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세상의 용도 (양장)
니콜라 부비에 지음, 티에리 베르네 그림, 이재형 옮김 / 소동 / 2016년 7월
평점 :
1. 여행기의 고전
여행기의 고전이라 일컬어지는 책이다. 이 책은 "전 세계의 책벌레들이 여행서가에서 반드시 집어드는 전설적인 여행서(문학동네 카페 인용)" 중에 하나라고 한다. 스위스인 문장가 니콜라 부비에와 화가 티에리 베르네는 1953년 6월 스위스 제네바를 떠나서 1954년 12월 아프가니스탄의 종착지인 카이바르 고개까지 이동한다. 이 책은 그렇게 지나온 여정을 기록한 책이다.
책을 읽다보면 여행이라는 행위에 대하여 의미를 부여하는 초반부. 여행이라는 것과 자신을 따로 떼어서 생각했던 작가가 어느새 정착하는 곳에 동화되어 살아가는 모습을 읽을 수 있고, 그런 상황에서 각 지방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전반적인 문화와 역사에 관한 이야기에 더하여 거칠고 경사진 길과 낙후된 공간을 이동하면서 극한의 고통을 견디는 초인적인 모습을 읽을 수도 있으며, 그러한 고통을 참지 못한 나머지 파리에게 화풀이를 하는 모습도 읽을 수 있다.
일단 여행기로서 니콜라 부비에가 말하는 여행에 대한 고찰 몇 가지를 음미해보자.
15. 여행은 동기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여행은 그냥 그 자체로서 충분하다는 것을 곧 증명해 주리라. 여행자는 자기가 여행을 하고 있다고 믿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여행이 여행자를 만들고 여행자를 해체한다.
85. 넓은 시골땅에 분산되었던 그날의 기분이 포도주 몇 잔과 연필로 그리는 종이 식탁보, 입 밖에 내는 단어 속에 응축된다. 감정의 분비에 수반하여 식욕이 느껴지는 걸 보면, 여행생활에서 몸을 위한 양식과 정신을 위한 양식이 어느 정도까지 밀접하게 연관되는지 알 수 있다.
86. 여행은 엔진 소리와 스쳐가는 풍경에 실려와서 당신의 몸을 관통하고 당신의 머리를 환하게 밝혀준다. 아무 이유 없이 받아들인 생각은 당신을 떠난다. 반대로 다른 생각이 새로 정리되어 강 밑바닥에 조약돌처럼 당신 가슴속에 자리를 잡는다. 개입할 필요는 전혀 없다. 도로가 당신을 위해 일을 한다. 도로가 제 할일을 다 하여 이번 여행의 최종 목적지인 인도 끝까지, 아니 그보다 훨씬 더 멀리까지, 죽음까지 그렇게 뻗어나갔으면 좋겠다.
119. 여행은 몸을 털고 일어나 기운을 차릴 기회를 제공한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자유를 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일종의 축소를 경험하게 해줄 뿐이다. 일상적인 주변 환경에서 벗어나 자신의 습성을 박탈당한 여행자는 마치 포장지가 벗겨지듯 자기 자신이 보잘 것 없는 크기로 줄어든 것을 보게 된다. 하지만 그는 좀 더 왕성한 호기심과 날카로운 직관을 발휘하게 되고, 첫인상을 보다 중요하게 생각하게 된다.
270. 우리가 여행을 하는 것은 무슨 일인가 일어나서 자신을 변화시키도록 하기 위해서다. 그렇지 않다면 그냥 집에 있는 게 차라리 낫다.
2. 무목적성이 일궈낸 쾌거
니콜라 부비에와 티에리 베르네가 여행을 떠난 동기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이들이 여행할 곳에 대해서 공부한 흔적들은 자주 소개된다. 이것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여행의 목적은 없지만 여행을 떠날 곳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는 사실이다. 얼핏 모순처럼 들린다. 이러한 점으로 추측해 봤을 때, 두 사람은 예술가로서. 그리고 학자로서 지금보다 더 나은 능력을 갖춘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그것을 이론적으로 아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했으며, 직접 눈으로, 마음으로 관찰하고, 새기고, 그러한 고양을 글이나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두 사람은 일단, 유럽이라는 공간을 벗어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 여행기에서 유독 이스탄불을 그렇게 빨리 떠난 것도 유럽과 닮은 실용적인 문화였기 때문에 그랬다. 그들은 그들을 존재케 한 문화와 다른 문화를 원했다. 타브리즈, 그리고 카불. 이질적인 경험은 그들을 성장시키는 용도로서 활용된다. 나에게 없는 것을 채우기 위해서... 완전성이란 결국 외부에 존재한다라는 생각으로서 그들은 길을 떠난 것이다. 아래 문장은 타 문화에 대하여 여태껏 알지 못했던 것을 깨달아가는 과정을 잘 표현해 놓은 문장이다.
