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와 시간, 그 부조리에 바치는 희비극:

이 지랄은 이제 더는 못하겠다.”

- 사뮈엘 베케트(1906-1989), <고도를 기다리며>(1952년 출간, 1953년 초연) -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이하 고도)의 명성과 인기는 셰익스피어의 여느 희곡에 맞먹을 법하지만 실제 내용은 허망하기, 심지어 한심하기 그지없다. 1, 어느 시골길, 고목(枯木) 같은 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고고(에스트라공)와 디디(블라디미르)가 차례로 나타나 고도를 기다린답시고 각종 시답잖은 놀이를 한다. 이어, 포조가 끈에 묶인 럭키를 앞세우고 등장한다. 이 둘이 퇴장하자 한 소년이 나타나 고도는 내일 올 것이라는 말을 전해주고 사라진다. 무대에는 고고와 디디만 남는다. 2막의 내용도 대략 비슷하다.

 

연극이 진행되는 내내 아무런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고도가 초연된 1953년은 물론 지금에 와서도 제법 충격적이다. 통상 희곡의 사건은 인물-성격이 서로 부딪치는 와중에 발생하여 모종의 위기와 절정을 거쳐 파국(혹은 해피엔딩)을 맞이하는데, 그 원동력이 되는 것은 주인공-영웅(hero)의 의지와 욕망이다. 그러나 고도에는 마땅히 주인공도 없을뿐더러 주인공 비스름한 고고와 디디는 더 이상, 어떤 의미에서도 영웅이 아니다. 제각기 다른 이름과 그 나름의 차별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음에도(가령 고고는 곧잘 구두를 갖고 놀고 자신을 예수에 비유한다) 서로 잘 구분되지도 않는다. 일견 주인과 노예로 엮인 포조와 럭키는 여차하면 전복될 것 같은 괴상한 주종 관계를 보여준다. 1막과 2막의 말미에 잠시 등장하는 소년()은 형제지간인지 동일인인지 끝까지 헷갈린다. 르네상스 이래 지난 세기의 문학이 이룩한 -자아의 신화는 이렇게 무너진다.

 

 

 

 

 

 

 

 

 

 

 

 

 

 

시공간 역시 특이하다. 어딘지 불명확한 장소에 시간은 정지돼 있거나 아니면 정반대로 무한대로 흘러간다. 등장인물 중 누구도 객관적인 시간관념을 갖고 있지 않다. 고고와 디디는 오랜 시간을 함께하며 수시로 만남과 이별을 반복한 것 같으나 구체적인 정황을 기억하지 못하거나 그러지 않는다. 사정은 럭키와 포조, 소년도 마찬가지. 등신 같은 떠돌이 어른 네 명은 더 늙을 것도 없음에도 시종일관 더 늙어가는 반면, 소년은 시간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기에(그래서 더 소름끼친다) 아예 자라지도 못한다. 시계와 달력이 없는 공간이랄까. 여기서 고도는 시간의 다른 이름인지도 모르겠다. 존재와 시간은 기다림의 형식으로 서로에게 손발이 꽁꽁 묶여 있다. 이 경우 기다림은 삶의 동의어로서, 행위(순간)라기보다는 어떤 양태(지속)이다. 고고와 디디는 오지 않는 고도때문에, 더 정확히 고도가 오지 않기 때문에 존재한다. 태어남과 죽음 사이를 흐르며 모든 것을 느긋하게 해치워버리는 저 무자비한 시간을 두고 포조는 절규한다. “어느 날과 같은 어느 날  저놈(럭키)은 벙어리가 되고 난 장님이 된 거요. 그리고 어느 날엔가는 우리는 귀머거리가 될 테고. 어느 날 우리는 태어났고, 어느 날 우리는 죽을 거요.(중략) 여자들은 무덤 위에 걸터앉아 아이를 낳는 거지. 해가 잠깐 비추다간 곧 다시 밤이 오는 거요.”(150) 그러니 디디의 말마따나 그 긴 시간 동안 우린 온갖 짓거리를 다 해가며 시간을 메울 수밖에 없다.”(134)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래 시간과 공간과 행동의 엄정한 일치는 희곡(특히, 비극)의 근간을 이루어왔다. 그러나 체호프를 기점으로 극 장르는 각종 의미론적 요소를 지워가는 쪽으로 진화하다가 사르트르와 카뮈의 실존주의 극을 거쳐 베케트의 이른바 부조리극에 이르면 인물 아닌 인물과 사건 아닌 사건으로 한 편의 극이 완성된다.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사유의 틀을 바꿔놓은 대사건이다. 고도한 불문학자의 표현대로 사물과 육체를, 언어와 정신을 차례로 소멸시켜 나가는 이 도저한 절망의 상상력”(이인성)을 통해 불확정성과 상대성의 원칙, 존재와 세계의 부조리를 비단 내용이 아니라 형식 그 자체로 담아낸다.(마틴 에슬린, <부조리극>) 사실성의 환상을 창조하기 위해 기존의 연극이 고수해온 각종 조건성과 인과율이 사라지자 오히려 무대는 무대 바깥, 실제 우리의 삶과 놀랍도록 닮았다. 2막이 끝날 무렵 고고는 이 지랄은 이제 더는 못하겠다.”라고 말하고 디디는 다들 하는 소리지.”(158)라고 응수한다. 결국 둘은 가자는 말만 할 뿐, 럭키가 자신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지 못하듯(혹은 그러지 않듯) 여전히 움직이지 않는다. 이 황량한 정체(停滯)와 불모의 세계에서 오직 나무만 1막에서 2막을 거치면서 이파리 몇 장을 달고 있다. 기적과 구원의 상징인가, 아니면 그저 허망한 디테일인가. 글쎄다. ‘고도가 누구이며 무엇을 의미하느냐는 물음에도 작가는 내가 그걸 알았더라면 작품 속에 썼을 것이라고 대답했다지 않는가.

