동화를 문학으로: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1805-1875), <안데르센 메르헨>

 

 

안데르센이 쓴 동화는 총 156편인데, 하나같이 인간 개개인의 속물성과 이중성, 인간사의 희로애락과 세태를 놀랍도록 잘 묘파한다. 인물 역시 전통적인 우화와 달리 또렷하고 개성적인 성격을 갖는다. 동화 속의 환상 세계와 동화 밖의 현실 세계가 닮았다는 느낌은 우선 그가 인간의 차이-다름에 천착했기 때문이다. 인간과 동물(심지어 오리와 오리, 나이팅게일과 인조 새 등)의 이분법은 물론 부자와 빈자, 왕족(귀족)과 천민(평민) 19세기사회의 신분-계급 틀의 의인화된 버전이다. 갈등과 사건은 주로 낮은 쪽에서 높은 쪽으로의 상승 욕망과 복수 욕망, 이른바 원한의 심리학에 의해 형성된다. 문제는 그것이 전개되는 과정과 방식이 전혀 동화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흔히 작가의 전기를 고스란히 반영한 입신출세의 스토리로 읽어온 못 생긴(미운) 아기 오리를 보자. 이 동화의 첫 부분에서 조명 받는 것은 흥미롭게도 아기 오리가 아니라 엄마 오리이다. 다른 알들은 다 부화됐는데 유독 알 하나만 아직도 소식이 없는 터라 짜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칠면조 알이니 그만 품으라는 충고도 있지만 엄마 오리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마침내 알을 깨고 나온 오리는 그러나, 너무 크고 못 생겼다. 엄마 오리는 아이의 정체를 확인하려고 물에 풀어놓았다가 헤엄치는 모습을 보고서 자기 아이가 틀림없다며 기뻐한다. 머지않아 예뻐질 거라는 남들의 인사치레에도 담담하다.

 

그렇게는 안 될 것 같아요. 쟤는 별로 예쁘지가 않아요. 하지만 성격은 좋고 헤엄도 다른 아이들처럼 잘 친답니다. 어쩌면 더 잘 치는 것도 같아요! 곧 나아지겠지요. 시간이 지나면 작아질지도 몰라요! 알 속에 너무 오래 들어 있어서 모습이 좀 이상해졌을 거예요.() 게다가 얘는 사내아이니까 조금 안 예뻐도 괜찮아요. 힘이 아주 세질 거예요. 벌써부터 저렇게 거침없이 나다니잖아요.”(95)

 

결국 아기 오리는 주변의 박해를 견디다 못해 집을 나간다. 하지만 이는 단순한 가출이라기보다는 난 세상으로 나갈 거야.”라는 야망을 실현하기 위한 첫 걸음이다. 엄마 오리의 믿음과 격려는 그 자양분이 되었을 법하다. 간난신고 끝에 우리가 익히 아는 반전이 펼쳐진다. “못생긴 아기 오리였을 때 이런 행복이 오리라고는 꿈도 못 꿨어!”(105) 과거의 원한은 이렇게, 말하자면 우아하게 설욕된다.

 

차이-다름은 물론 같음을 배면에 깔고 있다. 웅숭깊은 해학이 돋보이는 연애 동화 양치기 소녀와 굴뚝 청소부의 두 연인에 대해 작가는 이렇게 쓴다. “서로 잘 어울렸는데요, 둘 다 젊은이들이었고, 똑같은 도자기였고, 둘 다 부서지기 쉬웠지요.”(188) 젊은 연인은 자신들의 사랑을 방해하는 숫염소다리(소녀를 열두 번째 색시로 데려가려고 한다)와 고개를 끄덕일 줄 아는 늙은 중국인 인형을 피해 넓은 세상으로 나간다. 하지만 굴뚝 밖을 나가기가 무섭게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데, 중국 영감이 그들을 쫓아오다가 산산조각 난 상태이다. 그는 다시 붙여졌지만 목에 죔쇠를 달아 고개를 끄덕이지 못하게 되고 고로 숫염소의 청혼에 답을 못해주는 신세가 되었다. “그래서 두 도자기 인형은 함께 지낼 수 있게 되었어요. 둘은 할아버지의 죔쇠에 감사하면서, 깨질 때까지 서로 사랑하면서 살았답니다.”(193) 못 생긴 아기 오리와는 전혀 반대로 분수/주제를 알고 착하게 살라는 전언이 전해지는 듯하다.

