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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
다니엘 글라타우어 지음, 김라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4월
평점 :
그는 나와 동갑에 일 년을 재수해서 대학에 들어갔다.
그와 나의 거리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만날 수 있는 거리였다.
그는 장발에 오토바이를 타고 치대에 들어가는 남자가 자신이라고 말했다.
'꽤나 특이한 아이로구나'하고 생각했다.
추웠던 그날 밤, 그에게 메일을 보냈다.
'앞으로 메일 보내도 될까?'
그가 바로 답메일을 보냈다. '그래'
며칠 후, 나는 비행기를 타고 중국에 가서 북경의 학교 기숙사에 짐을 풀었다.
나무에서 쭈뼛쭈뼛 연두빛이 나오기를 주저하고 있을 때, 그에게 오랜만에 메일을 보냈다.
'북경에 왔어. 일 년 후에 돌아갈꺼야.'
그가 며칠 후에 답메일을 보냈다.
'방학 때도 안 나와?"
Re: '응. 그 동안 네가 여자친구가 생기면 나를 오해하는 일이 생길까?
우린 그냥 친구니까 괜찮겠지?'
Aw: '너는 그냥 친구니까 괜찮을거야.'
그렇게 우리는 가끔 메일을 주고 받았다.
그는 나의 가짜 남자친구였고, 종종 안부를 전하는 사이가 되었다.
여행을 무척 좋아해서 돌아온 후에 메일을 보내면 그는 무척이나 부러워했다.
그러면서 자기는 재시에 걸렸다느니...시험에 치어 사는 삶을 푸념하곤 했다.
황사가 너무 심해 스카프로 얼굴을 싸매고 다니던 날들이 지나고......
여름 방학에 정신없이 중국을 돌아다니다, 장춘의 어느 피씨방에서 그에게 여행에 대한
이메일을 보냈다.
'백두산에 다녀왔어. 그 곳에서 한 사람을 만났지. 엄마는 조선족인데, 아빠는 중국인이래. 그래서 한국말을 알아듣기는 하지만 말은 하지 못해. 그가 아침까지 기차 안에서 우리를 보호해줬어. '
나무들이 커피색으로 변하던 가을에는 그가 이런 글을 보내기도 했다.
'여자친구를 사귀게 되었어. 전에 만났던 아이인데 헤어졌다가 이번에 다시 만나게 되었어.
이제 그 아이를 사랑하려고 노력해보기로 했어.'
Re:'나는 네가 말한 사랑하기 위해 노력해보겠다는 말이 이해가 안 된다.'
Aw:' 그 아이에게 너무 큰 상처를 줘서 이번에는 잘해주고 싶어.'
나는 그에 대해서 잘 모르고, 여자 친구와의 사이에서의 일도 모르고, 모르는 것 투성이었으니
잘 생각해보고 알아서 잘 하리라고 믿는다 라고 보낼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는 한동안 소식이 없었다.
그렇게 일 년이 지나고 나는 다시 돌아왔다.
우리는 '한 번 만나자' 라는 말을 습관처럼 했지만 정작 기회가 닿지 않았다.
그에게는 여행 중에 찍은 한 무리의 사람 속에 섞여 있는 나의 사진이 있었고.
나에게는 학교 단체 사진 속에 있는 그의 사진이 있었다.
이메일을 주고 받다가 나와 그는 같은 거리를 지나가고, 같은 가게를 가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서로 먼저 알아본 사람이 밥을 사기로 약속을 했다.
그리고 4월의 어느 화창한 오후에 그를 만나게 되었다.
나는 거리를 지나가고 있었고, 그는 친구들과 가게에 들어가고 있었다.
그가 문을 열다 멈춰서 나를 쳐다보았다.
나도 길을 걷다 멈춰서 그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우리는 잠시 멈춰서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제 갈 길을 갔다.
그가 예상외로 별로였냐고 묻는다면, 아니라고 대답하겠다.
그는 180에 가까운 키에 호리호리한 몸매, 지적인 외모를 가졌다.
게다가 그 때는 단정하게 자른 짙은 밤색의 머리카락이 귀 밑으로 내려와 있었다.
그 뒤로도 그와는 가끔 문자메세지를 주고 받고, 계속 이메일을 주고 받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우리는 그 날의 만남을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 친구는 나중에 개업하면 한 번 꼭 오라고 했는데......
아마 지금은 결혼해서 잘 살고 있겠지......하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