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처럼의 비극: 바보로 죽을 것인가, 속물로 살아남을 것인가

- 플로베르, <마담 보바리>(1857)

 

 

 

<마담 보바리>는 시골 의사의 아내인 엠마 보바리의 불륜과 파멸을 그린 소설이지만 소설에 관한 소설이기도 하다. 끊임없이 욕망을 생산해내는 책(소설)과 그 욕망-책을 끊임없이 배반하는 삶의 충돌, 그것을 엠마의 인생이 보여준다. 수도원에서 성장기를 보내며 소설을 많이 읽은 탓에 항상 소설처럼!’을 꿈꾸는 그녀에게 현실은 따분하기만 하다. 가령, 결혼 전에는 사랑을 느낀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결혼하고 나자 전혀 행복하지 않다. 오히려 소리 없는 거미와도 같은 권태가 그녀의 마음 구석구석의 그늘 속에 거미줄을 치고 있었다.”(70) 이런 그녀 앞에 레옹이 나타나, 지금껏 비어 있던 욕망의 빈 칸을 채워준다. 그를 직접 만나는 것보다는 고독 속에서 그의 모습을 마음껏 그려보는 것이 더 즐겁다.

 

 

 

 

 

 

 

 

 

 

 

 

 

 

 

로돌프의 경우도 비슷하다. 명실상부한 애인이 생기자 그녀는 옛날에 읽었던 소설 속의 여주인공들을 떠올리며 그녀 자신이 그토록 선망하던 사랑에 빠진 여자의 전형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설욕의 만족감”(237)마저 맛본다. 속된 현실과 권태를 참아낸 보상을 톡톡히 받아낸 셈이다. 이 낭만적 사랑에 탐닉하면서 그녀는 점점 더 소설의 여주인공 같은 자세를 취한다. 로돌프에게 버림받았을 때는 기만과 배반으로 점철된 사랑의 비극 때문에 파멸한 여주인공의 역을 맡는다. 종부성사까지 준비하고 신심을 불태우기도 한다. 3년 뒤, ‘파리 물을 먹고 돌아온 레옹이 파리에서는 흔히 있는 일인걸요!”(354)라는 천연덕스러운 말로 그녀를 유혹하고, 그녀는 기꺼이 거기에 응한다. 하지만 소설과 몽상 속에서는 낭만적 사랑의 정점이었던 불륜이 현실 속에서 반복과 지속을 거듭하자 결혼생활 못지않은 진부함을 지니게 된다. 권태와 환멸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엠마의 파국에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한 것은 굳이 말하자면 연애가 아니다. ‘소설처럼살기 위해 그녀는 몸치장에 지나친 관심을 보이는 반면 살림살이와 금전문제에는 무관심하다. 낭만적인 소설에는 돈 얘기가 나오지 않는다. 책과 몽상 속의 세계는 너무나 시적인데 실제 현실은 너무나 속되고 천박하달까. 이렇게 현실을 외면하다가 엠마는 요즘 식으로 말해 카드빚 때문에 파산하고 만다. 사태를 수습하고자 로돌프를 찾아가 때 아닌 사랑 타령을 늘어놓고 돈을 구걸하는(“실은 저 파산했어요, 로돌프! 제게 삼천 프랑만 꿔주세요!”(448)) 장면은 거의 참담하다. 음독자살과 그 과정(특히 수의를 입힐 때 시체가 된 상태에서 구토를 하는 장면)은 어떠한가. 모든 것이 엠마의 욕망과 몽상을 모독하고 조롱한다. 혹시 그녀가 다른 남자와 결혼했거나 다른 처지에 놓였더라면 사정이 좀 달랐을까? 물론 아니다. 욕망은 그 본질상 만족을 모르기 때문이다.

 

 

 

 

 

 

 

 

 

 

 

 

 

<마담 보바리>는 잡지에 연재될 당시부터 물의를 일으켰으며 미풍양속을 해친다는 이유로 작가와 출판업자, 편집자가 모두 법정에 섰을 정도였다. 자연스레 보바리 보인의 모델이 누구냐는 질문이 나왔을 법하다. 그때 플로베르가 내놓은 답이 마담 보바리, 그것은 바로 나다!”라는 저 유명한 말이다. 플로베르와 엠마 사이에 어떤 유사성이 있느냐는 차치하더라도 어떻든 그는 저 속된, 따라서 보편적인 모방 욕망의 근원과 귀결을 속속들이 해부하는 데 성공했다. 의사의 아들로서 메스 대신 펜을 손에 든 외과의-소설가였던 셈이다.

 

 

 

 

 

 

 

 

 

 

 

 

 

 

<마담 보바리>을 쓸 때 그는 스스로를 손등에 납덩어리를 얹어놓고 피아노를 치는 사람”(1852726일 루이즈 콜레에게 보낸 편지)에 비유했다. 그 살인적인 고통을 5년 동안 감내했다. 대체로 플로베르는 동굴 속에 칩거한 고독한 ’, 크루아세의 은둔자를 자처하며 고행하는 수도승과 같은 자세로 문학함을 실천했다. ‘일물일어설의 창시자답게 비단 무엇이 아니라 무엇을 어떻게쓰느냐, 문체의 문제에 어쩌면 최초로 골몰한 작가이기도 하다.

