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칸 드림의 실체:

바보로 죽을 것인가, 속물로 살 것인가

- 스콧 피츠제럴드, <위대한 개츠비>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가 던지는 여러 물음은 결국 하나로 요약된다. 개츠비는 왜 위대한가? 소설의 시점과 형식상 닉 캐러웨이의 시선을 따라갈 수밖에 없겠다. 그는 톰의 대학 동창이자 데이지의 먼 친척임에도 출신 성분(서부 출신으로서 출세를 위해 동부로 옴)과 내적인 성향에 있어 개츠비 쪽에 가깝다. 이런 그의 눈을 통해 보아도 개츠비는 알쏭달쏭한 인물이다. 가령 개츠비의 첫 고백을 보자.

 

하나님께 맹세코 진실을 말씀드리지요.” 그는 신의 처벌을 멈추게 하려는 듯 갑자기 오른손을 쳐들었다. “나는 중서부의 어떤 부잣집에서 태어났지요. 가족들은 모두 죽고 없습니다. 미국에서 자랐지만 교육은 옥스퍼드에서 받았어요. 선조 대대로 그곳에서 교육을 받아왔거든요. 집안 전통이죠.”(94-95)

 

이어, 가족의 죽음으로 거액의 유산을 상속받고 오래 전에 있었던 매우 슬픈 일을 잊으려고유럽을 떠돌아다니고 등. 닉조차 대번에 거짓말임을 알 수 있는 소리를 개츠비는 천연덕스레 늘어놓는다. 죄책감은커녕 모종의 불편함조차 느끼지 않는 모양이다. 한편 실제의 그는 이렇다. 서부의 가난한 노동자 출신으로서 아버지는 살아 있고(그의 말에 따르면 개츠비는 아비에게 새 집을 사줄 만큼 효자이다!) 종전 후 잠시 옥스퍼드에 머무른 적이 있고 귀국 후 조직 폭력업계의 거두 울프심과 손잡고 밀주 유통을 비롯한 여러 일을 통해 부를 축적하고 등. 간단히, ‘제임스 개츠제이 개츠비로 바뀌면서 거의 페이스오프에 가까운 성형과 신분 세탁이 행해진다. 이 과정의 중심축이 돈-물신(物神)이며 데이지는 그 상징이다.

 

그녀는 그가 난생처음으로 알게 된 멋진여자였다. 그는 숨겨진 다양한 능력을 발휘해 상류층 사람들과 만나긴 했지만 그들과의 사이에는 언제나 눈에 보이지 않는 가시철조망이 가로놓여 있었다. 그는 그녀가 몹시도 탐났다. 처음에는 캠프 테일러의 다른 장교들과 같이 그녀의 집에 놀러 갔지만 나중에는 혼자서 찾아갔다. 그에게는 놀라운 일이었다. 그렇게 아름다운 집에 들어가 보기는 처음이었다.(209)

 

 

데이지는 어느 각도에서 봐도 천상의 베아트리체와는 거리가 멀다. 개츠비는 그녀의 목소리는 돈으로 가득 차 있어요.”라고 말한다. 실상 목소리뿐만 아니라 그녀의 존재 자체가 돈 칠갑이다. “()가 가두어 보호하는 젊음과 신비, 그 많은 옷이 주는 신선함, 그리고 힘겹게 살아가는 가난한 사람들과는 동떨어진 곳에서 그녀가 안전하고 자랑스럽게 은처럼 빛을 발한다는 것.” 그녀에게 돈이란 뼛속까지 밴 부르주아 근성의 총체이다.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는 놈”, 즉 개츠비와 시카고 부호의 아들이자 예일대를 졸업한 톰 뷰캐넌의 차이는 당시 흑인과 백인의 차이만큼이나 어마어마하다. 따라서 그녀가 개츠비의 구애에(더 정확히 그의 화려한 저택과 무도회에!) 살짝 마음이 흔들리지만 결코 톰을 떠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것이 자유와 평등의 대륙인 아메리카의 실체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개츠비는 정녕 순수와 낭만의 화신인가. 가령 헤어진 지 5년이나 지난 시점에서 이미 유부녀가 된 옛 여자주변을 부나비처럼맴돌고 그녀의 남편까지 동석한 자리에서 어설프게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비상식적일뿐더러, 뷰캐넌 부부의 반응을 고려한다면 애처롭고 우스꽝스러운 행위이다. 그의 최후 역시 비극적이라고 하기엔 너무 어처구니없다. 이 경우에는 동정도 이래저래 톰의 희생양이 된 자동차 정비공 윌슨에게로 가는 것이 더 마땅하리라.

