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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석제 중학교 3학년이 되면서 나는 특별활동으로 바둑반에 들기를 바랬다. 그런데 그 반에 들려는 아이들이 너무 많아서 도서반에 갈 수밖에 없었다. 정부, 부모, 선생님, 형제자매가 공히 권장하는 독서를 특별한 활동의 대상으로 삼는 ‘독서반’이 아니라 ‘ㄱ’ 받침이 하나 부족한 도서반의 특별한 활동은 독서였다. 담당 선생님은 복스럽게 생긴 여선생님이었는데 도서반의 특별활동에 관해 단 한 문장으로 정의했다. “여기 도서관에 있는 책 중에서 자기 마음에 드는 책을 골라서 읽는다.” 그리고 선생님 자신의 마음에 드는 책을 고르고 자리를 잡아서 읽는 것으로 시범을 보여주었다. 나는 선생님처럼 책을 고르러 가는 아이들의 뒤를 따라 가서 아이들이 골라가고 남은 책 가운데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게 우연이었는지 필연이었는지 내 일생을 바꿔놓았다. 그 책은 ‘필독 고전 읽기’ 같은 묵직한 제목 아래 편집된 수십 권의 시리즈물 가운데 한 권이었다. 하드커버였고 필독을 강조하는 고전 대부분이 그렇듯 읽은 사람이 거의 없어 책 바깥쪽이 누렇게 물들어 있었다. 지은이는 박지원, 내가 처음으로 펴든 대목은 「허생전」이었다.
나이가 두 자리 숫자가 되면서 무협지에 빠지기 시작해서 전학 오기 전 국내 출간된 대부분의 무협지를 읽었다고 생각하고 있던 내게, 한문을 번역한 고답적인 문체는 별 거부감이 없었다. 오히려 옆자리나 앞자리의 아이들이 읽고 있는 현대소설이 가볍게 느껴질 정도였다. 내용 역시 익숙했다. 무협지에는 늘 깊고 고요한 곳에 숨어 있되 세상을 뒤흔들 실력이 있는 사람이 있고 그가 세상에 나갈 일이 반드시 생기게 마련이며 세상을 뒤흔들고 제자리로 돌아오는 게 다반사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허생전」의 주인공 허생은 내가 읽었던 수천 권의 무협지의 주인공과 달리 내게 무슨 말인가를 건네오는 듯 했다. 「허생전」 다음에는 「호질」, 「양반전」도 있었다. 「예덕선생전」도 있었던 것 같다. 책이 꽤 두꺼웠으니 「열하일기」도 있었는지 모른다. 3학년 2학기가 되었을 때 특별활동 시간은 없어졌다. 시간표에 있긴 했는데 입시를 앞둔 3학년은 활동하지 않는 게 보통이었다. 내가 1학기의 특별활동 시간에 읽은 것은 박지원의 저작이 전부였다. 책을 집으로 빌려가거나 방과 후에 남아서 읽지 않았던 것은 어떤 식으로 생각하면 다행스러운 일이다. 일주일에 단 한 시간, 맛있는 걸 아껴먹듯 읽다가 또 다음을 기약하는 방식이, 한꺼번에 읽고나서 ‘졸업했다’ 하고 잊어버리는 것보다 나을 것이기 때문이다. 중학교 3학년 1학기 특별활동 시간에 나는 몇백년 전 글을 쓴 사람의 숨결이 글을 다리로 하여 건너와 느껴지는 경험을 처음 해보았다. 글에서 품위와 아름다움을 느낀 것 역시 처음이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무척 재미있었다는 것이다. 내가 재미를 들인 최초의 고전, 그것이 우리의 조상이라는 게 소년에게 뿌듯함을 안겨주었다. 그 뒤의 국어나 국사 시험에서 득을 본 것은 말할 것도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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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대녕
신화라고 하면 우리는 흔히 ‘신들의 이야기’를 떠올린다. 아마도 중고등학교 때 읽은 <그리스 로마 신화>의 영향 때문일 것이다. 물론 신화는 신들이 등장하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그 주인공은 신들이 아닌 바로 우리 인간이다. 신화는 인류의 역사와 함께 시작돼 인간 삶의 중심에서 가장 역동적인 에너지를 제공한다. 또한 우주와 자연과 인간의 신비적인 관계를 푸른 열쇠로 작용하기도 한다.
‘우주와 조화를 이루면서 그곳에 오래 머무는 것, 이것이 신화의 주요한 기능이다. 사회가 원시적인 상태에서 벗어나 발전할 때 제기되는 문제는 개인과 사회의 이런 ’신비적인 관계‘를 지속시키는 일이다. 지금 주위를 둘러보면 특히 대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기회가 거의 없음을 알게 된다.’
나는 대학 때 신화의 미궁(?)에 빠져 지금껏 거기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김열규 선생의<한국문학과 민속연구>라는 책이 그 계기가 되었다. 민속학, 종교학, 인류학, 신화학은 모두 한 줄기를 이루고 있거니와, 그로부터 촉발된 신화에 대한 관심은 칼 융, 말리노프스키, 레비스트로스, 엘리아데, 프레이저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그러다 군에서 제대하고 대학을 졸업한 뒤 등단할 때까지는 불교의 세계에 매료돼 한동안 신화를 잊고 지냈다. 아니, 어쩌면 잃고 지냈는지도 모른다. 막상 등단을 했으나 무엇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몰라 화염에 휩싸인 듯 고뇌하던 날들이었다. 그 무렵 만난 것이 조셉 캠벨의 <신화의 힘>이었다. 나는 마치 어렸을 때 늘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시던 어머니의 품으로 돌아온 기분이었다. 이 책을 나는 성경처럼 되풀이해서 읽었다. 그리고 신화라는 것이 너무도 당연하게 ‘인간에 대한 이야기’라는 단순한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 그 오래 된 이야기 속에는 인류의 모든 지혜와 삶에 대한 톨찰과 종교적인 수긍이 포함돼 있었다. 또한 아직까지도 우리들 영혼에 생생하게 유전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비록 우리가 그러한 사실을 잊고 있더라도 말이다. 신화의 기능은 삶에 영원성을 부여하고 무엇보다도 ‘내면으로의 여행’을 이끌어준다. 거기서 우리는 언제든 태초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신화를 ‘영원의 가면’이라고 했을까?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책을 어느 날 나는 읽어버리고 말았다. 이사 도중에 분실했거나 도서관이나 복지재단에 책들을 기증하는 과정에서 섞여들어간 모양이었다. 다시 서점에 가서 찾아보았으나 이미 절판된 후였다. 그러다 1999년 역시 조셉 캠벨의 <신화의 세계>(까치 발행/과학세대 옮김)라는 책을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표지를 들춰보니 그때의 감격이 이렇게 적혀 있다.
‘1999년 11월, 다시 신화와 만나다.’
나는 지금 복간된 <신화의 힘>과 <신화의 세계>를 늘 옆에 두고 있다. 1985년부터 1986년까지 텔레비전 대담을 모은 <신화의 힘>은 주로 신화의 기원을 다룬 책이고, <신화의 세계>는 아메리카 인디언, 이집트의 오시리스 신화, 불교, 고대 그리스의 신비 종교, 아서 왕의 전설에 이르기까지 신화의 모든 영역을 고루 살펴주고 있다. 누구나 이해하기 쉽게 씌어졌고 두 권 모두 신화 입문서로도 읽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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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경
길에서, 전철 안에서, 젊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든지 예쁜 20대들을 보면 마음 한 끝이 저려온다. 저들은 청춘의 혼돈과 절망을 또 어떻게 견디고 있는 걸까. 40대 후반이 된 또래 친구들과 모여앉아 수다를 떨다가 20대 시절 이야기가 나왔을 땐 다들 손사래를 쳤다. 거저 준다고 해도 20대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아. 누군가가 말했고, 대부분 맞장구쳤다. 맞아, 맞아.