 

(아무리 봐도 블독이에요 ㅎㅎ)

 

으젠느 지로가 그린 초상화 속의 플로베르는 머리가 훌러덩 벗겨지고 눈은 반쯤 풀려 있으며 전반적인 생김새는 불도그를 닮았다. 덧붙여 183센티의 거구였던 그는 간질병 환자였거나 적어도 간질발작으로 추정되는 신경 발작에 시달렸다. 이런 그를 두고서, 말년에 두툼한 플로베르 전기(<집안의 백치>)를 썼던 사르트르가 남긴 말이 인상적이다. “그는 내 마음에 들지도 않고 우스꽝스럽지만, 그러나 <마담 보바리>를 썼다. 내 관심을 끈 것은 뚱뚱하고 키가 큰 그 둔한 인간과 그의 그 걸작 사이의 대조였다.”(사르트르, 대담)

 

과연 남성우월주의에 빠진, 오만하고 방탕한(혹은 그런 척한) 독신자를 좋아하기는 쉽지 않다. 한편 마담 보바리라는 제목이 붙은 이 소설은 샤를르의 어린 시절로 시작해서 약제사 오메에 관한 문장(“그는 이제 막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503))으로 끝난다. 이렇듯 바보들’(결국 죽는다)속물들’(결국 살아남는다)만 등장하는 <마담 보바리>를 좋아하기는 더 쉽지 않다. 그러나 낭만적 거짓의 허울을 벗겨내고 그 밑에 감춰진 소설적 진실을 보여준 이 작품이 소설의 교과서가 되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 <책앤>

 

--  말미에 쓴 대로 소설가 지망생(^^;)은 꼭 탐독해야 하는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톨스토이도 <안나 카레니나> 쓰기 전에 이 책을 읽었더랬죠.) 소설이 안 써질 때면  재능의 부재가 아닌 노력의 부족을 탓하라!, 뭐, 이런 생각하며 떠올리는 작가입니다...^^;

 

위에 이미지를 가져다 놓았지만, 이자벨 위페르 주연의 <보바리>,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보바리의 삶이 얼마나 '연극적'(!)인지를 무척 잘 표현했던 것 같아요. 겸사겸사, <레이스 뜨는 여자>, <피아니스트> 등 (그녀와 동갑인 이자벨 아자니의 미모가 그렇듯 ^^;) 그녀의 매력과 연기력에 대해서는 굳이 말이 필요 없을 터. <브론테 자매>(?)인가 하는 영화에서는 이자벨 아자니가 에밀리 역을, 이자벨 위페르가 앤 역을 맡았는데요... 흠.

 

 

전설 같은 프랑스 여배우들을 한 자리에서 다 볼 있는 이런 영화가 있었죠...^^;  

 

한편, 러시아 소설 판 <보바리 부인>은 (역시나 불륜을 소재로한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보다는 ^^;) 체호프의 단편 <베짱이>인 것 같습니다. 아참, 이것도 불륜 얘기이긴 하네요.

 


댓글(2)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김병현 2013-03-08 0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선생님 안녕하세요 예전 서울대 러시아문학의 이해 수강생입니다.

방금전 보바리 부인을 다 읽고 감상문을 써보려고 검색하다가 선생님 글을 발견하였습니다.

이자벨 위페르의 '마담 보바리'를 한 번 봐야겠네요^^

2013-03-08 19: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위대한 순간’, 그 이후의 삶

- 톨스토이, <안나 카레니나>

 

 

 

러시아의 고관 부인 안나 카레니나는 가정교사와 불륜 행각을 벌이다 발각된 오빠의 집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모스크바에 온다. 오빠와 올케 사이는 용케 봉합해놓지만, 정작 그녀 자신이 그날 기차역에서 만난 젊은 장교 브론스키에게 모종의 끌림을 느낀다. 당황한 그녀는 도망치듯 예정보다 빨리 페테르부르크로 떠나는데 도중에 브론스키가 그녀의 뒤를 좇아 같은 기차에 탔음을 알게 된다. 종착역, 마중을 나와 있는 남편 카레닌을 보자 , 어쩜! 저이의 귀는 어째서 저렇게 생긴 걸까?’(1, 229)라는 생각이 든다. 결혼한 지 거의 10년이 됐건만 왜 이제 와서 남편의 귀가 별안간 못생겨 보인 걸까. 말하자면 운명의 테러와 같은 열정 때문에, 지금껏 아름답고 정숙한 귀부인이자 다정다감한 어머니로 살아온 안나의 삶에 치명적인 균열이 생긴다.

 

 

 

 

 

 

 

 

 

 

 

 

 

8부로 이루어진 <안나 카레니나>는 이렇게 시작하지만 이 이 두툼한 소설의 내용을 요약하기는 쉽지 않다. 제목 그대로 안나 카레니나의 인생 역정, 즉 사회의 통념과 편견에 맞서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면서까지 사랑을 지키고자 했던 한 여자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이기도 하다. “난 더 이상 자신을 속일 수 없다는 걸 깨달았어. 난 살아 있는 여자야.”(2, 122) 그녀에게 있어 사랑은 삶의 동의어이다. 그것을 지키기 위해 그녀는 자신을 휘감고 옥죄는 거짓과 기만의 거미줄을 찢어버린다. 결국 그 대가로 그녀는 목숨을 내놓아야 했다.

