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떻게 살 것인가:

오노레 드 발자크(1799-1850), <나귀 가죽>(1831)

 

 

사실주의 소설의 대가인 발자크가 서른두 살에 쓴 장편소설 <나귀 가죽>1(“부적”)는 극히 낭만적이고 환상적인 분위기로 시작된다. 시끌벅적한 도박장, 자살을 결심한 한 청년이 돈을 잃고도 미련 없이 나가버린다. 센 강 주변을 거닐다가 마침내 골동품 가게에 들어선 그는 어딘가 마법사 같은 늙은 골동품상을 만난다. 놀라운 것은, 화자도 지적하듯, 이러한 환상과 마법이란 것이 불가능한 시간과 장소“19세기 파리의의 결합, 그리고 그것이 야기하는 미학적 충격이다. 일찌감치 청년의 내면을 간파한 노인은 독특한 언어(아랍어)나를 가지면 모든 것을 갖게 될 것이지만 너의 목숨은 나의 것이다라는 요지의 글이 쓰인 나귀 가죽을 보여준다. “자네의 자살은 다만 연기되었을 뿐이네.”(77) 소위 악마와 계약을 맺은 청년에게 노인이 던지는 의미심장한 한 마디는 이후 소설의 복선 구실을 한다

 

 

 

 

 

 

 

 

 

 

 

 

 

 

소원을 들어주는 대신 목숨을 조금씩 앗아가는 나귀 가죽의 이야기는 동화, 적어도 환상적인 고딕소설을 예고한다. 하지만 골동품 가게를 나온 청년이 친구들에게 아니, 라파엘이잖아.”하고 불리는 순간부터 19세기 파리의 청년들의 일상을 담은 세태 소설이 펼쳐진다. 2(“무정한 여인”)에서 라파엘이 친구(에밀)를 상대로 늘어놓는 과거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아버지의 뜻에 따른 법학 공부, 사춘기의 방황(도박), 아버지의 파산과 사망 이후 1826년 현재, 22세의 라파엘은 파리에 홀로 남겨졌다. 자신의 불행에 도취된 라파엘은 자신의 진가를 몰라주는 세상과 여자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지식을 쌓기로 결심하고는 마담 고댕의 하숙집에서 3년 동안 디오게네스처럼 금욕적인 생활을 하며 희곡 작품과 해부학, 생리학 관련 책(<의지론>)을 쓴다. 한편으론 하숙집 여주인의 딸(폴린)과 오누이 같은 우정-사랑을 나눈다. 이런 라파엘 앞에 인생의 선배 라스티냐크(훗날 <고리오 영감>의 주인공이 될 촌뜨기 법대생이기도 하다)가 등장한다. 이 능수능란한 청년은 라파엘을 천재인 동시에 얼간이취급하며 각종 처세술을 전수해주고 사교계의 여왕인 페도라 백작 부인에게 데리고 간다. 라파엘은 한 명의 여인 이상”, “한 편의 소설인 그녀에게 반하지만 이내 배신당한다. 극적인 데라곤 전혀 없는 연애 이야기를 에밀은 이렇게 비꼰다.

 

페도라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그게 자네 이야기의 요점 아냐?”(280)

 

 그 다음 이야기가 바로 1부의 도입부, 즉 자살을 생각하던 중 나귀 가죽을 손에 넣게 되는 것이다. 에밀과 함께 가죽의 저력을(실제로 유산이 떨어지고 대신 나귀 가죽이 줄어든다) 확인하면서 라파엘의 운명은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나귀 가죽>은 낭만주의자 발자크(청년)와 사실주의자 발자크(중장년)가 격하게 충돌하는 소설, 그래서 당혹스럽고 놀라운 소설이다. 이 소설의 핵심어인 욕망은 출세(성공)와 연애(사랑)으로 구체화되는데, 어느 경우든 문제는 이다. 모두가 졸지에 부자 혹은 가난뱅이가 되고 돈이 없으면 사랑도 할 수 없다. 페도라와의 다분히 낭만적인 연애에도 끊임없이 돈이 개입하고(마차를 빌릴 돈이 없어 집까지 걸어간다) 그녀와 대조되는 폴린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라파엘은 여인이 왕비의 풍모를 갖추려면 모름지기 부자여야만하고 가난한 상태에서는 숫제 사랑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3부의 극장 장면, 파리의 사교계를 흥분시킨 미모의 미지의 여인이 과거의 그 폴린으로 밝혀지는 대목은 정녕 동화적이다. 남편이 백만장자가 되어 돌아올 것이라는 고댕 부인의 예감이 실현되자(돈의 마법!), 라파엘은 오랫동안 그를 흠모하며 그림을 그려서 팔면서까지 그의 우유 값을 대온 폴린과 열렬한 연애에 돌입한다. 그들의 사랑이 깊어지는 것도 두 인물이 공히 소유한 부 덕분인 양 묘사된다. 3부의 도입부에서는 손님을 맞이한 라파엘의 충복(조나타)의 입을 빌어 그가 식비로 하루에 천 프랑을 쓸 만큼 부자임을 강조한다. 초기자본주의의 물질만능주의를 대변하는 이토록 거친 직접 화법에 속이 시원해지는 것은 왜일까. 아무튼 그렇더라도 발자크가 묘파한 속물성은 <나귀 가죽>의 일부일 뿐이다.

