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랜드마더스
도리스 레싱 지음, 강수정 옮김 / 예담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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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 금기에 도전한 가족 <그랜드 마더스>


<다섯째 아이(1988)>의 등장인물인 해리엇과 데이빗은 사회적 통념들을 사실로 가정하고, 당신의 행복을 남들에게 잘 보여주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남들과 함께 축하 인사를 건네며 즐길만한 계기가 필요했고, 행복에 넘치는 축하 인사를 받기 위해서 가족계획을 세웠다. 이 과정에서 벤이라는 존재는 모든 이의 승인을 받지 않은 상태로 태어났. 벤을 바라보는 흔들리는 의식이 지금껏 숭배해왔던 모든 가치를 엎어버릴 정도였다는 점은 매우 큰 깨달음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덕분이었을까? 도리스 레싱의 전작 <다섯째 아이(1988)>의 인물과 <그랜드 마더스(2003)>의 인물 성향은 달라졌다. 도리스 레싱의 인물들은 이제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지 않게 되었다. 그들은 가족의 몸집을 줄였고, 스스로 미니멀라이징화 되었다. 그들은 이미 아름다웠고, 풍요로웠다. 그렇기에 누구의 관심도 필요하지 않았다.


12. 나른하고 흡족한 풍경. 아름드리나무 아래에 놓인 테이블마다 비슷하게 축복받은 인생들이 노닥거렸다. 그리고 그들을 에워싼 바다는 불과 몇 미터 아래에서 슈르르슈슈, 한숨 소리를 내며 해변으로 밀려왔고, 바다의 목소리는 낮고 나른했다.


그들의 사정을 모르는 이들은 여유로운 삶을 즐기는 그들을 오히려 선망했다. 


<그랜드 마더스>의 첫 번째 소설 <그랜드 마더스>의 최대 행복을 위해 필요한 가족의 숫자는 최소 4명뿐이었다. 아빠, 엄마, 아들 , 딸이었을까? 아니. 그렇지 않았다. 엄마와 아들. 그리고 또 다른 엄마와 아들. 이렇게 4명이었다. 이 4명의 인물은 모든 욕구를 이 안에서 해결하려 했다. 그 결과. 4명을 제외한 나머지 가족은 불행해졌다.


60. 뭔가 있었다... 뭔가 불쾌한 것... 그녀가 들어가서는 안되는 공간. 메리는 그걸 깨달았다.


83. 벡스터즈 정원 아래쪽에서 한나와 함께 길가에 선 채 로즈의 웃음소리를 들었을 때 그녀는 그게 자신을 조롱하는 웃음이라는 걸 알았다. 그 웃음은 그녀, 메리를 조롱했고 그제야 그녀는 비로소 모든 걸 이해했다. 모든 게 명확해졌다.


어떤 반성과 깨달음을 통해 새로운 전개로 이야기를 시작했지만, 그 새로움 속에서도 부작용은 발견되었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개인주의의 불편한 이면을 발견했다. 극단주의의 한 단면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2. 딸에게 더 나은 삶을 선물하고 싶어. <빅토리아와 스테이브니 가>


166. 빅토리아는 필리스가 자신에 대해 생각했던 것처럼 지금 자신이 딸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여자를 노리는 끔찍한 위험들... 함정과 올가미, 여자들이 지닌 가장 큰 장점을 오히려 미끼로 삼아 그 여자들을 낚는 악마들.


<테스>의 비극도 이겨낸 강인한 여인. 토리아의 모성애를 그린 작품이다. 가난에도 불구하고 아름다운 여성으로 자라난 그녀는 빈부격차와 인종갈등이라는 표면적인 장벽에 어쩔 수 없이 직면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과거의 상징인 테스는 농락당했지만, 현재의 상징. 빅토리아는 그것을 피할 수 있는 조건을 찾아낸다. 오래전 그녀가 잠시 머물렀던 곳의 몽환적인 기억이 유일한 돌파구였다. 그 기억을 잃지 않은 덕분에 그녀의 딸 메리는 빈부격차와 인종갈등이라는 장벽에 구애받지 않게 되었다. 


메리는 그녀가 낳은 다른 자식인 딕슨과는 달리 스테이브니 가 출신이라는 점에서 그러했다. 빅토리아가 만들 울타리와 스테이브니 가가 제공할 울타리의 격차는 너무나 크고, 무엇을 선택해야 옳은 것인지 당연했기에. 앞으로 닥쳐올 분리에 대한 두려움을 담고 있는 작품이다. 빅토리아는 이미 체념했다. 184. 메리는 스테이브니가 되고 싶을 거야. 그래, 그 사실을 직시해야 해. 결국 그렇게 될 테니까. 슬픈 현실이었다. 아마도 훗날 메리가 빅토리아를 이해할 날이 온다면 더욱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3. 낙관적인 더욱 낙관적인 파국. <그것의 이유>


<로마제국 쇠망사>를 모티브로 가져온 듯한 소설이다. 로다이트라고 불리는 이곳은 이론상으로는 집단지도체제로 운영되고 있지만, 왕정과 독재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한편으로는 알레고리 소설 같기도 하다. <나는 전설이다>를 연상시키는 과거의 수호자는. 이 소설의 화자인 현자 십이 호로서 상징된다. 그의 눈에 비친 젊은 세대의 국가는 급격하게 멸망의 나락으로 추락하는 중이었다.


214. 내가 공들였던 모든 것들이 자취 없이 사라졌다. 찬란했던 시절, 탁월했던 날들이 머나먼 꿈, 모두 깨져버린 꿈만 같았다.  


바야흐로 쾌락이 만연한 세상이 되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십이 호는 마침내 알게 되었다.