 

 

 

 

 

 

 

 

 

 

 

 

 

 

 

 

 

 

안나의 열정이 소설의 중심축을 형성함에도 작가의 주된 관심사가 거기에 있는 것 같지는 않다. 톨스토이는 사랑과 연애, 심지어 결혼 자체도 아닌, 그 모든 것 이후에 오는 생활의 속성을 거시적이면서도 세밀하게 안팎에서 묘파해낸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제각각의 불행을 안고 있다.”(1, 13) 이렇게 시작하는 <안나 카레니나>는 무엇보다도 가정 소설이며 사회 소설이며, 이른바 위대한 순간’(카타르시스의 순간)보다 그 이후의 삶을 문제 삼는다.

 

 

 

 

안나가 브론스키의 아이를 출산 직후 연출되는 장면을 보자. 죽음을 예감한 그녀는 남편 앞에서 회개하고 연민에 사로잡힌 카레닌은 부정한 아내와 그녀의 정부를 너그럽게 용서한다. 그러나 거국적인 화해로 점철된 위대한 순간은 그야말로 순간일 뿐, 그 이후 인물들은 이전보다 더 묵직한 일상의 시간을 살아내야 한다. 진정한 공포는 극적인 파국의 순간이 아니라 그 이후에 찾아오는, 철저히 관성의 법칙에 지배되는 저 생활의 무게에서 비롯된다. 다른 한편, 주인공의 자살과 살아남은 자들의 슬픔에도 불구하고 총체로서의 삶은 지속된다. 더욱이 그 삶이란 레빈과 키티의 결혼생활이 보여주듯 지극히 보잘것없고 사소한 것으로 가득 차 있다.

 

 

 

소설의 맨 앞으로 돌아가자. 원수 갚는 것은 내가 할 일이니, 내가 갚겠다.” <안나 카레니나>의 제사이다. 불륜의 주체였던 안나는 물론이거니와 각기 다양한 방식으로 그녀를 죽음에 이르게 한 모든 이들에 대한 심판을 인간의 차원이 아닌 더 높은 심급으로 이월시키려는 작가의 의도가 엿보인다. 레빈의 형의 말대로 심판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 아니다. 이 지점에서 <안나 카레니나>는 간음을 소재로 죄와 벌, 타락과 구원의 문제를 다룬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소설로 거듭난다.

 

그러나 실제 소설 속에서는 기독교적 신이 형상적으로 부각되지도 않거니와 오히려 이신론(理神論)의 세계관이 지배적이다. 가령 안나는 무섭게 생긴 한 농부가 침실 한 구석에서 열심히 무슨 일을 하며 프랑스어로 뭐라고 읊조리는 것 같은 꿈을 꾼다. 자살하기 전날 밤에도 거의 비슷한 꿈을 꾸고, 자살하는 순간에도 명멸하는 그녀의 의식의 한가운데로 그 농부가 떠오른다. 그의 손에 쥐어진 철은 안나가 브론스키를 처음 만난 순간 한 역무원의 목숨을 앗아간 기차-철로의 상징이며, 그것이 계속 그녀의 무의식을 장악하다가 그녀를 달려오는 기차 밑으로 던져넣은 것은 아닐까. 이런 가정이 유물론의 산물이든 미신의 산물이든 어떻든 인간 개개인의 삶과 세계의 흐름을 관장하는 어떤 거대한 힘(때로는 자연이라 불리는)이 있는 것이며 아무리 위대한 순간도 그것에 압도당할 수밖에 없다.

 

 

 

 

 

 

 

 

 

 

 

톨스토이의 이름 앞에는 흔히 러시아의 대문호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실제로 그의 소설은 19세기 러시아 귀족 사회의 세태와 풍습을 꼼꼼하고 치밀하게 담아낸 백과사전일뿐더러 러시아문학 특유의 심리적 깊이, 각종 사회 문제에 대한 통찰,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사유까지 갖추고 있다. 그 기저에는 그가 유서 깊은 백작 가문의 후예로서 유년시절부터 평생 동안 쌓아올린 직간접인 경험과 폭넓은 사유, 학습의 성과가 깔려 있다. 거장의 여러 자아가 소설 속 인물의 모습으로 살아나기도 한다. 도시의 번잡한 사교계를 떠나 시골의 영지를 경영하며 단란한 가정을 꾸리는, 그러면서 사상적 추구에 골몰하기도 하는 지주 귀족 레빈은 작가의 직접적인 분신이다. 그러나 그가 꿈꾼 가장 이상적인 자신의 모습은 허름한 농민 차림에 봇짐을 진 순례자였던 듯하다. 노작가는 해묵은 가정불화 끝에 오랜 숙원을 실행에 옮겼으나 그의 마지막 여행은 안타깝게도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다. 결국 그는 시골의 외딴 기차역에서 82년에 걸친 인생을 마감한다.