70년대 끝자락에 들어간 대학시절, 나는 돌멩이처럼 외로웠다. 누군들 그러지 않았을까. 어느 날 수필 연습 시간, 스승은 ‘돌’을 소재로 글을 써오라고 하셨다. 다음 시간에 몇몇 학생을 지목해 자기가 쓴 글을 나와서 읽게 하셨다. 시위 현장의 돌에 대해 쓴 친구가 여럿이었다. 그만큼 들끓던 시절이었다. 그때 나는 돌의 단단함, 안으로 응축한 그 견고한 침묵을 내것으로 하고 싶다고 썼다.
그 시절의 혼돈은 그나마 알고 있던 것들이 전복(顚覆)되는 데에서 왔을 것이다. 하필 80년이었고, 최승자와 황지우, 이인성 등이 그 무렵 등단해서 그동안 읽어오던 것들을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다.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는 1980년에 발간되었다.
앵도를 먹고 무서운 애를 낳았으면 좋겠어/걸어가는 詩가 되었으면 물구나무 서는/오리가 되었으면 嘔吐하는 발가락이 되었으면/발톱 있는 감자가 되었으면 상냥한 工場이/되었으면 날아가는 멧돌이 되었으면 좋겠어(「口話」의 첫연)
그 낯선 시구가 어떤 의미냐고 물으면 나는 대답하지 못했을 테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 시를 읽으며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내가 무서운 애를 낳고 싶었고, 물구나무 서는 오리, 구토하는 발가락, 발톱 있는 감자, 상냥한 공장이 되고 싶어했다는 것을. 나는 그동안 ‘정든 유곽에서’ 서성였고, ‘어째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내내 곱씹었으며, ‘어떤 싸움의 기록’이 내 안에서 떠나지 않고, “살아온 날들/ 물결 심하게 이는 오늘, 오늘”이 살아 있는 한 계속되리라는 것을. 그냥 고스란히 견디는 것, 그 견딤만으로도 우리의 생이 완성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문학은, 마음에 떠오른 것들을 말로 드러내는 방법을 모르는 이들의 입을 대신하는 게 아닐까 하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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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규
내 인생의 책은 <허슬러>(HUSTLER)였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렇다. 나는 이 책을 통해 책읽기의 즐거움을 알았고 골똘히, 집중해서 책을 읽는 습관을 가질 수 있었다. <허슬러>를 만나기 전의 나는 책만 펴면 잠부터 몰려오는 소년이었다. 따지고 보면 작가가 될 수 있었던 것도 다 <허슬러> 덕분이다.
게다가 그 속엔 언제나 <좋은 것>들이 가득했다. 하지만 그것이 이유의 전부는 아니다. 그후 줄곧 나는 수많은 책들을 읽었다. 위대한 시집과 소설들, 철학서적과 사회과학서적… 과학과 생물서적에서 경전에 이르기까지. 물론 그 목록에는 내 인생의 책이요 하고 내세울 만한 지성의 결정체들이 얼마든지 널려 있다. 하지만 <허슬러>를 내 인생의 책으로 삼는 이유가 있다. 언제부턴가 나 자신이 <어쩔 수 없는> 인간이란 사실을 자각하고 나서였다. 톨스토이를 읽었지만 그래도 <엉덩이>를 좋아하는 나를, 맑스에 심취한 건 심취한 거고 <가슴>을 좋아하는 나를, 성경을 읽고 기도를 올린 후에도 <허슬러>를 펴드는 나를, 나란 인간을, 그 <어쩔 수 없는> 나란 인간을 이 책은 늘 잔인할 정도로 상기하고 상기하게 만들어준다.
<허슬러>를 읽으며 나는 생각한다. 인간이 그리 특별한 존재가 아님을. 어쩔 수 없이, 어쩔 수 없는 존재란 사실을. 실은 어쩔 수 없어, 인간은 철학을 만들고 소설을 쓴다는 사실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고마워 언니들! 래리 아저씨도 오래오래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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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영
작가, 사회운동가, 영화감독으로서 지칠 줄 모르는 열정적인 삶을 살았던 마르그리트 뒤라스가 긴 혼수상태에서 기적처럼 회생한 후 죽음을 예감하며 연인과 나눈 대화나 삶의 짧은 단상들을 기록해놓은 마지막 작품 <이게 다예요>에서 ‘당신이 정말 좋아하는 책은 뭐죠?’라는 얀의 질문에 뒤라스는 이렇게 대답한다. ‘<태평양을 막는 방파제>’, 어린 시절 나는 1996년 <이게 다예요>를 읽은 후부터 다작의 작가로 알려진 뒤라스가 그것도 죽음 직전에서 자신이 정말 좋아하는 책이라고 말한 <태평양을 막는 방파제>가 궁금했다. 그리고 그 소설이 내가 가장 좋아하는 뒤라스의 소설 <연인>과 같은 시기를 다룬다는 점도 흥미로웠다. 2004년 드디어 우리나라에 번역 출판된 <태평양을 막는 방파제>를 읽으면서 나는 뒤라스가 <이게 다예요>에서 왜 다음과 같이 썼는지를 비로소 알게 되었다. ‘글을 쓸 때, 나는 삶 속에서와 같은 광기에 휩싸인다. 글을 쓸 때 나는 돌덩어리들을 다시 만난다. <태평양을 막는 방파제>의 돌들을.’
<태평양을 막는 방파제>의 가족은 어머니와 아들 조제프, 딸 쉬잔이다. 어머니는 15년 동안 일을 하면서 모은 돈으로 식민지 관리국으로부터 불하지를 받는다. 불하지를 개간해서 농사를 지어 성과를 보이면 그 땅은 어머니의 것, 그리고 이들 가족의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의 세월을 모두 지불하고 그들이 불하받은 땅은 태평양의 파도에 해마다 쓸려가고 바닷물의 소금기에 젖어있는 땅, 아무것도 자랄 수 없는 땅이다. 그 사실을 알고도 어머니는 포기하지 않고 같은 처지의 원주민들을 설득해서 태평양을 막는 방파제를 건설한다. 그러나 그들이 고생하여 만든 방파제조차도 한순간에 파도에 휩쓸려 가버린다. 방파제를 짓기 위해 또 빚을 진 어머니,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불하지를 잃어버리게 될 어머니는 관리국에 끊임없이 편지를 쓰고 슬퍼하고 아파한다. 실패할 것을 알지만 그걸 포기하는 순간 살아가야할 이유를 잃어버리는 지독한 절망의 끝에 놓인 어머니의 무모한 열정을 바라보는 조제프와 쉬잔. 그들은 누군가가 나타나서 그곳을 그리고 어머니를 떠날 수 있게 되기를 꿈꾼다.
어쩌면 뒤라스에게 인도차이나 식민지에서 보낸 어린 시절은 작가로서의 평생의 과제였을지도 모르겠다. 뒤라스는 그 혹독한 체험을 타고난 문학적 재능으로 1950년 <태평양을 막는 방파제>, 1984년 <연인>, 1991년 <북중국의 연인>으로 승화시킨다. 뒤라스는 그 반복을 통해, 스스로에게 몰두하는 열정적인 글쓰기 통해 어떤 극한을 넘어선다. 뒤라스는 나에게 작가란 어떤 사람인가를, 명백히 그리고 환상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다. 글을 통해 사랑하고 글을 통해 자신을 치유하고 글을 통해 살아야 할 이유를 발견했던 뒤라스. 일평생 쓰고 또 쓰고도 죽음 앞에서 또 쓸 책이 있다고 말했던 뒤라스. 뒤라스는 나의 로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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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경
“인간은 자기 마음속에 있는, 굳게 닫힌 문 뒤에 존재하는 어두운 미로와 비밀스런 장소에 대해 전혀 알지도 못하면서 다른 세계와 다른 문명을 이해하려고 우주로 진출했다.”
