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정란을 위한 정자 한 개 외에 아버지가 나에게 준 게 무엇일까.
초등학교 시절 나는 아버지를 가장 존경한다는 친구 은경을 질투했고,
완벽한 가정주부였던 그녀의 어머니를 동경했다.
난 억척어멈의 표본인 어머니를 존경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실상 그 억척스러움을 많이 부끄러워하기도 했다.
하여 어린 내가 책에 푹 빠져 살았던 건 역할 모델에 대한 갈망이었을게다.
삼성 위인전을 보며 질질 짜기도 했지만
어린 마음에도 미국대통령과 미국이 만든 대통령만 우글거리는 위인전에 위화감을 느꼈고,
내가 가장 동화되고 싶었던 대상은 일명 소녀소설의 주인공들이었다.
쥬디 애보트와 세라, 캔디, 에밀리에 열광하던 그 시절, 으뜸가는 우상은 죠와 앤이었고,
특히 빨간머리 앤 전집은 지금까지 읽고 읽고 또 읽는다.
지금 돌이켜보면 유독 빨간머리 앤을 좋아한 건,
앤의 소녀시절부터 시작해 대학 시절 및 졸업 후 직업을 가지고
첫사랑과 결혼 후 아이를 낳아 가정을 꾸려가는 과정까지 모두 담고 있어
그야말로 역할 모델의 인생을 완벽히 따라갈 수 있었기 때문인 듯 싶다.
지금도 난 내 삶의 변화가 있을 때마다 앤을 다시 뒤적인다.
마로를 임신했을 때 '앤의 딸 리라'를 읽으며 딸의 모습을 그렸고,
아라를 잃어버렸을 땐 '꿈의 집의 앤'을 읽으며 함께 꿈의 아이를 가슴에 새겼다.
해람이를 가졌을 땐 '노변장의 앤'을 읽으며 산후조리원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결심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 페이퍼야말로 얼마 전 감히 지젝 따라하기를 하며
살아있는 인물 중 가장 존경하는 이를 선뜻 대답하지 못했던 까닭.
나의 영원한 역할 모델은 여전히 빨간 머리 앤 혹은 루시 몽고메리.
난 역할 모델이 아닌 그 누군가를 가장 존경하는 이라고 대답하지는 못하겠다.
단상1.
세라와 죠를 제외하면 죄다 고아이다.
죠와 세라의 아버지도 전쟁으로 인해 부재나 다름없었으니 그건 내 무의식의 발로?
단상2.
올해가 앤 100주년이란다. 캐나다에 가고 싶다. ㅠ.ㅠ
그게 안 되면 최소한 DVD라도 지르는 게 예의라고 지름신을 합리화시키고 있는 중.
덧붙여 고백.
마로 학교 방과후 교실에서 영어이름을 지으라고 하길래 대뜸 Rilla로 결정했다.
해람이는 당근 Jem이 될 예정. =3=3=3
또 덧붙여.
결국 질렀다. 예약 주문이라 9월 4일까지 기다려야 함. 잉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