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진실이요 진리인가:

아쿠다가와 류노스케(1892-1927), 「라쇼몬」(1915) / 「덤불속」(1922)

 

 

어느 해질 무렵, 일자리를 잃은 한 사내가 비를 피해 라쇼몬[羅生門]의 누각 밑에 서 있다. 도둑질이라도 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일단은 밤을 보내야겠다는 생각에 누각의 사다리를 오른다. 소문대로 시체들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가운데, 앙상한 백발의 노파가 시체의 머리카락을 뽑고 있다. 사내는 악을 향한 증오와 분노에 사로잡혀 노파에게 덤벼들지만 가발을 만들려고 그랬다는 ‘평범’한 대답에 실망한다. 흥미로운 것은 차라리 노파의 변명이다. 지금 이 시체는 토막 내 말린 뱀을 건어물이라고 속여 팔다가 역병에 걸려 죽은 여자라는 것. “이 여자가 한 짓거리가 나쁘다고는 안 하겠어. 안 그러면 굶어죽을 테니 어쩔 수 없이 한 짓이지. 그러면 방금 내가 한 짓도 나쁜 짓이라고는 못하는구먼. 이렇게 안 하면 당장 굶어죽으니까 어쩔 수 없이 한 짓이야. 그런 사정을 뻔히 아는 이 여자는 내가 한 짓도 너그럽게 봐줄 것이구먼.”(17-18)

 

 

 

 

이 말에 사내 역시 아까의 고민을 가뿐히 내던지고 잽싸게 노파의 옷을 벗겨 사라진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생존을 위해서라면 웬만한 악행쯤은 허용된다는 논리에 따라 악이 또 악을 양산한다. 그악하고 처절한 순환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관점을 달리 하면, 노파는 사기꾼 여자 덕분에, 사내는 또 이 노파 덕분에 살아남는 공생 관계가 유지되는 셈이다. 윤리와 도덕이란 동병상련에 기반한 것, 그토록 상대적이고 위태로운 것인가. 「라쇼몬」은 아쿠다가와 류노스케가 스물세 살 때 쓴, 사실상 처녀작인데, 인간 본연의 이기주의와 선악의 이율배반성에 대한 서슬 퍼런 묘사는 실로 충격적이다. 과연 무엇이 진실이요 진리인가. 서른 살에 쓴 단편 「덤불 속」은 더 극적이다.

 

 

한 무사 부부가 길을 가던 중 강도의 습격을 받아, 무사의 아내는 강도에게 능욕당한 이후 도망치고 무사는 사망한다. 일견 간단해 보이는 사건이지만, 연루된 인물들은 각자 자신의 논리와 기억에 따라 서로 엇갈리는 말을 늘어놓는다. 강도의 자백을 보자. 첫 눈에 무사의 아내에게 반한 다조마루는 고총(古冢)을 미끼로 무사를 산 속 깊숙이 유인하여 덮친 다음 밧줄로 삼나무에 묶어놓고 여자를 데려온다. 그렇게 목적을 이룬 다음 그만 떠나려하는데, 여자가 울면서 매달린다. 두 사내 중 하나는 죽어야 한다, 자기는 살아남은 남자를 따라가겠다, 라는 것. 여자의 말에 따라 강도는 싸움 끝에 무사를 죽이지만 그 사이에 여자는 도망쳐 버린다. 이런 흉악범도 자기 합리화의 근거는 얼마든지 있다. “다만 우리는 사람을 죽일 때 허리의 검을 쓰지만, 당신들이야 칼 대신 뭐 권력으로 죽이고 돈으로 죽이고, 아니면 그럴싸하게 위해주는 척하는 말로 사람을 죽이기도 하지 않습니까.”(128) 남자를 결박에서 풀어 정정당당히 겨룰 기회를 주었음을 강조하고 자기와 스물세 합이나 맞선 적수의 실력을 칭찬하기도 한다. 끝까지 당당하게 굴며 극형에 처해달라고 호기를 부리는 ‘위대한 죄인’, 이것이야말로 다조마루가 꿈꾼 자신의 이상적 모습이었을 터이다.

