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와 시간, 그 부조리에 바치는 희비극:
“이 지랄은 이제 더는 못하겠다.”
- 사뮈엘 베케트(1906-1989), <고도를 기다리며>(1952년 출간, 1953년 초연) -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이하 「고도」)의 명성과 인기는 셰익스피어의 여느 희곡에 맞먹을 법하지만 실제 내용은 허망하기, 심지어 한심하기 그지없다. 1막, 어느 시골길, 고목(枯木) 같은 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고고(에스트라공)와 디디(블라디미르)가 차례로 나타나 고도를 기다린답시고 각종 시답잖은 놀이를 한다. 이어, 포조가 끈에 묶인 럭키를 앞세우고 등장한다. 이 둘이 퇴장하자 한 소년이 나타나 고도는 내일 올 것이라는 말을 전해주고 사라진다. 무대에는 고고와 디디만 남는다. 2막의 내용도 대략 비슷하다.
연극이 진행되는 내내 아무런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고도」가 초연된 1953년은 물론 지금에 와서도 제법 충격적이다. 통상 희곡의 사건은 인물-성격이 서로 부딪치는 와중에 발생하여 모종의 위기와 절정을 거쳐 파국(혹은 해피엔딩)을 맞이하는데, 그 원동력이 되는 것은 주인공-영웅(hero)의 의지와 욕망이다. 그러나 「고도」에는 마땅히 주인공도 없을뿐더러 주인공 비스름한 고고와 디디는 더 이상, 어떤 의미에서도 영웅이 아니다. 제각기 다른 이름과 그 나름의 차별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음에도(가령 고고는 곧잘 구두를 갖고 놀고 자신을 예수에 비유한다) 서로 잘 구분되지도 않는다. 일견 주인과 노예로 엮인 포조와 럭키는 여차하면 전복될 것 같은 괴상한 주종 관계를 보여준다. 1막과 2막의 말미에 잠시 등장하는 소년(들)은 형제지간인지 동일인인지 끝까지 헷갈린다. 르네상스 이래 지난 세기의 문학이 이룩한 ‘나-자아’의 신화는 이렇게 무너진다.
시공간 역시 특이하다. 어딘지 불명확한 장소에 시간은 정지돼 있거나 아니면 정반대로 무한대로 흘러간다. 등장인물 중 누구도 객관적인 시간관념을 갖고 있지 않다. 고고와 디디는 오랜 시간을 함께하며 수시로 만남과 이별을 반복한 것 같으나 구체적인 정황을 기억하지 못하거나 그러지 않는다. 사정은 럭키와 포조, 소년도 마찬가지. 등신 같은 떠돌이 어른 네 명은 더 늙을 것도 없음에도 시종일관 더 늙어가는 반면, 소년은 시간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기에(그래서 더 소름끼친다) 아예 자라지도 못한다. 시계와 달력이 없는 공간이랄까. 여기서 ‘고도’는 시간의 다른 이름인지도 모르겠다. 존재와 시간은 기다림의 형식으로 서로에게 손발이 꽁꽁 묶여 있다. 이 경우 기다림은 삶의 동의어로서, 행위(순간)라기보다는 어떤 양태(지속)이다. 고고와 디디는 오지 않는 ‘고도’ 때문에, 더 정확히 ‘고도’가 오지 않기 때문에 존재한다. 태어남과 죽음 사이를 흐르며 모든 것을 느긋하게 해치워버리는 저 무자비한 시간을 두고 포조는 절규한다. “어느 날과 같은 어느 날 저놈(럭키)은 벙어리가 되고 난 장님이 된 거요. 그리고 어느 날엔가는 우리는 귀머거리가 될 테고. 어느 날 우리는 태어났고, 어느 날 우리는 죽을 거요.(중략) 여자들은 무덤 위에 걸터앉아 아이를 낳는 거지. 해가 잠깐 비추다간 곧 다시 밤이 오는 거요.”(150쪽) 그러니 디디의 말마따나 “그 긴 시간 동안 우린 온갖 짓거리를 다 해가며 시간을 메울 수밖에 없다.”