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욕망하는 힘, 스피노자 인문학 - 처음 만나는 에티카의 감정 수업
심강현 지음 / 을유문화사 / 2016년 3월
평점 :
1.
에티카. 이 용어를 <몰락의 에티카>라는 책을 통해서 처음 알게 된 후 몇 번 빌려와서 써먹은 적이 있다. 이 블로그의 검색창에 에티카를 검색하면 쉽게 찾을 수 있다. 검색 결과에서 자연을 수호하려는 생태주의자와 그러한 관점으로 작품을 쓴 <녹색고전>의 이야기에 대하여 몰락의 길로 향하고 있다고 말한 기록을 찾을 수 있다.
그들(자낳괴)의 관점으로서는 "유정 (살아있는 생물) 뿐 아니라, 무정(무생물)에도 제각기 의식이 있다. 그래서 인간중심주의 사고를 내려놓자"고 주장하는. 게다가 "인간은 홀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존재"라고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는 <녹색 고전> 속의 작가들은 몰락(沒落)의 길로 향하는 밥 빌어먹는 사람들로 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모든 작품을 생태주의적 관점(몰락의 선택)으로 해석하는 김욱동 선생 또한 몰락(沒落)의 길로 향하는 사람으로 보일 것이다.
"전부인 하나를 지키기 위해 그 하나를 제외한 전부를 포기한 것이었다."
"그들은 스스로 몰락(Go Down)하면서 이 세계의 완강한 일각을 더불어 침몰시킨다. 그 순간 우리의 생이 잠시 흔들리고 가치들의 좌표가 바뀐다. 그리고 질문하게 한다. 어떤 삶이 진실하고 올바르고 아름다운 삶인가."
"문학이란 무엇인가. 몰락(Go Down)의 에티카다. 온 세계가 성공을 말할 때 문학은 몰락(Go Down)을 선택한 자들을 내세워 삶을 바꿔야 한다고 세계는 변해야 한다고 말한다. 지금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이 이야기를 쓸 당시에는 이 문단의 정확한 의미를 알지 못한 채 끄적였던 것 같다. <스피노자 인문학>의 힘을 빌어서야 이 문단에 적힌 의미가 무엇인지 깨우칠 수 있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내용은 가장 위에 있는 문장이라고 생각한다. 이 문장에서 몰락(沒落)이라는 것은 자낳괴의 관점일 뿐이라고 표현했던 것 같다.
이 선택을 '몰락의 길(沒落)'로 해석한 이유는 간단하다. 이 선택을 몰락(沒落)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그것이 연민이라고 하더라도. 이것을 주변인의 눈으로 관찰하고 있기 때문에 당신에게는 이것이 몰락(沒落)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몰락(沒落)이라고 발설하는 순간 그것은 이미 몰락(沒落)이라는 슬픔. 수동적 정념에 예속에 사로잡힌다. 그렇지만, 이것을 몰락(沒落)으로 인식하지 않고 능동적인 기쁨으로 인식한 당사자에게는 이것은 예속이 아닌. 자유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명심해야 할 것은 이 몰락(沒落)이라는 용어가 멸망하여 모조리 없어짐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가 아니라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Go Down이라면 이 몰락(Go Down)은 자낳괴가 바라보는 관점이 아니라면 몰락(Go Down)이란 인간의 본성이자.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경험이자. 인간이 세상과 격렬하게 부딪히는 사투의 장면이라고 볼 수 있다.
인간의 위대함은 그가 다리일 뿐 목적이 아니라는 데 있다. 인간이 사랑스러울 수 있는 것은 그가 건너가는 존재이며 몰락(Go Down)하는 존재라는 데 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9p.>
2.
이제부터 이야기하려는 몰락은 Go Down. "전부인 하나를 지키기 위해 그 하나를 제외한 전부를 포기한 것이었다." 이다. 그런 의미에서 몰락은 <미움받을 용기>라는 책에서 이야기하는 미움받을 용기와도 정확히 일치한다. Go Down은 미움받을 용기이자. <스피노자 인문학>에서 말하는 인간의 이성이 선택한 최선의 자유였다.
'경험 그 자체'가 아니라 '경험에 부여한 의미'에 따라 자신을 결정한다는 말이지. 우리는 과거의 경험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가'에 따라 자신의 삶을 결정한다네. 인생이란 누군가가 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는 걸세. 어떨게 사는가도 자기 자신이 선택하는 것이고. <미움받을 용기 37 p>
타인의 기대를 충족시키려고 살면, 그리고 내 인생을 타인에게 맡기면, 자신에게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도 계속 거짓말을 하게 되는 삶을 살게 된다는 걸, 이해해야 돼. <미움받을 용기 181 p>
3.
