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는다
은희경 지음 / 창비 / 199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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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부도덕한 사랑이면 부도덕한 사랑이지. 명백히 부도덕한 사랑은 대체 어떤 것일까?


<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는다>의 첫 단편의 제목인 <명백히 부도덕한 사랑>은 부도덕함의 타협점이 아닐까 싶었다. 명백하게 부도덕한 것이란 어떤 것일까?를 고민한 끝에 나온 그녀의 대답이다. 그 대답에 중요하게 자리하고 있는 것은 '가족애' 였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 '나'는 한 가정의 가장과 내연관계를 맺고 있다. 아버지의 외도 덕분에 이혼의 위기를 맞은 어머니의 딸기이도 했다.  


47. 나에게는 고독이 오랜 친근이었다, 외롭지 않다고 거짓말을 해주는 술도 있었다.

 

38. 마음속에 집착이 있을 때 사람은 혼령 같다. 무엇을 봐도 보이지 않고, 먹는지 뱉는지도 느끼지 못한다. 고독을 겪어본 사람만이 집착의 끔찍함을 아는 것은 참 이상한 일이다.


'나'로서는 이 관계가 부도덕한 것을 알지만, 외로우니까. 술로 외롭지 않다고 거짓말하는 것도 한계가 있으니까. 그래서 누군가를 사랑하며 살아야하니까 당신의 향기에 취해 다가오는 한 남자를 허락한다. 이 남자가 싱글이 아니었기에 자연스레 불륜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이 부도덕한 사랑은 당신 자신이 나고 자란 가족의 파괴라는 문제와 정확히 겹친다. 


34. 가족이란 서로의 꼬리를 물고 있다, 아프게 깨물면 아프게 물린다. 그렇다고 가볍게 물었다가는 자칫 서로를 놓칠 수도 있다. 너무 세게 물면 - 끊겨버릴지도 모른다. 모든 사랑이 다 그렇듯이.


'나'는 그의 여자이기 전에. 어머니와 아버지의 딸이다. 그런데도 아내가 있는 그의 구애를 받아들여 그의 여자가 된다는 것은 어머니의 연적임을 인정하는 꼴이다. 결국 '나'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머니를 배신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 부도덕함이 명백하게 자신이 감당해야 할 문제로 성큼 다가오게 된다. 


이 문제에서 가장 큰 걸림돌인 그 남자와의 관계가 예상보다 순순히 정리되어서 다행이었다. 새로 시작하고 싶다는 그 남자의 말이 이 순간의 욕망을 채우고자 그녀를 억지로 설득시키고자 내뱉는 변명처럼 들렸다는 사실은 내가 보기에는 작가에 의하여 의도된 서사였다.


35. 마음을 정하고 나니까 그래. 이렇게는 하루도 더 못 살겠어. 내년이면 나도 사십인데 지금 못바꾸면 평생 이렇게 살고 말거야. 네가 내 인생의 마지막 기회라구, 알아? (중략)

 

나하고 살면 인생이 바뀔 것 같아요? 그래. 왜요? 너는 내가 사랑하는 여자니까. 그럼 12년 전에는 사랑하지 않는 여자하고 결혼했던 거예요? 물론 그때는 사랑한다고 생각했으니까 결혼을 했겠지. 당신이 나하고 결혼한다고 해요. 그러면 12년 뒤에 똑같은 말을 하지 않을 것 같아요? 그때 어떤 기힉 오면 당신은 또 이번이 진짜 사랑이고 진짜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면서 나를 떠나겠죠.

 

40. 집사람을 의존하고 살면서 마누라는 지켜워하는군요. 그 두가지는 똑같은 역할의 양면일 뿐이에요. 당신 아내와 내가 다른 게 뭐가 있죠? 당신은 내가 하는 말은 배려로 듣고 아내가 하는 말은 잔소리라고 짜증을 내죠. 자신이 낡은 달력 같은 존잭 되기 싫다고 말예요. 하지만 언제까지나 새로운 관계는 없어요.

 

덕분에 그에 대한 명백히 부도덕한 사랑의 미래에 대하여 확신을 갖게될 수 없어졌다. 그 이전에 독자로 하여금 그 남자의 매력이 무엇인지 판단할 기회조차 말끔히 제거해버렸다. 결론은? 남자와 함께 살아갈 치명적인 매력이 없다고 할까? 덕분에 '나'는 명백히 부도덕한 사랑에서 탈출할 수 있었으며 이것은 곧, 가족의 문제에서 어머니의 편을 들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2.


만약에 <명백히 부도덕한 사랑>의 남자가 <인 마이 라이프>의 남자였으면 '나'는 결정을 내리기 훨씬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어쩌면 '나'는 명백히 부도덕한 사랑임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의 연적이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모든 여자에게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인 마이 라이프>의 이 남자는 슬픔의 왕국에 찾아온 불청객이었지만, 얼마지 않아 슬픔의 왕이 되었다. 슬픔을 갖고 있는 여인들에게 그의 모습은 치명적으로 다가온다. 그를 차지하기만하면 슬픔에서 해방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남자였다.  


