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기독교)적 의미의 '고백'(참회)이 문학 장르, 즉 고백체(서간체) 소설로 발전, 이월하는 데 이정표가 된 작품으로 루소의 <고백>을 꼽는다. 위의 세 책이 세계문학 삼대 고백록이다.(-라고 한다.) 내가 읽은 루소의 <고백>은 아주 오래전, 김붕구 선생님 번역본인데, 그 사이 새 판본이 또 나온 모양이다. 아무튼, 명불허전!이라, 이 책에 무척 감동했다. 자신의 과거를 이렇게 미주알고주알 일일이, 많이 시간이 흐른 후에, 기록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사실 이 역시 '자전적 소설'이라 이름해도 되었을 법하지만, 루소는 그러지 않았다. 즉, '픽션'이 아니라 '논픽션'으로 내놓은 것. 그럼에도 몇 십년의 강을 거슬러, 과거를 기록함에 있어 '픽션'이 전혀 없을까. 게다가 여기에는 엄청나게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고, '죄를 고백'하는 것이기 때문에, 대부분 다 좋지 않은 일(혹은 대놓고 가해자, 소극적 가해자, 그것의 목격자, 방관자, 아니라면 희생자, 피해자)로 언급된다. 루소는 이 모든 것을 '인간을 이해하는 자료'(?)로 이해한 것 같고, 그러길 바라서, 서문에 비슷한 언급을 해놓았다.(지금 책을 뒤져볼 시간이 없어서 -_-;;) 아무튼, 장르 불문, 세계문학의 고전이며, 개인적으론, 읽어본 루소의 몇 권의 책 중 가장 애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좀 더 뒤에(말년?) 쓴 것으로 아는, 또 다른 에세이('고백')인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보다 더 좋아한다. 아마 일본 가서 읽었기 때문인지도^^;
서양문학은 이런 고백록, 자서전, 자전적 소설의 전통이 유구하다. 위에 가져온 톨스토이의 <참회록>(고백)은 말할 것도 없고, 그의 많은 소설이 자전 소설이다. 데뷔작은 말할 것도 없고 <전쟁과 평화>도 사실상, 자기 이야기의 확장판인 자기 가정, 가족, 가문의 이야기다. 물론 이런 개인사를 보편사로 확장하는 그 능력은, 과연 대가의 그것이라 할 만하다. <안나 카레니나>, <부활>은 사회적 이슈를 소설화한 것인데, 개인적 경험을 활용하고 심지어 자신의 분신을 소설화하는 능력과,,, 타인의 이야기를 반대로 자기화하여 개연성 있게 써내는 능력,,, 두 능력의 조합 역시, 그러하다. 겸사겸사, <부활> 번역의 역자가 바뀌었다, 허걱. 표지 그림, 카튜샤, 어쩔 겨 -_-;;
동양문학은 아무래도 고백의 전통의 약하고, 대신 '-전'의 전통이 강하다.(-라고 한다. by 조동일) 양반전, 전우치전, 허생전 등등. 3인칭적 서사, 전지적 화자가 남 얘기를 들려주는 식. 내가 내 얘기하는 게 쉽지 않다. 그걸 처음으로 소설에 도입한 자는 누구??? - 아는 사람 가르쳐주세요!^^;
분명한 건, 일본문학은 동아시아에서 제일 빠른 근대화를 시도하면서, 그러려고 엄청나게 열을 올리면서 이 부분에서도 서양 것을 더 빨리 받아들였던 것 같다. 그 영향이 이런 작품들에 배어 있다. 개천용지개의 서고에 있었던(<어느 바보의 일기>?) 많은 책들 보라. 그런 갈망이 여실히 보인다. 아무튼 이건 순전히 주관적이고 인상적인 얘기라, 전거를 좀 아시는 분은 좀 알려주셔도 좋겠다^^;
일본식 사소설의 전통을 이상의 소설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들식 탐미소설은 김동인의 각종 예술가 소설에 반영되지 않았나 싶다마는, 김동인을 읽은지 넘나 오래되었다 -_-;
사소설은 내 경험의 극단이다. 이게 싫으면, 그 반대의 극단이 있는데, 철저하게 남의 얘기를 가져오는 것. 개천용지개 식으로, 고사, 전설, 다른 고전(가령 <카라마조프)에서 이야기를 가져오는 것이다. 아쿠다가와의 소설의 많은 부분이 이것. 그다음, 루쉰 역시, 말년에(?) <고사신편>을 쓴 것으로 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만큼 우려먹을^^; 자신의 경험이 없어지고(바닥나고) 동시에 상상력을 먹여 살릴 정신의, 마음의 힘이 없어졌다는 뜻이리라.