 

 

 

 

 

 

 

 

 

 

 

 

 

 

 

 

 

 

 

 

-- <책앤>

 

--- 톨스토이 번역 중입니다! 큰 작품을 맡고 싶은 욕심이 없지 않으나, 여러 정황상, 좀 규모 있는 단편을 하고 있는데, 역시 번역은 '중-노-동-'입니다.  독려 차원에서 <안나 카레니나>에 관한 글을 올려봅니다.

-- 작가의 밑천은 물론 자신의 삶 전체니까 당연한 소리이지만, 톨스토이는 그 인생 자체가 톨스토이 소설감인 것 같습니다. 실제로 그의 소설은 거의 백프로 자전소설이고요. 당대에는 자타가 공인하는 '엄친아'(부유한 백작에 젊고 예쁜 아내에 명성에 등등)이고 죽어서는 거장이고, 흠, 이런 재수 없는(ㅋㅋㅋ) 인물도 있지만, 솔직히, 단편 하나만 읽어봐도 입이 쩍~ 벌어지긴 합니다...^^;; 그러니까 더 재수 없고..-_-;; 그에 대한 얘기는 언제 또 하도록 하죠!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 안의 악마를 어찌할 것인가

- 윌리엄 골딩, <파리대왕>

 

 

 

 

 

비행기에 탄 채 어디론가 이송되던 소년들이 불의의 사고로 바다 한가운데 무인도에 불시착한다. <파리 대왕>은 이 소년들의 모험담을 다루고 있지만 모험소설이나 성장소설로 읽히지는 않는다. 차라리 디스토피아 소설, 혹은 우화의 형식 속에 인간의 본성과 그것의 사회적 발현인 정체(政體)에 대한 사유를 담아낸 철학소설에 가깝다 

(베엘제붑(-불)/파리대왕)

 

소년들은 크게 랠프 파와 잭 파로 나뉘는데, 이를 통해 이성과 광기(본능), 문명과 야만, 어른의 세계와 아이의 세계, 낙관주의와 냉소주의, 민주주의와 전체주의 등의 이분법이 형성된다. ‘쿠데타-혁명으로 정권을 쟁취한 후 불이 필요해지자 피기의 안경을 훔쳐가 버린 잭 일당 앞에서 랠프와 피기가 하는 말이 나름의 도식이 될 수 있겠다. 두 소년의 과 잭 일당의 야유와 함성도 묘한 대조를 이룬다.

 

나는 이 말을 해야겠어. 너희들은 마치 한 패의 어린아이들처럼 처신하고 있다는 것을

야유소리가 높아졌다가 돼지가 마술적인 힘을 가진 흰 소라를 쳐들자 다시 조용해졌다.

어느 편이 좋겠어? 너희들같이 얼굴에 색칠한 검둥이처럼 구는 것과 랠프같이 지각 있게 구는 것과

오랑캐들 사이에서 큰 함성이 터졌다. 돼지는 다시 소리쳤다.

규칙을 지키고 합심을 하는 것과 사냥이나 하고 살생을 하는 것 - 어느 편이 더 좋겠어?

다시 함성과 휙 하고 날아오는 소리.

소음에 지지 않고 랠프가 다시 외쳤다.

법을 지키고 구조되는 것과 사냥을 하고 모든 것을 파괴하는 것 중 어느 편이 좋으냔 말이야?(270)

 

랠프는 해군 중령의 아들로서 아빠 없는 피기를 은근히 무시하고 또 피기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그의 별명(피기-돼지)을 다른 아이들에게 알리지만,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수호할 의지와 능력을 갖춘, 온화한 유형의 지도자-대장으로 나온다. 피기 역시 훌륭한 통치자의 멘토, 즉 지성의 상징이다. 그럼에도 성가대 지휘자로서 카리스마를 발휘하던 야심가 잭 대신 랠프가 선거를 거쳐 대장으로 선출되는 데 엄정하고 필연적인 논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선거 장난은 소라만큼이나 모두의 마음에 들었다. 잭은 항의를 하기 시작했으나 좌중의 고함소리는 대장을 골라내자는 일치된 의견에서 박수갈채로 랠프를 선출하자는 것으로 변했다. 그 이유는 아무도 설명할 수 없었을 것이다. 지성(知性)이라고 할 만한 것을 보여준 것은 돼지였고, 한편 누가 보아도 지도자다운 소년은 잭이었다. 그러나 앉아 있는 랠프에게는 그를 두드러지게 하는 조용함이 있었다. 몸집이 크고 매력 있는 풍채였다. 뿐만 아니라 은연 중 가장 효과적인 것은 소라였다. 그것을 불고 그 정교한 물건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화강암 고대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존재 - 그런 존재는 별난 존재였던 것이다.(30)

 

그 때문인지 랠프와 잭의 연대는 시작부터 위태롭다. 우선 구조될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불을 피워 연기를, 즉 봉화를 올리자는 견해와 당장 먹을 식량을 구하기 위해 사냥을 하자는 견해가 대립한다. 작가는 은근히 전자 쪽에 손을 들어주지만 과연 어느 쪽이 옳다고 정언적으로 말할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 또 잭 일당을 얼굴에 색칠을 한 채, 즉 가면을 쓴 채 짐승처럼 날뛰는 오랑캐, 공포와 폭력의 축으로 몰아간 것(상당히 선정적이고 폭력적인 암퇘지 사냥 장면이나 사이먼-‘짐승살해 장면)은 영국 작가 특유의 결벽증의 산물인지도 모르겠다.