 

 

 

 

 

 

 

 

 

 

 

 

 

이런 해학과 위트가 넘치는 동화가 적지 않음에도 우리에게 안데르센은 여전히 슬픈 동화의 대명사이다. 인어 공주의 비극은 인어’(동물-천민)로서 왕자’(인간-왕족)의 사랑을 갈구했다는 데 있다. 주지하다시피, ‘필멸’(물거품)의 운명을 타고난 인어 공주가 불멸’(영혼)의 지위를 가진 인간이 되기 위해 치르는 노력은 필사적이다. 제일 잔혹한 것은 한 푼의 에누리도 없는 등가교환의 원칙이다. “막대기같은 두 다리를 얻는 대가로 인어 공주는 자신의 아름다운 목소리를 내놓고(마녀는 그녀의 혀를 싹둑 잘라간다) 다시 인어로 돌아갈 수도 없을 뿐더러 반드시 왕자와 결혼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는다. “예쁜 얼굴”, “하늘거리는 걸음과 말을 하는 듯한 눈으로 왕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는 성공하지만, 왕자는 그녀를 왕비로 맞을 생각이 전혀 없다.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공주의 추억 때문이기도 하지만 여기에는 현실의 법칙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왕자는 썩 내키지 않음에도 이웃나라의 공주와 결혼하라는 부모님의 뜻을 따르기로 한다. 정략결혼의 상대가 기억 속의 그 공주였음이 밝혀지는 반전이야말로 인어 공주에겐 크나큰 비극이다. 그들의 결혼식 날, 인어 공주가 얻은 또 한 번의 기회(다섯 언니들이 머리카락을 대가로 얻어온 칼날로 신혼 초야를 치룬 왕자의 심장을 찌르고 그 피를 다리에 묻히면 다시 꼬리가 돋아나 인어로 돌아갈 수 있다)는 더 큰 시련이 된다. 신방으로 들어간 인어 공주가 보는 것은 꿈결에도 신부의 이름만 부르는 왕자이기 때문이다. 다음날, 사라진 인어 공주를 찾는 왕자와 공주의 모습을 통해 그들의 선함이 강조된다. 요컨대 불행은 있으나 악역은 없고, 고로 자기 자신 외에는 아무도 탓할 수 없다. 이것만도 서러운데, 물거품이 된 인어 공주에게 공기의 딸들의 세상(연옥)에서 3백 년 동안 열심히 착한 일을 해서 영혼을 얻으라는 판결이 떨어진다. 일말의 정상참작도 없는 이 등가교환의 원칙에 간담이 서늘해진다.

 

 

 

 

 

 

 

 

 

 

 

 

 

 

안데르센은 덴마크가 인류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이다. 실상 그는 뛰어난 동화작가라기보다는 동화를 문학의 지위로 올려놓은 최초의 작가라고 정의하는 편이 옳을 것 같다. 그 이전의 페로나 그림 형제가 주로 민담을 수집, 정리, 편찬했던 것에 반해 안데르센은 낭만주의의 후예를 자처하며 명실상부한 창작 동화를 썼다. 하지만 그의 시와 소설, 희극은 별로 인기를 얻지 못했는데, 흥미로운 것은 그가 자서전을 쓰는 데 무척 공을 들였다는 점이다. <내 인생의 동화>는 젊은 구두수선공과 세탁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가 전 유럽의 유명 인사가 된 동화같은 이야기를 세밀하게 기록하는데, 전반부는 가난과 역경과 그 속의 행복, 각종 후원자들의 은혜와 교육의 과정을, 중후반부는 출세의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덴마크와 유럽의 각종 유력, 유명 인사를 찾아다니며 자기가 만든 이야기를 읊어주고 밥을 얻어먹는 삶, 즉 진정한 매설’(賣說)의 삶이 펼쳐진다. 이런 그를 두고 하이네는 재단사처럼 추레한 행색과 충성을 바치려고 안달복달하는 행동거지며 모든 시인의 완벽한 전형, 왕이 딱 좋아하는 시인이라고 비꼬기도 했다. 안데르센의 출신과 유산계급을 향한 양가적이고 모순적인 감정은 물론 그의 동화의 저변에 깊숙이 침투되어 있다.(잭 자이프스)

 

실상 동화 작가로서는 너무도 많은 얼굴과 목소리를 가진 위대한 인물이 자서전 속에서는 한평생 출세를 위해 아등바등 살았던 선량하되 속된 인간의 전형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19세기의 신분 체제를 고려한다면 그의 아첨은 일종의 생존 전략, 즉 기법이자 방법론이 아니었을까. 적어도 동화를 쓸 때만큼은 그는 이었다. 그가 자서전에서 한껏 포장해놓은 외로운 떠돌이에 출세한 촌놈의 모습과, 그가 창조한 동화 세계가 날카로운 대조를 이룬다. 과연 좋은 문학이란 그것을 창조한 작가를 뛰어 넘어 불멸하는 것이다.

