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누구인가에서 는 누구인가'로:

앎을 향한 인간의 열망, 자기 단죄의 숭고한 비극

- 소포클레스, <오이디푸스 왕>

 

 

 

 

 

 

 

 

오이디푸스라는 이름이 세간에 널리 알려진 것은 아무래도 프로이트 덕분이겠지만,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함의와 소포클레스의 주인공이 실제로 겪는 비극은 사뭇 다르다. 오이디푸스는 아비를 증오하고 어미를 취하려는 욕망을 품은 자가 아니라 오히려 그런 내용을 담은 섬뜩한 신탁을 피하기 위해 부단히 애썼으나 그 희생양이 됐던 자이다. 실상 막이 열릴 때 이미 사건-죄악은 종료돼 있다. 그는 테바이의 왕이며 왕비 이오카스테와의 사이에 아들 둘과 딸 둘을 두고 있다. 문제는 나라의 환란을 해결하려는 과정에서 불의의 사고로 비명횡사한 선왕 라이오스 얘기를 들으면서 시작된다. , 그의 행동의 시발점은 라이오스를 죽인 자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이다. “그가 전에 가졌던 왕권도, 그의 침상과 씨 뿌릴 아내도 이어받았으니 (중략) 그러니 나는 이것을 위해, 마치 내 아버지의 일인 양 / 싸워 나갈 것이고, 그 살인을 저지른 자를 / 잡고자 찾으며 모든 곳을 뒤질 것이오.”(36) 극이 진행되면서 설마 그 살인자가 나인가?”라는 물음이 대두되고 그것은 이내 나는 과연 누구인가?”라는 치명적인 물음을 낳는다. 오이디푸스가 라이오스의 살인자를 밝히는 과정은 곧, 그가 자신의 정체와 더불어 신탁의 실현 여부를 알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테이레시아스: (중략) 내 그대에게 이르노니, 그대가 진작부터 라이오스의 / 살해자라 선언하고 위협하며 찾는 / 그 사람이 바로 여기에 있소. / 그는 명목상으로는 이방 출신의 거주자이지만, 나중에는 / 태생부터 테바이 사람임이 드러날 테고, 그 행운에 / 즐거워하지 않을 것이오. 그는 눈 뜬 자에서 장님이 되고, / 부자에서 거지가 되어 이국 땅을 향해 / 지팡이로 앞을 더듬으며 가게 될 것이오. / 또 그는 자기 자식들의 형제이자 / 아버지로서 함께 살고 있으며, 자신을 낳은 / 여인의 아들이자 남편이고, 자기 아버지와 / 함께 씨 뿌린 자이자 그의 살해자임이 드러날 것이오.(48-49)

 

오이디푸스는 예언자의 말이 너무나 두려워 그것을 처남(동시에 외숙부이다) 크레온의 정치적 음모로 돌린다. 하지만 이오카스테, 코린토스의 사자, 라이오스의 갓난 아들의 처리를 맡았던 목부(牧夫) 등의 입을 통해 하나하나 축적되는 말들은 모두 동일한 진실을 겨냥한다. 죄악을 피하고자 행했던 일들이 역설적으로 그 죄악의 완성에 기여한 셈이다.

 

오이디푸스: 아아, 아아, 모든 것이 이뤄질 수밖에 없었구나, 명백하게! / , 빛이여, 이제 내가 너를 보는 게 마지막 되기를! / 태어나서는 안 될 사람들에게서 태어나서, 어울려서는 안 될 / 사람들과 어울렸고, 죽여서는 안 될 사람들을 죽인 자라는 게 드러났으니!(95-96)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은 척 보기에도 아리스토텔레스의 비극론에 상당히 잘 들어맞는다. ‘무지에서 으로의 이월, ‘발견과 급전’, 무엇보다도 그 과정에서 야기되는 연민과 공포의 크기는 실로 어마어마하다. 더욱이 그는 악덕과 악행 때문이 아니라 어떤 과오 때문에 불행에 빠지는 사람”, 서사시의 영웅과는 달리 덕과 정의감이 특별히 뛰어나지는않으나 적어도 보통보다 더 나은 고상한 인물”, 간단히 인간의 전형이다. , 헤라클레스나 아킬레우스 같은 신의 아들은 아니었으나, 스핑크스를 무찌른 영웅이자 나라의 역병을 퇴치하기 위해 노력한 훌륭한 왕이며 왕비의 옷에 브로치를 꽂아주곤 한 자상한 남편이자 파국 앞에서 자식들의 미래를 걱정하는 인자한 아버지이다.