248. 그는 잊은 게 아니었다. 훌륭한 것들을 의도적으로 파괴한 것도 아니었다. 그는 그것들이 훌륭하다는 걸 전혀 몰랐다.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 모든 것들의 일원인 듯 보였지만 데스트라의 아들이며 우아하고 매력적이고 유쾌해서 우리 모두가 찬사를 보냈던 그 데로드는 청맹과니였다. (중략) 우리는 다양한 상상과 원망과 의심으로 우리 자신을 속였다. 우리는 이 남자, 데로드를 악당으로, 야욕에 차서 음모를 꾸미는 파렴치한 사기꾼으로 여겼다, 실은 처음부터 멍청했을 뿐인데, 그게 전부였는데 우리는 그걸 끝내 알아차리지 못했다.


데스트라는 십이위원회를 낙관했고, 십이위원회는 데스트라를 낙관했다.     


깨달음. 데로드는 처음부터 멍청했었다는 사실은 직접적으로 공개된다. 데로드는 처음부터 멍청했었다. 외모는 출중했지만, 지적장애가 있는 인간이었던 것 같다. 그의 어머니이자 황금기를 이끌었던 선대 지도자였던 데스트라는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녀의 리더십과 정치력 훌륭했지만, 후대의 왕을 선택하는 순간에 이르자. 모성애가 발동했던지. 낙관주의에 모든 책임을 떠넘겼다. 십이인 위원회의 믿음이라는 회피 수단으로 데로드의 치부를 묵인했던 것이다. 자신의 실책을 누군가 발견해 줄 것이라고 믿었지만. 현실에서 이와 같은 낙관은 무너진 상태였다.


4. 전쟁과 구원. <러브 차일드>


소설보다 매력적인 추천사는 소설의 기대감을 증폭시켜 소설의 재미를 오히려 반감시킬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읽은 <러브차일드>는 정혜윤 작가가 느낀 초연한 사랑, 관대한 사랑이라는 사랑의 낭만적인 성격을 논하는 작품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보다는 소망하는 것과 강렬한 기억을 남긴 전환적인 순간과 자신을 달래주었던 구세주라는 존재. 이러한 측면에 중점을 두고 읽었다.


만약. 내가 데이브였다면, 전쟁 상황. 언제 전시에 투입될지도 알 수 없고, 목적지조차도 알 수 없는 군함 안에서 심하게 뱃멀미를 하며,하며, 발이 퉁퉁 부을 정도의 고통. 고통을 잠시 잊을 수 있었던 장소에서 만난 어떤 여인이 진심으로 자기를 걱정해준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조건이라면 사랑에 빠지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상황이다. 아이를 간절히 원하며 눈물을 흘렸던 대프니의 경우에도 그랬을 것이다. 레싱이 이 에피소드를 이유 없이 집어넣었을 리가 없다. 분명 대프니에게도 필요했던 썸씽이라고 레싱은 판단했을 것이다.  


401. "사랑스러운 시를 찾아냈어. 물론 당신은 알고 있겠지. <디어드리>라고 제임스 스티븐스가 쓴 시인데? 이걸 읽으면 당신이 떠올라. '그러나 두 번 다시 태어나지 않았네. / 그토록 아름다운 여인은. 세상에 태어난 여인들 가운데 / 그토록 아름다운 이는 없었네.' 디어드리와 대프니. 그리고 당신은 여왕이지. 나의 여왕 대프니."


이것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데이브는 대프니라는 인간에 대한 매력보다는 어떤 상황을 벗어나게 해준 구세주의 의미로서 디어드리라는 환상까지 덧씌워 그녀를 기억했다. 그녀가 이미 오래전부터 조라는 군인의 부인이며, 조의 아이를 갖고 싶어 했으며, 전쟁 내내 조를 그리워했고, 데이브와 처음 만났을 때에도 그랬었다는 점은 데이브의 의식 안에서만 부정된다. 나중에 대프니와 자신과의 관계로서 자신의 아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부터는 대프니를 소유할 수 있을 것이라는 착각에 그녀를 집착한다.


381. 전쟁은 계속 이어지는 게 아니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지루한 기간이 오래 지속되는 가운데 간간이 교전이 벌어지는 식이었다. 이를테면 전투, 위험, 죽음, 그러다가 권태와 무위가 다시 반복됐다. 그러니 전방에서 오는 소식은 늘 똑같았다. "전쟁은 어땠어?" "아이고, 그 권태라니, 그게 가장 힘들었다네." (중략) 캠프 X의 원태는 질병, 바이러스로 인해 면역력이 떨어지는 질병 같은 것이었다. 권태 증세를 완화시키는 건 소문이라는 열병이었다. 전시의 소문. 이건 연구 과제였다. 인간의 마음속에 도사린 의외의 공간에서 공포와 고독과 희망이 배태하여 꿈의 광채를 입은 징후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다가 술집이나 막사에서 어느 경솔한 자의 입을 통해 기어이 누설되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다가 순식간에 하루나 일주일 만에 진실이 드러난다.