 

3(“죽음의 고뇌”)의 라파엘은 부유한 발랑탱 후작이 된 대가로 그만큼의 목숨을 내놓았다. 폴린과 재회한 이후부터 나귀 가죽은 더더욱 급속도로 줄어든다. 두려워진 라파엘은 그것을 몰래 우물 속에 버리지만 정원사가 발견하여 다시 가져온다. 이어 그는 가죽을 처리하기 위해 과학(박물학, 생리학, 기계역학, 화학 등), 그 다음에는 자신의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의학(유기체론, 생기론, 외과수술론)에 의존한다. 그 과정에서 장황하게 전개되는 각종 ‘-1부의 도박론골동품론을 비롯하여 발자크의 지식욕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보여준다. 자신의 주인공의 입을 빌어 돈과 명예를 멀리하고 오로지 학적인 즐거움에만 탐닉하는 학자(플랑셰트)를 찬미하는 것도 그 예이다. 하지만 문학에 대한 숭고한 헌신에 있어 발자크 역시 만만치 않았다. 로댕의 조각상이 잘 표현해준 그의 짐승 같은 노동은 익히 알려진 바이다.

 

 

 

 

 

 

 

 

 

 

 

 

 

 

 

노동, 끝없는 노동은 마지막 순간까지 발자크의 진짜 존재방식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 노동을 사랑했다. 아니, 이런 노동을 하는 자신을 사랑했다. 창작의 고통 한가운데서 그는 비밀스런 기쁨으로 자신의 악마적인 에너지, 창작의 잠재력, 의지력 등을 즐겼다.”(스테판 츠바이크)

 

다시 라파엘로 가자. 1804년생인 그는 물론 욕망의 화신이었던 못 생긴 청년 발자크의 미화이다. 라파엘의 자살-욕망(타나토스)은 손쉽게 삶-욕망(에로스)과 등치되고, 그로써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요양 차 찾은 온천장에서 사소한 일로 결투(살인)까지 한 다음 라파엘이 택한 최후의 길은 그야말로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 역시 여의치 않아지자 그는 다시 파리로 돌아와 일종의 수면마취제를 꾸준히 복용하며 (그래도 살기 위해 중간에 밥은 먹는다!) 거의 하루 종일 잔다. 하지만 눈앞에 다시 폴린이 나타나자 억눌렀던 욕망이 불타오르면서 명줄이 탁, 끊기고 만다.

 

죽음의 순간은 극적이지만, 나귀 가죽을 손에 넣는 순간부터 시작된 삶-죽음의 과정(추정컨대 폐병에 걸린 듯하다)은 서서히 진행된다. 많이 욕망하면 빨리 죽는다. 하지만 욕망을 죽인 채 조심조심 영위되는 삶은 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의문스럽다. 출발점에 있어서는 우리 모두에게 거의 똑같이 주어지는 ’(=시간=욕망)을 어떻게 꾸려갈 것인가. 이런 물음을 던졌다는 점에서 <나귀 가죽>은 과연 부제대로 철학 소설이라고 할 만하고 발자크의 거대한 문학 기획인 인간 희극의 첫 고리가 될 만하다. 아래의 인용문에서 으로 바꿔 읽어도 무방하겠다.

 

(=라파엘)는 문득 힘을 소유하는 것 자체가, 아무리 그 힘이 막대하다 하더라도, 그 힘을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을 가져다주지는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왕홀(王惚)은 어린아이에게는 한갓 장난감일 뿐이지만 리슐리외에게는 도끼요, 나폴레옹에게는 세상을 들어 올릴 수 있는 지렛대인 것이다. 힘은 꼭 우리만큼의 크기를 가지며 그래서 큰 사람만을 더 키우는 법이다.”(408-409)

 

- <책앤> 2015년 ??월 호

 

 

 

 

 

 

 

 

 

 

 

 

 

 

 

 

발자크의 소설은 재미가 아니라 의무감에서, 발자크 자신이 그토록 숭상한 공부-노동에의 욕구에서 읽는다.  나로서는 (가령 스탕달의 <적과 흑>과는 달리) 그냥 막 읽히지는 않으므로  초반에 집중과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래서 완독한 책들. 뜻밖에도(?!), <골짜기의 백합>이 고등학교 때 멋 모르고 집어든, 그리고 그 무렵엔 무조건 끝장을 봤으니, 완독한 발자크의 첫 작품이다. 그 이후 몇 권을 더 들춘 듯한데, 아무튼 도스토예프스키에게야 재미있는(그래서 번역까지 한) 작가였겠지만, 우리에게는 힘든  작가다.

 

 

 

 

 

 

 

 

 

 

 

 

 

 

 

작품이 이러니 연구서도 다 그런 느낌이었다. 하지만 위에도 인용한 <발자크 평전>은 그의 소설보다 훨씬 더 재미있었다.  그만큼 발자크는 흥미로운 인물. 그리고 소설도 썼지만 츠바이크, 그대의 장르는 전기였구나.

 

 

 

 

 

 

 

 

 

 

 

 

 

 

 

2016년도 사실상 저무는 셈이다. <책앤> 지면이 없어져 서운했는데 올 봄에는 너무 바빠 좀 가뿐 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렇게 놀아서야 쓰나. 아무래도 지면이 주어져야 읽기-쓰기를 강제할 수 있을 법하다. 그거 안 하는 시간은 어디로 산화하는(-한)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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