 

- <책앤> 2015년 ??월

 

- 아이 때문에 동화를 많이 읽는다.  안데르센의 동화 중 최근에 가장 유명세를 떨친 것은 아마, 심하게 개작된 디즈니 애니메이션 <얼음왕국>(프로즌)의 밑텍스트인 <눈의 여왕> 일 터.

개인적으론, <어머니 이야기>를 무척 좋아한다. 어릴 때 텔레비전 만화 영화로 봤던 듯하다. (<안개 속의 고슴도치>에도 삽입했다.) 그리고, 간혹 <안데르센 동화 전집>에나 실리는, 별로 안 알려진 , 이루어지지 못한 슬픈 러브 스토리인 <한스와 크리스티나>.  초등 3학년 때 책이 아주 많았던 어느 친척집에서 몰래(?) 읽은 기억이 있다. 동화의 초반에 점쟁이 할머니가 호두인가 뭔가를 가지고 두 남녀 아이의 운명을 예언하는 부분, 마지막, 한스가 크리스티나가  죽은 다음 그녀를 꼭 닮은 어린 딸과 함께 그녀의 무덤을 찾는(맞나??) 장면 등이 인상적이었다. 아무튼 아주 슬픈 동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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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 최근에는 일찍 일어나던 아이가 오늘은 웬일로 9시가 넘도록 퍼질러 잤다. 하긴 이렇게 기습적으로 가을이 왔으니.(정녕 사람 놀리냐!) 자다 깨면서 경기를 할까봐 걱정이 되기도 하지만, 곤히 자는 모습이 너무 예뻐서 차마 못 깨웠다. 비까지 주룩주룩 오는 가운데 아이를 데려다 주고(아, 운전 면허증 좀 따둘 걸!ㅠ.ㅠ) 돌아와 책상 앞에 앉으니 뭐, 거의 11시다. 그럴 수록 더 열심히 공부해야 하건만, 역시 공부(=일)란 (잘) 하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무한히 하기 싫은 어떤 것이다. 음, 그럼에도, 아니, 그러니까 더더욱 나도 <내 인생의 동화>를 꿈꾸어 본다.

 - 기적 한 줌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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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란의 신작 소설집을 샀고, 반 정도 읽었다. 재미있다. 헐, 내가 그녀의 소설을 재미있게 읽다니 뜻밖이다. 왜 그런 작가 있지 않나, 별로 재미 없다고 툴툴 대면서 간헐적으로 자꾸 책을 사고 또 읽게 되고 또 투덜대곤 하는. 조경란도 내겐 그런 작가인데, 이번 소설은 어딘가 발랄하다 못해 껄렁(?)해보이는 낯선 출판사, 화사한 삽화 등을 감안해도, 그저 소설만으로도 재미있다. 백설공주와 일곱 난장이 얘기를 바꾼(혹은 그 후일담) 이야기, 아버지가 토끼로 변한 이야기 등 다 좋다.

 

 

 

 

 

 

 

 

 

 

 

 

 

 

 

 

내가 이번에 그녀의 소설책을 산 것은, 위에서 잠깐 구시렁댄 습관 때문이기도 하고, 짧은 소설(엽편 소설, 장(손바닥)편 소설, 콩트)을 읽고 싶어서였다. 장르는 곧 영혼의 형식. 긴 것이 맞는 작가도 있고 짧은 것이 맞는 작가도 있다.

 

가령, 체호프는 정말로 한 장짜리 소설로 문학사에 입문했다. 그리고 참 잘 쓴다! 하지만 도-키와 특히 톨스토이의 후예로서 그가 느낀 열등감은 대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긴 소설을 써야 한다는 강박. 그것이 때론 (거의 명백히 실패작인 ㅠ.ㅠ) 중편(요즘 개념으론 경장편)을 쓰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뭔가 길어질 때, 구구절절이 늘어질 때 그에게 적합한 장르는 소설(산문)이 아니라, 바로 드라마, 즉 희곡이다. 그 희곡을 그는 항상 희극-코미디로 완성하고자 했다. 몇 번 말한 것 같은데 나는 그의 <벚꽃 동산>을 무척 좋아한다.      

 

 

 

 

 

 

 

 

 

 

 

 

 

 

 

 

짧은 소설이 제격인 또 다른 작가는 물론 카프카와 보르헤스이다. 그들에 대해 많이 썼지만, 언젠가 지면이 주어지는 대로 또 쓰고 싶다. 그런데 카프카는 자기 주제를 좀 몰랐던 것 같다. 장편을 쓰려 하다니! 물론 이 주제를 모름에, 바로 그의 문학의 핵심(고뇌^^;;)이 들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실패한, 이라기보다는 미완의 장편 세 편('고독' 삼부작')은 그의 문학의 딜레마를 여실히 보여줄 법하다. 언제 또 다시 탐독할 기회가 오길.  