 

 

 

 

 

 

 

 

 

 

 

 

 

 

 

대체로 <파리 대왕>의 내포 작가는 어디로 튈 줄 모르는 아이-자식을 바라보는 어른-아빠와 유사하다. 어른-아빠는 소위 착하고 똑똑한 아이들(랠프와 피기)이나 아직 백지 상태에 가까운 꼬마들이 자신의 권위를 따르며 그 훌륭하고 질서정연한 세계를 모방하길 바란다. 소라의 이용, 선거 흉내, 봉화 지키기 등에 반영된 의회 민주주의의 미니어처를 보라. 한데 하나의 전범이나 희망의 형태로만 존재하던 어른-아빠가 소설의 말미에서 갑자기 진짜로 등장한다. 이 해군 장교가 아이들에게 던진 첫 질문이 성인들 - 어른들도 함께 있니?”(300)라는 점은 꽤 의미심장하다. 사태를 어느 정도 파악한 다음 그는 어른-아빠특유의 점잖은 완곡어법으로 아이들을 나무란다.

 

영국의 소년들이라면너희들은 모두 영국 사람이지?그보다는 더 좋은 광경을 보여줄 수가 있었을 텐데. 내 말은…」(302)

 

진짜 어른-아빠앞에서 아이들은 더 이상 어른 흉내를 낼 수 없다. 그토록 호기롭고 용감하게 어른의 세계를 구축했던 잭마저도 몸부림치며 울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과연 어른-아빠의 세계는 완벽할까 

 

<파리 대왕>어른-아빠가 아이들을 구원하는 것으로 끝나지만 소설 바깥에 더 큰 공포가 도사리고 있음을 간과하지 않는다. 섬 속의 아이들이 봉화냐, 사냥이냐 하는 문제로 다투다가 결국 두 명의 희생양을 내기에 이르렀다면, 섬 밖의 어른들은 숫제 핵전쟁을 벌이고 있다. 어른 세계라고 짐승이라는 이름의 불안과 공포가 없을 리 없다. 잭 일당에게 잔인하게 살해된, 무수한 파리 떼로 뒤덮인 암퇘지의 머리, 파리 대왕’(베엘제붑-악마)은 우리 안에 있으며 그것이 결코 아이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점, 이것이 진정한 비극이다.

 

(사이먼)는 재빨리 눈을 떴다. 야릇한 햇볕 속에 그 머리는 재미있다는 듯 씽긋 웃고 있었다. 꾀는 파리도 도려낸 창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막대기에 꽂혀 있다는 창피함조차도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투로 -(205)

 

 

-- 네이버캐스트

 

-- 저 글을 쓰며 처음 읽어봤는데요(-_-;;)  그 명성에 비해... 좀 실망했습니다.(영화는 오히려 괜찮았는데요.)  전반적인 주제는 아무래도, 도...키의 <악령>에 가까울 법도 합니다만. 영국 소설은 아무래도 너무 귀족적인(??) 감이 있어요. 최고 소설가는  코난 도일과 아가사 크리스티?? -_-;;

 

 

 

 

 


댓글(4)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oren 2013-01-18 2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군대생활하하던 1984년에 '1983년 노벨문학상 수상작'이라는 이유 때문에 일부러 누군가에게 부탁해서 사 읽었던 책인데, 이 소설이 영화로도 제작되었다는 건 금시초문이네요.

구원의 상징이었던 불(안경으로 발생시켰던)을 둘러싼 다툼, 추적자의 신호소리, 히죽이 웃던 '파리대왕'의 등장 등등에서 적잖이 '충격적인 모습으로 다가왔던' 소설이었던 기억이 나네요. 이 소설을 읽기 직전에 읽었던 또다른 노벨상 수상작 '백년동안의 고독'도 같이 언급해 주시니 더욱더 옛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네요.

푸른괭이 2013-01-20 15: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백년...>은 아직 다룰 기회가 없었네요-_-;;

DANNYJ 2013-01-22 09: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미국에서 잘 보고 갑니다:) 앞으로도 더 유익한 포스팅 부탁드려요!

푸른괭이 2013-01-22 15:38   좋아요 0 | URL
예, 응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태어나서 죄송합니다

- 다자이 오사무, <인간 실격>

   

 

 

네 번의 자살미수, 그리고 마지막 다섯 번째 자살 시도와 성공. 한 작가의 문학세계의 핵심어가 자살일 수는 있어도 작가의 삶 자체가 이렇게 요약되기는 쉽지 않겠다. 다자이 오사무(太宰治)는 왜 그토록 자살에 집착했을까. 일본 문화의 특수성을 고려해도 쉽게 이해되지는 않는다. “태어나서 죄송합니다.”(20세기 기수(二十世紀旗手)라는 유명한 말, 그 기괴한 원죄 의식의 근거가 무엇일까.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13)

 

 

(왼쪽 사진은 처음 보는데, 이미지가 사뭇 다르네요! 웬 훈남의 중년이 ^^;; )

 

오바 요조가 쓴 총 세 편의 수기는 부끄럼으로 점철된 27년간의 생애에 관한 기록이다. 배고픔과 가난을 모르고 보낸 유년기와 익살연기를 시작한 소년기(수기1), 담배여자 등 타락과 이른바 가마쿠라 정사(情死) 미수 사건, 호리키와의 교류, 좌익사상에의 경도로 요약되는 청소년기(수기2), 무명 만화가(‘조시 이키타’)를 자처하며 넙치(시부타), 시즈코 등의 집에 기식하다가 약물 중독, 각혈에 시달리고 결국 정신병원에 감금되는 청년기(수기3). 여기에 스스로를 자살로써 벌해야 할 만큼 수치스러운 죄가 있는가.