 

고도를 발표했을 때 베케트는 이미 세 편의 장편을 내놓은 소설가, 특히 해체적이고 실험적인 문체로 유명한 <몰로이>의 작가였다. 은둔과 방랑의 삶 속에서 영어와 프랑스어를, 소설과 희곡을 넘나들며 문학에 매진했으며 한때 대학 강단에 서기도 했던 이 아일랜드 작가에게 고도는 정녕 고고와 디디의 당근(순무) 놀이, 모자 놀이, 목매달기 놀이처럼, 또 럭키의 썰렁한 춤과 황당한 생각놀이처럼 이 지랄”, 일종의 호작질-손장난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애초에 프랑스어로 쓴 이 작품을 영어로 다시 쓰면서 그는 두 막짜리 희비극이라는 부제를 달았다. 베케트의 개인사든(가령 1938년 파리에서 길을 걷다가 어느 청년의 칼에 찔려 죽을 뻔한 일) 역사든(2차 세계 대전) 진정한 비극은 비극의 진짜 원인을 찾을 수 없다는 데, 어쩌면 그것은 그 어디에도 없다는 데 있다. 포조는 자기와 럭키의 처지를 두고 팔자소관운운한다. 이 세상의 눈물과 웃음의 총합은 동일하다는 식의 말도 덧붙인다. 과연 웃지 않고서야 이 당연한 부조리를 어떻게 견뎌내랴.

 

-- 책&

 

 

-- <산울림>의 <고도...> 공연을 보지 못해서 늘 죄지은(?) 느낌인데요, 유투브 검색하다가 이언 맥컬린이 출연하는 공연의 일부를 보고 즐거웠습니다. 링크할 줄 몰라서(-_-;;) 사진을 긁어봤습니다. 후줄근한 늙은이들이 찐따 같이(!), 등신 같이(!) 춤추고 웃고 하는 장면이 진짜 웃깁니다. 우울할 때 보면서 한껏 웃고 그렇게 웃으면서 우울해할 수 있는 장면이랄까요.

 

-- 베케트의 작품, 특히 <고도를 기다리며>를  읽을 때  가장 먼저 생각하는 작가는 위에도 인용했지만 소설가 이인성입니다. 그 다음은 소설가 정영문인데요, 베케트에 대한 그의 사랑(?!)은 유명하죠(물론 이 문장은 정말로 정영문스럽지 않습니다만-_-;;). 올해 동인문학상을 탄 <어떤 작위의 세계>에서도 여전히(더 많이?) 베케트 냄새가 나더군요. 베케트와 함께 일독을 권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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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변할 뿐, 없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다:

무한한 생성과 순환으로 가득 찬 아름다운 세계

- 오비디우스, <변신 이야기>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는 천지 창조에서 시작해 신과 인간이 빚어내는 온갖 사건, 특히 트로이 전쟁을 거쳐 트로이아의 후예인 아이네이아스의 로마 제국 건국 신화를 들려준 다음 카에사르(카이사르)의 죽음과 승천으로 끝난다.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유피테르(제우스)에 비유되기도 한다. “신들이 유피테르에게 보내는 사랑은, 카에사르 사후(死後), 로마의 신민(臣民)들이 아우구스투스 황제께 보낸 사랑에 못지않았다.” 그러나 이런 정치적인 함의에도 변신 이야기는 통상적인 건국 서사시와는 사뭇 다르다. 오비디우스가 아우구스투스 황제에 의해 추방된 이유도 그 스스로 밝힌 바에 따르면 (자신의 실수와 더불어) ‘때문이었다. 실상 이 두툼한 책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결사(結辭)를 보면 신-황제에 대한 은근한 도전이, 적어도 시인 특유의 오만함이 엿보이기도 한다.

 

이제 내 일은 끝났다.

유피테르 대신의 분노도, 불길도, 칼도, 탐욕스러운 세월도 소멸시킬 수 없는 나의 일은 이제 끝났다.

내 육체밖에는 앗아 가지 못할 운명의 날은 언제든 나를 찾아와, 언제 끝날지 모르는 내 이승의 삶을 앗아 갈 것이다.

그러나 육체보다 귀한 내 영혼은 죽지 않고 별 위로 날아오를 것이며 내 이름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로마가 정복하는 땅이면 그 땅이 어느 땅이건, 백성들은 내 시를 읽을 것이다.

시인의 예감이 그르지 않다면 단언하거니와, 명성을 통하여 불사(不死)를 얻은 나는 영원히 살 것이다.