 

 

 

 

 

 

 

 

 

 

 

 

 

 

그에 반해, 아르헨티나의 귀족 가문 출신인 보르헤스는 일찌감치 '체념'을 문학으로 승화한 듯하다. 굳이 장편을 쓸 필요도 못 느꼈을 법한데, 그가 문학을 통해 추구한 세계는 기본적으로 서사의 세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즉, 구질구질 할 말이 별로(전혀) 없었던 듯. 그러니 그토록 황량한 것이다. 또한 구질구질함이 없으니 유머와 위트도 없는 것이다.

 

 

 

 

 

 

 

 

 

 

 

 

 

 

애매하긴 하지만, 카뮈에 대해서도 나는 장편이 잘 맞지 않는 작가였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제일 아끼는 그의 소설 <이방인>도 사실, 분량이든, 구성이든 전통적 의미의 장편은 아니다. <페스트>가 좀 두껍긴 하지만 워낙에 관념적이고 이념적이서, 역시나 서사에 기반한 정통 장편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에세이적 장편이랄까. <전락>은 도..키의 <지하>의 카뮈 버전이니 더 말할 것도 없겠다.

많은 부분, 그는 (철학자, 사상가라고 하긴 그렇고) 고급한 에세이스트였던 듯한데, 초기(아마 첫?) 산문집 <안과 겉(밖)>(<표리>라고 번역된 적도 있는 듯하다)부터 이런 재능이 보인다. 나중에 <시지프 신화>, <반항인>에서 더 잘 쓰게 된다.  

 

 

 

 

 

 

 

 

 

 

 

 

 

 

어딘가 날렵한 재능 덕분에 카뮈의 단편도 다 재미있게 읽은 기억이 있다. 덧붙여, 그는 희곡 <오해>를 쓰기도 했다. 극작을 향한 끌림, 이 또한 흥미롭다. 그만큼이나 흥미로운(또한 이해가 되는!) 끌림이, 무대에 서서 연기를 하고자 하는 끌림이기도 하다. 까뮈는 워낙 인물이 출중했던 터라, 도-키의 <카라마조프>를 무대에 올리며 이반 역을 맡기도 했다.

 

 

 

 

 

 

 

 

 

 

 

 

 

 

 

짧으나 기나 다 잘 쓰는 징그런 작가도 있다. 아무래도 사랑할 수 없는 그대, 톨스토이다.

 

 

 

 

 

 

 

 

 

 

 

 

 

 

어쩌면 천만다행으로 이런 거물은 한 나라의 문학사에서도 자주 나오지 않는다. 그 이전의 한 작가는 장편을 써가는 도중에 반쯤 광기에 사로잡혀 단식을 시작, 거의 스스로를 체계적으로 굶겨 죽였다. 그의 장르 역시, 그로테스크하고 환상적인 단편(중편)이었던 듯. 큰 장르를 감당하지 못한  작가의 딜레마와, 시작은 했으되 끝나지 못한 이 장편(<죽은 혼>)의 미학이 맞물린다. 차라리 극작이 장편보다는 더, 그를 '구원'했을지도.

 

 

 

 

 

 

 

 

 

 

 

 

 

 

 

 

 

러시아와 비슷한 '대륙적' 스케일, 심지어 한 시절 사회주의 국가였던 중국. 루쉰은 고골의 <광인일기>에 영향을 받아, 사회 비판적 요소가 농후한, 심지어 거의 그것만 있는 <광인 일기>를 쓴다. 아무래도 나는 러시아문학 전공자라 고골의 소설이 훨씬 더 훌륭해 보인다. 그의 단편들을 쭉 일별하며 많은 감동을 받았지만, 워낙에 지식인, 투사, 사상가 등 다른 이름이 많은 터라 루쉰은 좀처럼 소설가로는 기억되지 않는다. 하긴 이런 요소까지 포함하여 그는 소설가이긴 하다.

 

 

 

 

 

 

 

 

 

 

 

 

 

 

 

루쉰은 말년에 다시 한 번 고골에게 관심을 기울여 그의 <죽은 혼>을 번역한다. 아니, 그러다가 죽는다. 그런 운명의 소설(책)이 있는 듯하다. 고골은 정녕 이 소설을 쓰지 말아야 했던가. 지난 금요일, 그에 대해 강의하면서 한 번 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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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몇 년 전이냐, <문지문화원 - 사이>에서 세계문학읽기 강의를 했다. 저녁 시간, 일주일에 한 번. 오가는 길은 힘들었으나 강의는 참 재미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공부를 많이 했고(그 밑천으로 지면이 주어질 때마다 세계문학 읽기를 연재했다) 수강생들과의 상호작용이 좋았다. 그때 첫 학기 수강생들이었나, 아무튼 그 당시 중년의 초입에 있던 분들이 소설가 됐다.

