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은 변할 뿐, 없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다:

무한한 생성과 순환으로 가득 찬 아름다운 세계

- 오비디우스, <변신 이야기>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는 천지 창조에서 시작해 신과 인간이 빚어내는 온갖 사건, 특히 트로이 전쟁을 거쳐 트로이아의 후예인 아이네이아스의 로마 제국 건국 신화를 들려준 다음 카에사르(카이사르)의 죽음과 승천으로 끝난다.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유피테르(제우스)에 비유되기도 한다. “신들이 유피테르에게 보내는 사랑은, 카에사르 사후(死後), 로마의 신민(臣民)들이 아우구스투스 황제께 보낸 사랑에 못지않았다.” 그러나 이런 정치적인 함의에도 변신 이야기는 통상적인 건국 서사시와는 사뭇 다르다. 오비디우스가 아우구스투스 황제에 의해 추방된 이유도 그 스스로 밝힌 바에 따르면 (자신의 실수와 더불어) ‘때문이었다. 실상 이 두툼한 책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결사(結辭)를 보면 신-황제에 대한 은근한 도전이, 적어도 시인 특유의 오만함이 엿보이기도 한다.

 

이제 내 일은 끝났다.

유피테르 대신의 분노도, 불길도, 칼도, 탐욕스러운 세월도 소멸시킬 수 없는 나의 일은 이제 끝났다.

내 육체밖에는 앗아 가지 못할 운명의 날은 언제든 나를 찾아와, 언제 끝날지 모르는 내 이승의 삶을 앗아 갈 것이다.

그러나 육체보다 귀한 내 영혼은 죽지 않고 별 위로 날아오를 것이며 내 이름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로마가 정복하는 땅이면 그 땅이 어느 땅이건, 백성들은 내 시를 읽을 것이다.

시인의 예감이 그르지 않다면 단언하거니와, 명성을 통하여 불사(不死)를 얻은 나는 영원히 살 것이다.

 

오비디우스의 신화적 공간에서 신은 우선 인간을 둘러싼 제반 현상, 무엇보다도 자연의 의인화이다. 자연 속 만물이 두루 평등하듯, 자연-신 사이에 권력적 위계질서가 설정되어 있긴 하되 각자 자기만의 고유한, 신성불가침의 영역을 갖는다. 가령 제 아무리 유피테르라고 할지라도 플루토(하데스)에게 납치당한 자신의 딸 프로세르피나(페르세포네)를 무작정 빼 올 수는 없다. 유피테르의 말을 빌면 (플루토)는 이 세상을 상속받을 때 제비를 잘못 뽑아 이 천궁을 나에게 양보하고 저승 왕이 된 것뿐이므로, 서로의 관할 영역은 존중되어야 한다. 신들의 세계에서, 한 신이 매긴 죗값을 다른 신이 벗길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런 원칙하에 신들의 활약이 가장 두드러지는 분야는 아무래도 생산이다. 변신 이야기의 대부분이 사랑을 다루고 있음은 익히 알려져 있거니와 이 무수한 이야기들을 엮어 주는 요소인 변신/둔갑역시 대부분 사랑의 쟁취 혹은 회피, 그와 관련된 응징이나 복수의 과정에서 발생한다. 이 경우에도 가장 역동적인 신은 물론 유피테르인데 그의 애정 행각은 사랑을 성취하려는 마음과 품위를 지키려는 마음은 원래 조화도 양립도 불가능한 법임을 여실히 보여 준다. 비단 애욕만이 아니다. 유노(헤라)의 정조 관념과 가정 수호의 의지는 때때로 지나친 질투와 잔혹함을, 베누스(아프로디테)의 아름다움과 자유분방함은 허영과 방탕을 낳는다. 디아나(아르테미스)는 목욕 중인 자신의 알몸을 보았다는 이유로 죄가 있다면 길 잃은 죄밖에 없었던 악타이온을 잔인하게 응징한다. 이쯤 되면 처녀성과 신성에 대한 그녀의 집착은 거의 병리적인 수준이다. 말하자면 오비디우스가 창조한 신들은 자연의 은유인 만큼이나 인간의 은유이다. 그들은 인간처럼 오류를 범하고 쉽사리 감정의 격동에 휩싸이고 항상 보상과 대가를 바란다. 다소 역설적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신에 대한 도전과 불경은 최고의 죄악으로 다스려질 수밖에 없다.

