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를 문학으로: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1805-1875), <안데르센 메르헨>

 

 

안데르센이 쓴 동화는 총 156편인데, 하나같이 인간 개개인의 속물성과 이중성, 인간사의 희로애락과 세태를 놀랍도록 잘 묘파한다. 인물 역시 전통적인 우화와 달리 또렷하고 개성적인 성격을 갖는다. 동화 속의 환상 세계와 동화 밖의 현실 세계가 닮았다는 느낌은 우선 그가 인간의 차이-다름에 천착했기 때문이다. 인간과 동물(심지어 오리와 오리, 나이팅게일과 인조 새 등)의 이분법은 물론 부자와 빈자, 왕족(귀족)과 천민(평민) 19세기사회의 신분-계급 틀의 의인화된 버전이다. 갈등과 사건은 주로 낮은 쪽에서 높은 쪽으로의 상승 욕망과 복수 욕망, 이른바 원한의 심리학에 의해 형성된다. 문제는 그것이 전개되는 과정과 방식이 전혀 동화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흔히 작가의 전기를 고스란히 반영한 입신출세의 스토리로 읽어온 못 생긴(미운) 아기 오리를 보자. 이 동화의 첫 부분에서 조명 받는 것은 흥미롭게도 아기 오리가 아니라 엄마 오리이다. 다른 알들은 다 부화됐는데 유독 알 하나만 아직도 소식이 없는 터라 짜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칠면조 알이니 그만 품으라는 충고도 있지만 엄마 오리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마침내 알을 깨고 나온 오리는 그러나, 너무 크고 못 생겼다. 엄마 오리는 아이의 정체를 확인하려고 물에 풀어놓았다가 헤엄치는 모습을 보고서 자기 아이가 틀림없다며 기뻐한다. 머지않아 예뻐질 거라는 남들의 인사치레에도 담담하다.

 

그렇게는 안 될 것 같아요. 쟤는 별로 예쁘지가 않아요. 하지만 성격은 좋고 헤엄도 다른 아이들처럼 잘 친답니다. 어쩌면 더 잘 치는 것도 같아요! 곧 나아지겠지요. 시간이 지나면 작아질지도 몰라요! 알 속에 너무 오래 들어 있어서 모습이 좀 이상해졌을 거예요.() 게다가 얘는 사내아이니까 조금 안 예뻐도 괜찮아요. 힘이 아주 세질 거예요. 벌써부터 저렇게 거침없이 나다니잖아요.”(95)

 

결국 아기 오리는 주변의 박해를 견디다 못해 집을 나간다. 하지만 이는 단순한 가출이라기보다는 난 세상으로 나갈 거야.”라는 야망을 실현하기 위한 첫 걸음이다. 엄마 오리의 믿음과 격려는 그 자양분이 되었을 법하다. 간난신고 끝에 우리가 익히 아는 반전이 펼쳐진다. “못생긴 아기 오리였을 때 이런 행복이 오리라고는 꿈도 못 꿨어!”(105) 과거의 원한은 이렇게, 말하자면 우아하게 설욕된다.

 

차이-다름은 물론 같음을 배면에 깔고 있다. 웅숭깊은 해학이 돋보이는 연애 동화 양치기 소녀와 굴뚝 청소부의 두 연인에 대해 작가는 이렇게 쓴다. “서로 잘 어울렸는데요, 둘 다 젊은이들이었고, 똑같은 도자기였고, 둘 다 부서지기 쉬웠지요.”(188) 젊은 연인은 자신들의 사랑을 방해하는 숫염소다리(소녀를 열두 번째 색시로 데려가려고 한다)와 고개를 끄덕일 줄 아는 늙은 중국인 인형을 피해 넓은 세상으로 나간다. 하지만 굴뚝 밖을 나가기가 무섭게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데, 중국 영감이 그들을 쫓아오다가 산산조각 난 상태이다. 그는 다시 붙여졌지만 목에 죔쇠를 달아 고개를 끄덕이지 못하게 되고 고로 숫염소의 청혼에 답을 못해주는 신세가 되었다. “그래서 두 도자기 인형은 함께 지낼 수 있게 되었어요. 둘은 할아버지의 죔쇠에 감사하면서, 깨질 때까지 서로 사랑하면서 살았답니다.”(193) 못 생긴 아기 오리와는 전혀 반대로 분수/주제를 알고 착하게 살라는 전언이 전해지는 듯하다.