이것은 전쟁이라는 얼굴을 한 미지의 공포와 실제로 다가오는 권태가 극심해질수록 이에 대한 반작용의 측면으로서 증상이 더 커지게 됨을 알 수 있다. 이 관념은 전쟁이 끝나고 데이브의 가정이 생기고 난 이후에도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사진 속의 남자아이는 극한의 순간. 구세주와의 환상적인 하룻밤을 상징하는 <러브 차일드>인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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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랑비 속의 외침
위화 지음, 최용만 옮김 / 푸른숲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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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3월의 책 선정의 변


리스트에 오른 책 가운데 위화의 <가랑비 속의 외침>을 북살림의 3월의 책으로 선택한 이유는 <허삼관 매혈기>, <인생>, <형제>, <제7일>을 읽은 경험1 덕분에 위화라는 작가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의 기초는 고난과 비극 속에서도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삶의 기운이 충만한 휴머니즘 문학이라고 평가해왔었다. 가장 최근의 작품이었던 <제7일>에 도달해서야 작가는 죽음의 얼굴을 본격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구나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첫 번째 장편소설인 <가랑비 속의 외침>은 2월의 책이었던 <죽음의 수용소에서>의 핵심주제인 로고테라피에 부합하는 작품일 것이라고 예상했다. '삶의 의미'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럼에도 살아가야 할 이유'를 던져줄 만한 작품일 것으로 기대했다.


2. 유년 시절의 기억. 그리고 죽음


13. 기억 속의 일이란 그 당시의 분위기를 날려버린 채 껍데기만을 남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의 내 느낌은 그 안의 것들을 그대로 담고 있다.


19. 아마도 기억이란 속세의 은혜와 원한을 뛰어넘어 저 홀로 오는 것인듯싶다.  


기억에 관한 소설이라는 설명만 듣고 선택한 이 작품을 실제로 읽어보니 충만한 삶의 기운을 내포한 이야기와는 정반대로 이야기가 흘러갔다. <가랑비 속의 외침>의 배경인 1960년대의 중국. 이곳은 가난에 수반하는 고생스러움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공간이었다. 이곳의 사람들에게는 배고픔을 달래고 성적 욕구를 푸는 것정신적인 만족과 가족을 지키는 것보다 훨씬 중요했다. 삶은 점점 더 팍팍해져만가고, 자기 몸 하나 지키기에 바빠 여유가 없어진 사람들은 도무지 누군가를 믿고 의지할 틈을 만들 수 없었다. 그러니 누군가와 함께 공생을 바라기보다 홀로 몸뚱아리에 의존한 채, 경험 하나만으로 험한 세상을 헤쳐나가야 했다.


327. 어른들의 권력이 아이들 사이의 아름다운 우정을 순식간에 박살내버렸다. 그 후로 오랫동안 나는 그들과 얘기하지 않았다.


무슨 이유에선지 그들이 그토록 자랑하는 오랜 역사의 산물인 공맹과 노장의 정신은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추었다. 규범은 무너졌으며, 사회안전망은 부재했다. 사회는 점차 부패해져만 가고, 손광림의 주위에는 불온한 영혼의 소유자들만 가득했다. 이런 세상에서 유년기를 보낸 손광림은 무언가 돌파구를 찾기 위해서 본능적으로 함께 이겨낼 사람들을 물색하고 접촉하지만, 그 누구와도 오랜 시간 함께할 수 없었다. 그렇게 그는 외톨이가 되었다.


그들은 모두 죽음이라는 비극으로 손광림을 떠나갔다. 이들은 현재의 손광림의 의식 속으로 예고 없이 찾아온다. 아니 살아가기 벅찬 순간의 손광림의 무의식이 그들을 정중히 불러오는 것 같기도 하다. 확실한 것은 이 죽음이 완결이 아닌 연속이라는 점이다. 만남과 죽음의 기억이 하나의 이야기가 되어 무한루프처럼 이어진다. 누군가 죽을 때마다 가랑비 속의 슬픈 외침이 기억 속에서 울려 퍼진다. 손광림 홀로 그들의 무게를 짊어지고 살아간다. 위화의 첫 번째 장편소설이라는 작품은 삶보다는 죽음에 훨씬 더 가까웠다. 내가 그에 대해서 평가해왔던 기본틀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232. 오랫동안 할아버지의 죽음은 내게 시종일관 하나의 수수께끼였다. 그의 죽음에는 신비한 호흡과 현실적 존재가 섞여 있어서 나는 그의 진정한 사인에 대해 알 길이 없었다. 마치 기쁨 뒤에는 슬픔이 있다는 말처럼 할아버지는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던 그날 아침. 하늘을 향해 포효하고 나서 바로 어찌할 바 모르는 비겁과 쥐새끼 같은 생활의 심연으로 빠져들었다.


그의 소설의 형태가 삶을 갈구하는 것에서 죽음을 집중해서 보여주는 것으로 변했으나 그것을 그려내는 그의 개성있는 문장은 그대로였다. 이야기의 힘이 센 특유의 문장으로 시점이 흔들리는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힘들이지 않고도 읽을 수 있었고, 곳곳에 숨은 타고난 해학적 문체로 그들이 겪을 비극을 조금은 덜 고통스러운 상태에서 공감할 수 있었던 점은 이전의 작품에서도 느꼈던 위화 소설만이 가지고 있는 특징이었다.


3. 더 나은 세상을 위한 기록


위화작가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무엇을 위해서 과거의 슬픈 기억을. 마음을 주었던 사람들의 죽음을 고백하는 것일까? 아마도, 무라카미 하루키의 "죽음은 삶의 반대편 극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일부로서 존재하고 있다."의 명제를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들은 현재 실제로 존재하지 않지만, 손광림의 기억 속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손광림이 살아있는 한 그들 역시 살아있는 존재로서 움직이는 것이다.


46. 산 자가 망자를 땅에 묻고 나면 망자는 영원히 그곳에 누워 있게 되고 산 자는 계속 살아 숨쉰다.


48. 계속 살아갈 자들은 태양을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고, 오직 죽음을 앞둔 자의 눈만이 햇발을 뚫고 태양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다.