 

오비디우스의 신화적 공간에서 신은 우선 인간을 둘러싼 제반 현상, 무엇보다도 자연의 의인화이다. 자연 속 만물이 두루 평등하듯, 자연-신 사이에 권력적 위계질서가 설정되어 있긴 하되 각자 자기만의 고유한, 신성불가침의 영역을 갖는다. 가령 제 아무리 유피테르라고 할지라도 플루토(하데스)에게 납치당한 자신의 딸 프로세르피나(페르세포네)를 무작정 빼 올 수는 없다. 유피테르의 말을 빌면 (플루토)는 이 세상을 상속받을 때 제비를 잘못 뽑아 이 천궁을 나에게 양보하고 저승 왕이 된 것뿐이므로, 서로의 관할 영역은 존중되어야 한다. 신들의 세계에서, 한 신이 매긴 죗값을 다른 신이 벗길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런 원칙하에 신들의 활약이 가장 두드러지는 분야는 아무래도 생산이다. 변신 이야기의 대부분이 사랑을 다루고 있음은 익히 알려져 있거니와 이 무수한 이야기들을 엮어 주는 요소인 변신/둔갑역시 대부분 사랑의 쟁취 혹은 회피, 그와 관련된 응징이나 복수의 과정에서 발생한다. 이 경우에도 가장 역동적인 신은 물론 유피테르인데 그의 애정 행각은 사랑을 성취하려는 마음과 품위를 지키려는 마음은 원래 조화도 양립도 불가능한 법임을 여실히 보여 준다. 비단 애욕만이 아니다. 유노(헤라)의 정조 관념과 가정 수호의 의지는 때때로 지나친 질투와 잔혹함을, 베누스(아프로디테)의 아름다움과 자유분방함은 허영과 방탕을 낳는다. 디아나(아르테미스)는 목욕 중인 자신의 알몸을 보았다는 이유로 죄가 있다면 길 잃은 죄밖에 없었던 악타이온을 잔인하게 응징한다. 이쯤 되면 처녀성과 신성에 대한 그녀의 집착은 거의 병리적인 수준이다. 말하자면 오비디우스가 창조한 신들은 자연의 은유인 만큼이나 인간의 은유이다. 그들은 인간처럼 오류를 범하고 쉽사리 감정의 격동에 휩싸이고 항상 보상과 대가를 바란다. 다소 역설적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신에 대한 도전과 불경은 최고의 죄악으로 다스려질 수밖에 없다.

 

감히 신과 겨루려 했거나 겨룬  인간 중 단연코 눈에 뜨이는 것은 아라크네이다. 베 짜는 재주로 이름을 날리던 그녀의 오만함이 도를 넘어서자 미네르바가 친히 찾아와 조용히 그녀를 타이른다. 그럼에도 그녀는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 결국 신과 인간 사이의 한판 승부가 펼쳐지는데, 그들이 자신의 베에 그려 넣는 그림이 시사적이다. 미네르바는 12신을 중심으로 신의 권능을 강조하는 반면 아라크네는 유피테르와 여러 신들의 비행을 폭로하고 조롱한다. 하지만 여신이 분노한 더 큰 이유는 아라크네가 짠 베가 흠잡을 데 없을 만큼 완벽했기 때문이다. 미네르바는 그 베를 찢는 걸로도 부족해, 그제야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자살하려는 아라크네를 거미로 만들어 버린다. 미네르바의 행위에는 분명히 옹졸한 면이 있다. 그러나 신-자연과 인간이 하나의 세계 속에 공존하는 이상, 이 역시 불가피한 일이다. 헤브라이즘의 세계라면 애초에 신이 인간과 솜씨를 겨누는 일 자체가 없었을 터이다. 변신 이야기의 저변에는 헬레니즘 특유의 자유롭고 건강한 민주주의가 깔려 있으며, ‘변신이란 자연의 구성원인 온갖 생명 간에 무한한 생성과 경계 이월, 활기찬 낙관주의의 표현이다. 15장에 느닷없이 삽입된 퓌타고라스의 가르침을 보자.

 

모든 것은 변할 뿐입니다. 없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영혼은 이리저리 방황하다가 알맞은 형상이 있으면 거기에 깃들입니다. 짐승의 육체에 있다가 인간의 육체에 깃들이기도 하는 것이고, 인간의 육체에 있다가 짐승의 육체에 깃들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돌고 돌 뿐, 사라지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말랑말랑한 밀랍을 보십시오. 이 밀랍으로 새로운 형태를 만들면 거기에는 그 전의 형태가 남지 않을뿐더러, 그 전의 형태로 되돌릴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모양만 변했을 뿐, 밀랍은 여전히 밀랍입니다. 이와 같습니다. 영혼은 어디에 가든 처음의 영혼 그대롭니다. 다만 다른 형상에 자리를 잡았을 뿐입니다.

 

세계는 종말론이 얘기하듯  시작에서 끝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계절의 흐름처럼 끊임없이 순환한다. 따라서 “<태어남>이라는 말은, 하나의 물상이 원래의 형상을 버리고 새 형상을 취한다는 뜻이고 “<죽음>이라는 말은, 그 형상대로 있기를 그만둔다는 말일 뿐, 이것이 변하여 저것이 되고 저것이 변하여 이것이 될지언정 그 합()은 변하지 않는다. 이런 믿음은 무자비한 자연에 대한 경외감과 공포, 인간 개개인의 생로병사에 대한 허무감에서 비롯됐을 터이다. 하지만 과학이 이토록 발전했음에도 자연의 힘, 탄생과 죽음의 신비 앞에서 우리는 여전히 전율한다. 이것이 자연-신과 인간이 한데 어우러져 생명의 기운을 한껏 뽐내는 변신 이야기를 읽는 이유이기도 하다.