 

 

 

 

 

 

 

 

 

 

 

 

 

 

그리고 최근에 알게 됐는데, 이 분도 소설 쓰신다. 그것도 엄청 열심히.

 

 

 

 

 

 

 

 

 

 

 

 

 

 

 제일 최근에 나온 작품집 중 맨 처음에 수록된 소설은 안락사(존엄사)의 한 양상을 다룬다. 일종의 미래 소설(심지어 SF)임에도, 혹은 그렇기에 아주 재미있게 읽었다. 죽음을 코앞에 두고 스스로 죽음의 순간을 택한 자들, 그와 관계된 자들(주로 자식), 마지막을 처리하는 ,뭐랄까, 직업적 저승사자(?)의 대화와 풍경이 흥미롭다. 엄청 사실적이다! 끝으로, 안락 서비스를 제공하는 남자가, 맨 마지막 (예상되는 것이긴 한데!) 다섯 살 때 자기를 버리고 떠난, 그 이후 자기를 한 번도 찾지 않는 엄마(늙은 여자)를 만나면서 전개되는 극적인 장면은, 너무 극적이어서, 오히려 좀 아쉬웠달까. 그밖에 표제작 <존슨...>, <타미카 레드> 등도 이런 판타지, SF의 느낌이다. <타미카 레드>는 일종의 로봇 창녀(?)가 나오는데, 전체적으로 리들리 스콧의 <블레이드 러너> 느낌을 좀 받았다. 아무튼 이런 끼(!)를 지금껏 숨기고 있었다니, 놀라울 뿐이다.

 

이런 세팅의 관점에서는, 얼마전에 읽은 배명훈의 소설을 연상시킨다. <첫 숨>보다는 <신의 궤도>가 좀 더 재미있게 읽힌다. '은경이'가 나도 마음에 드나 보다.

 

 

 

 

 

 

 

 

 

 

 

 

 

소설이 뭔지. 소설을 쓴다는 것이 뭔지.

나는 아주 어려서부터 소설을 쓰고 싶어 했고, 또 직업적 작가(=등단)가 된 것도 돌이켜 보면 아주 어려서이지만, 이렇게 어떤 식으로든 일가를 이룬 사람이 인생이 절반 이상 꺾어진 지점에서 소설을 쓰는 것을 보면  소설 쓰기의 묘한 마력을 새삼, 절감한다. 한편, '못 가본 길' 혹은 '가다 만 길'에 대한 향수가 느껴지는, 어느 국문학자의 이런 소설집도 떠오른다.   

 

 

 

 

 

 

 

 

 

 

 

 

 

물론 잘 쓰기는 쉽지 않다. 이건 뭐 어릴 때부터 계속, 꾸준히 써온 사람도 마찬가지. 내가 좋아하는 소설가 최수철의 최근작은 영 마뜩치 않다. 신작이 나와서 얼른 사 봤지만, 지루하다. 아, 물론, 그의 소설은 지루함이 특기이자 장점이다. 나는 그가 예전처럼 좀 독하게(?!) 지루해졌으면 한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재미있게 읽었던 것 같다. 심지어 두 권짜리 두툼한 <페스트> 역시, 한 시절 열광하며 완독한 장편 <불멸과 소멸>에 이어 그득한 만족감을 준 장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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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상 개강. 지난 학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수월한 학기다. 그 때문인지 계속 우울하고 나른하다. 그런 가운데 쓰이는 소설은, 한없이 날렵하고 가볍길 바란다, 라니, 너무 욕심인가. 이러나저러나 쓰자, 쓰자, 쓰자.

 

하루만에 자취를 감춰 버린 무더위가 사람을 머쓱하게 만든다. 너, 그렇게 쉽게 갈 거였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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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떻게 살 것인가:

오노레 드 발자크(1799-1850), <나귀 가죽>(1831)

 

 

사실주의 소설의 대가인 발자크가 서른두 살에 쓴 장편소설 <나귀 가죽>1(“부적”)는 극히 낭만적이고 환상적인 분위기로 시작된다. 시끌벅적한 도박장, 자살을 결심한 한 청년이 돈을 잃고도 미련 없이 나가버린다. 센 강 주변을 거닐다가 마침내 골동품 가게에 들어선 그는 어딘가 마법사 같은 늙은 골동품상을 만난다. 놀라운 것은, 화자도 지적하듯, 이러한 환상과 마법이란 것이 불가능한 시간과 장소“19세기 파리의의 결합, 그리고 그것이 야기하는 미학적 충격이다. 일찌감치 청년의 내면을 간파한 노인은 독특한 언어(아랍어)나를 가지면 모든 것을 갖게 될 것이지만 너의 목숨은 나의 것이다라는 요지의 글이 쓰인 나귀 가죽을 보여준다. “자네의 자살은 다만 연기되었을 뿐이네.”(77) 소위 악마와 계약을 맺은 청년에게 노인이 던지는 의미심장한 한 마디는 이후 소설의 복선 구실을 한다