뻗어나가는 상념을 이쯤에서 정리하고, <스피노자 인문학>의 이야기를 되새김해보려한다.
67. 욕망은 인간의 본질입니다.
인간은 마땅히 욕망하는 동물이다. 인간은 욕망을 통해 삶을 살 수 있는 동력을 얻는다. 인간의 선택은 내재하는 욕망이 치열하게 겨룬 이후 가장 강력한 욕망의 발현이다. 이것을 자유라고도 부를 수 있다. 그런데 만약 당신이 선택한 자유가 잘못된 선택이었다면 그것을 후회하면서 죄책감에 사로잡혀 봤자 당신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때 그 시절로 되돌아 간다고 하더라도 그 선택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선택을 하지 않도록 욕망을 다스리기 위한 역량을 키우는 것이다. 치열하게 전투를 벌이고 있는 당신의 무의식이 더 나은 선택을 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이성을 확장시킨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이성의 확장은 배움으로 가능하다. 직접적인 경험으로의 깨달음이 가장 효과적이긴 하지만, 독서를 통한 간접 경험으로도 이성을 확장시킬 수 있다.
과거의 무의식 보다 지금의 무의식이 더 나은 선택을 했다는 것을 판단할 기준은 감정상태를 들여다 봄으로써 확인할 수 있다. 이 선택으로 인하여 신체와 영혼에 경쟁심과, 경외심과 경멸이라는 감정이 깃들거나 혹은 그 선택에 대하여 애써 정당화하려는 불편한 생각이 든다면 당신의 역량은 여전히 부족하다 판단할 수 있겠다.
스피노자가 제시하는 이상적인 형태는 300페이지에서 설명된 1종인식에서 역량(=이성)을 갈고 닦아 2종 인식으로 발전시키고, 더 나아가서 초인을 의미하는 직관지. 3종 인식에 다다르는 것이다. 니체의 생각과 같다. 2종은 넘어, 3종 인식에 다다르게 하기 위하여 스피노자는 모든 문제를 개인의 선택에 맡기기 보다는 정치적인 제도를 개선하는 것에도 매우 큰 관심을 보였다. 공포로부터 인간을 해방시켜 인간이 안전하게 자신의 심신을 개발하고 자유로이 이성을 사용하도록 말이다.
스피노자는 3종 인식인 직관지에 이르는 상태가 이상적인 형태라고 했지. 여전히 1종 인식이 만연한 현재의 상태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저 아쉬울 뿐이다. 어쩌면 어떤 것이 3종 인식인지 1종 인식인지조차 불분명하다.
90. "즐거운 음악은 기쁜 자에게는 좋은 것이고, 장례식장에는 나쁜 것이며, 귀머거리에게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습니다."
107. 우리는 그것이 선하다고 생각되기에 그것을 원하고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원하고 욕망하기에 그것을 선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선과 악의 기준은 관계에 의해서만 가려질 수 있는데 그것은 개인적인 기준에서 판단할 수도 있다고 본다. 스피노자는 현실 세계에서의 이 모든 진행상황 자체가 '자연'의 형태이며, 그 자체를 신이라고 칭했다.
소요슈타인 가아더가 쓴 <소피의 세계>의 스피노자 챕터를 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어쩌면 엄지 손사락을 네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자유가 네게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엄지손가락은 오직 그것의 본성에 따라서만 움직일 수 있다. 엄지손가락이 네 손에서 뛰어올라 온 방 안을 만지고 다닐 수는 없는 일이다. 그처럼 너 역시 전체 속에서 네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거란다. 얘야, 너는 소피이지만 신이 몸에 달린 손가락이기도 하지."
55. 실재성은 곧 완전성이다
이것 자체가 자연이기 때문에 강제할 수 없는 문제라고 인식하는 것이다.
이 말은 즉, 강제할 수 없기 때문에 몰락(Go Down) 역시 허락될 수 있는 것이다. 욕망의 싸움터에서 역량을 강화시키기 위한 불가피한 이유로 말이다.
"그들은 스스로 몰락(Go Down)하면서 이 세계의 완강한 일각을 더불어 침몰시킨다. 그 순간 우리의 생이 잠시 흔들리고 가치들의 좌표가 바뀐다. 그리고 질문하게 한다. 어떤 삶이 진실하고 올바르고 아름다운 삶인가." <몰락의 에티카>
141. 올바른 인식이란 부분적인 앎이 아니라 전체적인 인식.
210. 우리에게 필요한 자유(=기쁨)란?
1. 정념으로부터의 자유
2. 역량을 향한 자유
230. 이성에 인도되지 못하고 혼란된 사람은 자기 자신과 사물과 신에 대해 거의 의식하지 못한 채 방황하는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302. 사랑 = 기쁨 = 능동 = 이성 = 역량 = 공감 = 이해 = 자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