 

 

 

 

 

 

 

 

 

 

 

 

문제는 자기 연민과 자기 비하의 이면에 숨어 있는 가공할 만한 자기도취이다. 나르시시즘은 그 표현 양상은 다양할 수 있으나, 애초 희랍신화가 보여주듯, 지나친 자기애로 인해 죽음 충동에 사로잡히고 결국에는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다. 요조는 마땅히 어떤 죄를 지었다기보다는 죄인(=범인), ‘음지의 사람이 되고자 하는 욕망에 사로잡혀 죄를 조장하고 그것을 기록하는 과정에서 죄의식을 더 키워나간다. 주로 여성과의 관계에서 보이는 일련의 기괴한 행각(가령 자신의 내연녀가 능욕당하는, 그렇다고 생각되는 장면을 목격하면서도 거의 일부러 방관자의 입장을 취한다), 건강한 생활을 마다하고 굳이 기생충의 삶을 고집하며 집안과 의절하기에 이르는 것 등 그 스스로 익살은 물론 수난을 자처한다.

 

비합법. 저는 그것을 어렴풋하게나마 즐겼던 것입니다. 오히려 마음이 편했던 것입니다. 이 세상의 합법이라는 것이 오히려 두려웠고(그것에서는 한없는 강인함이 느껴졌습니다.) 그 구조가 불가해해서, 도저히 창문도 없고 뼛속까지 냉기가 스며드는 그 방에 앉아 있을 수가 없어서 바깥이 비합법의 바다라 해도 거기에 뛰어들어 헤엄치다 죽음에 이르는 편이 저한테는 오히려 마음이 편했던 것 같습니다.

음지의 사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간 세상에서는 비참한 패자, 또는 악덕한 자를 지칭하는 말 같습니다만, 저는 태어날 때부터 음지의 존재였던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이 세상에서 떳떳하지 못한 놈으로 손가락질당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언제나 다정한 마음이 되곤 했습니다. 그리고 저의 그 다정한 마음은 저 자신도 황홀해질 정도로 정다운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범인(犯人) 의식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저는 이 인간 세상에서 평생 동안 범인 의식으로 괴로워하겠지만 그것은 조강지처 같은 나의 좋은 반려자니까 그 녀석하고 둘이 쓸쓸하게 노니는 것도 내가 살아가는 방식 중 하나일지도 모릅니다.(51)

 

어떤 경우든 요조의 관심사는 오직 이며 그 는 죄를 범하고 그 때문에 괴로워하는, 카인의 표식을 단 이다. 여기에 요조와 호리키의 말장난을 적용해 보자.

 

죄와 벌. 도스토예프스키. 언뜻 그 생각이 머리 한쪽 구석을 스치자 흠칫했습니다. 만일 저 도스토 씨가 죄와 벌을 유의어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반의어로 병렬한 것이었다면? 죄와 벌. 절대 서로 통할 수 없는 것. 얼음과 숯처럼 융화되지 않는 것. 죄와 벌을 반의어로 생각했던 도스토예프스키의 바닷말, 썩은 연못, 난마(亂麻)의 그 밑바닥아아, 알 것 같다.(115)

 

다른 식의 물음을 던져보자. ‘’, 그리고 은 희극명사인가, 비극명사인가. 요조의 삶은 죄와 벌의 희비극성을 극대화하는 쪽에 있는 것 같다. 그는 스스로 죄 많은 광대이고자 한다. 그의 비밀을 꿰뚫어보는 자가 바보이자 외톨이인 다케이시라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아니, 그가 어울리는 자들은 대체로 반쯤 날건달인 호리키, 어딘가 타락과 연민의 냄새를 풍기는 여성들 등 소외계층이거나 타락계층이다.

 

 

(다운만 받아놓고 아직 못 본 ㅠ.ㅠ 영화 ^^;) 

 

 

이렇게 낮은 데로 임하여 돈키호테 같은 우스꽝스러운 광인-바보의 역할을 맡음으로써 그는 지상의 그리스도로 거듭난다. 훗날 어느 술집 마담은 이렇게 회고한다. “우리가 알던 요조는 아주 순수하고 눈치 빠르고술만 마시지 않는다면, 아니 마셔도하느님같이 착한 아이였어요.”(138) 지상의 그리스도를 꿈꾼 도스토예프스키의 주인공들이 현실에서 범죄자, 백치, 광인이 될 수밖에 없던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요조는 스스로에게 인간 실격을 선고한다. 물론 다분히 퇴폐적인 측면이 있다.