 

 

 

 

 

 

 

 

 

 

 

 

 

 

소원을 들어주는 대신 목숨을 조금씩 앗아가는 나귀 가죽의 이야기는 동화, 적어도 환상적인 고딕소설을 예고한다. 하지만 골동품 가게를 나온 청년이 친구들에게 아니, 라파엘이잖아.”하고 불리는 순간부터 19세기 파리의 청년들의 일상을 담은 세태 소설이 펼쳐진다. 2(“무정한 여인”)에서 라파엘이 친구(에밀)를 상대로 늘어놓는 과거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아버지의 뜻에 따른 법학 공부, 사춘기의 방황(도박), 아버지의 파산과 사망 이후 1826년 현재, 22세의 라파엘은 파리에 홀로 남겨졌다. 자신의 불행에 도취된 라파엘은 자신의 진가를 몰라주는 세상과 여자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지식을 쌓기로 결심하고는 마담 고댕의 하숙집에서 3년 동안 디오게네스처럼 금욕적인 생활을 하며 희곡 작품과 해부학, 생리학 관련 책(<의지론>)을 쓴다. 한편으론 하숙집 여주인의 딸(폴린)과 오누이 같은 우정-사랑을 나눈다. 이런 라파엘 앞에 인생의 선배 라스티냐크(훗날 <고리오 영감>의 주인공이 될 촌뜨기 법대생이기도 하다)가 등장한다. 이 능수능란한 청년은 라파엘을 천재인 동시에 얼간이취급하며 각종 처세술을 전수해주고 사교계의 여왕인 페도라 백작 부인에게 데리고 간다. 라파엘은 한 명의 여인 이상”, “한 편의 소설인 그녀에게 반하지만 이내 배신당한다. 극적인 데라곤 전혀 없는 연애 이야기를 에밀은 이렇게 비꼰다.

 

페도라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그게 자네 이야기의 요점 아냐?”(280)

 

 그 다음 이야기가 바로 1부의 도입부, 즉 자살을 생각하던 중 나귀 가죽을 손에 넣게 되는 것이다. 에밀과 함께 가죽의 저력을(실제로 유산이 떨어지고 대신 나귀 가죽이 줄어든다) 확인하면서 라파엘의 운명은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나귀 가죽>은 낭만주의자 발자크(청년)와 사실주의자 발자크(중장년)가 격하게 충돌하는 소설, 그래서 당혹스럽고 놀라운 소설이다. 이 소설의 핵심어인 욕망은 출세(성공)와 연애(사랑)으로 구체화되는데, 어느 경우든 문제는 이다. 모두가 졸지에 부자 혹은 가난뱅이가 되고 돈이 없으면 사랑도 할 수 없다. 페도라와의 다분히 낭만적인 연애에도 끊임없이 돈이 개입하고(마차를 빌릴 돈이 없어 집까지 걸어간다) 그녀와 대조되는 폴린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라파엘은 여인이 왕비의 풍모를 갖추려면 모름지기 부자여야만하고 가난한 상태에서는 숫제 사랑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3부의 극장 장면, 파리의 사교계를 흥분시킨 미모의 미지의 여인이 과거의 그 폴린으로 밝혀지는 대목은 정녕 동화적이다. 남편이 백만장자가 되어 돌아올 것이라는 고댕 부인의 예감이 실현되자(돈의 마법!), 라파엘은 오랫동안 그를 흠모하며 그림을 그려서 팔면서까지 그의 우유 값을 대온 폴린과 열렬한 연애에 돌입한다. 그들의 사랑이 깊어지는 것도 두 인물이 공히 소유한 부 덕분인 양 묘사된다. 3부의 도입부에서는 손님을 맞이한 라파엘의 충복(조나타)의 입을 빌어 그가 식비로 하루에 천 프랑을 쓸 만큼 부자임을 강조한다. 초기자본주의의 물질만능주의를 대변하는 이토록 거친 직접 화법에 속이 시원해지는 것은 왜일까. 아무튼 그렇더라도 발자크가 묘파한 속물성은 <나귀 가죽>의 일부일 뿐이다.