한국 현대 문학에서 최고의 자전 소설을 꼽으라면 박완서의 <그많던싱아는...>이 아닐까 한다. 이 역시 명불허전!, 나이 들고 나서 무척 재미있게 읽었다. 하지만 실상 그녀의 많은 소설이 자전적 경험을 토대로 하고 있고, 자연스레 자신과 가족과 주변 이웃, 지인 들의 이야기가 들어가지 않았을까 한다. 공지영, 신경숙 등 굵직한 베스트셀러 작가의 많은 소설이 그런 것으로 안다. 워낙 안 팔려서^^; 문제가 안 돼서 그렇지, 다른 작가들의 경우도 비슷하리라. 경험과 상상의 비중이 다를 뿐, 두 가지가 섞인다는 건 동일하다. 그리고 앞서 강조한대로, 순수 고백(수기, 일기 등)을 표방한 글도 '픽션화'는 불가피하다는 점, 꼭 염두에 둬야 한다. 대표적인 걸작이 이것.
헉, 내가 읽기를 쉬는 동안에도 계속 나오고 있구나. 이 소설 속 '나'는 결국 '마르셀(프-트)인데, 이든 아니든, 기든 말든 사실 아~무 상관 없다. 중요한 건 읽을 만한, 후손에게 길이 남겨줄 가치가^^ 있는 예술텍스트인가, 아닌가 하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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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김봉곤 사태(-라고 불러야 하나)를 보면서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하, 굳이 절판까지 ㅠㅠ 가뜩이나 독자가 없는 한국문학에, 출판계에, 작가들에게, 이런 악재까지 ㅠ(강조하건대, 나는 김봉곤 소설을 좋아하지 않고 그가 잘했다는 건 아니다!!) 다른 한편, '성인지감수성'이라는 요상한 말이 시사하듯, 각종 모럴이(가령 저작권 포함) 많이 달라졌음을 우리가 예민하게! 인식해야 할 것 같다.
아무도 관심 없겠지만, 재작년에 나온 나의 (경)장편 역시 많은 모델들이 있다. 주로 물리적 짜집기에 덧붙여 화학적 변용이 있었지만, 틀거리를 제공한 커피숍 사장은 상당히 대놓고 가져온 인물이다. 내 소설 읽고 그가 소송냈으면 클~ 날 뻔 했다^^;(실은 굉장히 좋아했음 ㅋ) 역시나 아무도 읽지도 않고 관심도 없겠지만^^; '벙거지 문청' 김건우의 모델은,,, 저 커피숍에 아침마다 나타나던(나를 전혀 모르는) 시인 오은과, 간헐적으로 출몰한 (역시나 나를 전혀 모르는) 사회학자 김홍중(곧잘 벙거지를 쓰고 다님), 대학 시절의 '나', 영문과 선배(의 외모) 등이다. 이런 걸 다 일일이 문제 삼자면, 결국 작가가 쓸 수 있는 글이란 저런 식의 독서 에세이 뿐이다.
소설이 백프로 창작이다, 라고 쉽게 생각하신 분들은, 그런 식의 소설을 쓰시는 분들이고, 소설에는 정녕 많은 소장르가 있다. 앞서 쓴, 톨스토이, 프루스트, 박완서 등은 말하자면 자전 소설 계열이다. 얼핏 떠오르기로, 도스-키, 나보코프, 이런 작가들은, 자기 얘기를, 정보를, 디테일을 가끔 이용은 해도, 자전 소설 자체는 잘 쓰지 않는다. 나보코프는 아예 자서전을 따로 썼다. 즉, 그는 보르헤스처럼 픽션적 글쓰기=소설적 글쓰기, 라고 생각하고 이른바 자기 얘기를 구질구질^^; 청승 떨며 쓸 때는 아예 '자서전'을 쓰기로 한 것이다. 이건 성향의 문제지, 작품 품질의 문제는 아니고, 윤리의 문제는 더더욱 아니다.
도중에 넣었어야 했는데-_-;; 낭만주의기에는 이 구분이 정말로 애매했던 것 같다. 이른바 자전 소설, 고백체 소설의 전성기랄까.
베르테르는 곧 젊은 괴테(질풍이야, 노도야~), 세기아는 곧 뮈세(그 연인인 무슨 부인은 조르주 상드), 우리 시대의 영웅 페초린은 곧 레르몬토프. 아무도 이게 큰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모델이 된 본인이라면 모르겠다^^; 가령, <베르테르>의 알프레드나 로테, <세기아...>의 그 부인(즉, 상드), <...영웅>의 그루시니츠키, 메리 등등. 그런 것까지 허락을 받아야 할까. 글쎄다. 나도 예민한 부분은 물어보긴 하는데 - 사회성(!), 역시나 쉽지 않다!
요즘 우리가 너무 예민한 건 아닌지, 조심스레 생각해본다. 나한테 던지는 말이기도 하다. 오늘도 맛나는 것을 먹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