과거의 기억을 털어놓음으로써 그 공간의 사람들을 불온하게 한 사회의 문제점에 대해서 불평하고, 그것에 대한 반성도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우리는 이 비극을 멈추기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도 던져볼 수 있을테다. 평범한 사람에게 좀처럼 찾아오지 않을 비극을 수차례 경험한 손광림이 그곳에서 정체되지 않고, 아픔을 딛고, 북경으로 주거지를 옮겨갔다는 점은 단순히 공부로 성공해야 한다는 의미를 초월한 상징적인 의미도 포함된 결론일 것이다. 그럼에도 그 기억이 당신을 성장시킨 자양분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 나름대로 이미 비극인 것이다.


30. 내가 남문을 멀리 떠난 후부터 남문은 내게 고향으로서의 친근함을 줄 수 없었다. 오랫동안, 난 이 생각을 고수했다. 옛일을 회상하거나 고향을 그리워한다는 것은 사실 현실 속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침착함을 잃게 되면서 짐짓 평온을 가장하는 것에 불과하고, 설령 그것이 감상적인 상황과 함께 떠오른다 하더라도 그것은 장식에 불과하다.


31. 기억 속의 저수지는 내게 늘 따뜻함을 전해주는 곳이었으나, 내 앞에 나타난 현실 속의 저수지는 내 과거를 일깨웠다. 수면에 부유하는 더러운 쓰레기들은 저수지가 날 위로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좀 더 확실하게 말하자면, 그곳은 과거의 한 기표로서 내 기억 속에서 사라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남문에 남아서 나에게 영원을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45. 시간은 투명한 어둠을 드러내고, 그 모든 것은 감춰진 어둠 속에 숨어 있다. 사실 우리의 삶은 시간 속에 존재하는 것이지 땅 위에 발 딛고 사는 것이 아니다. 논밭, 거리, 강, 집은 모두 사실 우리가 시간 속에 존재하는 동안에 함께하는 동반자들인 것이다. 시간은 우리를 앞으로 혹은 뒤로 이끌어갈 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습을 바꾸어놓기도 한다.  


225. 나의 기억이 맹렬한 속도로 살아나기 시작한 것과는 달리 할아버지는 질병과 노쇠함이 그의 과거를 무정하게 갉아먹어 들어갔다. 그는 그 자신이 가장 익숙한 길에서 길을 잃었고, 나와 마주치면서 마치 익사 직전의 사람이 나무 판자를 만난 것처럼 남문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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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수업 - 벤저민 프랭클린에게 인생을 배우다
테레사 조던 지음, 박아람 옮김 / 책읽는수요일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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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배움과 경험으로 의미를 되새기다


테레사 조던이라는 낯선 작가의 책. <생활수업>은 20세기 미국의 위대한 철학자 에릭 호퍼를 기념하기 위해 제정된 '에릭 호퍼 북 어워드'의 2015년 대상을 받은 작품이라고 한다. 개인적으로는 이 책의 타이틀에 실린 미국 건국의 아버지라 불리는 위대한 사상가 벤저민 프랭클린 외에 주목할 만한 사상가 한 사람을 더 만날 수 있어서 기뻤다. 도덕적 이성에 근거한 합리적 개인주의를 주창한 여류 사상가 아인 랜드를 굉장히 오랜만에 만나게 된 것이었다.


174. "한 인간이 사람들로부터 자립하는 것은 삶의 원칙이다. 한 인간이 사람들에게 의존하는 것은 죽음의 원칙이다. (중략) 나의 가치들이 서로 모순되지 않고 나의 욕망들이 서로 충동하지 않듯, 합리적인 인간들 사이에는 이해의 상충도, 희생자도 없다."


작가는 앞에서 말한 사상가 외에도 미국의 선구자들이 남겨놓은 가치를 블로그를 개설하여 꾸준히 기록했다. 어떤 가치에 대한 기록을 공부하고, 거기에 자기의 경험도 고백하는 방식으로 자기관리를 시도한다. 마치, 우리가 영단어를 쉽게 외우기 위해서 영영사전으로 해당 단어에 대한 의미를 깊이 공부하듯이, 관련된 개념에 대해 이야기와 경험과 잠언들을 덧붙여서 우리가 그 가치들을 더 깊게 생각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이러한 방식으로 인간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한 그것들을 꾸준히 증식시켰다. 블로그를 방문하는 사람들이 남긴 댓글에 대한 피드백을 충실하게 반영한 흔적도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벤저민 프랭클린의 13가지 덕목1 이외에도 작가가 판단했을 때는 믿음, 감사, 관용, 용기, 용서 같은 가치 또한 삶에 있어서 유용한 가치라서 생각해서 책에 포함시켰다. 작가는 거기에서 만족하지 않고, 우리에게 해를 끼치는 가치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서문에서 그녀가 제기하는 문제점과 얼마 전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읽으며 느낀 감정과 너무나 비슷하다.  


17. 우리들 대부분은 희망하는 인간상이 있음에도 종종 그에 미치지 못한다. 우리는 내일 있을 회의를 준비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TV 드라마에 탐닉한다. 유기농 브로콜리가 좋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빅맥 버거를 먹어댄다. 잠시만 참으면 지나갈 것을 알지만,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고 폭발하여 일을 더욱 그르치기도 한다.


우리들의 양쪽 어깨엔 천사와 악마가 나란히 앉아 있다. 그리고 우리들의 삶이란 그 둘의 싸움이 펼쳐지는 시트콤과 같다. 나 역시 이 책을 쓰면서 부족한 의지와 능력으로 고전할 때에는 주로 나태와 심통과 늑장이 일상이라는 시트콤의 주인공이 되었다.  


우리에게 해를 끼치는 가치. 죽음에 이르는 적으로 규정한 그것들의 이름은 음욕과 탐식, 탐욕, 나태, 분노, 시기, 교만, 허영, 심통 고집 같은 것들이었다.