 

 

 

 

 

 

 

 

 

 

 

 

 

이런 해학과 위트가 넘치는 동화가 적지 않음에도 우리에게 안데르센은 여전히 슬픈 동화의 대명사이다. 인어 공주의 비극은 인어’(동물-천민)로서 왕자’(인간-왕족)의 사랑을 갈구했다는 데 있다. 주지하다시피, ‘필멸’(물거품)의 운명을 타고난 인어 공주가 불멸’(영혼)의 지위를 가진 인간이 되기 위해 치르는 노력은 필사적이다. 제일 잔혹한 것은 한 푼의 에누리도 없는 등가교환의 원칙이다. “막대기같은 두 다리를 얻는 대가로 인어 공주는 자신의 아름다운 목소리를 내놓고(마녀는 그녀의 혀를 싹둑 잘라간다) 다시 인어로 돌아갈 수도 없을 뿐더러 반드시 왕자와 결혼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는다. “예쁜 얼굴”, “하늘거리는 걸음과 말을 하는 듯한 눈으로 왕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는 성공하지만, 왕자는 그녀를 왕비로 맞을 생각이 전혀 없다.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공주의 추억 때문이기도 하지만 여기에는 현실의 법칙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왕자는 썩 내키지 않음에도 이웃나라의 공주와 결혼하라는 부모님의 뜻을 따르기로 한다. 정략결혼의 상대가 기억 속의 그 공주였음이 밝혀지는 반전이야말로 인어 공주에겐 크나큰 비극이다. 그들의 결혼식 날, 인어 공주가 얻은 또 한 번의 기회(다섯 언니들이 머리카락을 대가로 얻어온 칼날로 신혼 초야를 치룬 왕자의 심장을 찌르고 그 피를 다리에 묻히면 다시 꼬리가 돋아나 인어로 돌아갈 수 있다)는 더 큰 시련이 된다. 신방으로 들어간 인어 공주가 보는 것은 꿈결에도 신부의 이름만 부르는 왕자이기 때문이다. 다음날, 사라진 인어 공주를 찾는 왕자와 공주의 모습을 통해 그들의 선함이 강조된다. 요컨대 불행은 있으나 악역은 없고, 고로 자기 자신 외에는 아무도 탓할 수 없다. 이것만도 서러운데, 물거품이 된 인어 공주에게 공기의 딸들의 세상(연옥)에서 3백 년 동안 열심히 착한 일을 해서 영혼을 얻으라는 판결이 떨어진다. 일말의 정상참작도 없는 이 등가교환의 원칙에 간담이 서늘해진다.

 

 

 

 

 

 

 

 

 

 

 

 

 

 