어린 시절부터 나에게 상상력과 미래에 대한 호기심을 일깨워준 것은 주로 SF소설들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충격과 감동을 준 작품이 스타니스와프 램의 <솔라리스>이다. 스타니스와프 램은 원래 폴란드의 의학박사로 이론생물학, 사이버네틱스, 철학, 종교학, 정보이론, 과학철학, 수학, 시, 소설에 모두 조예가 깊었다. <솔라리스>는 구소련의 거장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에 의해 1972년 영화로 만들어져 ‘사상 최고의 SF영화’라는 찬사를 받은 바 있으며, 2002년도에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에 의해 리메이크되었다.
<솔라리스>를 읽기 전까지는 SF소설이란 주로 우주와 미래세계를 그리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우주와 미래세계와 과학적인 요소가 모두 등장하는 <솔라리스>가 궁극적으로 탐사하는 세계는 바로 ‘인간’이었다. 작가는 이 소설에서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지식을 총동원하여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당연히 이 작품은 철학과 심리학이 가미된 SF적 실험소설이다.
‘솔라리스’는 붉은색 태양과 푸른색 태양 둘레를 도는 행성의 이름이다. 솔라리스 행성의 표면은 바다로 덮여 있는데 이 바다는 콜로이드 상태의 시럽을 닮았으며 고도의 지능과 인식능력을 갖고 있다. 최근 솔라리스 행성을 탐사하러 간 과학자들이 자살하거나 정신착란에 걸리거나 소식두절 상태가 되는 사고가 일어난다. 이를 조사하러 떠난 케빈이 알아낸 사실은 솔라리스의 바다가 과학자들 각자에게 결코 잊거나 무시할 수 없는 ‘방문객’들을 보낸다는 것이다. 그 방문객은 솔라리스의 바다가 인간의 뇌를 탐구한 결과물이다.
솔라리스에 도착한 후 케빈 역시 뜻밖의 방문객을 맞이하게 된다. 방문객은 케빈의 무의식 속에 남은 죄책감의 근원이자, 한때 사랑했으나 지금은 죽고 없는 여인 레아이다. 두려움과 공포에 휩싸인 케빈은 그녀를 돌려보내지만, 솔라리스의 바다는 그녀를 끝없이 반복 재생시킨다. 참다못한 케빈은 그녀를 로켓에 넣어 우주로 발사시켜버리기까지 한다. 그러나 다음날이면 어김없이 그녀가 찾아온다. 그녀는 과거의 그녀라기보다는 현재 케빈의 무의식 속에 남겨진 그녀이다. 그러므로 시간여행을 해서 과거의 인물을 만나거나 꿈속에서 과거의 인물을 만나거나, 유령이 된 인물을 만나는 것과는 또 다른 종류의 기상천외한 만남이 펼쳐진다. 이런 상황에 부딪히면 인간은 자신의 맨얼굴을 드러내지 않을 수 없다.
<솔라리스>가 그려낸 무자비할 정도로 냉혹하고 신비로운 세계 속에서, 나는 완전히 넋이 나가고 말았다. 책을 덮으면 그만인 가상인 줄 뻔히 알면서도 머리카락이 빠지도록 고민하고, 번민하며 눈물을 흘린 기억이 생생하다. 나라면 내 무의식이 원하는 대로 과거의 연인 곁에 영원히 남을 것인가, 의식이 명령하는 대로 그를 제거하고 현실로 돌아오는 길을 선택할 것인가.
과학적이고 철학적인 설명들 때문에 쉽게 읽히지 않는다는 게 유일한 단점이지만, 영화만 봐서는 솔라리스의 세계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컴퓨터그래픽기술이 고도로 발달한 지금에도 이 소설을 섣불리 영화화하기 어려운 이유는, 이 소설이 다룬 세계가 단순히 우주의 어느 행성이 아니라 바로 수없이 뒤엉킨 미로를 지닌 인간의 복잡한 내면이기 때문이다. 재능이 부쳐 늘 미완성으로 끝내면서도 소설을 쓰려고만 하면 일단 터무니없는 상상부터 하고 보는 내 고약한 버릇이 모르긴 해도 <솔라리스> 때문인 것 같다. 몇 번 흉내만 내보았을 뿐이지만, 인간을 가상소설이라는 새로운 무대에 세울 때 그들을 또 다른 측면에서 정교하게 관찰하는 재미가 그만이다. 물론 아무런 지도도 없이 가상의 공간에 하나의 세계를 건축하고, 그곳에 사람이 깃들이게 하는 일은 천지창조만큼이나 어렵다. 아마 하느님조차 여러 번 만들다 구겨버린 초안들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가상소설은 시작하는 것 이상으로 완성하고 끝내기가 더 어렵다. 그것이 내가 스타니스와프 램이나 올더스 헉슬리, 조지 오웰, 주제 사라마구 그리고 그 밖의 수많은 위대한 소설가들과 그들의 강인한 상상력을 숭배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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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윤경
나는 지하철에서 책읽기를 좋아한다. 지하철역 벤치에 앉아 시계를 흘끔거리면서 책을 읽는 그 맛은 무어라고 설명하기 어렵다. 조용하고 흐름이 느린 책은 지하철 독서에 적합하지 않다. 읽는 사람을 쥐락펴락하는, 재미 넘치는 책이 알맞다. 2호선 열 다섯 정거장을 오가며 출퇴근하던 시절은 내 인생의 황금기였다. 그 때 읽었던 많은 책들 중에 오늘까지도 단연 기억에 남는 책은 바르가스 요사의 <나는 훌리아 아주머니와 결혼했다>다.
<훌리아 아주머니>는 작가 자신의 첫 결혼 이야기에 약간의 상상력을 보태 만든 자전적 소설이다. 작가 자신이 18세의 청년으로 실명 등장한다. 주인공은 18세의 나이로 32세의 친척 아주머니와 사랑에 빠진다. 아내가 되는 훌리아는 삼촌의 처제, 볼리비아 태생의 이혼녀다. 아무리 관대한 남미 사람들이라도, 이 커플의 연애가 순조로울 리 없다.
1950년대의 페루를 배경으로(한국의 6.25 이야기도 한줄 등장함) 주인공인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엎치락뒤치락 결혼 대작전과 천재 방송작가 페드로 카마초의 요절복통 라디오 드라마 이야기가 한 챕터씩 나란히 진행되는 특이한 구성이다. 페드로 카마초는 TV가 귀하던 시절 대중을 울리고 웃기던 라디오 드라마의 스타 작가로, 듣는 이의 애간장을 능수능란하게 쥐어짜는 뛰어난 드라마들을 집필한다. 바르가스 요사가 근무하는 라디오 방송국은 페드로 카마초를 영입함으로서 절정의 청취율을 구가하며 승승장구한다.
천재라고 해서 인격자는 아닌지라, 페드로 카마초는 전대미문의 괴짜요, 어이없을만큼 안하무인이고 편협한 사람이라서 아르헨티나 사람에 대해 이유 없는 적개심을 가지고 있으며 그 적개심을 방송극에 아낌없이 드러낸다. 그의 드라마 속에서 무뢰한, 협잡군, 정신병자, 거짓말쟁이 역할은 아르헨티나 인들이 도맡고 있으며 사석에서는 아르헨티나인을 "씹구멍을 후비고 후장을 딸 놈들"이라고 거침없이 표현한다. 그리고 자신의 나이가 아마도 50대인 듯, 인생의 황금기는 50세부터라고 선언하며 그의 방송극에서 모든 선하고 현명한 역할은 50대 남자(가끔 여자)가 도맡는다.
