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스푼의 시간
구병모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6년 9월
평점 :
품절


1. 동행


29. 세상은 한 통의 거대한 세탁기이며 사람들은 그 속에서 젖은 면직물 더미처럼 엉켰다 풀어지기를 반복하는 동안 닳아간다.


구병모 작가의 여섯 번째 장편 <한 스푼의 시간>에는 사람 같지만, 엄연히 사람과는 다른 존재가 등장한다. 그것은 아버지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명정의 아들이 변두리에서 세탁소를 운영하는 명정에게 유품으로 남긴 것이다. 다름아닌 사람 모양을 한 로봇이었다. 명정은 이 로보트에 은결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노년의 남성와 인간 형상의 로봇 간의 동행을 기록한 소설. <한 스푼의 시간>은 세탁소라는 장소로부터 시작된다.


2. 배움과 성장. 사람다움


103. 사람의 말은 가끔 맥락 없이 튀기 때문에 은결은 주인의 모든 말에 반응해야 할 필요는 없음을 안다. 그러나 맥락이 없기도 하지만 때로는 손닿는 모든 곳이 맥락이 되기도 한다.


108. 무슨 수로 인간은 그 다양한 상황에서 가장 합당한 말 한마디를 골라 건넬까. 눈앞의 사람이 아픈지 슬픈지 분하거나 억울한지 또 달리 무슨 문제가 있는지, 어떻게 마이크로 단위의 시간동안 확정하고 가장 그런듯한 조치를 취할까. 어쩌면 사람이 그 때 그 순간에 가장 적절하게 반응한다는 것도 확률의 문제일 뿐 실은 그들이 내놓는 모든 결론과 행위 또한 매 순간 몇 제타바이트에 이르는 오해를 동반하는 게 아닐까.


얇은 분량임에도, <한 스푼의 시간>에서 읽을 수 있는 깨달음은 다양하다. 그 중에서 은결이 주변 이웃들의 말과 표정과 행동을 관찰하고, 그것에 대하여 학습하는 과정에 녹아있는 여리고 순수한 서사와 은결이 사람의 감정들을 이해하며 점점 더 사람과 닮아가는 모습. 그리고 죽을 때까지 사랑하는 존재의 곁에 남기를 소망하며 저지르는 은결의 결심에 담겨 있는 성장소설로서의 면모는 소설의 중심축을 형성한다.


인간을 닮아가는 은결의 내적성장을 그리는 이야기 이외에. <한 스푼의 시간>에는 잠시 시점을 세탁소의 이웃들인 시호나 준교나 세주의 삶으로 옮겨서 삶을 살아가는 것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구병모 작가는 이들의 고단한 하루를 위로한다. 위로에 덧붙여 이러한 팍팍한 인생살이와 살아가는 것에 대한 어쩔 수 없음. 그리고 이러한 인생의 한없이 짧음에 같은 인간으로서 공감한다.  


157. 아무리 약품을 집중 분사해도 직물과 분리되지 않는 오염이 생기게 마련이듯이 사람은 누구나 인생의 어느 순간에 이르면 제거도 수정도 불가능한 한 점의 얼룩을 살아내야만 한다. 부주의하게 놓아둔 바람과 팽창과 수축을 거쳐 변형된 사죽처럼. 복원 불가능한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여야 한다.


184. 우주의 나이가 137억 년을 조금 넘나 그렇다지. 그 우주 안의 콩알만 한 지구도 태어난 지 45억 년이나 되고, 그에 비하면 사람의 인생은 고작 푸른 세제 한 스푼이 물에 녹는 시간에 불과하단다. 그러니 자신이 이 세상에 어떻게 스며들 것인지를 신중하게 결정하고 나면 이미 녹아 없어져 있지.


3. 삶의 아포리즘


구명모 작가의 문장을 일부러 떼어내 읽으면 아포리즘처럼 진한 울림이 있다. 많은 사유를 거친 후 탄생한 날카로운 문장들은 현실적인 문제에 깊이 천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아포리즘에 담긴 진지함에 대해서 함께 고민해보는 것도 <한 스푼의 시간>을 읽는 좋은 방법이 될 것 같다. 그런 면에서 <한 스푼의 소설>은 페이지가 쉽게 넘어가는 소설은 아니었다.


50. 가족이란 신선한 공기가 들락거리는 건강한 폐 같은 거라고 믿었던 순진한 시절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지나고 보면 모든 것이 엇박자 내지는 폐기종에 불과한 것을


51. 관계란 물에 적시면 어느 틈에 조직이 풀려 끊어지고 마는 낱장의 휴지에 불과하다.


