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의 기원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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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진은 왜 살인마가 되어야 했나?


작가의 말. "인간은 살인으로 진화했다"의 첫 문단을 보면 정유정 작가는 "인간은 악하게 태어난 것도, 선하게 태어난 것도 아니다. 인간은 생존하도록 태어났다." (...) "선이나 악만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었기에 선과 악이 공진화했으며, 그들에게 살인은 진화적 성공, 즉 경쟁자를 제거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었다."라는 데이비드 버스라는 진화심리학자의 주장을 소개한다. 이 주장은 <종의 기원>의 핵심 주제이기도 하다.


모든 유전자의 작동 원인은 그것이 이타적이든 이기적이든 관계없이 결과적으로 그 행위가 각 개체의 유전자 보존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발생한다는 <이기적 유전자>의 특성과도 맞물리는 이 주제는 누군가에 의하여 생존을 위협받던 사이코패스 주인공을 각성시켜 살인 기계로 만들어버렸다. 한유진이라는 사이코패스의 첫 살인은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우발적으로 일어나지만, 악마가 깨어난 다음부터는 계획적으로 살인을 저지른다.


왜냐하면, 한유진이 살기 위해서는 한유진이 사이코패스라는 것을 아는 - 정체를 안다는 것은 생존을 위협한다는 뜻이므로- 주변 사람을 제거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본능이 시키는대로 한유진은 살인하는 것에 매우 충실하게 반응했다. <종의 기원>은 유진이 저지르는 몇 건의 살인 기록과 살인 전과 후의 심리변화와 한유진의 주변세계를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한 소설이다.


29. 책상 너머 테라스 유리문 안에 낯선 남자가 서 있었다. 염소 뿔처럼 곤두선 머리칼, 껍질이 홀랑 벗겨진 것처럼 시뻘건 얼굴, 흰자위만 불안하게 번득거리는 눈. 시각적 충격으로 정신이 다 아뜩해왔다. 저 시뻘건 짐승이 나라고...?


81. 수천 개의 감각들이 느릿느릿 나를 통과해갔다. 머리를 얼리는 한기, 내장을 뒤틀며 맹렬하게 번지는 불의 열기, 신경절 마디마디에서 폭발하는 발화의 전율, 규칙적으로 뛰는 내 심장 소리. 왼쪽에서 출발한 칼날은 삽시에 오른쪽 귀밑에 이르렀다. 벌어진 턱 밑에선 뜨거운 피가 왈칵왈칵 솟구치며 내 얼굴과 계단참 벽과 바닥을 뒤덮어버렸다. 나는 눈을 감고 어머니의 머리채와 손을 집어던지듯 밀쳐냈다. 어머니는 쿵, 소리를 내며 무너져 내렸다. 무너진 몸이 계단을 타고 미끄러지는 소리가 텅,텅,텅 울렸다. 이어 고요해졌다.


한유진이라는 껍데기 속의 들어있는 악마 (= 유전자). 인류라는 전체의 개념이 아닌 한유진 속의 악마라는 단일 개체로 봤을 때, 자신의 생존은 악마가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의 정체를 드러낼만큼 중요한 것이었다. 정석주를 뛰어넘기 위해 살인을 저지르는 <붉은 소파>의 청년. 완벽한 냄새를 만들기 위해 살인을 저지르는 <향수>의 그르누이의 목적과 비교했을 때, 가장 순수하고, 또 가장 잔인한 목적이었다.


삶의 의지가 누군가의 죽음으로 이루어져야만 하는 비극. 한유진의 "나는 왜 살인 기계가 되어야 했나?"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제공하는 어머니의 일기장. 이 두 텍스트의 얽힘은 "인간은 살인으로 진화했다"는 <종의 기원>의 가장 일반적인 읽기방식이다.


2. 어머니의 일기장


259. 유진은 뇌 편도체에 불이 들어오지 않는 아이였다. 먹이사슬로 치자면 포식자. ..."유진이는 포식자야 사이코패스 중에서도 최고 레벨에 속하는 프레데터."


300. 포식자는 보통 사람과 세상을 읽는 법이 다르다고, 혜원이 말했다. 두려움도 없고, 불안해하지도 않고, 양심의 가책도 없고, 남과 공감하지도 못한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남의 감정은 귀신처럼 읽고 이용하는 종족이라고 했다. 타고나길 그렇게 타고났다고 했다.


유진이 유치원을 다닐 때 그린 잔인한 그림으로부터 이모가 유진의 공격성을 읽은 것(255. 유진 또래의 남자애들에게는 모든 여자가 다 엄마의 화신이고, 아이가 엄마 목을 잘라서 우산대에 꽂았을 땐 중대한 문제가 있는 것)부터가 시작이었다. 그리고 몇 년 후. 예기치 않은 사고로 형과 아버지를 한꺼번에 잃고 난 이후에 유진은 이모인 혜원에 의하여 사이코패스 중에서도 최고 레벨에 속하는 프레데터로 분류된다.


