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교 랍비인 렙 제불룬은 “오늘 우리는 산다. 그러나 내일이면 오늘은 이야기가 될 것이다. 온 세상은, 모든 인생사는 하나의 긴 이야기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말처럼 오늘의 삶은 내일의 이야기가 될 것이고, 결국 우리의 삶은 이야기로 남을 것입니다. 그 이야기는 비극이 될 수도 있고, 희극이 될 수도 있겠지요. 우리의 자손들에게 우리의 생애는 숨기고 싶은 이야기가 될 수도 있고, 자랑스런 이야기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딱 한 번뿐인 인생을 닥치는대로 막 살아버릴 수는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우리는 오늘도 한 순간 한 순간의 삶으로써 이야기를 써 나가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삶을 평가하려면 그의 돈과 시간이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를 보면 된다고 합니다. 오늘날 우리를 지배하는 시대의 분위기는 ‘이기주의’입니다. ‘불의는 참아도 불이익은 참을 수 없다’는 말이 대변하는 것처럼, 현대인들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어서 부지런히 모으고, 모여진 돈을 자신을 위해 폼 나게 쓰고, 남에겐 전혀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모두의 꿈은 ‘부자’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부와 부자를 결코 정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돈이 주인이 되고, 돈이 목표가 되고, 돈이 최상의 가치가 될 때, 그것을 명백히 죄라고 선언합니다. 그리스도인임에도 불구하고 부자가 되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들, 세상의 것에 유혹을 받고 사는 목적을 부의 축적에 두는 사람들, 많은 재산을 가진 사람들을 부러워하고 시샘하며 더 많은 돈을 모으려고 기를 쓰는 사람들을 향하여 야고보는 다음과 같은 경고를 하였습니다.

1. 그리스도의 제자는 결코 부당한 방법으로 재물을 모으지 않습니다(4)

2. 그리스도의 제자는 재물을 자신만을 위해 쌓아두지 않습니다(2-3)

3. 그리스도의 제자는 사치와 쾌락을 누리기 위해 살지 않습니다(5)

4. 그리스도의 제자는 돈 때문에 남을 짓밟거나 억울하게 하지 않습니다.(6)

그리스도의 제자인 우리는 이야기를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이야기로 남아 두고 두고 영향을 끼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어떤 이야기를 남길까요? 적어도 누가복음 12장에 나오는 부자처럼 “재물에 대해서는 부요했지만 하나님께 대하여는 부요하지 못한 자”(눅12:21)였다는 이야기를 남기지는 말아야 할 것입니다. 구약의 아간이나 신약의 아나니아와 삽비라같은 이야기는 남기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벌고, 모으고, 마음껏 즐기고 사치하고, 남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틈 속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시대의 분위기(trend)와 보편적인 사람들의 가치관을 거부하고 마음 속 가장 깊은 곳에 말씀을 담고, 용감하게 적용하고 순종하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부요했던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남겨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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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네르바 2005-06-02 2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부요했던 사람>... 정말 그러고 싶어요. 내가 이 세상에 남길 이야기는 무엇일까? 생각해 보는 글이네요. 적어도 부에 대해 안절부절 못하는 사람은 아니건만, 사람과 하나님께 얼마나 부요했는지는 다시한번 생각해 보아야 될 것 같아요. 잘 읽었어요.
 



구원-강관욱

하나님께 무관심함(사22:1-25)


22:11 그러나 너희는 일이 이렇게 되도록 하신 분을 의지하지 않고, 이 일을 옛적부터 계획하신 분에게는 관심도 없었다.