 

 

 

 

 

무사의 아내의 말은 어떤가. 능욕을 당한 이후 그녀는 자기를 멸시하는 것 같은 남편의 시선에 자살을 결심한다. 하지만 그에 앞서 자신의 치욕을 목격한 남편을 먼저 찔러 죽인다. 그녀의 어머니의 말대로 “웬만한 남자 못지않게 기가 드센”(126) 여자답다. “남편을 죽인 저는, 도둑놈에게 능욕당한 저는, 대체 어찌해야 좋을까요?”(135) 이런 흐느낌, 즉 ‘약함’에의 호소는 남성적 논리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녀가 본능적으로 선택한 생존 전략일 것이다. 한편, 무사는 무사 나름의 이야기가 있다. 능욕 이후 강도는 무사의 아내를 감언이설로 유혹했고 그녀는 그 유혹에 넘어갔다는 것이다. 이렇듯 아내를 부정하고 뻔뻔한 여자로 몰아감으로써, 또 자신은 아내의 단도로 자살했다고 말함으로써(사실일 수도 있다!) 그는 사무라이로서의 명예를 지키려 한다. 심지어 부차적 인물인 나무꾼의 말도 그대로 믿을 수는 없다. 다들 언급하는 여자의 단도가 현장에 없었다는 것은 최초의 목격자인 그가 절도를 범했음을 말해준다. 어떻든 가장 흥미로운 존재는 ‘덤불 속’ 너머에 있는 포청(捕廳)이다. 자신의 모습을 감춘 채 각종 말을 유도하고 이야기의 판을 짜는 자(혹은 그런 자들), 작가의 은유이다.

 

 

 

아쿠다가와 류노스케는 스스로를 “빈곤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되는 프티 부르주아”(「다이도오지 신스케의 반생(半生)」)라고 했으나 그렇게 가난한 편은 아니었다. 덧붙여 도쿄 대학 영문과를 졸업한 수재였으며 일찍이 나쓰메 소세키의 인정을 받아 백 편이 훌쩍 넘는 단편소설을 남기기까지 비교적 무난한 삶을 살았던 것 같다. 그럼에도 그의 소설에 짙게 드리워져 있는 세기말과 황혼녘의 분위기, 묵직한 우수와 고뇌는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나의 어머니는 광인이었다.”(「점귀부」) 광기의 유전자를 의식한 탓인지 생명에 대한 공포, 심지어 혐오는 거의 병적인 수준에 이른다. 진정한 예술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가장 아끼는 딸의 목숨마저 희생한 다음 자살하고 마는 화가(「지옥변」)는 물론 작가의 분신처럼 읽힌다. 도저한 탐미주의와 예민한 죄의식, 현대식으로 변용된 설화(모노가타리)와 새로운 서사 양식처럼 읽히는 독특한 사소설(私小說) 등 아쿠다가와의 문학은 그의 삶이 서른다섯에 자살로 마감되는 순간 비로소 완성된다. “인생은 보들레르의 시 한 줄만도 못하다.”(「어느 바보의 일생」)

 

 

-- <책&> 10월호

 

 

 

 

 

 

-- 작품 인용은 <지옥변>(양윤옥 옮김, 시공사)에 근거합니다. 일본 근현대 작가 중 제일 좋아하는 작가입니다. 최근에 새 번역본이 나와서 무척 반가웠지요^^; 

-- 아쿠다가와는 기존 텍스트(각종 설화 포함)를 새롭게 쓰는 데 재주가 있었던 것 같은데(어쩌면 이것만이 재주?!) 그만큼 각종 고전에 박식했다는 얘기이기도 할 겁니다.(위에 보들레르를 언급한 문장, 유명하죠!)  러시아 문학도 꽤 많이 읽은 것 같아요. '동화'로 소개되는 <거미줄>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중 그루셴카의 얘기에서 가져온 겁니다. 흔히 사소설 하면 다자이 오사무를 많이 떠올리겠지만, 저는 이 경우에도 아쿠다가와 쪽이 좀 더 잘 접수되더라고요.

-- 구로사와 아키라가 만든 <나생문>(1950)은 <나생문>의 틀 속에 <덤불 속>을 끼워 넣은 식으로 진행됩니다. 강도 역은 물론(!) 미후네 토시로 가 맡았지요. 오래 된 흑백 영화임에도 무척 재미있습니다. 하긴 재미로야 <7인의 사무라이>만할까마는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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뷰렛 2012-10-29 17: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쇼몽은 고전으로 인간심리를 잘나타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