2. 쌍곡선 할인(= Hyperbolic discounting, 과도한 가치폄하 효과)과 다중자아 이론, 각성과 회피


<생활수업>에서 인상 깊은 부분은 인간을 망치는 부정적인 것을 다룬 부분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인상적이면서 유용했던 부분을 '늑장'에서 찾을 수 있었다. '늑장'에서 그녀는 사람들이 늑장을 부리는 이유에 대해서 생각한다. '과도한 가치폄하'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경제학자 조지 에인슬리의 견해를 가져다쓴다. 이 내용은 예전에 언급했던 쌍곡선 할인과 같은 뜻이지만 해석의 차이로 인하여 '쌍곡선 할인'이 '과도한 가치폄하 효과'로 해석되었다.


2-1. 게으름 피우려고 하는 자아를 극복하기 위한 방식으로 잘 알려진 커미트먼트 효과를 빅토르 위고의 일화로 쉽게 설명한다. 빅토르 위고는 글을 쓸 때 밖에 나가고픈 유혹을 뿌리치기 위해 알몸으로 책상 앞에 앉아서 하인에게 옷을 숨겨두라고 했는데, 이것은 자기를 구속함으로써 글을 쓰도록 유도하는 방식이다.


2-2. 다중자아 이론이라는 흥미로운 해결책을 소개한다. 이것은 우리 안에 여러가지 자아가 있다고 생각하는 방식이다. 최근에 읽은

<프로이트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꼭 알아야 할 것들>의 리뷰에서 언급했던 '쾌락본능' 과 '죽음본능' 2이 다중자아의 여러 얼굴 가운데 두 가지 얼굴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철학자 돈 로스의 말을 빌려와서 실질적으로 이렇게 제안하라 충고한다.


185. "텔레비전을 보는 자아는 계속 텔레비전만 보고 싶어 하지만 그 자아는 현재뿐 아니라 미래에도 텔레비전을 보고 싶어 한다. 이는 곧 흥정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지금 일을 하면 나중에 텔레비전을 더 많이 보게 해주겠다고 흥정하면 된다." 늑장은 흥정 프로세스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을 때 일어나는 결과인 셈이다.   


2-3. 인간의 유형을 압박을 받아야만 일에 대한 아드레날린이 분출하는 '각성 늑장꾼'과 자신의 가치를 성취도로 평가하기 때문에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할까 적정하며 일을 미루는 '회피 늑장꾼'으로 분류해줌으로써 인간에 대한 이해를 한층 증진 시켜준다. 물론 이 각성과 회피의 이론 또한 조지프 페라리 박사의 이론을 가져온 것이다.


안타까운 점은 여기에서 인용한 조지 에인슬리,돈 로스,조지프 페라리 같은 학자의 번역 서적을 찾을 수 없다는 점이었다. 체레사 조던이 이 책을 통하여 소개하는 학자들의 서적은 대부분 한국어로 번역되지 않은 상태였다.

 

3. 아나이스 닌의 잠언


193. 우리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일률적으로 성장하지 않는다. 한 부분만 성장하고 다른 부분은 성장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우리의 성장은 들쭉날쭉하다. 어떤 부분에서는 성숙한 사람도 다른 부분에서는 어린애 같을 수 있다.


이것도 요즘 느끼는 부분이라 옮겨본다.


4. 퍼트리샤 넬슨 리메릭의 '얼간이 10퍼센트 법칙'의 활용법


210.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은, 라디오와 TV에 새로운 채널이 수백 개로 늘었고 인터넷의 목소리도 셀 수 없을 정도이다. 그중 대다수는 끊임없이 볼륨을 높이고 미끼를 던져 주목을 끌려고 경쟁한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가장 큰 우려들을 확인해주는 목소리만 들으려 한다. 그러면서 갈수록 자신의 믿음 안에 갇혀 세상을 본다. 사실 오늘날의 세계에서 우리 모두가 함께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떠올리기조차 힘들다. 세상 거의 모든 일과 그에 대한 입장에 양극화가 심해지면서 양극의 청중도 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바로 그 청중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최소한 무엇을 들을 것인가는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


이 학자의 책은 국내에 딱 한권 번역되어 있는데, 이 주제 '얼간이 10퍼센트 법칙(모든 집단에는 일정 비율의 얼간이가 있다.)'을 다룬 책은 아닌 것 같다. 다시 본문 이야기로 가서. 스스로 선택하기 전에 얼간이 10퍼센트를 항상 생각하고 그것을 배제하고, 결정하는 것을 권한다는 내용이었다.

 

5. '지위를 위한 지출'이 야기한 '쾌락의 쳇바퀴 '


'탐욕'에서는 소비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이 장에서 작가는 중산층의 소비 지출이 경제성장과 더불어 증가하는 통계자료를 가져와서 그들의 소비액이 증가하는 이유가 단순히 개인적인 욕구 때문인지 탐욕을 불러일으키는 다른 문제는 없는지 생각해본다.


87. "빈곤한 사회의 남편은 장미꽃 한송이로 아내에게 사랑을 표현할 수 있지만, 부유한 사회의 남편은 장미꽃 열두 송이를 사야한다."


작가는 개인의 문제로 모든 것을 돌리기 이전에 사회적 기준이 높아질수록 각자에게 요구하는 기준치가 높아지고, 그것이 쾌락으로 변질되어왔음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이런 악순환이 쳇바퀴로 돌아가면서 눈덩이처럼 불어나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로버트 프랭크 박사는 이것을 '지위를 위한 지출'이라고 정의한다. 이러한 '지위를 위한 군비 경쟁'이 오랜시간동안 우리 모두에게 효과를 미치고 있었음을 주지시킨다.