 

-- 네이버캐스트

 

 

(티치아노가 그린 유명한 그림이죠? 후덜덜-_-하는 그림입니다!)

 

-- 분량상 쓰지 못한 여러 얘기 중 지금 언뜻 생각나는 것은 아폴론과 겨루었다가 산 채로 살 가죽이 벗기는 벌을 받은(정녕 희랍 신화는 헨타이, 하드고어, 하드코어입니다 -_-;;) 마르시아스입니다. 예술은 창조이고 창조는 신의 영역인데, 그것을 넘본다는 것 자체가 반역인 셈이고  창조-창작의 고통은 불가피하겠지요. 산고처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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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리칸 드림의 실체:

바보로 죽을 것인가, 속물로 살 것인가

- 스콧 피츠제럴드, <위대한 개츠비>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가 던지는 여러 물음은 결국 하나로 요약된다. 개츠비는 왜 위대한가? 소설의 시점과 형식상 닉 캐러웨이의 시선을 따라갈 수밖에 없겠다. 그는 톰의 대학 동창이자 데이지의 먼 친척임에도 출신 성분(서부 출신으로서 출세를 위해 동부로 옴)과 내적인 성향에 있어 개츠비 쪽에 가깝다. 이런 그의 눈을 통해 보아도 개츠비는 알쏭달쏭한 인물이다. 가령 개츠비의 첫 고백을 보자.

 

하나님께 맹세코 진실을 말씀드리지요.” 그는 신의 처벌을 멈추게 하려는 듯 갑자기 오른손을 쳐들었다. “나는 중서부의 어떤 부잣집에서 태어났지요. 가족들은 모두 죽고 없습니다. 미국에서 자랐지만 교육은 옥스퍼드에서 받았어요. 선조 대대로 그곳에서 교육을 받아왔거든요. 집안 전통이죠.”(94-95)

 

이어, 가족의 죽음으로 거액의 유산을 상속받고 오래 전에 있었던 매우 슬픈 일을 잊으려고유럽을 떠돌아다니고 등. 닉조차 대번에 거짓말임을 알 수 있는 소리를 개츠비는 천연덕스레 늘어놓는다. 죄책감은커녕 모종의 불편함조차 느끼지 않는 모양이다. 한편 실제의 그는 이렇다. 서부의 가난한 노동자 출신으로서 아버지는 살아 있고(그의 말에 따르면 개츠비는 아비에게 새 집을 사줄 만큼 효자이다!) 종전 후 잠시 옥스퍼드에 머무른 적이 있고 귀국 후 조직 폭력업계의 거두 울프심과 손잡고 밀주 유통을 비롯한 여러 일을 통해 부를 축적하고 등. 간단히, ‘제임스 개츠제이 개츠비로 바뀌면서 거의 페이스오프에 가까운 성형과 신분 세탁이 행해진다. 이 과정의 중심축이 돈-물신(物神)이며 데이지는 그 상징이다.

 

그녀는 그가 난생처음으로 알게 된 멋진여자였다. 그는 숨겨진 다양한 능력을 발휘해 상류층 사람들과 만나긴 했지만 그들과의 사이에는 언제나 눈에 보이지 않는 가시철조망이 가로놓여 있었다. 그는 그녀가 몹시도 탐났다. 처음에는 캠프 테일러의 다른 장교들과 같이 그녀의 집에 놀러 갔지만 나중에는 혼자서 찾아갔다. 그에게는 놀라운 일이었다. 그렇게 아름다운 집에 들어가 보기는 처음이었다.(209)

 

 

데이지는 어느 각도에서 봐도 천상의 베아트리체와는 거리가 멀다. 개츠비는 그녀의 목소리는 돈으로 가득 차 있어요.”라고 말한다. 실상 목소리뿐만 아니라 그녀의 존재 자체가 돈 칠갑이다. “()가 가두어 보호하는 젊음과 신비, 그 많은 옷이 주는 신선함, 그리고 힘겹게 살아가는 가난한 사람들과는 동떨어진 곳에서 그녀가 안전하고 자랑스럽게 은처럼 빛을 발한다는 것.” 그녀에게 돈이란 뼛속까지 밴 부르주아 근성의 총체이다.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는 놈”, 즉 개츠비와 시카고 부호의 아들이자 예일대를 졸업한 톰 뷰캐넌의 차이는 당시 흑인과 백인의 차이만큼이나 어마어마하다. 따라서 그녀가 개츠비의 구애에(더 정확히 그의 화려한 저택과 무도회에!) 살짝 마음이 흔들리지만 결코 톰을 떠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것이 자유와 평등의 대륙인 아메리카의 실체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개츠비는 정녕 순수와 낭만의 화신인가. 가령 헤어진 지 5년이나 지난 시점에서 이미 유부녀가 된 옛 여자주변을 부나비처럼맴돌고 그녀의 남편까지 동석한 자리에서 어설프게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비상식적일뿐더러, 뷰캐넌 부부의 반응을 고려한다면 애처롭고 우스꽝스러운 행위이다. 그의 최후 역시 비극적이라고 하기엔 너무 어처구니없다. 이 경우에는 동정도 이래저래 톰의 희생양이 된 자동차 정비공 윌슨에게로 가는 것이 더 마땅하리라.

