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의 김영하 사건에 나는 꽤 충격을 받았는데, 소조의 글은, 사실 그 글이 왜 김영하의 최초 글에 맞붙게 되었는지도 전혀 이해할 수 없었고 (물론 그래서 흥행에 성공했다) 나에게는 김영하의 태도나 논조가 누구도 흠집낼 수 없는 개인주의자의 완벽한 논리로 보였다.
그래서 한 작가의 죽음 후, 그에 대한 반향은 굉장히 놀라웠다. 그와 소조의 논쟁은 계급투쟁의 전선이 되어버렸으며 많은 블로그에서 기꺼이 그 투쟁에 동참하였다.
나는 이 일련의 과정을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는데, 비유를 하자면, 마치 '운동을 하면 건강해진다' 라는 말이 다양한 촉매 작용으로 부르주아적인 태도가 되어버린 것과 비슷해보였다. 물론 그 촉매가 된 요소와 사건들은 복잡하지만 여전히 나에게 그의 말들은 (고인에 대한 섯부른 언급을 제외하면) 지극히 단순한, 일종의 개인적인 잠언 같아 보인다.
그는 예술가 후원이 복잡한 일이라고 하였다. 난 이 말에도 조금의 문제를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실로 그의 말처럼, 그럼 후원의 대상이 되는 '예술가란 무엇인가' 부터 시작해야한다. 하지만 역시 사회적인 언어가 되어 배부른 부르주아의 뻔뻔한 말이 되어버렸다.
적어도 내 생각엔, 폴 오스터나 조지 오웰등을 제외하면 (굳이 이문열이나 이인화까지 갈 것도 없이) 이 세상 대부분의 작가의 에세이나 자서전을 파헤쳐도 김영하와 비슷한 쁘띠부르주아라는 낙인을 찍어 난도질 할 수 있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같은 시각으로 보면 성공한 작가의 배부른 말들로 넘쳐난다. 물론 하루키는 죽은 제자에 대한 섯부른 언급을 한 일이 없고 김영하와 같이 복잡한 상황을 자초하진 않았지만.
새삼스럽지만 중요한 교훈.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이 너무나 많다는 것. 특정하게 복잡한 상황에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