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몇 년 전이냐, <문지문화원 - 사이>에서 세계문학읽기 강의를 했다. 저녁 시간, 일주일에 한 번. 오가는 길은 힘들었으나 강의는 참 재미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공부를 많이 했고(그 밑천으로 지면이 주어질 때마다 세계문학 읽기를 연재했다) 수강생들과의 상호작용이 좋았다. 그때 첫 학기 수강생들이었나, 아무튼 그 당시 중년의 초입에 있던 분들이 소설가 됐다.

그리고 최근에 알게 됐는데, 이 분도 소설 쓰신다. 그것도 엄청 열심히.
제일 최근에 나온 작품집 중 맨 처음에 수록된 소설은 안락사(존엄사)의 한 양상을 다룬다. 일종의 미래 소설(심지어 SF)임에도, 혹은 그렇기에 아주 재미있게 읽었다. 죽음을 코앞에 두고 스스로 죽음의 순간을 택한 자들, 그와 관계된 자들(주로 자식), 마지막을 처리하는 ,뭐랄까, 직업적 저승사자(?)의 대화와 풍경이 흥미롭다. 엄청 사실적이다! 끝으로, 안락 서비스를 제공하는 남자가, 맨 마지막 (예상되는 것이긴 한데!) 다섯 살 때 자기를 버리고 떠난, 그 이후 자기를 한 번도 찾지 않는 엄마(늙은 여자)를 만나면서 전개되는 극적인 장면은, 너무 극적이어서, 오히려 좀 아쉬웠달까. 그밖에 표제작 <존슨...>, <타미카 레드> 등도 이런 판타지, SF의 느낌이다. <타미카 레드>는 일종의 로봇 창녀(?)가 나오는데, 전체적으로 리들리 스콧의 <블레이드 러너> 느낌을 좀 받았다. 아무튼 이런 끼(!)를 지금껏 숨기고 있었다니, 놀라울 뿐이다.
이런 세팅의 관점에서는, 얼마전에 읽은 배명훈의 소설을 연상시킨다. <첫 숨>보다는 <신의 궤도>가 좀 더 재미있게 읽힌다. '은경이'가 나도 마음에 드나 보다.
소설이 뭔지. 소설을 쓴다는 것이 뭔지.
나는 아주 어려서부터 소설을 쓰고 싶어 했고, 또 직업적 작가(=등단)가 된 것도 돌이켜 보면 아주 어려서이지만, 이렇게 어떤 식으로든 일가를 이룬 사람이 인생이 절반 이상 꺾어진 지점에서 소설을 쓰는 것을 보면 소설 쓰기의 묘한 마력을 새삼, 절감한다. 한편, '못 가본 길' 혹은 '가다 만 길'에 대한 향수가 느껴지는, 어느 국문학자의 이런 소설집도 떠오른다.

물론 잘 쓰기는 쉽지 않다. 이건 뭐 어릴 때부터 계속, 꾸준히 써온 사람도 마찬가지. 내가 좋아하는 소설가 최수철의 최근작은 영 마뜩치 않다. 신작이 나와서 얼른 사 봤지만, 지루하다. 아, 물론, 그의 소설은 지루함이 특기이자 장점이다. 나는 그가 예전처럼 좀 독하게(?!) 지루해졌으면 한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재미있게 읽었던 것 같다. 심지어 두 권짜리 두툼한 <페스트> 역시, 한 시절 열광하며 완독한 장편 <불멸과 소멸>에 이어 그득한 만족감을 준 장편.
--
사실상 개강. 지난 학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수월한 학기다. 그 때문인지 계속 우울하고 나른하다. 그런 가운데 쓰이는 소설은, 한없이 날렵하고 가볍길 바란다, 라니, 너무 욕심인가. 이러나저러나 쓰자, 쓰자, 쓰자.
하루만에 자취를 감춰 버린 무더위가 사람을 머쓱하게 만든다. 너, 그렇게 쉽게 갈 거였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