안데르센은 덴마크가 인류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이다. 실상 그는 뛰어난 동화작가라기보다는 동화를 문학의 지위로 올려놓은 최초의 작가라고 정의하는 편이 옳을 것 같다. 그 이전의 페로나 그림 형제가 주로 민담을 수집, 정리, 편찬했던 것에 반해 안데르센은 낭만주의의 후예를 자처하며 명실상부한 창작 동화를 썼다. 하지만 그의 시와 소설, 희극은 별로 인기를 얻지 못했는데, 흥미로운 것은 그가 자서전을 쓰는 데 무척 공을 들였다는 점이다. <내 인생의 동화>는 젊은 구두수선공과 세탁부의 아들로 태어난 그가 전 유럽의 유명 인사가 된 동화같은 이야기를 세밀하게 기록하는데, 전반부는 가난과 역경과 그 속의 행복, 각종 후원자들의 은혜와 교육의 과정을, 중후반부는 출세의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덴마크와 유럽의 각종 유력, 유명 인사를 찾아다니며 자기가 만든 이야기를 읊어주고 밥을 얻어먹는 삶, 즉 진정한 매설’(賣說)의 삶이 펼쳐진다. 이런 그를 두고 하이네는 재단사처럼 추레한 행색과 충성을 바치려고 안달복달하는 행동거지며 모든 시인의 완벽한 전형, 왕이 딱 좋아하는 시인이라고 비꼬기도 했다. 안데르센의 출신과 유산계급을 향한 양가적이고 모순적인 감정은 물론 그의 동화의 저변에 깊숙이 침투되어 있다.(잭 자이프스)

 

실상 동화 작가로서는 너무도 많은 얼굴과 목소리를 가진 위대한 인물이 자서전 속에서는 한평생 출세를 위해 아등바등 살았던 선량하되 속된 인간의 전형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19세기의 신분 체제를 고려한다면 그의 아첨은 일종의 생존 전략, 즉 기법이자 방법론이 아니었을까. 적어도 동화를 쓸 때만큼은 그는 이었다. 그가 자서전에서 한껏 포장해놓은 외로운 떠돌이에 출세한 촌놈의 모습과, 그가 창조한 동화 세계가 날카로운 대조를 이룬다. 과연 좋은 문학이란 그것을 창조한 작가를 뛰어 넘어 불멸하는 것이다.

 

- <책앤> 2015년 ??월

 

- 아이 때문에 동화를 많이 읽는다.  안데르센의 동화 중 최근에 가장 유명세를 떨친 것은 아마, 심하게 개작된 디즈니 애니메이션 <얼음왕국>(프로즌)의 밑텍스트인 <눈의 여왕> 일 터.

개인적으론, <어머니 이야기>를 무척 좋아한다. 어릴 때 텔레비전 만화 영화로 봤던 듯하다. (<안개 속의 고슴도치>에도 삽입했다.) 그리고, 간혹 <안데르센 동화 전집>에나 실리는, 별로 안 알려진 , 이루어지지 못한 슬픈 러브 스토리인 <한스와 크리스티나>.  초등 3학년 때 책이 아주 많았던 어느 친척집에서 몰래(?) 읽은 기억이 있다. 동화의 초반에 점쟁이 할머니가 호두인가 뭔가를 가지고 두 남녀 아이의 운명을 예언하는 부분, 마지막, 한스가 크리스티나가  죽은 다음 그녀를 꼭 닮은 어린 딸과 함께 그녀의 무덤을 찾는(맞나??) 장면 등이 인상적이었다. 아무튼 아주 슬픈 동화였다.  

 

 

 

 

 

 

 

 

 

 

 

 

 

--

어째 최근에는 일찍 일어나던 아이가 오늘은 웬일로 9시가 넘도록 퍼질러 잤다. 하긴 이렇게 기습적으로 가을이 왔으니.(정녕 사람 놀리냐!) 자다 깨면서 경기를 할까봐 걱정이 되기도 하지만, 곤히 자는 모습이 너무 예뻐서 차마 못 깨웠다. 비까지 주룩주룩 오는 가운데 아이를 데려다 주고(아, 운전 면허증 좀 따둘 걸!ㅠ.ㅠ) 돌아와 책상 앞에 앉으니 뭐, 거의 11시다. 그럴 수록 더 열심히 공부해야 하건만, 역시 공부(=일)란 (잘) 하는 것이 바람직하지만 무한히 하기 싫은 어떤 것이다. 음, 그럼에도, 아니, 그러니까 더더욱 나도 <내 인생의 동화>를 꿈꾸어 본다.

 - 기적 한 줌 주세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