그러나 하루에 열 편의 방송 원고를 혼자서 써내는 천재 작가는 소설 중반쯤부터 차츰 광기를 드러내기 시작해, 소설 후반부에 나오는 그의 방송극들은 거의 엉망진창, 뒤죽박죽, 슬랩스틱 코미디를 보는 것 같은 황당한 즐거움을 준다. 한 방송극에서 죽었던 사람이 다른 극에 등장하고, 굉장히 착한 배역을 맡았던 사람이 갑자기 미치광이가 되어버리고, 이제까지 모든 방송극의 등장인물이 갑자기 한 방송극에 총 출연해서 상상도 못할 천재지변이나 말도 안되는 엉뚱한 상황, 예를 들면 지진, 화산, 축구장 폭동, 해일, 혁명 등등 때문에 몰살당해버린다... 뭐 그런 식이다.
그러니까 이 소설에서 페드로 카마초가 주는 즐거움은 세 가지로 요약된다. 1) 소설 전반부의 천재적 방송극 작품(상당히 재미있음) 2) 페드로 카마초 본인의 괴짜성에 대한 묘사(황당한 인간임) 3) 소설 후반부의 말도 안되는 미치광이 작품(엄청 웃김!!) 페드로 카마초의 황당무계함에 비하면 18살 소년과 32세 이혼녀의 결혼 소동은 너무 점잖아보일 지경이다. 페루의 가족들도 우리나라 가족들처럼 참견하기 좋아하고 친하게 지내는지, 소년의 결혼을 둘러싸고 대가족이 장난 아닌 소동을 피운다.
나 자신의 숨기고 싶은 속물성을 페드로 카마초에게서 위로받은 기분이랄까, 나 자신을 훌리아 아주머니의 위치에 놓고 열여덟살의 꽃미남 문학청년과 재혼하는 은근뻔뻔한 상상을 즐겨본달까. 얇지 않은 한권의 책을 이렇게 후련하게 읽어내고 정신적 치유효과마저 거두다니, 이래서 나에게는 TV가 필요치 않은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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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택수.
출간되자마자 미풍양속을 헤친다는 이유로 벌금형을 선고받고 여섯 편 삭제 판결이라는 수모를 감수해야 했던 시집. 보들레르의 <악의 꽃>은 발터 벤야민의 말처럼 동시대의 독자보다는 후세의 독자를 겨냥한 문학이었다. 서시에 해당하는「독자에게」라는 시를 보자. “우리 죄는 끈질기나, 뉘우침은 무르다/ 참회의 값을 톡톡히 받아들고/ 싸구려 눈물에 때가 싹 가신 기분으로/ 우쭐대며 되돌아온다” 인간성에 대한 깊은 통찰과 역사의 진보에 대한 회의가 배면에 깔려 있는 구절이다. 150여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이런 시구절 앞에서 나는 가슴이 뜨끔해진다. 혹여 내가 ‘싸구려 눈물’을 흘리고 있는 건 아닌지, 우리 시대가 지난 연대에 대한 ‘참회의 값’을 챙겨들고 거들먹거리고 있는 건 아닌지…… 1848년 혁명의 주도세력이었던 부르주아와 보수적인 정치세력과의 결탁, 그리고 맹목적인 ‘자본주의 발전’ 이데올로기에 편승했던 서구 계몽주의 이념에 대한 시인의 야유는 아직도 유효한 데가 있다.
<악의 꽃>에는 또한 거대한 자본의 힘에 떠밀려 도시를 배회하는 ‘산책자’의 이미지와 부랑자들의 이미지가 빈번히 등장한다. ‘권태’와 ‘게으름’과 ‘추악함’으로 무장한 인물들. 그들은 부르주아 사회에 대항하는 하나의 방법적 메타포다. 그 인물들에 대한 시편들을 따라 읽으면서 금치산자와 아편쟁이로 유곽을 전전했던 시인의 일대기를 떠올리는 것이 지나친 억측만은 아닐 것이다. 시인은 그렇게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하고 끝없이 떠도는 자였다. ‘알바트로스’의 날개 같은 거추장스런 영혼을 끌며 지상에 유배된 자의 비애를 곱씹고, 무력함의 극한까지 온몸으로 시를 밀고 가서 살아있고자 했던 자였다. "늘 취해 있어야 한다/ 문제의 핵심은 이것이다/ 이것만이 문제다". 아픈 생에 만취해서 비틀비틀 신산한 도시의 풍경 속으로 눈부시게 사라져간 시인. 보들레르의<악의 꽃>은 자신의 불우와 시대의 불우를 겹쳐 부른 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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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유주
오늘 나는 단 한 권의 책을 고르는 것에 실패했다. 단 한 권의 책이란 글쎄, 내게는 언제나 복수로 존재해왔던 것이 아닐까. 게다가 애써 고른 어떤 책은 내가 아직 읽지 않은 것이었고, 어떤 책은 이미 물리도록 읽어 더 이상 할 말이 없었고, 또 어떤 책은 그 묵직한 무게감에 눌려 지레 아무 것도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누군가가 내게 단 한 권의 책을 말해 달라고 한다면, 나는 <세상의 모든 아침>을 꼽을 것 같다. 좋아하는 책은 끝까지 읽지 않는, 다소 좋지 않은 버릇을 가지고 있음에도 세 번을 공들여 읽었던 책이다.
대단찮은 이유를 들자면 내가 이미 오래전에 절판된 상태였던 이 책을 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헌책방에서도 책을 찾아내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학교 도서관에서 빌려 읽어야 했었다. 내가 다닌 대학의 도서관은 두 군데로 나뉘어 있었는데, 그나마도 먼 쪽의 도서관에서 소장하고 있어 우편으로 빌린 책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대출 기한은 3주일이었고, 나는 1주일에 한 번씩 세 번을 읽고 책을 반납했다. 그때의 아쉬움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17세기의 파리, 실존했던 인물들인 마랭 마레와 생트 콜롱브가 연주하는 선율이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아니 책을 덮은 후에도, 들리는 것 같았다. 저자인 파스칼 키냐르가 손수 각색하고, 그의 친구인 조르디 사발이 음악을 맡은 동명의 영화를 본 것이 책을 읽고 난 다음이었는지, 그 전이었는지는 지금 알 수가 없다. 글이 먼저였는지, 음악이 먼저였는지, 영상이 먼저였는지는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세상의 모든 아침은 다시 오지 않는다는 문장을 떠올릴 때면 어디선가 비올 소리가 풍기는 것만 같다. 그리고 무슨 말을 더 해야 할까. 나는 다만, 이 책이 오늘의 나와 가까이 있는 도서관 어딘가에 숨겨져 있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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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서
내가 정말로 좋아하는 책은 소개하기가 애매하다. 거의 대부분 절판되었기 때문이다. 포스트모더니즘 소설집인 <사랑은 오류>나 제임스 더버의 <우리 시대를 위한 우화> 같은 책은 소개해봤자 찾아 읽기가 어렵다. 왜 이처럼 훌륭한 책들은 금방 절판되는 것일까? <죽기 전에 먹어야 할 아홉 가지 조림반찬> 따위의 제목을 단 책들은 서점마다 가득하면서. 수년 전에 나는 우연히 어느 놀라운 소설책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원서를 읽다 능력부족으로 집어치우고는 몇 해 전에 나왔다는 번역본을 찾아 도서관과 서점을 기웃거렸다. 그러다 마침내 내 고향인 춘천의 서점에서 한 권 발견했는데, 기가 막히게도 그 책은 소설 코너에 있지 않고 레저 코너에 있었다. <월간 낚시>와 <릴낚시의 기초> 사이에서 잔뜩 성이 난 채로.