 

아무래도 개츠비는 그 정체가 드러날수록 신화가 아니라 희화가 된다. 속물들의 사회에 편입되기 위해, 큰 저택과 많은 옷과 가구를 소유하기 위해 어릴 적부터 생활계획표를 짜가며 아등바등, 애면글면 살았던, 심지어 어두운 일도 서슴지 않았던 바보! 이런 그를 닉은 다음과 같이 변호한다.

 

개츠비는 내가 드러내놓고 경멸해 마지않는 모든 것을 대변하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만약 개성이 일련의 성공적인 몸짓이라면 그는 뭔가 멋진 것을, 마치 1만 마일 밖에서 일어나는 지진을 감지하는 복잡한 기계와 연결되어 있기라도 한 것처럼 삶의 가능성에 예민한 감수성을 지니고 있었다. (중략) 그것은 희망에 대한 탁월한 재능이요, 다른 어떤 사람에게서도 일찍이 발견된 적 없고 앞으로도 다시는 발견할 수 없을 것 같은 낭만적인 민감성이었다. 아니, 결국 개츠비는 옳았다. 내가 잠시나마 인간의 짧은 슬픔이나 숨 가쁜 환희에 대해 흥미를 잃어버렸던 것은 개츠비를 희생물로 이용한 것들, 개츠비의 꿈이 지나간 자리에 떠도는 더러운 먼지 때문이었다.(11)

 

그럼에도 개츠비란 인물이 정녕 위대한지 어떤지는 모르겠다. 동시대의 다른 작가, 가령 헤밍웨이나 포크너와는 전혀 다른 무게감을 지닌 피츠제럴드가 위대한 작가인지 어떤지도 잘 모르겠다. 그러나 <위대한 개츠비>는 위대한 소설이다. 이 소설이 묘파해낸 우리 삶의 부나비 같은 풍경을 보라. 밤마다 개츠비의 저택을 장식하는 불빛과 재즈 소리, 이른바 개츠비 룩으로 단장한 미녀들의 현란한 춤, 무도회가 끝난 뒤 수북이 쌓이는 오렌지 껍질. 이것은 비단 1920년대(재즈의 시대!), 대공황 직전의 미국의 풍경만은 아니다. 멸망 직전의 소돔과 고모라처럼 우리는 무작정 소비하고 향유하며 무작정 어리석은 꿈에 젖는다. 이 질펀한 향연의 끝은 웨스트에그(신흥 부촌 - 개츠비의 저택)와 이스트에그(토착 부촌 - 뷰캐넌 부부의 저택) 사이, 재의 계곡이 아닐까.

 

 

-- 네이버캐스트

 

 

-- 미국소설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잘 알지도 못하거니와 (이런 경우에 자주 그렇듯!) 깊이가 없다는 (원래 편견이라는 것이 그렇지만, 근거 없는-_-;;) 편견까지 있습니다. 오랜만에 <위대한 개츠비>를 다시 읽었는데 정말 잘 쓴 소설이어서 놀랐습니다. 그럼에도, 그러니까 더더욱  정이 안 가더군요. (ㅠ.ㅠ)  속물스러움(!)의 문학화에 유달리 깊은 관심을 보인 러시아문학과 비교를 하게 되니 더 그런 것도 같고요. (그래서인지 악플이 잔뜩 달렸던 아픈 기억이 있습니다...ㅠ.ㅠ)

최근에는 헤밍웨이를 다시 읽을 기회가 있었는데(이것도 조만간 올리겠지만), 어쩜, 어릴 때의 감동이 거의 살아나질 않아 좀 울쩍했더랬지요. 여하튼 소설가로서는 헤밍웨이보다야 피츠제럴드가 한 수, 두 수 위인 것 같아요.  최근에 영화화되기도 한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도 재미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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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누구인가에서 는 누구인가'로:

앎을 향한 인간의 열망, 자기 단죄의 숭고한 비극

- 소포클레스, <오이디푸스 왕>

 

 

 

 

 

 

 

 