 

감히 신과 겨루려 했거나 겨룬  인간 중 단연코 눈에 뜨이는 것은 아라크네이다. 베 짜는 재주로 이름을 날리던 그녀의 오만함이 도를 넘어서자 미네르바가 친히 찾아와 조용히 그녀를 타이른다. 그럼에도 그녀는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 결국 신과 인간 사이의 한판 승부가 펼쳐지는데, 그들이 자신의 베에 그려 넣는 그림이 시사적이다. 미네르바는 12신을 중심으로 신의 권능을 강조하는 반면 아라크네는 유피테르와 여러 신들의 비행을 폭로하고 조롱한다. 하지만 여신이 분노한 더 큰 이유는 아라크네가 짠 베가 흠잡을 데 없을 만큼 완벽했기 때문이다. 미네르바는 그 베를 찢는 걸로도 부족해, 그제야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자살하려는 아라크네를 거미로 만들어 버린다. 미네르바의 행위에는 분명히 옹졸한 면이 있다. 그러나 신-자연과 인간이 하나의 세계 속에 공존하는 이상, 이 역시 불가피한 일이다. 헤브라이즘의 세계라면 애초에 신이 인간과 솜씨를 겨누는 일 자체가 없었을 터이다. 변신 이야기의 저변에는 헬레니즘 특유의 자유롭고 건강한 민주주의가 깔려 있으며, ‘변신이란 자연의 구성원인 온갖 생명 간에 무한한 생성과 경계 이월, 활기찬 낙관주의의 표현이다. 15장에 느닷없이 삽입된 퓌타고라스의 가르침을 보자.

 

모든 것은 변할 뿐입니다. 없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영혼은 이리저리 방황하다가 알맞은 형상이 있으면 거기에 깃들입니다. 짐승의 육체에 있다가 인간의 육체에 깃들이기도 하는 것이고, 인간의 육체에 있다가 짐승의 육체에 깃들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돌고 돌 뿐, 사라지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말랑말랑한 밀랍을 보십시오. 이 밀랍으로 새로운 형태를 만들면 거기에는 그 전의 형태가 남지 않을뿐더러, 그 전의 형태로 되돌릴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모양만 변했을 뿐, 밀랍은 여전히 밀랍입니다. 이와 같습니다. 영혼은 어디에 가든 처음의 영혼 그대롭니다. 다만 다른 형상에 자리를 잡았을 뿐입니다.

 

세계는 종말론이 얘기하듯  시작에서 끝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계절의 흐름처럼 끊임없이 순환한다. 따라서 “<태어남>이라는 말은, 하나의 물상이 원래의 형상을 버리고 새 형상을 취한다는 뜻이고 “<죽음>이라는 말은, 그 형상대로 있기를 그만둔다는 말일 뿐, 이것이 변하여 저것이 되고 저것이 변하여 이것이 될지언정 그 합()은 변하지 않는다. 이런 믿음은 무자비한 자연에 대한 경외감과 공포, 인간 개개인의 생로병사에 대한 허무감에서 비롯됐을 터이다. 하지만 과학이 이토록 발전했음에도 자연의 힘, 탄생과 죽음의 신비 앞에서 우리는 여전히 전율한다. 이것이 자연-신과 인간이 한데 어우러져 생명의 기운을 한껏 뽐내는 변신 이야기를 읽는 이유이기도 하다.

 

-- 네이버캐스트

 

 

(티치아노가 그린 유명한 그림이죠? 후덜덜-_-하는 그림입니다!)

 

-- 분량상 쓰지 못한 여러 얘기 중 지금 언뜻 생각나는 것은 아폴론과 겨루었다가 산 채로 살 가죽이 벗기는 벌을 받은(정녕 희랍 신화는 헨타이, 하드고어, 하드코어입니다 -_-;;) 마르시아스입니다. 예술은 창조이고 창조는 신의 영역인데, 그것을 넘본다는 것 자체가 반역인 셈이고  창조-창작의 고통은 불가피하겠지요. 산고처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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