 

 

 

 

 

 

 

 

이런 그의 운명을 행복에서 불행으로 바꿔놓은 과오란 어떤 것인가. 세 갈래 길에서 마주친 행인을 말다툼 끝에 살해한 것과 미망인이 된 왕비를 그 나라와 함께 취한 것은 모두 무지에서 비롯됐다. 아비인 줄 모르고 살해했으며 역시 어미인 줄 모르고 동침했다. 그러니까 오이디푸스의 과오는 그가 인간인 이상 도대체 피해갈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신탁이 예언한 과오를 피하기 위해 고향과 부모를 떠나 오랜 세월 방랑의 길을 걸었으나, 결국 그 운명의 덫에 여지없이, 멋지게 걸려든 셈이다.

 

코로스: , 조국 테바이의 거주자들이여, 보라, 이 사람이 오이디푸스로다. / 그는 그 유명한 수수께끼를 알았고, 가장 강한 자였으니 / 시민들 중 그의 행운을 부러움으로 바라보지 않은 자 누구였던가? / 하지만 보라, 그가 무서운 재난의 얼마나 큰 파도 속으로 쓸려 들어갔는지. / 그러니 필멸의 인간은 저 마지막 날을 보려고 / 기다리는 동안에는 누구도 행복하다 할 수 없도다. / 아무 고통도 겪지 않고서 삶의 경계를 넘어서기 전에는.

 

과연 이 비극의 메시지는 운명 혹은 신 앞에서 겸손할 것을 촉구하는 것인가. 어떻든 두 눈에 피를 줄줄 흘리며 무대 위에 나타난 그의 모습에(물론 그가 눈을 찌르는 사건은 이오카스테의 자살처럼 무대 뒤에서 일어난다) 우리는 숭고의 절정을 맛본다. 죄악을 비껴가려는 인간의 처절한 몸부림, 그것을 무참히 조롱하는 변덕스럽고 야비한 운명의 테러, 그럴수록 더욱더 거세지는 앎과 자유를 향한 열망, 끝으로 크나큰 죄악 앞에서 행해진 잔혹한 자기 단죄. 인간 삶의 이 비극적인 아이러니 앞에서 연민과 고통을, 나아가 카타르시스를 느끼지 않을 수 있으랴.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등 3대 비극작가들이 활동하던 무렵, 그리스는 페르시아 전쟁의 승리 이후에 찾아온 태평성대를 구가하고 있었다. 가장 아름다운 시절에 가장 참혹한, 나아가 숭고한 비극이 쓰이고 공연됐던 것이다. 또한 소포클레스는 걸출한 비극작가였지만 90년에 육박하는 그의 인생은 상당히 순탄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 때문일까, 말년에 이르러 그는 오이디푸스 왕의 후일담을 담은 <콜로누스의 오이디푸스>를 쓴다. 저주와 파멸이 아닌, 구원과 안식의 신탁을 받아 영면에 이르게 되는 오이디푸스 왕의 모습 속에 은근히 자신의 노년을 투영한 것일까.

 

 

-- 네이버캐스트

 

 

-- 요즘 '운칠기삼'이라는 말에 대해 자주 생각합니다. '운'이 '7', '기'가 '3'. 삶의 여러 국면에서 나의 재주와 노력이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될까. 개인사든 역사든 우연론과 인과론 중 어떤 것이 더 의미가 있을까. 뭐, 이런 것들인데요, 오이디푸스의 비극이 얘기하는 것도 결국은 '운명'과 '인간'의 싸움/화해니까요.  지면이 부족해 많이 쓰지 못했는데, 이 점에서 <콜로누스의 오이디푸스>가 인상적이었습니다. 늙은 오이디푸스 옆에는 효녀 안티고네가 붙어 있는데(역시 딸이 대세?^^;) 노년은 썩 나쁘지 않은 셈이지요. 운명의 위로랄까요. 뭐, 이런 식으로 읽는다함은 그만큼 늙었다는 것이기도 할 테고요..-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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