88.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말했듯이, '창피하지 않게' 남들 앞에 나가기 위해 의복에 얼마를 지출해야 하는가는 그 지역의 기준에 따라 달라진다. 그가 쓴 바에 따르면, 18세기 스코틀랜드에서는 최하층의 노동자들조차도 리넨 셔츠를 입었다. 리넨 셔츠를 살 수 없다는 것은 대개 게으름이나 무능력, 때로는 그 이하를 의미했다.


89. 소비 경쟁을 부추기는 것은 두려움, 즉 진짜 실패보다 실패자로 인식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본질적인 불안을 인지하기 전에는 물질적으로 아무리 성공해도, 그래서 최상위 소비자들처럼 막대한 소비를 한다고 해도 결코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탐욕의 맨얼굴이라고 테레사 조던은 우리에게 소개시켜준다.


6.


책은 <오리지널스>같은 창의성에 대한 책, 혹은 일반 문학 작품과는 달리 다루는 주제가 전방위적인 수준으로 많다. 게다가 지면이 한정되어 있어서 관련 주제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금방 까먹게 되는 단점도 있다. 그렇지만 테레사 조던이라는 한 인간이 개인의 성장과 더불어 인류의 정신적 진보와 깨달음에 다가가기 위해 노력은 매우 훌륭하고 존경스럽다. 한번만 읽으면 절대로 매력을 느낄 수 없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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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기술
조제프 앙투안 투생 디누아르 지음, 성귀수 옮김 / arte(아르테)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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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열 가지 침묵


신중한 침묵이 있고, 교활한 침묵이 있다.

아부형 침묵이 있고, 조롱형 침묵이 있다.

감각적인 침묵이 있고, 아둔한 침묵이 있다.

동조의 침묵이 있고, 무시의 침묵이 있다.

정치적 침묵이 있다.

신경질적이고 변덕스러운 침묵이 있다.


2.


18세기 프랑스에 살았던 세속사제. 조제프 앙투안 투생 디누아르가 쓴 <침묵의 기술>.

이 책은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읽을 수 있다.


첫 번째는 우리 자신을 위해 읽는 방법이다. 이것은 편집자와 번역가가 굉장히 오래된 찾아내서 출간한 의도이기도 하다. 말과 글이 범람하는 인터넷 시대. 페이스북의 좋아요나 공감을 얻기 위하여 (수많은 팔로워의 추천을 받으면 광고가 따라오고 그것으로 돈을 번다) 자신의 몸과 마음을 거리낌 없이 학대하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디누아르 신부가 주장하는 침묵의 14가지 원칙은 굉장히 실용적인 조언이 될 수 있다. 게다가 디누아르 신부가 분류한 열 가지 종류의 침묵과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작용하는지에 관한 부분은 당신이 인터넷이나 주위 사람들로부터 접하는 말과 글과 같은 정보나 혹은 당신이 제공할 정보의 옳고 그름을 가리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만약, 진지하게 침묵의 기술을 적용해보기를 바라는 사람이라면 이 책의 원래 의도는 따로 살피지 않아도 된다. 처음부터 끝까지 읽을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열가지 종류의 침묵과 침묵이 어떻게 시작되고 작동하는지에 관한 설명(39페이지부터 64페이지까지)은 편집자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부분이기 때문에 굉장히 공을 들여서 배치해놓았다. 이것을 잘 기억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3.


두 번째 방법은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원래의 목적을 살피면서 읽는 방법이다. 다시 말해서, 18세기 프랑스의 상황을 상상하면서 읽는 것이다. 18세기 유럽. 굉장히 치열했을 유물론과 무신론을 주장하는 철학자. 그리고 종교인과 정치권력의 격렬한 대립 속에서 디누아르 신부가 믿는 가치를 타인에게 어떤 방식으로 설파하는지 지켜보는 것도 <침묵의 기술>의 흥미로운 요소다. 21세기의 사람들이 봤을 때, 과격하고 오른쪽으로 치우친 느낌의 디누아르 신부의 관점에 대하여 옳고 그르다를 논하는 것보다 흥미로운 것은 18세기 보수층의 소명의식을 디누아르 신부라는 상징으로서 읽을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224. 인간이란 워낙에 거짓과 타락을 좋아해서, 신성한 기적의 문헌에 반하는 글에 끌리기 마련이다. 정녕 신앙을 통해서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의심하고 부정하기 시작하면 그 무엇도 제동을 가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이라는 존재인가 싶다.


디누아르 같은 보수주의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종교와 국가가 지배하는 세계관을 보호하는 것이다. 디누아르 신부는 절대적인 진리가 신과 군주에게 이미 부여되어 있다고 평생 믿으면서 안정적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그의 사상이 변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다. 따라서 디누아르의 관점에서는 유물론과 무신론을 주장하는 자들은 존엄한 존재에 균열을 내고 전복시키려는 무리이므로, '악'으로 규정하고 비난하고 있는 그의 모습이 당연한 것이다. 결국, 일반 대중들은 종교와 국가를 뒤흔드는 그들의 말을 무시하고, 침묵으로 일관하며 현재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의견이다.


230.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이여, 목자들의 가르침에 다소곳이 귀 기울여라. 특히 알고자 하는 욕망이 그대를 수많은 위험에 노출시킬 때 덕 있는 자들의 경건한 대화를 경청하고, 그대의 순박한 심성으로 신을 찬양하라.


231. 신앙을 저버린 자들, 당대의 철학자를 자처하는 글쟁이들에게 고하노라. 부디 한 번이라도 진리를 깨달으려는 마음을 갖고, 진리를 추구하고 따르려는 지각 있는 자세를 가져보기를.