그 책의 이름은 <미국의 송어낚시>다. 나는 이 책을 읽고, 읽고, 또 읽었다. 이 책의 어떤 문장은 내겐 성스럽다. 또 어떤 문장은 너무 웃겨서 읽을 때마다 뒤로 넘어가곤 한다. 어떤 문장은 사진첩을 쓰다듬는 늙은 기생의 손길처럼 쓸쓸하고, 또 어떤 문장은 햇살을 받은 열대의 바다같이 투명하게 눈부시다. 그러나 이 소설의 진정한 매력은 신선하고 기발한 문장보다는 텍스트 자체의 놀라운 개방성 혹은 극단적인 폐쇄성, 즉 모든 설명이 가능할 것처럼 보이면서 동시에 어떠한 설명도 완전히 수용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학자들은 미니멀리즘이니 문명비판이니 이런 저런 소리를 하지만, 그건 그야말로 사소한 의견에 불과하며 원 텍스트만을 이용해 이를 반박하기도 아주 쉽다.
도대체 이 소설은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간단하다. 최소한 이 소설을 쓰는 동안만큼은 리처드 브라우티건이 천재였기 때문이다. 천재가 아닌 우리도 이 작품을 읽을 수 있고, 운이 좋으면 상당부분 이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설명할 수는 없다. 억지로 구성해 낸 조잡한 설명은 이해를 돕기보다는 오히려 현혹시킨다.
천재는 우리와 다른 방식으로 우주를 대한다. 우주란 늘 우리의 이성 밖에서 운행하며 애초에 설명 불가능한 것이기에, 천재들은 주절주절 설명하고 도식화하려 노력하는 대신 그들이 느낀 우주를 작품 속에서 묘사한다. 천재성이 뛰어나면 뛰어날수록, 작품에 담긴 우주는 진짜 우주 - 우리의 이성과 논리와 지식이 영원히 다다를 수 없는 저 너머의 세계 -를 닮는다.
모든 글에는 하나의 단어가 다른 단어와 연결되는, 하나의 장면에 다른 장면이 이어지는, 하나의 관념과 다른 관념이 결합되는 자기만의 방식이 있다. 나는 이 소설이 품고 있는 그러한 방식들, 느낄 수 있으나 설명할 수 없는 그것들을 진심으로 좋아한다. 그래서 이 소설의 존재를 알고 또 좋아하는 누군가를 만나기라도 하면 무척 반갑고 기쁘다. 이 책은 오래전에 절판되었으나, 다행히도 몇 년 전에 새 번역본으로 출간되었다. 나는 새 번역본도 샀다. 그리고 절대로 남에게 빌려주지 않던 내 오래된 <미국의 송어낚시>와 함께 책상에 나란히 내려놓고는 어느 분이 더 잘나셨는지 가늠해보았다. 아무래도, 오래된 쪽이 더 마음에 들었다. 자살하기 전 리처드 브라우티건의 촌스러운 흑백 사진이 표지에 큼지막하게 걸려있기 때문일까? 아무튼, 오래된 <미국의 송어낚시>를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펜을 찾기 귀찮아 손톱으로 꾹꾹 눌러놓은 저 마술의 언어들, 여기저기 무심히 접혀 있는 귀퉁이들, 사년 전에 집을 나간 내 고양이가 수줍게 반쯤 찢어발긴 127쪽, 그 사소한 기억과 흔적들이 모이고 모여 춘천의 서점에서 산 게 아니라 마치 브라우티건과 내가 머리를 맞대고 함께 써내려 간 원고인 듯한 느낌을 주... 아차,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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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현
토니 모리슨을 읽는 것은 때론 고통이다. 길게 벌어져 핏물이 배나오는 상처에 혀를 대고 쓱 핥는 느낌. 그럼에도 포기할 수 없는 쾌락이 그 안에 있다. 토니 모리슨이 평생에 걸쳐 천착해온 ‘흑인, 여성’ 문제는, 이미 한 작가 개인의 문학적 주제 차원을 넘어 ‘주류/비주류’라는 세상의 강고한 권력체계에 맞서는 하나의 경이로운 표지가 되었다.
그녀의 2003년 작 <러브>는 사랑과, 사랑의 모든 내재적 속성들-증오, 질투, 권력, 배반, 용서-에 관한 이야기이다. 오십 년에 걸쳐 서로 격렬하게 미워하며 끔찍하게 사랑하는 두 사람, 히드와 크리스틴은 둘 다 흑인, 여성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운명이 조금 쉬웠을까. 글쎄, 가정은 통용되지 않는다. 분명한 건 히드와 크리스틴 뿐 아니라 가해자 역할을 하는 (부와 권력을 가진 남성인) 코지나 주니어까지 도무지 안쓰러워하지 않을 수 없는 인간들이라는 것이다.
타고난 악인은 아무도 없지만 일방적 희생자도 없다. 그런데 왜 이들은 반목하는가. 나의 생존을 위해 절박하게 남을 짓누르는가. 짓눌림 당하는가. 그 뒤에 도사리고 있는 것은 대체 무엇인가. 개인들의 삶의 역사를 통해 은밀하고 거대한 사회적 구조를 아울러 드러내는 작가의 시선이 무시무시하다.
많이 아팠을 적에 이 책을 읽었더랬다. 처음 책장을 들췄을 때 시야가 흐리고 맥없이 몸이 까부라지는 것 같았는데, 정신없이 몰두해 읽다 보니 어느새 다른 생각이 아무 것도 나지 않았다. 독자로서는 고맙고, 작가로서는 부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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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태준
종교를 떠나 전 세계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온 불교의 초기 경전입니다. 부처님의 육성을 가까이서 생생하게 듣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그 유명한 경구가 들어있는 책이 바로 이 <숫타니파타>입니다. 팔을 뻗어 닿을 수 있는 거리에 두고 수시로 꺼내 읽는 책입니다. 행복을 찾을 수 있게 인도하여 비와 불을 피하듯 불행을 피하게 합니다. 두고두고 목마를 때 들이킬 책입니다.
대학 때 문학하는 선배들이 권해준 시집입니다. 이성복 시인은 제가 참으로 좋아하고 부러워하는 시인입니다. 이 시집을 읽고 있으면 '앓는 어머니처럼' 내가 아픕니다. 이 시집을 다 읽고 덮었을 때 저는 그 자리에서 꼼짝도 못하고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정처 없이 슬픈 새벽이었습니다. 일례로 「서시」라는 시에는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여, 당신이 맞은편 골목에서 / 문득 나를 알아볼 때까지 / 나는 정처 없읍니다". 가슴에 작은 떨림이 생겨나고, 가슴에 작은 균열이 생깁니다. 백 마디 말보다 「남해 금산」이라는?시를 소개하는 게 좋겠습니다.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 / 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갔네 / 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 / 그 여자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갔네 / 떠나가는 그 여자 해와 달이 끌어 주었네 / 남해 금산 푸른 하늘가에 나 혼자 있네 / 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나 혼자 잠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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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인
일단 소설로 분류되어 있는 이 책을, 그러나 어떻다고 말하면 좋을까. 이 책과의 조우가 없었더라면 지난 80년대 후반의 암울한 시간들을 내가 과연 견딜 수 있었을까. ‘문학하기’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을 지금껏 지탱할 수 있었을까. 이 작품은 내게 소설 이상의 것이면서, 또한 문학의 이름으로 어디까지를 겨냥할 수 있는 것인지, 그 겨냥의 태세가 어떠함으로써 비로소 문학다울 수 있는 것인지를 통렬하게 일깨웠다.
‘죽음의 한 연구’를 위시하여 박상륭문학 전반이 발하는 향기는 몹시도 사납게 고독한 채로 온갖 고름과 진물을 다 끌어안고 버그럭거리는 가운데의 것이어서 바로 대하기에 차마 끔찍한 바 있다. 그러나 눈 있고 후각이 예민한 독자들은, 이 고약하게도 아름다운 냄새를 이미 자신의 몸에 익혀 오고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박상륭 문학은 ‘죽음의 한 연구’라는 제목이 분명하게 보여주는 바, ‘살을 입고 태어남의 지난함과 지복스러움’을 일관된 문학적 화두로 삼고 있다. 그의 글쓰기는 삶과 죽음의 근원, 존재의 근원을 향한 긴장과 탐욕스런 헌신으로 가득차 있다. 글쓰기를 수행해 나가는 그의 기상은 마치 굶주린 독수리나 표범이 먹이를 노리는 기세와도 비슷하여, 사납고 집요하며, 비수처럼 날 세워진 그의 온몸은 터럭 하나까지 삼엄하다.