112. 그 무너짐은 정말 저 무너짐과 같은가. 무너진다는 건 결국 그 현상을 대하는 사람의 슬픔이나 분노에 좌우되는 게 아닌가.


141. 늘어나는 경험과 지식의 질량은 그에게 필요치않은 무거운 털외투처럼 나날이 몸을 감싼다. 그러나 그 외투를 벗고 가벼워져야 한다는 판단만은 들지 않는다.    


173. 사람이란 때로는 상대방을 행해. 자신조차 그 독법을 알지 못하는 행간을 읽어내달라는 부당한 호소를 거리낌 없이 하는 존재 아닌가.


208. 이해 불가능한 방식으로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이 있다. 구전을 통해 허황되게 부풀려지는 것들, 존재의 진실성 여부가 그것을 상상하는 사람들의 수긍과 인정에 달려 있는 것들 잊어버린 채 방기하고 있으면 어느 순간 등 뒤에서 노크해 오거나 부지불식간에 덜미를 잡아채는 것들. 실체를 확인하고 분석하기 위해 과감히 렌즈를 들이대면 사라지는 것들. 그래서 때로 지나치게 의미가 부여되곤 하는 것들.


249. 그는 인간의 시간이 흰 도화지에 찍은 검은 점 한 개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잘 안다. 그래서 그 점이 퇴락하여 지워지기 전에 사람은 살아 있는 나날들 동안 힘껏 분노하거나 사랑하는 한편 절망 속에서도 열망을 잊이 않으며 끝없이 무언가를 갈구하고 기원해야 한다는 사실도 잘 안다. 그것이 바로, 어느 날 물속에 떨어져 녹아내리던 푸른 세제 한 스푼이 그에게 가르쳐준 모든 것이다.


4. 약점


위에 쓴 글과 옮겨적은 문장들은 <한 스푼의 시간>의 강점이다. 그런데 이 소설에 깊이 빠져들지 못하게 하는 약점도 분명히 있다. 일단, 소설 자체가 이야기 중심이 아니라 의미 중심이라는 점을 이해하면 몇 가지 아쉬운 점은 그냥 넘어갈 수 있다. 그러고보면 제일 처음 읽었던 그녀의 소설 <위저드 베이커리>도 이야기가 남는 것이 아니라 강렬한 한 컷. 어떤 가게의 시나몬 쿠키의 인상이 남고, 이 소설도 마찬가지로 세제 한 스푼이 물에 녹아 풀어지는 이미지가 떠오른다.


또한, 장문을 즐겨 용하는 구명보 작가의 스타일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것들을 이해하더라도 한 번 읽어서는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문장들은 굉장히 거슬렸다. 실제로 읽는 속도를 더디게 만들었다. 예를 들면, 아래의 두 문장이 그렇다. 

164페이지의 문장 같은 경우는 독해하는 데 너무 어려웠다. 시호의 아르바이트에 얽힌 난처한 이야기를 하면서 아빠가 옛날에 겪었던 부조리한 기억을 연상하는 부분인데, 처음에 읽을 때는 무슨 말인지 도통 이해가 되지않았다.


164. 그때 문득 옛날에 우리 아빠가 결국 치료비 보조는 언감생심에 사람의 살이 익어가는 현장을 지켜본 손님들한테 오히려 돈 백만 원 물어줬던 일이 떠올랐어.  


201. 사지 멀쩡하여 일할 수 있는 누구나 마음이 조금만 기울어져도 그대로 넘어져 부서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하려 들지 않고 그저 의지박약의 일종으로 치부했으며, 자신이 홀몸으로 딸을 억척같이 키워낸 과업을 수시로 내세우는 한편, 과거의 자신과 달리 지금의 딸은 직무태만에 모성 부족이며 등 따시고 배가 불러서 우울증 따위가 드나드는 것이니, 우울증이란 그저 병원과 의사가 돈벌이를 위해 만들어낸 허상의 질병이름으로서 거기 놀아나는 딸이 한심하다는 말로 더 큰 갈등의 요인을 만들곤 했다.


201페이지의 장문 같은 경우에는 실제로는 '사지 멀쩡하여 / 일할 수 있는 누구나 / 마음이 조금만 기울어져도' 이렇게 끊어 읽어야 할 것 같은 문장인데 이걸 처음 읽을 때는 '사지 멀쩡하여 / 일할 수 있는 / 누구나 마음이 조금만 기울어져도' 같은 방식처럼. 제일 앞 부분을 주어로 판단해서 읽게 된다. 그런데 이 문장을 그렇게 읽었다가는 처음부터 의미가 꼬여버리니 아예 해석이 되지 않는 답답함이 밀려온다. 다듬을 때. 조금만 더 신경써줬으면 하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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