이런 의견을 주장하는 과정에서 말에 대한 침묵의 14가지 원칙은 자연스럽게 부차적인 것이 되고, 디누아르가 정말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논점이 이동한다. 글이 말을 대체한다. 말에 대한 침묵의 14가지 원칙이 글에 대한 침묵의 14가지 원칙이 되는 것이다.   


4. 침묵의 14가지 필수 원칙


말에 글을 대입하면 '말에 대한 침묵'이 아닌 '글에 대한 침묵'의 14가지 원칙이 된다.


첫 번째 원칙, 침묵보다 나은 할 말이 있을 때에만 입을 연다.


두번째 원칙, 말을 해야 할 때가 있듯이 입을 다물어야 할 때가 따로 있다.


세번째 원칙, 입을 닫는 법을 먼저 배우지 않고서는 결코 말을 잘할 수 없다.


네번째 원칙, 말을 해야 할 때 입을 닫는 것은 나약하거나 생각이 모자라기 때문이고, 입을 닫아야 할 때 말을 하는 것은 경솔하고도 무례하기 때문이다.


다섯 번째 원칙, 일반적으로, 말을 하는 것보다 입을 닫는 것이 덜 위험하다.


여섯 번째 원칙, 사람은 침묵 속에 거함으로써 스스로를 가장 효과적으로 관리할 수 있다. 침묵을 벗어나는 순간 자기 자신보다 남에게 의존하는 존재가 되고 만다.


일곱 번째 원칙, 중요하게 할 말이 있을수록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혹시라도 후회할 가능성은 없는지 다시 한 번 되뇌어보아야 한다.


여덟 번째 원칙, 지켜야 할 비밀이 있을 때에는 아무리 입을 닫고 있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할 때 침묵은 넘칠수록 좋다.


아홉 번째 원칙, 아는 것을 말하기보다는 모르는 것에 대해 입을 닫을 줄 아는 것이 더 큰 장점이다. 현명한 자의 침묵은 지식 있는 자의 논증보다 훨씬 가치 있다.


열 번째 원칙, 침묵은 이따금 편협한 사람에게는 지혜를, 무지한 사람에게는 능력을 대신하기도 한다.


열한 번째 원칙, 사람들은 보통 알이 아주 적은 사람을 별 재주가 없는 사람으로, 말이 너무 많은 사람을 산만하거나 정신 나간 사람으로 생각하기 쉽다. 따라서 말을 많이 하고픈 욕구에 휘둘려 정신 나간 사람으로 취급받느니, 침묵 속에 머물러 별 재주 없는 사람으로 보이는 편이 낫다.


열두 번째 원칙, 용감한 사람의 본성은 과묵함과 행동에 있다. 양식 있는 사람은 항상 말을 적게 하되 상식을 갖춘 발언을 한다.


열세 번째 원칙, 아무리 침묵하는 성향의 소유자라 해도 자기 자신을 늘 경계해야 한다.


열네 번째 원칙, 침묵이 필요하다고 해서 진솔함을 포기하라는 뜻은 아니다. 어떤 생각들을 표출하지 않을지언정 그 무엇도 가장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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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꼭 알아야 할 것들 -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프로이트 이야기
베벌리 클락 지음, 박귀옥 옮김 / 소울메이트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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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요즘 나를 고민케하는 화두는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통하여 찾아왔다. <죽음의 수용소에서>의 요점은 당신에게 어떤 시련이 다가오더라도 삶에 대한 의지와 미래에 당신이 추구할 목표를 찾아낸다면 그 고난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나는 책을 읽을 당시에도 그렇지만, 최근에도 "삶의 의미를 찾았다고 해서 그것이 곧잘 실현되는 것이 아니고, 쉽사리 정방향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라는 감정을 느끼고 있다. 어떤 목표를 앞에 두고, 이 행동이 옳고 저 행동은 그릇된 것을 머리는 너무나 잘 알지만 옳은 방향과는 거리가 먼 행동을 반복하고 내일부터는 안 그래야지하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이런 역설적인 문제를 예전부터 느끼고 있었지만, 그 심각성을 크게 인식하지 못하고 잊어버렸었다. 그리고 이번 기회에 예전의 기억을 더듬어본다.


나는 이 문제를 <이반 오소킨의 인생 여행>라는 기이한 책을 읽으면서 간접적으로 인지하게 되었다. 이 책의 주인공인 이반 오소킨은 인생을 잘못 살아온 결과. 돈도 잃고, 사랑도 잃는다. 그렇게 나락으로 전락한 자기 신세를 한탄한다. 만약, 신이 현재의 기억을 안고 인생을 다시 살게 해준다면 정말 열심히 살겠다고 기도한다. 그런 기도 후에 정말 신이 나타나서 그의 인생을 리셋시킨다. 새로 태어났음에도 그의 모습은 변하지 않았다. 기억을 간직한 덕분에 그 사건이 일어날 줄 알고 있었지만 막지 못하고 그는 다시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


이 이야기를 읽은 후에 나에게도 그런 성향이 작용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하여 목표로부터 자꾸만 엇나가는 인간에 대한 의문을 품게 되었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왜 살찐 사람은 빚을 지는가?>라는 책에서 읽었던 내용을 빌어와 "눈앞의 작은 이익과 편안함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능 때문에 먼 미래를 보며 계획했던 목표가 순간 흐릿해지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다. 그래서 그렇게 굳은 다짐을 했던 이반 오소킨의 결심이 흐트러졌을 것이다." 라고 정리를 하긴 했지만, 어느새 기억에서 잊혀져갔다. 지금 쓰고 있는 이 글도 이반 오소킨을 회상하며 그때 쓴 리뷰를 다시 보고 나서야 되새길 수 있는 내용이다.