270. 남자는 계속 여자의 눈을 바라보며 노래를 불렀다. 남자의 눈에서 던져진 빛이 여자의 눈 속으로 깃들일 때마다 생기가 넘쳐나고 눈빛니 타올라 여자의 모습은 아름답게 빛난다. 잠자는 숲속의 공주를 깨운 완자의 입맞춤처럼 남자의 눈빛은 여자의 몸속에 깊이 잠들어 있던 생을 일깨우는 것 같았다.

 

271. 혜린의 마음속에 있는 슬픔의 나라의 법정에서는 새로운 판결문이 나왔다. 여자가 그 남편을 사랑하는 것은 더러운 죄악이며 오직 '인 마이 라이프'의 남자를 사랑하는 것만이 순결한 일이라고, 사랑이 없으면서 함께 사는 부부야말로 상대를 기만하고 삶의 아름다운 섭리를 거스르는 부도덕한 관계라고.


3.


<멍>은 대학의 교수로 있는 이진찬이 '멍의 기억'이라는 제목의 한현정의 원고를 열어보는데서 본격적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 이야기 속에는 동기들 사이에서 막연히 부채의식으로 기억되곤 했던 현정의 남편. 영규의 고단한 생의 기록이 담겨 있다. 현정은 영규의 생을 사회 부조리의 한단면으로 세상에 내놓기를 원했다.


그 기록은 애절했다. 겉으로 보기에 영규의 생은 나태한 인간 자체였다. 그러나 현정의 원고에 담긴 영규의 일기를 통하여 그의 멍이 자신의 나태함의 결과로 생긴 것이 아니라 그를 가로막는 타자의 벽에 의하여. 즉, 온전히 삶의 무게에 의하여 생긴 것임을 알게된다. 영규의 멍은 그러한 부조리한 현실을 새기기 위한 결과로 매일 생겼다가 사라지고, 살아있는 내내 생성과 소멸은 반복된다. 딸에게 애정어린 일기를 남기기도 했던 그는 죽음으로 인하여 멍을 새기는 행위를 그만둔다.


91. 그의 맨살은 따뜻하다. 그는 이 맨살 속에 멍이 아른아른한 누르스름으로 남아 있을 때쯤이면 늘 새로운 멍을 만들어오곤 했다. 하지만 이제 더이상 새로운 멍을 만들지 않은 덕분인지 그의 몸은 아주 깨끗하다. 멍이 없다! 내 손이 멍을 찾아서 그의 몸 이곳저곳을 다급하게 헤맨다. 그의 가슴, 그의 배, 그의 팔과 다리, 아아, 그의 하얗고 투명안 몸속!

내 손은 갑자기 멈춘다.

멍의 기억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의 내막을 알지 못하는 동기들은 죽어버린 영규를 한심한 자식이라며 안타까워 하며, 마땅히 그래야만 한다는 생각으로 그들 마음대로 짊어지고 있었던 부채를 갚기로 한다. 냉정하다.


93. 죽은 자들에게는 산 자의 호의를 거절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산 자들이 자신의 삶을 새로 짜맞추더라도 거기에 대해 소명할 권리가 없다는 게 죽은 자의 가장 큰 비극이다, 하긴 죽은 자는 그런 일에 관심이 없다. 애도는 살아남은 자들 스스로를 위로하기 위한 것이다.


이게 끝은 아니다. 멍의 날카로운 일면은 영규에게만 해당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현정의 원고를 읽은 진찬의 아내. 그녀의 손등에도 푸른 멍자국이 있다는 것이다.    


4.


개인적으로 제일 소름돋았던 작품은 <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는다> 였다. 이 단편소설은 세상에 홀로 남겨진 한 여인의 회상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그녀는 그를 상실했지만, 여전히 그를 잊지 못한다.


105. 죽음이란 삶이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형태로 바뀐 것일 뿐 사라진 건 아니야. 죽은 너를 사랑하는 일이 조금 외롭기는 하겠지. 하지만 그런 건 두렵지 않아. 두려운 건 너를 잊는 일이야. 너를 잊게 되면 사랑을 잃는 거니까. 한 사람의 생에서 사랑이란 단 한번뿐번인 거잖아. 

 

103. 내일이 와도 네가 내 곁에 없으리라는 사실, 그것이 나로 하여금 내일이라는 말을 희망의 의미로 쓸 수 없게 만드는 거야. 거꾸로 오늘 다음에 어제가 온다면 얼마나 좋을까. 너도 살아 있을 테고, 그리고 또 지나온 시절이 좋았던 건 결코 아니지만, 내가 이미 다 아는 일들이 닥쳐올 테니 적어도 두렵지는 않을 거 아냐.