아름다운 책들에 무슨 서열이 있겠는가. 동서양의 경전들을 위시하여 고독한 영혼들이 치른 모든 고투의 기록들은 분야를 막론하고 하나하나가 다 무섭고도 아름답다. 그리고 그 매혹은 읽는 이의 생에 강렬한 흔적을 남긴다. 적어도 우리 문학의 높이와 깊이에 진지한 관심을 가진 독자들께라면 나는, 이 책을 통과하지 않고는 한국의 현대 산문 문학에 온전히 입문할 수 없다고 귀뜸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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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기원.
장자는 책이 아니다. 커다란 거울이다. 무얼 가르쳐주고 말하려 하는 대신 네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보라 할 뿐이다. 그의 앞에 서면 고정관념, 분별심, 이분법적 사고방식으로 틀 지워진 나의 딱딱한 자아가 낱낱이 보일 뿐이다. 장자는 초대장이다. 신나는, 자유로운, 드높은, 풍요로운 삶으로의 초대장. 장자를 읽는다는 건 장자와 사랑에 빠지는 일이다. 장자를 먹고, 숨 쉬고, 장자로 사는 일이다. 사랑하는 이와 한 몸을 이루듯. 장자와 함께 하는 동안 난 겨드랑이가 간지러웠다. 잃었던, 혹은 잊고 지냈던 날개가 돋아나려는 때문이었다. 붕새의 날개와도 같은 드넓은 의식의 날개가. 장자는 죽은 자가 아니다. 지금도 펄펄 살아 그 호탕한 웃음과 불꽃 같은 눈매로 시대를 초월한, 문자를 벗어난 절대 자유의 경지를 천둥의 목소리로 말해주고 있다. 고백하건대 난 장자를 두 번째로 펼치기가 두려웠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 느꼈던 첫사랑의 감격과 설레임이 조금이라도 흐려질까 염려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시 장자는 장자.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도 그의 흡인력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고 아니, 오히려 더 큰 품으로 날 끌어안았다. 하지만 언젠가는 <장자>도 모두 잊어야 할 것이다. ‘물고기 잡는 틀은 물고기를 잡기 위한 것. 물고기를 잡았으면 그것은 잊어야 합니다. 덫은 토끼를 잡기 위한 것. 토끼를 잡았으면 그것은 잊어야 합니다. 말(言)은 뜻을 전하기 위한 것. 뜻을 전했으면 그것은 잊어야 합니다. 나도 자기 말을 잊은 사람을 만나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外26:13)라고 그가 말했듯. 그러나 그 때까지는(그 때가 언제인지는 알 수 없으나) 난 그에게서 떠날 자신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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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규
스물여섯 나이에 나는 붕 떠 있었다. 몇몇 직장을 전전했으나 우연인지 필연인지 모두 별 볼일 없었다. 쉬면서 생각해 본다는 핑계로 집을 나와 친구 집에 머물렀다. 다행히 친구는 아무 눈치도 주지 않는 마음씨 좋은 녀석이었다. 딱 한 번 밥을 먹다가 나를 향해 유리컵을 던지긴 했다. 아마 정치적인 이야기를 하던 중에 감정이 격해졌던 모양이었다. 컵은 내 얼굴을 살짝 스치고는 벽에 부딪쳐 산산조각 났다. 다시 소설을 써 볼까 생각 중…… 종종 입 밖으로 그런 말을 내뱉으면서도 내심 역겨웠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능력 없는 무기력한 자의 핑계 같아서. 물론 사실이 그렇기도 했거니와 실제로도 위장병이 도져서 목으로 신물이 올라오곤 하던 때였다.
주로 늦은 아침에 승객이 별로 없는 지하철을 타고 도서관으로 향했다. 다른 공부는 안 하고 하루 종일 아무 책이나 빼들고 앉아서 읽었다. 느릿느릿 서가를 배회하면서 눈에 띄는 책을 골랐다. 글자가 흐릿하게 보이고, 머리가 어지러워지면, 엎드려서 짧게 잠을 잤다. 그런데도 잠깐씩 꿈을 꾸었다.
그때 나는 책을 읽는다기보다는 느린 헤엄을 치는 기분이었다. 책들로 뒤덮인 작은 호수가 있다. 책 한 권을 펼쳐든다. 손가락을 움직일 때마다 단어가 문장이 이야기들이 비틀대며 물결을 이룬다. 손가락 사이로 흘러가도록 그냥 내버려두고 계속 움직인다. 그러다 지겨워지면 호수 밖으로 나와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 머리카락에서 차가운 물방울 대신 복잡한 감정들이 뚝뚝 떨어진다.
어느 날, 헤엄을 치다 나는 살짝 울고 말았다. 후안 룰포의 <뻬드로 빠라모>를 읽었을 때였다. 통곡과는 거리가 멀지만 귀밑까지 축축한 기운이 차오르는 기분. 어찌 보면 우스운 일이었다. 나는 <뻬드로 빠라모>를 완벽하게 이해하지도 못했다. 고작해야 단순하고 표면적인 줄거리만을 따라갔을 뿐이었다.
후안 쁘레시아도는 어머니의 유언에 따라 아버지 뻬드로 빠라모를 찾아 꼬말라로 간다. 그곳은 어머니의 고향. 그러나 그가 찾아간 꼬말라는 폐촌이었고 뻬드로 빠라모 역시 세상을 뜬 지 오래였다. 그곳에서 후안은 매일 죽은 사람과 만나고 이야기 한다. 꼬말라는 죽은 이들만이 산 사람처럼 행동하다 다시 사라져 버리는 땅이었다. 결국 유일한 산 자였던 후안 역시 꼬말라에서 목숨을 잃고 만다. 소설은 이제 죽은 자들이 떠들어대는 목소리로 뒤덮인다. 어느 순간인가 책을 읽는 나 역시 소설 속으로 흐물흐물 사라진다.
한 번 더 눈을 뜨게 해 주는 책, 훔치고 싶어지는 책, 어깨를 빌려주는 책은 훌륭한 책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나를 사라지게 만드는 책은 더 이상 책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내가 한 번도 마주치지 못했던, 육신에서 벗어난 이후에야 볼 수 있는, 내 영혼의 희미한 그림자와 더 가깝다.
돌이켜보면 스물여섯의 나는 꼬말라를 배회하는 죽은 자들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아무런 소속도 없었고 앞날은 계획조차 하기 힘들었다. 버틸 수 있는 행동이라고는 본질적으로 과거의 이야기인 책을 들여다보는 게 전부였다.
물론 지금도 크게 달라졌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여전히 책들로 뒤덮인 호수에 떠 있고, 머리카락에서는 복잡한 감정들이 뚝뚝 떨어진다. 물귀신 같은 꼴이다(작가들이란 어쩌면 물귀신과 비슷한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그저 스쳐갈 뿐인 타인의 고통 기쁨 죄악 따위의 감정들을 물고 늘어지니 말이다). 다만 더 이상 막막하고 두렵지는 않다. 알고 보면 죽은 자들의 삶이나 산 사람들의 삶이나 실은 별로 다르지 않을 것 같아서. 우리들은 배회하고 절규하고 미친 듯이 웃어대며 어느 순간 분실되고 말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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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종국.