 

이젠 저는 죄인은커녕 미치광이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아니요, 저는 결코 미치지 않았습니다. 단 한순간도 미친 적은 없었습니다. 아아, 그렇지만 광인들은 대개 그렇게들 말한다고 합니다. 즉 이 병원에 들어온 자는 미친 자, 들어오지 않은 자는 정상이라는 얘기가 되는 것이지요.

신에게 묻겠습니다. 무저항은 죄입니까?

(중략)

인간 실격.

이제 저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습니다.(131)

 

몇몇 소설적 장치에도 불구하고 <인간 실격>은 거의 사소설(私小說)에 가까운, 말하자면 가면의 고백이다. 맨손 체조만 좀 했어도 그의 우울증은 치유됐을 것이라는 미시마 유키오의 냉소적인 말은 상당히 일리가 있지만 그럼에도 고통을 향한 그의 집요한 엄살에서 모종의 진정성이 느껴지지 않는가.

 

-- 네이버캐스트

 

말미에 언급한 미시마 유키오의 <가면의 고백>도 재밌습니다 ^^; 

 

 

 

 

 

 

 

 

 

 

 

 

 

원래 썩 좋아하지 않은 일본근대문학에 관심을 갖게 된 데는 영화와 애니메이션의 역할이 큰데요, 요즘 가장 다시 보고 싶은 영화는 우울할 때마다 항상 틀어놓았던(일본어 공부도 할겸^^), "필란도노 카모메와 데카이!"라는 말로 시작하는  이 영화~! 

 

 

 

 

 

 

 

 


댓글(1)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카라미 2013-04-08 0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고통을 향한 집요한 엄살...ㅋㅋㅋ 인간실격에 딱맞는 표현이네요
 

낯선 시간, 낯선 소설 속으로:

마르셀 프루스트(1871-1922),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스완네 집 쪽으로>(1913)

 

 

오랜 시간, 나는 일찍 잠자리에 들어 왔다. 때로 촛불이 꺼지자마자 눈이 너무 빨리 감겨 잠이 드는구나.’라고 생각할 틈조차 없었다.”(1, 15) 잠들기 전 는 언제나처럼 엄마의 저녁 키스를 기다린다. 하지만 마침 손님(스완 씨)이 와 있어 엄마가 오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중대한 용건이 있으니 꼭 의 방으로 올라와 달라는 내용의 쪽지를 보내지만 냉대에 부딪친다. 그러나 오늘은 아이가 신경이 날카로운 것 같으니 함께 자주라는 아빠의 권유도 있고 하여 엄마는 의 방으로 온다. 엄마가 의 곁에서 책을 읽어주는 밤, “나는 이런 밤이 두 번 다시 오지 않으리라는 걸 잘 알았다.”(1, 83) 한 토막의 이야기가 끝나자 어느 겨울날 추위에 떨며 귀가하는 성인 가 등장한다. 엄마는 에게 간만에 홍차를 권하고 사람을 시켜 일부러 프티트 마들렌을 사오게 한다. 과자 조각이 녹아든 홍차 한 숟가락을 입안으로 가져간 순간 나 자신이 초라하고 우연적이고 죽어야만 하는 존재”(1, 86)라는 것을 잊을 만큼 강렬한 기쁨을 맛본다. 그 진앙을 찾던 끝에 콩브레 시절, 일요일 아침마다 레오니 아주머니가 홍차나 보리수차에 적셔준 마들렌의 맛에 도달한다.

 

 

 

 

 

 

 

 

 

 

 

 

 

 

여기까지가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1권 <스완네 집 쪽으로>11절의 내용이다. 남편이 죽은 이후 처음에는 콩브레를, 그 다음은 자기 집과 방과 침대를 떠나지 않고 극도의 무기력증에 빠져 사는 레오니 아주머니, 주인마님 보필과 살림에 열성인 만큼이나 외부인들(노처녀 욀랄리 할멈)과 아랫사람(부엌데기, 즉 지오토의 자비)에게는 매몰찬 하녀 프랑수아즈의 얘기가 흥미롭다. 독립된 소설처럼 삽입된 스완의 사랑은 물질적인 부와 세련된 몸가짐에 덧붙여 뛰어난 예술 감각을 지닌 사교계 인사 스완이 천박한 화류계 여자 오데트를 사랑하면서 겪는 감정적 흐름을 다룬다. 환희, 의심과 질투에 이어 찾아온 것은 환멸이다. “내 마음에 들지도 않고 내 스타일도 아닌 여자 때문에 내 인생의 여러 해를 망치고 죽을 생각까지 하고 가장 커다란 사랑을 하다니!”(2, 330) 이런 깨달음에도 불구하고 스완은 오데트와 정식으로 결혼하고, 그들의 딸 질베르트가 의 첫 사랑이 된다. 이렇듯 콩브레의 는 두 산책로인 메제글리즈(스완네 집 쪽)과 게르망트 쪽, 부르주아지귀족의 세계를 오가며 작가를 꿈꾼다. 수시로 재능의 부재를 절감하지만 종국에는 총 500명이 넘는 인물들의 대서사시를 창조하게 될 것이다.