오이디푸스라는 이름이 세간에 널리 알려진 것은 아무래도 프로이트 덕분이겠지만,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함의와 소포클레스의 주인공이 실제로 겪는 비극은 사뭇 다르다. 오이디푸스는 아비를 증오하고 어미를 취하려는 욕망을 품은 자가 아니라 오히려 그런 내용을 담은 섬뜩한 신탁을 피하기 위해 부단히 애썼으나 그 희생양이 됐던 자이다. 실상 막이 열릴 때 이미 사건-죄악은 종료돼 있다. 그는 테바이의 왕이며 왕비 이오카스테와의 사이에 아들 둘과 딸 둘을 두고 있다. 문제는 나라의 환란을 해결하려는 과정에서 불의의 사고로 비명횡사한 선왕 라이오스 얘기를 들으면서 시작된다. , 그의 행동의 시발점은 라이오스를 죽인 자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이다. “그가 전에 가졌던 왕권도, 그의 침상과 씨 뿌릴 아내도 이어받았으니 (중략) 그러니 나는 이것을 위해, 마치 내 아버지의 일인 양 / 싸워 나갈 것이고, 그 살인을 저지른 자를 / 잡고자 찾으며 모든 곳을 뒤질 것이오.”(36) 극이 진행되면서 설마 그 살인자가 나인가?”라는 물음이 대두되고 그것은 이내 나는 과연 누구인가?”라는 치명적인 물음을 낳는다. 오이디푸스가 라이오스의 살인자를 밝히는 과정은 곧, 그가 자신의 정체와 더불어 신탁의 실현 여부를 알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테이레시아스: (중략) 내 그대에게 이르노니, 그대가 진작부터 라이오스의 / 살해자라 선언하고 위협하며 찾는 / 그 사람이 바로 여기에 있소. / 그는 명목상으로는 이방 출신의 거주자이지만, 나중에는 / 태생부터 테바이 사람임이 드러날 테고, 그 행운에 / 즐거워하지 않을 것이오. 그는 눈 뜬 자에서 장님이 되고, / 부자에서 거지가 되어 이국 땅을 향해 / 지팡이로 앞을 더듬으며 가게 될 것이오. / 또 그는 자기 자식들의 형제이자 / 아버지로서 함께 살고 있으며, 자신을 낳은 / 여인의 아들이자 남편이고, 자기 아버지와 / 함께 씨 뿌린 자이자 그의 살해자임이 드러날 것이오.(48-49)

 

오이디푸스는 예언자의 말이 너무나 두려워 그것을 처남(동시에 외숙부이다) 크레온의 정치적 음모로 돌린다. 하지만 이오카스테, 코린토스의 사자, 라이오스의 갓난 아들의 처리를 맡았던 목부(牧夫) 등의 입을 통해 하나하나 축적되는 말들은 모두 동일한 진실을 겨냥한다. 죄악을 피하고자 행했던 일들이 역설적으로 그 죄악의 완성에 기여한 셈이다.

 

오이디푸스: 아아, 아아, 모든 것이 이뤄질 수밖에 없었구나, 명백하게! / , 빛이여, 이제 내가 너를 보는 게 마지막 되기를! / 태어나서는 안 될 사람들에게서 태어나서, 어울려서는 안 될 / 사람들과 어울렸고, 죽여서는 안 될 사람들을 죽인 자라는 게 드러났으니!(95-96)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은 척 보기에도 아리스토텔레스의 비극론에 상당히 잘 들어맞는다. ‘무지에서 으로의 이월, ‘발견과 급전’, 무엇보다도 그 과정에서 야기되는 연민과 공포의 크기는 실로 어마어마하다. 더욱이 그는 악덕과 악행 때문이 아니라 어떤 과오 때문에 불행에 빠지는 사람”, 서사시의 영웅과는 달리 덕과 정의감이 특별히 뛰어나지는않으나 적어도 보통보다 더 나은 고상한 인물”, 간단히 인간의 전형이다. , 헤라클레스나 아킬레우스 같은 신의 아들은 아니었으나, 스핑크스를 무찌른 영웅이자 나라의 역병을 퇴치하기 위해 노력한 훌륭한 왕이며 왕비의 옷에 브로치를 꽂아주곤 한 자상한 남편이자 파국 앞에서 자식들의 미래를 걱정하는 인자한 아버지이다.

 

 

 

 

 

 

 

 

이런 그의 운명을 행복에서 불행으로 바꿔놓은 과오란 어떤 것인가. 세 갈래 길에서 마주친 행인을 말다툼 끝에 살해한 것과 미망인이 된 왕비를 그 나라와 함께 취한 것은 모두 무지에서 비롯됐다. 아비인 줄 모르고 살해했으며 역시 어미인 줄 모르고 동침했다. 그러니까 오이디푸스의 과오는 그가 인간인 이상 도대체 피해갈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신탁이 예언한 과오를 피하기 위해 고향과 부모를 떠나 오랜 세월 방랑의 길을 걸었으나, 결국 그 운명의 덫에 여지없이, 멋지게 걸려든 셈이다.

 

코로스: , 조국 테바이의 거주자들이여, 보라, 이 사람이 오이디푸스로다. / 그는 그 유명한 수수께끼를 알았고, 가장 강한 자였으니 / 시민들 중 그의 행운을 부러움으로 바라보지 않은 자 누구였던가? / 하지만 보라, 그가 무서운 재난의 얼마나 큰 파도 속으로 쓸려 들어갔는지. / 그러니 필멸의 인간은 저 마지막 날을 보려고 / 기다리는 동안에는 누구도 행복하다 할 수 없도다. / 아무 고통도 겪지 않고서 삶의 경계를 넘어서기 전에는.