 

아무래도 개츠비는 그 정체가 드러날수록 신화가 아니라 희화가 된다. 속물들의 사회에 편입되기 위해, 큰 저택과 많은 옷과 가구를 소유하기 위해 어릴 적부터 생활계획표를 짜가며 아등바등, 애면글면 살았던, 심지어 어두운 일도 서슴지 않았던 바보! 이런 그를 닉은 다음과 같이 변호한다.

 

개츠비는 내가 드러내놓고 경멸해 마지않는 모든 것을 대변하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만약 개성이 일련의 성공적인 몸짓이라면 그는 뭔가 멋진 것을, 마치 1만 마일 밖에서 일어나는 지진을 감지하는 복잡한 기계와 연결되어 있기라도 한 것처럼 삶의 가능성에 예민한 감수성을 지니고 있었다. (중략) 그것은 희망에 대한 탁월한 재능이요, 다른 어떤 사람에게서도 일찍이 발견된 적 없고 앞으로도 다시는 발견할 수 없을 것 같은 낭만적인 민감성이었다. 아니, 결국 개츠비는 옳았다. 내가 잠시나마 인간의 짧은 슬픔이나 숨 가쁜 환희에 대해 흥미를 잃어버렸던 것은 개츠비를 희생물로 이용한 것들, 개츠비의 꿈이 지나간 자리에 떠도는 더러운 먼지 때문이었다.(11)

 

그럼에도 개츠비란 인물이 정녕 위대한지 어떤지는 모르겠다. 동시대의 다른 작가, 가령 헤밍웨이나 포크너와는 전혀 다른 무게감을 지닌 피츠제럴드가 위대한 작가인지 어떤지도 잘 모르겠다. 그러나 <위대한 개츠비>는 위대한 소설이다. 이 소설이 묘파해낸 우리 삶의 부나비 같은 풍경을 보라. 밤마다 개츠비의 저택을 장식하는 불빛과 재즈 소리, 이른바 개츠비 룩으로 단장한 미녀들의 현란한 춤, 무도회가 끝난 뒤 수북이 쌓이는 오렌지 껍질. 이것은 비단 1920년대(재즈의 시대!), 대공황 직전의 미국의 풍경만은 아니다. 멸망 직전의 소돔과 고모라처럼 우리는 무작정 소비하고 향유하며 무작정 어리석은 꿈에 젖는다. 이 질펀한 향연의 끝은 웨스트에그(신흥 부촌 - 개츠비의 저택)와 이스트에그(토착 부촌 - 뷰캐넌 부부의 저택) 사이, 재의 계곡이 아닐까.

 

 

-- 네이버캐스트

 

 

-- 미국소설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잘 알지도 못하거니와 (이런 경우에 자주 그렇듯!) 깊이가 없다는 (원래 편견이라는 것이 그렇지만, 근거 없는-_-;;) 편견까지 있습니다. 오랜만에 <위대한 개츠비>를 다시 읽었는데 정말 잘 쓴 소설이어서 놀랐습니다. 그럼에도, 그러니까 더더욱  정이 안 가더군요. (ㅠ.ㅠ)  속물스러움(!)의 문학화에 유달리 깊은 관심을 보인 러시아문학과 비교를 하게 되니 더 그런 것도 같고요. (그래서인지 악플이 잔뜩 달렸던 아픈 기억이 있습니다...ㅠ.ㅠ)

최근에는 헤밍웨이를 다시 읽을 기회가 있었는데(이것도 조만간 올리겠지만), 어쩜, 어릴 때의 감동이 거의 살아나질 않아 좀 울쩍했더랬지요. 여하튼 소설가로서는 헤밍웨이보다야 피츠제럴드가 한 수, 두 수 위인 것 같아요.  최근에 영화화되기도 한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도 재미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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