사이코패스라는 진단으로 말미암아 유진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약물을 복용한다. 어머니는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항상 감시하고 그의 일과를 통제한다. 그가 좋아하던 수영선수라는 꿈도 포기해야 했다. 그리고 어머니는 아들인 유진 대신에 애정을 쏟을 존재로 해진을 그들의 가족으로 새롭게 받아들인다. 이것으로 알 수 있듯이. 한 사람을 사이코패스로 만들어버린 진단 하나로 인하여 유진의 자유의사와는 관계없이 그의 삶을 송두리째 결정해버린다. 그리고 훗날. 진단 결과로 상상했던 모든 우려스러운 일들이 모조리 현실이 되어 이들 앞에 나타났다.  


300. 혜원은 '그날 일'이 우발적으로 일어난 게 아니라고 했다. 유진이가 포식자로서 처음으로 '해치운 짓'이었다. 놔두면 언제든 반복될 행위라고 했다.


'그날 일'은 정말 유진이가 사이코패스라서 포식자의 본능이 나타난 것 때문일까? 나는 지원-혜원 자매를 외탁한 유민-유진 형제 사이의 강한 경쟁심때문에 우발적으로 '그날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다. 형제 간의 서바이벌은 단순히 장난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위험한 수준의 놀이였. 이 위험에도 아랑곳않고 서바이벌을 즐기는 형제의 강한 승부욕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서 찾은 어머니의 일기 중 일부 내용은 이 위험한 장난을 일으킨 강한 경쟁심의 우발성이 형제에게서만 아니라 그들의 어머니와 이모 사이에서도 일어날 수 있겠다 싶었다.


255. 돌이켜보면, 우린 어린 시절부터 자매라기보다는 경쟁자에 가까웠다. 연년생인 탓에 옷도 함께 입어야 하고, 책도 함께 봐야 했다. 혜원은 전교 1등을 도맡아놓고 하면서도 내가 글짓기대회에 나가 상 하나 타오는 걸 견디지 못했다. 똑똑하다는 칭찬을 밥 먹듯 들으면서 가끔씩 내 몫으로 오는 '어른스럽다'는 말을 참아내지 못했다. 내가 아끼는 세계문학전집에 제 이름을 큼직하게 써넣기도 하고, 내가 받은 상장에 중간 이름만 바꿔 제 상장으로 만들어버리기도 하고, 내 독후감을 훔쳐다가 제가 쓴 것처럼 제출해버리기도 했다. 어른이 되어 각자의 인생을 살게 된 후에도 우리 사이에는 늘 껄끄러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데면데면한 것과는 다른, 기싸움에 가까운 대립이었다. 남편이 가끔 '처제가 나를 우습게 본다'라고 불평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상상력을 조금 보태자. 혜원은 어떠한 이유로 결혼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자식을 낳아서 키울 수 없는 이모가 자상한 남편과 어려움없이 아이를 낳고 기르는 언니의 가정을 우발적으로 질투해서 조카를 사이코패스라고 진단했을 수도 있다. 그렇게 해서 언니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을 망쳤다고 가정한다면 그것은 혜원이 갖지 못한 것을 언니도 갖지 못하게 한 것이기에 255페이지의 혜원의 성격으로서는 가능한 행동일 수 있겠다. 상상해보았다.


악은 우리 유전자에 내재된 어두운 본성이다. 그리고 악인은 특별한 '누군가'가 아니라, 나를 포함한 '누구나'일 수도 있다.는 작가의 두번째 명제에 따르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이렇게 유진에게 부여된 악의 근원이 사이코패스라는 선천적인 요소가 아니라 그와 친척 관계에 있는 또 다른 악으로부터 유전적으로 탄생한 것이라고 한다면, <종의 기원>은 조종하는 Vs 억압된 악 이라는 새로운 대결 구도로도 읽을 수 있다.  


작가의 말 383. 내가 왜 인간의 '악'에 관심을 갖는지에 대해 대답할 차례다. 평범한 비둘기라 믿는 우리의 본성 안에도 매의 '어두운 숲'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 똑바로 응시하고 이해해야 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지 못한다면 우리 내면의 악, 타인의 악, 아나가 삶을 위협하는 포식자의 악에 제대로 대처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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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한엄마 2016-08-24 06: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히려 단예님이 한 추측이 반전이라는..이 책은 너무 반전이 없어서-

단예 2016-08-24 07:38   좋아요 0 | URL
반전은 없지용. 그래서 하나 짜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