 

과연 이 비극의 메시지는 운명 혹은 신 앞에서 겸손할 것을 촉구하는 것인가. 어떻든 두 눈에 피를 줄줄 흘리며 무대 위에 나타난 그의 모습에(물론 그가 눈을 찌르는 사건은 이오카스테의 자살처럼 무대 뒤에서 일어난다) 우리는 숭고의 절정을 맛본다. 죄악을 비껴가려는 인간의 처절한 몸부림, 그것을 무참히 조롱하는 변덕스럽고 야비한 운명의 테러, 그럴수록 더욱더 거세지는 앎과 자유를 향한 열망, 끝으로 크나큰 죄악 앞에서 행해진 잔혹한 자기 단죄. 인간 삶의 이 비극적인 아이러니 앞에서 연민과 고통을, 나아가 카타르시스를 느끼지 않을 수 있으랴.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등 3대 비극작가들이 활동하던 무렵, 그리스는 페르시아 전쟁의 승리 이후에 찾아온 태평성대를 구가하고 있었다. 가장 아름다운 시절에 가장 참혹한, 나아가 숭고한 비극이 쓰이고 공연됐던 것이다. 또한 소포클레스는 걸출한 비극작가였지만 90년에 육박하는 그의 인생은 상당히 순탄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 때문일까, 말년에 이르러 그는 오이디푸스 왕의 후일담을 담은 <콜로누스의 오이디푸스>를 쓴다. 저주와 파멸이 아닌, 구원과 안식의 신탁을 받아 영면에 이르게 되는 오이디푸스 왕의 모습 속에 은근히 자신의 노년을 투영한 것일까.

 

 

-- 네이버캐스트

 

 

-- 요즘 '운칠기삼'이라는 말에 대해 자주 생각합니다. '운'이 '7', '기'가 '3'. 삶의 여러 국면에서 나의 재주와 노력이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될까. 개인사든 역사든 우연론과 인과론 중 어떤 것이 더 의미가 있을까. 뭐, 이런 것들인데요, 오이디푸스의 비극이 얘기하는 것도 결국은 '운명'과 '인간'의 싸움/화해니까요.  지면이 부족해 많이 쓰지 못했는데, 이 점에서 <콜로누스의 오이디푸스>가 인상적이었습니다. 늙은 오이디푸스 옆에는 효녀 안티고네가 붙어 있는데(역시 딸이 대세?^^;) 노년은 썩 나쁘지 않은 셈이지요. 운명의 위로랄까요. 뭐, 이런 식으로 읽는다함은 그만큼 늙었다는 것이기도 할 테고요..-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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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진실이요 진리인가:

아쿠다가와 류노스케(1892-1927), 「라쇼몬」(1915) / 「덤불속」(1922)

 

 

어느 해질 무렵, 일자리를 잃은 한 사내가 비를 피해 라쇼몬[羅生門]의 누각 밑에 서 있다. 도둑질이라도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일단은 밤을 보내야겠다는 생각에 누각의 사다리를 오른다. 소문대로 시체들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가운데, 앙상한 백발의 노파가 시체의 머리카락을 뽑고 있다. 사내는 악을 향한 증오와 분노에 사로잡혀 노파에게 덤벼들지만 가발을 만들려고 그랬다는 ‘평범’한 대답에 실망한다. 흥미로운 것은 차라리 노파의 변명이다. 지금 이 시체는 토막 내 말린 뱀을 건어물이라고 속여 팔다가 역병에 걸려 죽은 여자라는 것. “이 여자가 한 짓거리가 나쁘다고는 안 하겠어. 안 그러면 굶어죽을 테니 어쩔 수 없이 한 짓이지. 그러면 방금 내가 한 짓도 나쁜 짓이라고는 못하는구먼. 이렇게 안 하면 당장 굶어죽으니까 어쩔 수 없이 한 짓이야. 그런 사정을 뻔히 아는 이 여자는 내가 한 짓도 너그럽게 봐줄 것이구먼.”(17-18)

 

 

 

 

이 말에 사내 역시 아까의 고민을 가뿐히 내던지고 잽싸게 노파의 옷을 벗겨 사라진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생존을 위해서라면 웬만한 악행쯤은 허용된다는 논리에 따라 악이 또 악을 양산한다. 그악하고 처절한 순환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관점을 달리 하면, 노파는 사기꾼 여자 덕분에, 사내는 또 이 노파 덕분에 살아남는 공생 관계가 유지되는 셈이다. 윤리와 도덕이란 동병상련에 기반한 것, 그토록 상대적이고 위태로운 것인가. 「라쇼몬」은 아쿠다가와 류노스케가 스물세 살 때 쓴, 사실상 처녀작인데, 인간 본연의 이기주의와 선악의 이율배반성에 대한 서슬 퍼런 묘사는 실로 충격적이다. 과연 무엇이 진실이요 진리인가. 서른 살에 쓴 단편 「덤불 속」은 더 극적이다.

 

 

한 무사 부부가 길을 가던 중 강도의 습격을 받아, 무사의 아내는 강도에게 능욕당한 이후 도망치고 무사는 사망한다. 일견 간단해 보이는 사건이지만, 연루된 인물들은 각자 자신의 논리와 기억에 따라 서로 엇갈리는 말을 늘어놓는다. 강도의 자백을 보자. 첫 눈에 무사의 아내에게 반한 다조마루는 고총(古冢)을 미끼로 무사를 산 속 깊숙이 유인하여 덮친 다음 밧줄로 삼나무에 묶어놓고 여자를 데려온다. 그렇게 목적을 이룬 다음 그만 떠나려하는데, 여자가 울면서 매달린다. 두 사내 중 하나는 죽어야 한다, 자기는 살아남은 남자를 따라가겠다, 라는 것. 여자의 말에 따라 강도는 싸움 끝에 무사를 죽이지만 그 사이에 여자는 도망쳐 버린다. 이런 흉악범도 자기 합리화의 근거는 얼마든지 있다. “다만 우리는 사람을 죽일 때 허리의 검을 쓰지만, 당신들이야 칼 대신 뭐 권력으로 죽이고 돈으로 죽이고, 아니면 그럴싸하게 위해주는 척하는 말로 사람을 죽이기도 하지 않습니까.”(128) 남자를 결박에서 풀어 정정당당히 겨룰 기회를 주었음을 강조하고 자기와 스물세 합이나 맞선 적수의 실력을 칭찬하기도 한다. 끝까지 당당하게 굴며 극형에 처해달라고 호기를 부리는 ‘위대한 죄인’, 이것이야말로 다조마루가 꿈꾼 자신의 이상적 모습이었을 터이다.