176. 그들에게는 기술이 부족하다. 반면에 우리는 지나치게 발달된 기술이 우리를 끌고 들어갔던 막다른 길에서 벗어나고 싶어한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오락문화에 물들 대로 물든 우리의 감수성을 되살리고 싶어 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를 되살리기 위해 그들의 방식을 신뢰하고, 그들은 살기 위해서 우리들의 방식을 신뢰한다.
434. 돌은 더 이상 우리의 시대에 속하지 않았다. 그것은 우리가 아닌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며, 우리와는 다른 주기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돌을 다듬어서 돌에게 우리의 언어로 말하도록 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은 잠시뿐이다. 그러고 나면 돌은 결별과 포기, 무관심, 그리고 망각을 의미하는 자신만의 시간으로 돌아간다.
315. 이란에서는 불가능이란 게 없다. 영혼들은 최고에 관해서든, 최악에 관해서든 상당한 여유를 가지고 있으며 당신은 완벽함에 대한 이 지속적이고 광신적인 열망을 참작해야만 한다. 가장 태평스런 사람조차도 이 열망을 이기지 못해 가장 극단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다.
341. 타브리즈의 삶을 넘어서는 것을 도대체 어떻게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이곳에는 부조리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다. 삶이 도처에서 마치 어둠 속의 레비아탄 처럼 모든 것을 밀어낼 뿐이다.
3. 깨달음
이 책에서 가장 결정적이며 인상적인 깨달음은 이것이 아닌가 싶다.
186. 결국 존재의 기반을 이루는 것은 가족도 아니고, 나에 대한 다른 사람의 말이나 생각도 아니다. 사랑보다 더 평온한 초월적 힘에 의해 고양될 때의 순간이 내 삶의 뼈대를 이루는 것이다. 삶은 그 같은 순간을 인색하게 나누어준다. 우리의 허약한 마음은 더 이상 견뎌낼 수 없다.
249. 출발은 마치 새로운 탄생과도 같고, 나의 세계는 아직도 너무나도 새로워서 체계적으로 성찰할 수 없다. 나는 자유도, 유연성도 가지고 있지 않다. 오직 욕망만을, 그리고 순전한 공포심만을 갖고 있을 따름이다.
니콜라 부비에는 이러한 삶의 인색함에 반기를 든다. 그렇게 그는 고양의 순간을 직접 찾아나선다. 기다리기만 하면 쉽게 얻을 수 없는 자기를 만들어낼 특별한 순간을 얻기 위하여 조급하게 움직인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세상의 용도>에서 고백하는 이러한 조급함은 에고이즘에 의한 본능적인 행위였다. 에고이즘은 목적을 두지 않은 여행을 만들었으며, 결과적으로 니콜라 부비에라는 존재를 끌어올렸다.
니콜라 부비에와 티에리 베르네가 보고 기록한 내용보다는 이런 관념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것이 훨씬 중요한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한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니콜라 부비에라는 인물의 작품에서 이러한 경험들이 어떤 방식으로 작용하는지를 즐길 수 있는 방법이 현재로서는 없다는 점이다. 괴테나 헤르만 헤세의 여행기는 그들의 문학과 관련해서 생각할거리를 않이 제공한다. 그런 면에서 <세상의 용도> 한 권만 읽는 것은 미완성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깨달음을 얻기란 쉽지 않은 것은 사실이긴 하지만 말이다.
4. 기록을 위한 중요하지 않은 기록
462. 태양에 관해 자주 생각했지만, 사람을 죽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 건 이때가 처음이었다. 정신을 되찾고 보니 티에리가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기서 떠나야 해... 여기서 떠나야 한다구!"
이방인에서 뫼르소는 태양 때문에 사람을 죽이는데. 여기 실제로 태양 때문에 사람을 죽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는 사람이 나온다. 그 사람은 니콜라 부비에다. 전체적인 맥락에서 이 부분이 그렇게 중요하진 않다. 그저 이 부분을 보면서 카뮈 생각이 났다. 니콜라 부비에가 뫼르소를 생각하면서 이 부분을 썼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5. 기록을 위한 중요하지 않은 기록
563. 인간은 지나치게 까다롭다. 그는 선택받은 죽음을, 뭔가 완성되고 개인적인 것을 꿈꾼다. 그는 그 꿈을 이루려고 노력하고, 때로는 그 꿈을 이룬다. 아시아의 파리들은 이런 구분을 하지 않는다. 이 혐오스런 생물체에게는 죽거나 살거나 마찬가지이며, 시장에서 잠을 자는 아이들을 보면 이놈들이 형체 없는 것의 완전한 하인이 되어 모든 걸 제멋대로 혼돈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원래 유럽인들은 파리가 똥에서 태어나고, 재에서 부활하고, 죄를 짓는 자의 입에서 나온다고 생각했으며, 파리를 악령 또는 악령을 옮기는 동물이라고 해서 저주했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에 하나의 저주가 더 보태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