엄밀히 말하자면 위화(余華)의 장편소설 <살아간다는 것[活着]>(푸른숲)은 내 인생 최고의 책이 아닐지도 모른다. 굳이 ‘내 인생 최고의 책’을 단 한 권 꼽아야 한다면 나는 필경 도스토예프스키나 마르케스, 조지 오웰, 조정래, 이문구, 황석영 등의 책을 펼쳐놓고 석 달 열흘쯤 고민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다른 책을 제쳐놓고 ‘내 인생 최고의 책’이라는 문장을 듣는 순간, 위화의 책이 가장 먼저 내 머릿속에 스쳤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아마도 내가 구상 중인 장편소설에 그의 소설 <살아간다는 것>이 큰 영감을 주었으며 지금도 그 구상을 가지고 노상 이리저리 궁굴리고 있기 때문일 터이다.
어느 때라고 힘없는 민중들이 살아내기 쉬운 시절이 있었을 턱이 없지만 20세기만큼 온갖 고난들이 쉴 새 없이 터져 나와 민중들을 괴롭혔던 때도 흔치 않을 것이다. 중국 역시 우리와 다르지 않아서 청 왕조의 붕괴와 중국 혁명, 대약진과 문화대혁명을 거치는 내내 민중들의 고초는 지난했을 터인데, <살아간다는 것>은 그 시절을 살아낸 ‘복귀’ 노인의 일대기를 잔잔히 읊고 있는 액자소설이다. 노름으로 인한 가문의 몰락 이후 아버지 어머니 아들 딸 아내 사위 외손자를 차례차례 앞세우고 자신의 이름을 붙인 소로 밭을 갈고 있는 노인의 이야기는 위화의 말마따나 “사람은 살아가는 것 자체를 위해 살아가지, 살아가는 것 이외의 그 어떠한 것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님을 웅변한다.
새옹지마(塞翁之馬)의 고사를 보는 듯한 이 이야기는, 그러나 차츰 주인공에게 가해지는 삶의 고통이 더해질수록 일방적이고 참혹한 ‘TKO패’로 기울지만, 적어도 복귀 노인의 인식 안에서의 인생은 살아가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닌 그 무엇이 되고 만다. 니힐리즘 혹은 마조히즘으로 보일만큼 주인공의 인생사는 덧없지만 이 소설의 마지막 장은 마치 산꼭대기에서 일부러 돌을 굴려 떨어뜨리는 시시포스의 짧지만 강렬한 쾌감을 보는 듯하다. 우리 민중에게 그러한 실패가 쾌감일 수도 있다는 건 심오한 역설에 다름 아닐 것이므로. 이 소설을 영화화한 장이모 감독의 「인생」이 여러 곳에서 정치색을 띠다가 마침내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된 것에 비해 소설 <살아간다는 것>이 한 급 높은 감동을 주는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살아간다는 것, 그것은 ‘살았던’도 ‘살아갈’일 수도 없는 것이므로, 눈물겹고 소중하고 치열한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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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형렬
1970년대를 풍미했던 ‘세계사상교양전집’(을유문화사 1973) ‘세계의대사상’(휘문출판사, 1978) 속에서 나는 처음 장자를 만났다. 인간중심주의의 글들이 답답할 때 읽는 <장자>는 세월이 흐를수록 푸르다. 김명은 씨가 선물한 <장자남화경?(敎林, 현토역해 김탄허) 초판본을 받고 아이처럼 기뻤다. 나는 또 안동림의<莊子>를 가지고 있다.
<사기>를 땅이라 하고 <장자>를 하늘이라고 한다. 바람을 좋아한 장자는 세속의 위대한 범부였다. <장자> 한 줄을 읽고 환희심을 얻는 나는 낯선 지방에서 별을 보는 아이가 된다. <장자>는 한마디로, 새롭다, 재미있다. 붕새가 하늘을 날아오르는 북명의 바다와 하늘, 바람이 빠져나가는 조용한 숲속 잔가지들이 흔들리는 음영, 몇겹의 얇은 꿈속을 떠도는 생을 보여준 나비 이야기. 불편하게 하는 모든 구속과 체제는 장자의 적(敵)들처럼 보인다.
나는 장자의 영아(?兒)이다. 몇 번을 읽어도 지치지 않는 그 영혼의 이야기를 껴안고 산다. 바깥의 허공도 내부의 죽음도 무섭지 않다. 이 철학 에세이의 만물제동(萬物齊同)사상은 마음에 빛을 주었다. 나는 오늘도 <장자>를 머리맡에 펼쳐놓고 ‘양행(兩行)’을 저울질하며 외출하거나 잠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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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혁
나는 잡지를 사랑한다. 잡지라는 단어 속에 들어 있는 ‘잡(雜)’이라는 말도 사랑스럽고, 잡스러운 온갖 이야기들이 종이 위에 얹혀 있다는 사실도 사랑스럽다. 세상에는 수많은 종류의 이야기들이 있고, 그 이야기들을 다루는 수많은 종류의 잡지들이 있다. 서점에 가면 언제나 잡지 매장에 들른다. 잡지의 종류만큼이나 다양한 세상이 있다고 생각하면, 즐거워진다. 나는 잡지를 통해 세상을 배웠다. 어떤 잡지든 상관없다. 요리, 미용, 음악, 미술, 건축, 만화, 스포츠, 과학 등등 내가 원하기만 한다면 언제든 새로운 세상을 만날 수 있다.
나는 잡지의 운명도 마음에 든다. 이사를 가야 할 때, 집이 너무 비좁아 짐을 줄여야 할 때, 뜨거운 라면 냄비의 받침대가 필요할 때, 우리는 잡지를 떠올린다. 우리는 쉽게 잡지를 사고 쉽게 버린다. 그리고 잡지에서 본 지식을 쉽게 잊어버린다. 나는 쉽게 휘발돼 버리고 곧 잊혀지고 다시 기억되고 다음호를 기약하는 잡지의 글과 사진이 좋다. 1회용인 잡지 속의 그 소소한 것들이 내 속에 쌓이고 뭉치고 더미가 되었을 때, 어떤 커다란,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전체가 되는 순간이 있다. 그런 순간들을 만나기 위해 나는 여전히 잡지를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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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은
대학 신입생 시절에 한 강사와 터무니없는 언쟁을 벌인 적이 있었다. 감명 깊게 읽은 책을 말해보라는 질문에 곤란하다 대꾸한 것이 문제의 시작이었다. 하나만 골라내기란 어렵다는 것이 내 요지였고 강사는 기어이 화를 내고 말았다. 강의 첫 시간이니 분위기나 풀어 보자 싶은 질문에 발끈한 셈이어서 그것은 전적으로 내 탓이었다. 한 발 양보해 그렇다면 열 권을 대 보라는 요구에도 끝내 대답을 하지 않았으니 화를 낼만도 한 일이었다. 문학을 하겠다는 녀석이 감명 깊게 읽은 책 한 권 못대고 있다니. 그 때 내가 예로 든 것은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라는 익숙한 질문이었다. 그러니 강사는 내가 장난치는 줄만 알았을 터였다. 보다 유연하게 대답했더라면 벌어지지 않았을 일이라 여전히 미안한 일로 남아있지만 갓 스무 살이었으니 이제는 어디선가 헛헛 웃으면서 이해해 줄 것이라는 믿음도 있다.
열 명의 사람이 모였다면 최고는 열 개쯤 나와야 하지 않을까. 서울에서 최고로 높은 빌딩은? 이라는 질문이라 해도 다를 이유가 없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우린 그렇게 배우지를 못했다. 정답은 언제나 영등포구 여의도동 소재 초고층 건물이어야 했다. 그것이 이를테면 정답이었다.
우리가 우리 문학을 처음 접하는 계기는 아무래도 교과서다. 그 시절 「국어」나 「문학」교과서를 가끔 꺼내보면서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교과서들은 대부분 훌륭했다. 종합 문예지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만큼 필진도 범위도 또 그 내용까지 흠잡을 구석이 없었다. 그런데 그 책들이 그 때는 정말이지 꼴도 보기 싫었다. 고루하고 지루해서 답답하기만 했다. 아직도 그 책을 버리지 않고 있느냐 되물으면서 나를 괴상한 녀석으로 여기고는 서슴없이 변태라 말하는 친구까지 있으니 나만 그런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뭐랄까 그것이 교과서의 현실인가. 그런 생각.