(134쪽)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이래 시간과 공간과 행동의 엄정한 일치는 희곡(특히, 비극)의 근간을 이루어왔다. 그러나 체호프를 기점으로 극 장르는 각종 의미론적 요소를 지워가는 쪽으로 진화하다가 사르트르와 카뮈의 실존주의 극을 거쳐 베케트의 이른바 부조리극에 이르면 인물 아닌 인물과 사건 아닌 사건으로 한 편의 극이 완성된다.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사유의 틀을 바꿔놓은 대사건이다. 「고도」는 한 불문학자의 표현대로 “사물과 육체를, 언어와 정신을 차례로 소멸시켜 나가는 이 도저한 절망의 상상력”(이인성)을 통해 불확정성과 상대성의 원칙, 존재와 세계의 부조리를 비단 내용이 아니라 형식 그 자체로 담아낸다.(마틴 에슬린, <부조리극>) 사실성의 환상을 창조하기 위해 기존의 연극이 고수해온 각종 조건성과 인과율이 사라지자 오히려 무대는 무대 바깥, 실제 우리의 삶과 놀랍도록 닮았다. 2막이 끝날 무렵 고고는 “이 지랄은 이제 더는 못하겠다.”라고 말하고 디디는 “다들 하는 소리지.”(158쪽)라고 응수한다. 결국 둘은 가자는 말만 할 뿐, 럭키가 자신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지 못하듯(혹은 그러지 않듯) 여전히 움직이지 않는다. 이 황량한 정체(停滯)와 불모의 세계에서 오직 나무만 1막에서 2막을 거치면서 이파리 몇 장을 달고 있다. 기적과 구원의 상징인가, 아니면 그저 허망한 디테일인가. 글쎄다. ‘고도’가 누구이며 무엇을 의미하느냐는 물음에도 작가는 “내가 그걸 알았더라면 작품 속에 썼을 것”이라고 대답했다지 않는가.
「고도」를 발표했을 때 베케트는 이미 세 편의 장편을 내놓은 소설가, 특히 해체적이고 실험적인 문체로 유명한 <몰로이>의 작가였다. 은둔과 방랑의 삶 속에서 영어와 프랑스어를, 소설과 희곡을 넘나들며 문학에 매진했으며 한때 대학 강단에 서기도 했던 이 아일랜드 작가에게 「고도」는 정녕 고고와 디디의 당근(순무) 놀이, 모자 놀이, 목매달기 놀이처럼, 또 럭키의 썰렁한 춤과 황당한 ‘생각’ 놀이처럼 “이 지랄”, 일종의 호작질-손장난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애초에 프랑스어로 쓴 이 작품을 영어로 다시 쓰면서 그는 “두 막짜리 희비극”이라는 부제를 달았다. 베케트의 개인사든(가령 1938년 파리에서 길을 걷다가 어느 청년의 칼에 찔려 죽을 뻔한 일) 역사든(2차 세계 대전) 진정한 비극은 비극의 진짜 원인을 찾을 수 없다는 데, 어쩌면 그것은 그 어디에도 없다는 데 있다. 포조는 자기와 럭키의 처지를 두고 “팔자소관” 운운한다. 이 세상의 눈물과 웃음의 총합은 동일하다는 식의 말도 덧붙인다. 과연 웃지 않고서야 이 당연한 부조리를 어떻게 견뎌내랴.
-- 책&
-- <산울림>의 <고도...> 공연을 보지 못해서 늘 죄지은(?) 느낌인데요, 유투브 검색하다가 이언 맥컬린이 출연하는 공연의 일부를 보고 즐거웠습니다. 링크할 줄 몰라서(-_-;;) 사진을 긁어봤습니다. 후줄근한 늙은이들이 찐따 같이(!), 등신 같이(!) 춤추고 웃고 하는 장면이 진짜 웃깁니다. 우울할 때 보면서 한껏 웃고 그렇게 웃으면서 우울해할 수 있는 장면이랄까요.
-- 베케트의 작품, 특히 <고도를 기다리며>를 읽을 때 가장 먼저 생각하는 작가는 위에도 인용했지만 소설가 이인성입니다. 그 다음은 소설가 정영문인데요, 베케트에 대한 그의 사랑(?!)은 유명하죠(물론 이 문장은 정말로 정영문스럽지 않습니다만-_-;;). 올해 동인문학상을 탄 <어떤 작위의 세계>에서도 여전히(더 많이?) 베케트 냄새가 나더군요. 베케트와 함께 일독을 권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