2.


<프로이트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꼭 알아야 할 것들>. 이 책에서도 지금의 고민과 관련된 내용이 눈에 들어왔다.



54. 전쟁이 끝난 후, 그는 새로운 고민을 시작했다. 과연 인간이 가진 공격성의 근원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그에 대한 답으로 성 본능 뿐만 아니라 다른 본능이 존재한다고 가정. 성본능이 새로운 삶과 새로운 것을 창조하려는 성질과 연관되어 있다면, 또 다른 본능은 활동적인 삶 이전에 고요한 상태로 회귀하려는 충동으로써 분해와 죽음을 유도한다고 보았다.


'죽음충동'. 프로이트는 장기간에 걸친 전쟁에 대한 공포로 인해 "모든 삶의 목표는 죽음이다."라는 비관적인 결론을 내렸다.


150. 프로이트는 전반적으로 인간의 삶에 강한 본능이 영향을 미친다고 보았다. 특히 성장. 새로운 삶, 발전을 이끄는 성 본능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설명하는 성 본능과 함께 물체를 파괴하고 살아있는 것을 무생물의 상태로 되돌리는 '죽음본능'이 등장했다. 프로이트가 인간의 성격과 행동을 이해하는 데 본능을 강조했다면, 그의 사후에 정립된 정신분석의 이론들은 '대상관계'에 초점을 맞추는 방향으로 크게 변화했다.


153. 프로이트는 섹스에 우선하는 본능이 있다고 주장했다. 초기의 상태로 되돌리려는 충동은 살아있는 생명체가 무생물로 돌아가는 죽음의 단계에서 발견된다. (중략) "살아 있는 모든 것이 예외 없이 내부 원인에 따라 죽은 뒤 무기물로 돌아간다는 진실을 받아들인다면 '모든 생명체의 목표는 죽음이다.'라는 말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154. 이 주장은 죽음본능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반복강박'에 대해 설명한다. 생명체는 자신의 흔적을 지워가며 발전을 멈추려는 특징을 보인다.


여기에서 등장하는 '죽음본능'이라는 개념이 어쩌면 목표로 향하는 올바른 길을 막아서는 본능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이 본능은 우리를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 하는 상태로 이끄는 힘이 있다고 한다. 그렇게 보면 이 '죽음본능'이라는 것이 자신을 계속 발전시키려는 노력들을 전부 무화시키려는 본능이 아닐까? 인간이 점차 늙고, 죽음에 가까워지는 것처럼. 이 죽음본능이라는 것도 늙어가는 육체에 맞게 인간을 정신적이거나 육체적인 활동성을 점차 약화시키는 개념이 아닐까?   


결국, 의미를 찾아가는 능동적인 활동을 통하여 쾌락을 느끼는 본능과 발전을 멈추고 아주 평온한 상태로 머물다가 죽음으로 돌아가려는 죽음본능. 이 두 가지 본능이 우리 안에 동시에 작동하는 것이다. 죽음본능이라는 것이 좀 더 강력하고 말이다. "누군가 나를 죽이지 못한다면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들 것"이라고 했었는데, 자신의 안에 이미 죽음의 본능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엄청난 괴물을 만난 느낌이다.

 

3.


이 괴물을 다스리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 봤다. <왜 살찐 사람은 빚을 지는가?>에서도 할인율의 문제를 제시한다. 눈앞의 작은 이익과 편안함에 취해 미래의 목표에 소홀해진다고 말이다. 그렇다면 눈앞의 작은 이익을 미래의 목표와 연관되는 목표로 설정하면 될 일이다. 미하이 칙센트미하이의 몰입이론에 다시금 발길이 닿는다.


박웅현의 <인문학으로 광고하라>에서도 "미하이 칙센트미하이의 책, <몰입>의 부제는 '미치도록 행복한 나를 만난다'이다."라는 점을 강조한다. 즉, 이 말의 뜻은 삶의 의미와 목표를 항상 자신의 가까이에 두고, 죽음본능이 당신을 유혹하기 전에 먼저 쾌락본능에 취해있는 상태를 유지하라고 조언해주는 듯하다. 이 괴물에 대해 잘 알게 되었으니. 이제 죽음본능을 멀리하는 일만 남은 것 같다.


34. 그는 삶의 본질에 대한 고통스러운 진실을 깨달았다. 삶은 절대 성장과 발전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파괴와 상실을 포함한다는 것이다.


222. 삶이 어려운 이유는 과거에 형성된 두려움과 욕망의 희생양이 되어 판단력을 상실한 채 과거에 갇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거의 경험과 꿈을 자유롭게 다루고 현재와 미래를 바탕으로 재구성한다면 우리의 삶은 창의적으로 변할 수 있다.  


235. 인간의 삶이 가진 한계를 인정하면 개인이 어느 정도 삶을 통제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궁극적으로 스토아학자들은 정신을 개인이 장악할 수 있는 대상으로 파악했다. 그 결과 개인에게 일어난 일 자체보다는 개인이 어떻게 반응하는지가 더 중요해졌다.


236. 개인이 만족스럽게 살아가려면 자신이 속해 있는 우주를 인정하고 그에 따라 자신의 소망과 삶에 대한 태도를 맞춰나가야 한다. 세계가 인간의 행복을 증진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거나 인간의 소망에 맞춰 압박할 수 있다고 기대하는 것은 실망과 불만족을 야기할 뿐이다.


"인간이 행복해야 한다는 목표는 신의 '창조' 계획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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