그 시절 교과서는 마치 형형색색의 난수표 같았다. 무지개 색이 총동원된 플러스펜의 깨알같은 글씨를 보고 있노라니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그 내용에서 앞서 말한 유연함을 찾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대부분이 단정적인 까닭에서였다. 작가의 출생 년도와 사망 년도, 문파, 대표작, 주제, 소재. 그런 것들과 더불어 밑줄아래 직유법이니 환유법이니 같은 수사법이 요약되어 있었으며 덧붙여진 포스트 잇 위에는 같은 주제의 참고 작품 리스트가 써 있었다. 아, 나는 한 작품을 똑같은 감정으로 소화하는 기묘한 법을 배웠구나.
최고란 하나뿐이면서 동시에 무한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유연함을 배우지 못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사랑하는 이에게 바치는 헌사가 아니라면 최고는 남발될 이유가 없다는 것을 지금의 아이들은 배우고 있는지 모르겠다. 애석하지만 아무래도 여전한 느낌이다. 신작 영화 한 편만 개봉해도 서슴없이 또 재빠르게 ‘내 인생 최고의 영화’ 운운하는 댓글이 달리는 시절이다. 여전한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연 평균 독서량이 열 두 권이 나올 수는 없는 일이다. 교과서 때문이라기 보다는 그 수업 때문일 터다. 그러니 여전히 책이라면 고루하고 지루해서 답답하기만 한 것 아닐까. 투정이 아니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
그런 이유로 내 최고의 책은 아무래도 복수(複數)가 될 수밖에 없다. 또한 즐거운 마음으로 비로소 유연하게 읽었던 책들을 골라야 할 테니 대부분 대학 시절에 읽은 책들이다. 황석영 선생님의 모든 작품, 김승옥 선생님의 모든 작품, 조세희 선생님의 모든 작품이 그렇다. 그럼에도 딱 한 권만 골라야 한다면 아무래도 추억이 되어버린 책을 꼽아야 할 것 같다. 곧 이 최고의 책은 최고로 특별한 책의 다른 이름일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소설을 쓰게 된 것은 역시 신입생 시절에 만난 스승 때문이었다. 돌이켜 보면 내게 소설을 쓰는 방법이 아닌 소설을 쓸 수 있다는 문제의 유연함을 가르친 것 같다. 스승은 지금은 모 대학의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나 그때는 서울 시내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는 시간강사였다. 물론 등단한 소설가이기도 해서, 정확하지는 않지만 스승의 형제 중 하나가 서강대 근처의 조그만 빌딩 지층에다 속옷 도매상 비슷한 것을 운영했는데, 그곳의 1/4쯤을 베니어판으로 막은 공간을 작업실 삼아 꾸준히 집필도 하고 있었다. 하루는 내가 방이 없어 글을 쓸만한 여유가 없다는 것을 어찌 알았는지 그 작업실의 열쇠와 노트북까지 건네며 마음껏 쓰라고 했다. 노트북이 낡아 미안하다면서. 소설가가 되면 좋은 노트북을 사 주겠노라는 말까지 덧붙이면서. 차마 스승 앞에서는 아무 말 하지 못하고 있다 혼자 남아서는 얼마나 웃고 또 울었는지 몰랐다. 나는 그것이 스승이 내게 전부를 준 것이라 여겼다. 그 날 나는 그 작업실의 열쇠와 함께 문예지 부록판 <미국의 송어낚시>도 받았다. 터무니없이 헐렁한 몇 편의 내 글을 읽은 바 있었던 스승이 내게 어울린다면서 건넨 것이었다. 그래서 수많은 브래지어와 팬티, 란제리 박스를 등지고 앉아 나는 그 책을 읽었다. 단순하고 명료해서 유쾌하고 동시에 서글픈 소설이었다. 그러니 유연할 수밖에. 그런 다음 몇 줄을 썼고 그렇게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 됐다. <미국의 송어낚시>를 정식판본으로 구입하던 날 스승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수많은 란제리와 함께.
미국의 송어낚시의 대답 :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난 계단을 하천으로 바꿀 수는 없었다. 소년은 자신이 떠나온 곳으로 되돌아갔다. 똑같은 일이 한 때 내게도 일어났었다. 나는 버몬트 주에서 한 노파를 송어 하천으로 착각하고 용서를 구했다. “실례했습니다.” 나는 말했다. “전 할머니가 송어하천인 줄 알았어요.” “난 아냐.” 할머니가 말했다.
소설을 쓸 때마다 나는 시를 떠올린다. 그것은 이를테면 열등감이다. 내게 시는 넘기 어려운 장벽과도 같다. 소설이 일 백 페이지로 말하는 것을 시는 언제고 두 줄쯤으로 요약해버리니까. 뭐랄까 이렇게 할 순 없겠니? 하는 느낌이 든다. 이 책을 통해 나는 약간의 희망을 얻었다. 시를 뛰어 넘는 소설이라기보다는 시에 다가가고 있는 소설이라 하는 것이 좋겠다 그것을 역시 문제의 유연함이라 해도 좋을 것 같다. 이 작가는 어떻고 문장은 어떻고 소설은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에 소중하다는 말은 생략하고 싶다. 그런 교과서는 이제 버려야 한다. 책이란 눈으로 읽지만 동시에 머리로 또 가슴으로 읽는 것인 까닭에서다. 누군가 좋다해도 나는 싫을 수 있다. 우리는 그저 기회와 순간을 나눌 뿐이다. 스무 살에 스승이 내게 가르쳐 주고자 했던 것도 아무래도 그것이었을 테니까. 그 유연함은 자연의 힘이다. 그래서 사람은 늘 자연을 이길 수 없다. 그 유연함을 우린 책으로밖에 배울 수 없다. 몇일 안에 부자되기나 글로벌 리더십 어쩌구 하는 책이 아닌 시와 소설에 보다 많은 유연함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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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탁환
내 인생 최고의 책은 모르겠고 여러 판본을 여러 곳에서 때로는 정독으로 때로는 띄엄띄엄 읽은 작품은 나관중의 <삼국지연의>다. 소설가로 평생 늙어갈 예감이 들던 20대 후반에 김구용 판 <삼국지연의>를 진해 앞바다를 바라보며 읽었다. 그리고 소설가가 된다면, 파란만장한 인간의 삶을 유장하게 그리는 스토리텔러가 되겠다고, 우리 시대의 벽화를 대하소설에 담으리라 다짐했다.
<불멸의 이순신>(8권)과 <압록강>(7권), 두 편의 대하소설을 쓰면서 대하소설이란 정말 목숨을 걸고 달려들어야 할 만큼 힘들다는 것을 알았다. 몇 편의 장편에 손을 대고 있지만, 자료 조사가 끝나고 체력이 회복되면 나는 다시 대하소설에 도전할 것이다. 그리고 내내 책상에 꽂힌 여러 소설가들의 여러 <삼국지연의>를 구경하며, 나만의 대하소설을 완성시켜 나가리라.
<삼국지연의>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인물은 순욱이다. 처음과 끝이 같은 사람. 조조가 첫마음을 바꾸었을 때 명쾌하게 지적하고 빈 찬합을 받은 쿨한 사내. 나도 그를 닮고 싶다. |
* 나라면?
어려서는 빨간머리앤과 함께 자랐고, 지금은 앤과 함께 나이를 먹고 있다. 에, 그러니까 지금의 나는 노변장의 앤(창조사 본) 혹은 잉글사이드의 앤(동서문화사 본)쯤 되겠다. 흠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