 

 

 

 

 

 

 

 

 

 

 

 

 

 

순간과 영원을 오가는 무한대의 시간, 사물과 현상에 대한 세밀화 같은 묘사, 소설적 가공 없이 무심한 척 던져지는 인물들과 야생의 상념들, 학술서 수준의 미학 담론들,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고 오직 소비만 하는 상류 사회의 수다의 생리학’(벤야민), ‘의식의 흐름을 따르는 몽롱한 반수(半睡)의 서사를 좇아가기가 만만치 않다. 프루스트의 실제 삶(명망 있고 부유한 집안의 장남, 타고난 감수성과 총명함, 최상의 교육 환경 등)에서도 극적인 사건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장 이브 타디에). 유일한 결핍인 병약한 체질(천식)은 역설적으로 어머니의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만년 마마보이의 호사스러운 삶, 가령 엄선된 식재료로 구성된 식탁, 과민성 피부 관리법, 소음과 외풍과 빛이 차단된 최고급 거처 등은 익히 알려진 바이다(알랭 드 보통).

 

 

 

 

 

 

 

 

 

 

 

 

 

사진 속의 프루스트 역시 스완처럼 마땅한 직업도 없이 사교계를 드나들며 딜레탕트의 삶을 즐기는 전형적인 댄디의 모습을 하고 있다. 두 권의 번역서에 미발표 평문, 얄팍한 소설책(<즐거움과 나날들>)이 거의 전부인 허랑방탕한 고급 속물이 상당한 규모의 소설 한 편을 완성한다. 바로, 우여곡절 끝에(당시 갈리마르-NRF의 편집장이었던 앙드레 지드는 훗날 프루스트에게 이 소설의 출간을 거부한 일을 통렬히 후회하는 편지를 쓴다) 자비로 출간된 <스완네 집 쪽으로>이다. 이어 총 7권에 육박하는 대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완간되는 것은 1차 세계 대전을 거쳐 작가가 사망한 다음이다.

 

 

 

 

 

 

 

 

 

 

 

 

 

 

이 소설을 둘러싼 논의에서 절대 빠지지 않는 것이 시간이다. 시간, 그리고 글쓰기와 인상에 관한 이야기(폴 리쾨르), ‘시간-진리를 찾아가는, 그 점에서 철학과 경쟁하는 소설(들뢰즈), 욕망을 포함하여 여러 사물-대상의 변형 과정에 주목하는 소설(지라르) . 실상 소설의 제목은 물론이거니와 소설 전체의 맨 처음(“오랜 시간(longtemps)”)과 맨 끝에(“시간 속에(dans le Temps)”) ‘시간이 버티고 있다.

 

 

 

 

 

 

 

 

 

 

 

 

 

 

 

('시인' 이성복의 불문학자로서의 면모를 엿볼 수 있었던 책입니다 ^^;)

 

프루스트는 환시와 환각의 안개가 드리워진 낯선 시간 속을 헤매며 이미 환()이 돼버린 잃어버린과거에 생명을 불어넣고 그런 식으로 되찾은현재-영원을 선보인다. 40년에 이르는 인생의 전반부를 한심한 허송세월에 바치고 남은 10년을 파리 번화가에 쌓아놓은 자기만의 성에 틀어박힌 채 잃어지고’ ‘살아진시간들과 그 속으로 사라진 이름’, ‘’, ‘사물을 살려내는 데 보낸 작가! 모든 것을, 심지어 자기 자식마저도 무자비하게 집어삼키는 크로노스 신으로 의인화되는 시간과 맞장을 떠본들 얻는 것은 패배-죽음뿐이다. “! 집도 길도 거리도 세월처럼 덧없다.”(2, 407) 그럼에도 그는 묵묵히 시간의 아가리 속으로 걸어들어간다. 이보다 더 고독하고 숭고한 소설쓰기가 또 있을까. 한 시인이 그의 소설을 인식의 허망함과 허망함의 인식”(이성복)이라고 정의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이리라.

 

-- <책&>

 

**  이번 호에 실은 건데 편집 과정에서 문장이 너무 심하게 훼손돼서(ㅠ.ㅠ) 부랴부랴 올립니다^^;

작품이 난해하니 참고서(^^;)도 난해하고, 어쩜, 작가의 평전조차 어찌나 지루한지! ㅋㅋ 어쨌거나 머릿속에 애매하게 남아 있는 '스완'과 뭐 여타 인물들이 좀 더 또렷해졌고, 불어 공부할 때 읽었던 앞부분을 훌륭한 번역으로 다시 곱씹을 기회를 가졌습니다. 옛날 판본으론 2, 3권 정도까지 읽었던 것 같은데, 새 번역본이 출간되는 속도에 맞추어 꾸준히 완독(!)해 볼 참입니다. 바로 진입(?)하기 두려우신 분은 만화 버전으로 먼저 보세요! 이것도 계속 나오는 중입니다.  

-- 앗, 그리고 이 글의 제목의 출처는,  척 봐도 아시겠죠? 바로 이 분! ^^;

 

 

 

 

 

 

 

 

 

 

 

 

 

 

 

 

-- 아래, 지라르의 책에도 소개된(?) 프루스트의 사진입니다.^^;  

 

- 크로노스 관련 부분, 물론 염두에 둔 이미지는 고야의 이 그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