 

 

 

 

 

무사의 아내의 말은 어떤가. 능욕을 당한 이후 그녀는 자기를 멸시하는 것 같은 남편의 시선에 자살을 결심한다. 하지만 그에 앞서 자신의 치욕을 목격한 남편을 먼저 찔러 죽인다. 그녀의 어머니의 말대로 “웬만한 남자 못지않게 기가 드센”(126) 여자답다. “남편을 죽인 저는, 도둑놈에게 능욕당한 저는, 대체 어찌해야 좋을까요?”(135) 이런 흐느낌, 즉 ‘약함’에의 호소는 남성적 논리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녀가 본능적으로 선택한 생존 전략일 것이다. 한편, 무사는 무사 나름의 이야기가 있다. 능욕 이후 강도는 무사의 아내를 감언이설로 유혹했고 그녀는 그 유혹에 넘어갔다는 것이다. 이렇듯 아내를 부정하고 뻔뻔한 여자로 몰아감으로써, 또 자신은 아내의 단도로 자살했다고 말함으로써(사실일 수도 있다!) 그는 사무라이로서의 명예를 지키려 한다. 심지어 부차적 인물인 나무꾼의 말도 그대로 믿을 수는 없다. 다들 언급하는 여자의 단도가 현장에 없었다는 것은 최초의 목격자인 그가 절도를 범했음을 말해준다. 어떻든 가장 흥미로운 존재는 ‘덤불 속’ 너머에 있는 포청(捕廳)이다. 자신의 모습을 감춘 채 각종 말을 유도하고 이야기의 판을 짜는 자(혹은 그런 자들), 작가의 은유이다.

 

 

 

아쿠다가와 류노스케는 스스로를 “빈곤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되는 프티 부르주아”(「다이도오지 신스케의 반생(半生)」)라고 했으나 그렇게 가난한 편은 아니었다. 덧붙여 도쿄 대학 영문과를 졸업한 수재였으며 일찍이 나쓰메 소세키의 인정을 받아 백 편이 훌쩍 넘는 단편소설을 남기기까지 비교적 무난한 삶을 살았던 것 같다. 그럼에도 그의 소설에 짙게 드리워져 있는 세기말과 황혼녘의 분위기, 묵직한 우수와 고뇌는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나의 어머니는 광인이었다.”(「점귀부」) 광기의 유전자를 의식한 탓인지 생명에 대한 공포, 심지어 혐오는 거의 병적인 수준에 이른다. 진정한 예술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가장 아끼는 딸의 목숨마저 희생한 다음 자살하고 마는 화가(「지옥변」)는 물론 작가의 분신처럼 읽힌다. 도저한 탐미주의와 예민한 죄의식, 현대식으로 변용된 설화(모노가타리)와 새로운 서사 양식처럼 읽히는 독특한 사소설(私小說) 등 아쿠다가와의 문학은 그의 삶이 서른다섯에 자살로 마감되는 순간 비로소 완성된다. “인생은 보들레르의 시 한 줄만도 못하다.”(「어느 바보의 일생」)

 

 

-- <책&> 10월호

 

 

 

 

 

 

-- 작품 인용은 <지옥변>(양윤옥 옮김, 시공사)에 근거합니다. 일본 근현대 작가 중 제일 좋아하는 작가입니다. 최근에 새 번역본이 나와서 무척 반가웠지요^^; 

-- 아쿠다가와는 기존 텍스트(각종 설화 포함)를 새롭게 쓰는 데 재주가 있었던 것 같은데(어쩌면 이것만이 재주?!) 그만큼 각종 고전에 박식했다는 얘기이기도 할 겁니다.(위에 보들레르를 언급한 문장, 유명하죠!)  러시아 문학도 꽤 많이 읽은 것 같아요. '동화'로 소개되는 <거미줄>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중 그루셴카의 얘기에서 가져온 겁니다. 흔히 사소설 하면 다자이 오사무를 많이 떠올리겠지만, 저는 이 경우에도 아쿠다가와 쪽이 좀 더 잘 접수되더라고요.

-- 구로사와 아키라가 만든 <나생문>(1950)은 <나생문>의 틀 속에 <덤불 속>을 끼워 넣은 식으로 진행됩니다. 강도 역은 물론(!) 미후네 토시로 가 맡았지요. 오래 된 흑백 영화임에도 무척 재미있습니다. 하긴 재미로야 <7인의 사무라이>만할까마는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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뷰렛 2012-10-29 17: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쇼몽은 고전으로 인간심리를 잘나타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