 

3(“죽음의 고뇌”)의 라파엘은 부유한 발랑탱 후작이 된 대가로 그만큼의 목숨을 내놓았다. 폴린과 재회한 이후부터 나귀 가죽은 더더욱 급속도로 줄어든다. 두려워진 라파엘은 그것을 몰래 우물 속에 버리지만 정원사가 발견하여 다시 가져온다. 이어 그는 가죽을 처리하기 위해 과학(박물학, 생리학, 기계역학, 화학 등), 그 다음에는 자신의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의학(유기체론, 생기론, 외과수술론)에 의존한다. 그 과정에서 장황하게 전개되는 각종 ‘-1부의 도박론골동품론을 비롯하여 발자크의 지식욕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보여준다. 자신의 주인공의 입을 빌어 돈과 명예를 멀리하고 오로지 학적인 즐거움에만 탐닉하는 학자(플랑셰트)를 찬미하는 것도 그 예이다. 하지만 문학에 대한 숭고한 헌신에 있어 발자크 역시 만만치 않았다. 로댕의 조각상이 잘 표현해준 그의 짐승 같은 노동은 익히 알려진 바이다.

 

 

 

 

 

 

 

 

 

 

 

 

 

 

 

노동, 끝없는 노동은 마지막 순간까지 발자크의 진짜 존재방식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 노동을 사랑했다. 아니, 이런 노동을 하는 자신을 사랑했다. 창작의 고통 한가운데서 그는 비밀스런 기쁨으로 자신의 악마적인 에너지, 창작의 잠재력, 의지력 등을 즐겼다.”(스테판 츠바이크)

 

다시 라파엘로 가자. 1804년생인 그는 물론 욕망의 화신이었던 못 생긴 청년 발자크의 미화이다. 라파엘의 자살-욕망(타나토스)은 손쉽게 삶-욕망(에로스)과 등치되고, 그로써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요양 차 찾은 온천장에서 사소한 일로 결투(살인)까지 한 다음 라파엘이 택한 최후의 길은 그야말로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 역시 여의치 않아지자 그는 다시 파리로 돌아와 일종의 수면마취제를 꾸준히 복용하며 (그래도 살기 위해 중간에 밥은 먹는다!) 거의 하루 종일 잔다. 하지만 눈앞에 다시 폴린이 나타나자 억눌렀던 욕망이 불타오르면서 명줄이 탁, 끊기고 만다.

 

죽음의 순간은 극적이지만, 나귀 가죽을 손에 넣는 순간부터 시작된 삶-죽음의 과정(추정컨대 폐병에 걸린 듯하다)은 서서히 진행된다. 많이 욕망하면 빨리 죽는다. 하지만 욕망을 죽인 채 조심조심 영위되는 삶은 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의문스럽다. 출발점에 있어서는 우리 모두에게 거의 똑같이 주어지는 ’(=시간=욕망)을 어떻게 꾸려갈 것인가. 이런 물음을 던졌다는 점에서 <나귀 가죽>은 과연 부제대로 철학 소설이라고 할 만하고 발자크의 거대한 문학 기획인 인간 희극의 첫 고리가 될 만하다. 아래의 인용문에서 으로 바꿔 읽어도 무방하겠다.

 

(=라파엘)는 문득 힘을 소유하는 것 자체가, 아무리 그 힘이 막대하다 하더라도, 그 힘을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을 가져다주지는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왕홀(王惚)은 어린아이에게는 한갓 장난감일 뿐이지만 리슐리외에게는 도끼요, 나폴레옹에게는 세상을 들어 올릴 수 있는 지렛대인 것이다. 힘은 꼭 우리만큼의 크기를 가지며 그래서 큰 사람만을 더 키우는 법이다.”(408-409)

 

- <책앤> 2015년 ??월 호

 

 

 

 

 

 

 

 

 

 

 

 

 

 

 

 

발자크의 소설은 재미가 아니라 의무감에서, 발자크 자신이 그토록 숭상한 공부-노동에의 욕구에서 읽는다.  나로서는 (가령 스탕달의 <적과 흑>과는 달리) 그냥 막 읽히지는 않으므로  초반에 집중과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래서 완독한 책들. 뜻밖에도(?!), <골짜기의 백합>이 고등학교 때 멋 모르고 집어든, 그리고 그 무렵엔 무조건 끝장을 봤으니, 완독한 발자크의 첫 작품이다. 그 이후 몇 권을 더 들춘 듯한데, 아무튼 도스토예프스키에게야 재미있는(그래서 번역까지 한) 작가였겠지만, 우리에게는 힘든  작가다.

 

 

 

 

 

 

 

 

 

 

 

 

 

 

 

작품이 이러니 연구서도 다 그런 느낌이었다. 하지만 위에도 인용한 <발자크 평전>은 그의 소설보다 훨씬 더 재미있었다.  그만큼 발자크는 흥미로운 인물. 그리고 소설도 썼지만 츠바이크, 그대의 장르는 전기였구나.