이 소설이 대단한 것은 이유모를 자살로 생을 마감한 남자친구. 상실의 아픔에도 결코 그를 놓지 않은 그녀가 보여주는 두 장의 사진에 대한 서사. 그리고 자살한 남자가 손에 쥐고 있던 한 장의 사진에 대한 설명으로 이 연인에게 찾아온 비극에 대한 완벽한 시나리오를 머릿속으로 그려낼 수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녀는 사진을 설명하는데 충실했다. 오래전에 떠난 부모님의 이야기를 그에게 들려주지만, 독자인 나는 그것을 통하여 아주 자연스럽게 모든 인과관계를 캐낼 수 있었다.


119. 엄마가 사랑한 건 안경을 쓴 그 남자였어. 아버지에게 청혼을 받던 날 엄마는 그 남자의 옹색한 자취방으로 찾아갔대. 청혼받은 사실을 털어놓고 자기의 마음은 당신에게 있을 뿐이라고 고백했어. 그러나 남자는 아무런 약속도 해줄 수 없다고 했나봐. 엄마는 상처를 갇고 아버지와 결혼했던 거야. (중략) 남자에게 자시의 행복한 모습을 보여주려는 복수심과 그 남자를 가까이에서 보고싶다는 그리움. 그리고 죄의식과 질투.


이런 인과관계를 알게 된 이후. 그녀의 부탁은 너무나 슬프게 들린다.


129. 부탁이 있어. 네가 그 사진 속에 없다는 걸 증명해줘. 너는 다른 곳에 있어야만 해. 그래야 우리의 죄로부터 결백해질 거 아냐. 어서 도망쳐. 너를 속박하는 시계와 사진, 그리고 우리의 아버지로부터.


5.


<여름은 길지 않다>는 이해가 잘 되지 않는 단편이었다.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운 유부녀의 일탈을 그린듯 싶었다. 세기말 코드도 있는 것 같았다. 남성이라는 대상을 이름이 공개되지 않는 원룸주인과 혁희와 오래로 분리시켜 등장시킨다. 성적인 코드로서 포썸을 위한 듯한 묘사로 읽히기도 했다.


223. 몇사람을 만족시키는 것은 높은 곳에 있지만 대다수의 사람을 만족시키는 것은 언제나 탁자 아래에 있다. 낮은 곳에서 찾아야 한다. 넓어지려면 먼저 낮춰야 하는 게 보편성의 이치다, 라고 생각한다.


6.


<서정시대>라는 단편은 132.의 문장을 증명하는 것으로 마무리되는데. 솔직히 아주 인상적이지는 않았다. 그녀의 원형탈모는 남들도 그녀의 성격에 대해 판단할 수 있는 확실한 증거였다.


132. 과민함과 자의식, 자의식과 긴장, 긴장과 소심함과 진지함. 정작 머리카락이 유난히 많이 빠지는 데에는 아무런 주의도 기울이지 않았다는 뜻이다. 내 머릿속은 언제나 수많은 분석으로 터질 듯이 복잡하지만 실제로 인생에 효용이 되는 것은 별로 없었다.

 

164. 너, 어제 보니까 땜통이 더 커졌더라. 근데 사람들은 네가 일부러 드러내놓고 다니는 줄 알아. 널 냉소적이고 위악적인 여자로고 하더라니까. 네 소설 주인공같이 시건방지고 독하다고 말이야.


7.


<지구 반대쪽>은 환상적 리얼리즘을 가미한 소설이다. 어린 시절 일가족이 모두 살해당한 기억을 간직한 소년은 어른이 되어서도 '누군가가 돌아와서 그의 머리통을 떼내 보자기에 싸고 매듭을 조이'는 것 같은 고통을 느낀다. 그는 착하지 않기 때문에 누군가가 벌을 내린거라고 생각한다. 이런 고통 덕분에 그는 어딘가 불안한 존재로 남아있다.


그했던 남자가 작은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브라질로 떠난다. 그 여행기간 동안 그를 찾아온 기이한 꿈을 통해 남자가 오랜시간 품어왔던 트라우마가 극복되는 현상이 일어난다. 결론은 분명하지만 이해되지는 않았다. 그의 변화의 원인이 무엇인지.


189. 그 여자는 어쩐지 그가 달라졌다고 느낀다. 종일 가야 말 한마디 없는 것은 여전하지만 그 여자가 욕설을 퍼부으면 전에 없이 언뜻 웃음 같은 것을 띤다. 그의 몸을 안을 때도 그랬다. 체온이 느껴진다. 전에 그와 잘 때는 마치 그는 없고 그의 성기와만 접촉하는 기분이었다. 그 자신은 성기를 떼내 그 여자에게 주어버리고는 아랫도리가 어둠처럼 텅 비고 푹 꺼진 채로 혼자 돌아누워 자는 것만 같았다. 늘 그는 이곳에 없는 것 같이 존재했다. 하지만 이제 그는 자기가 앉았던 자리에 온기를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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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6-08-06 0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좋아하는데!^^

단예 2016-08-06 05: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천천히 은희경작가 작품 전작중입니다. 근데 함께 읽는 책이 많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