 

 

 

 

 

 

 

 

 

 

 

 

 

 

 

2016년도 사실상 저무는 셈이다. <책앤> 지면이 없어져 서운했는데 올 봄에는 너무 바빠 좀 가뿐 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렇게 놀아서야 쓰나. 아무래도 지면이 주어져야 읽기-쓰기를 강제할 수 있을 법하다. 그거 안 하는 시간은 어디로 산화하는(-한)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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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이제 말하고자 하는 모든 것 중에서 그 어떤 곳도 내가 당신을 떠나는 이류를 직접 설명해줄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을 것이다.

 

밤이 염세적이다. 밤이 무거운 신음을 토한다. 벽의 몸으로 둘러싸인 밤의 내부와 외부, 내부의 외부, 내부에 둘러싸인 외부, 그 밤에 관해서 이제 이야기한다. 내가 살던 나라는 벽으로 둘러 싸여 있었다. 그들이 살던 나라, 수니가 살던 나라를 말하는 것이다.(282)

(...)

물 속에서 흘러가는 시간의 속도는 임의적이다. 우리는 물고기의 자의식 속으로 들어간다. 십이년 동안 목소리가 없는 수니. 벽에 매달린 수니의 혀. 수난은 달콤한 굴종이니, 내 혀를 잘라다오, 아니면 내 머리나, 그리하여 나를 없애다오, 내 시간을, 내 기억을, 내 해석을, 내 말을 없애다오. 그들은 나를 재판했다. (298)

 

- 배수아, <밤이 염세적이다>(<올빼미의 없음> 중)

 

 

 

 

 

 

 

 

 

 

 

 

 

 

 

배수아의 <올빼미의 없음>을, 예전부터 읽고 싶었는데 어쩌다 놓친(<에세이스트의 책상>은 읽은 기억이 난다!) 책을 읽었다. 훑었다, 라고 해야겠다. 갑자기 미친 척, 눈을 찌르는 작품은 맨 마지막 수록된 <밤이 염세적이다>이다. 실은 제목이, 뭐랄까, 너무 찌르는 제목이라 제일 먼저 읽었다. 아, 간만에 이런 소설, 너무 좋아! (그 다음은 표제작인 <올빼미의 없음>. 마지막, 카프카의 작품 인용, 너무 좋다.)

 

<푸른 사과가 있는 국도>인가. 아무튼 그 시절부터 배수아 소설을 간헐적으로, 쭉 읽어왔다. 이제 쉰을 넘긴 그녀. 점점 더 달라지는(혹은 다름이 보이는) 그녀의 모습, 역시 좋다. 더 과격해져라! 이렇게 쓰고도 책을 낼 출판사가 있으니, 살짝(많이, 인가?), 부럽다. 

 

소설은 물론 '이야기'이지만, 이야기의 얽힘(나아가 독자 입장에서는 접수)을 방해하는 이런 시건방지고 심드렁하고 도도한 문체, 간만에 너무 좋다. 누가 당신으로 하여금 이야기를 짜라고 했던가. 결국 그 강박(!) 역시, 내가 나에게 부여한 것일 터. 서사의 강박으로부터의 자유.

 

19세기 소설(그야 소설의 교과서니까 당연히!)을 많이, 열심히 읽어온 까닭에 참 쉽지 않은 문제다. 나를 나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것도 결국 나다. 아무도 나로 하여금 나 이외의 것이 되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내 보기에 요즘 잘 살고 있는 작가 중 하나는 이 사람.

 

 

 

 

 

 

 

 

 

 

 

 

 

 

 

언젠가 그가 소설을 쓴다기에 놀랐다. 뭐, 솔직히 재밌지도 않았다. <고백의 제왕>은 지루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제일 최근 소설집 <기린이 아닌 모든 것>, 좋았다. 언젠가 몇 자 쓸 시간이 나면 좋겠다. 가사도우미가 무슨 클래식을 듣는 소설, 확 꽂히는 뭔가가 있었다.

 

소설가가 된 그가 최근 시집 냈다. 역시, 천생이 시인! <정오의 희망곡> 이후 훨씬 시다워진(?!) 이장욱을 본다. 그의 문장-시를 나도 반복해본다.

 

"나는 의욕을 가질 것이다."

 

세일즈포인트가 많은 것을, 어쩌면 모든 것을 이야기해준다. 님은 아마 소설이 아니라 시가 실존, 영혼의 형식인 듯. 흠, 이렇게 쓰고 보니, 나의 실존은 그럼 번역인가? 정녕 극혐, 노잼이다! 진짜 죽지 못해 하고 있다, 번역. 심지어 오늘도 오직 번역하기 싫어서, 그 이유 때문에 논문 쓴 듯하다. 그게 아니라면, 소설이 쓰이지 않아서, 더 정확히 초고가 잡힌 소설을 다시 보니 정녕 견적이 잡하지 않아서. - 넌 어쩜 소설을 이렇게 쓰느냐, 그 동안의 소설 공부는 똥구멍으로 한 것이더냐, 헐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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