  얼마나 어리석은 짓이란 말입니까? 모든 것을 계획하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께는 무관심하고 나머지 모든 것에만 관심을 두고 살아가다니 말입니다. 장난감에만 관심이 있고 아버지는 무시해 버리는 어린아이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아버지가 장난감뿐만 아니라 훨씬 더 많은 것을 주실 수 있는데도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임에도 하나님을 산타 할아버지처럼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이들이 산타 할아버지를 기다리는 것은 선물 때문이듯이, 이들은 하나님께는 관심이 없으면서 무언가를 얻으려고 기를 쓰며 기도하고 기대합니다. 하나님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선물만을 기대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신앙생활의 핵심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서, 예수님의 표현대로라면 아빠로서 더 깊이 알아가고 더 친밀해져 가고 경험해가는 것이 신앙의 핵심입니다. 그러나 어리석게도 이스라엘의 관심은 먹고 마시며 즐기는 데 있었습니다(13).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께 무관심하고,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는 소홀하면서도 절기에 맞춰 제사를 드리고, 자기 삶의 변화와 성장과 거룩을 추구하는 마음가짐 보다는 더 잘 먹고 잘 사는 데만 관심을 가진 이스라엘을 향해 하나님은 “이 죄는 너희가 죽기까지 용서받지 못한다”고 강하게 책망하셨습니다.


22:25 그 날이 오면 단단한 곳에 잘 박힌 못이 삭아서 부러져 떨어질 것이니, 그 위에 걸어둔 것들이 산산조각이 날 것이다.


  하나님께 무관심한 채, 자신이 단단한 못을 박고 그 위에 아무리 많은 것을 걸어둔다 할지라도, 시간이 지나면 다 삭아서 걸어둔 것들이 산산조각이 날 것입니다. 결국 영원한 것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뿐입니다. 하나님과 인격적인 친밀함을 유지하며,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며 살려는 매일 매순간의 결단 없이, 아무리 단단히 못을 박아도 언젠가는 다 떨어져서 산산조각이 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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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의 풍경 - 잃어버린 헌법을 위한 변론
김두식 지음 / 교양인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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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 오래전에 복음과 상황에서 연재되던 그의 글을 읽었던 탓에, 김두식이라는 작가가 낯설지는 않았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그 잡지에  아내의 공부를 돕고 딸을 양육하며 전업주부로  살아가던 그의 미국생활이 연재되었었는데,  나는 그의 기록된 일상에서 편안함과 즐거움을 동시에 즐기곤 했었다. 본서에서도 그의 맛갈스럽고 친절한 문장력은 여전히 힘을 발휘하고 있다. 여기에다가 자칭 무늬만 변호사라는 그가 법 공부를 뒤로 하고 읽어 왔던 수많은 사회과학서적들에서 비롯되었을 풍부한 사회과학적-역사적 지식이 덧붙여져서 읽는 기쁨이 더해진다. 이 책이 법에 관한 책이기 때문에, 법을 모르는 사람들도 재미있게 읽어야 하는 법에 관한 책이기 때문에 그의 균형잡힌 법상식이 책의 근간을 이루고 있음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여하간 그의 자상함과 지식과 법상식이 어우러져서 너무 재미있는 '법이야기'가 만들어졌으니 독자로서는 기쁘기 그지없는 일이다.

  나는 변호사에 관한 안좋은 추억이 있다. 너무 절박한 상황에서 내가 경험했던 변호사는 '돈만 밝히는 돈벌레'였다. 만져보기도 힘든 큰 돈을 변호사에게 건네주고 나오면서 다시는 변호사같은 부류와는 가까이 하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했던 기억이 난다. 이 책을 읽고나서 나는 나의 생각들이 결코 편견이 아니었음을 확인하게 되었고,  그럴 수 밖에 없는 구조를 이해하게 되었다. 우리 사회 곳곳이 문제가 많지만, 법에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들의 문제가 가장 심각하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김두식이 분석하고 설명해주는 시민과 법 사이의 철저한 괴리현상, 리갈 마인드(legal mind)의 허구성, 대화와 토론의 필요성, 실체적 진실이라는 신기루 등을 읽고 있으면 시민으로서 나의 무지가 부끄럽기도 하지만, 오랫동안 통제된 사회에서 살아온 어쩔 수 없는 태생적 한계도 토로할 수 밖에 없다. 국가라는 괴물이 저질러온 통제의 폐해는 '내 귀에 도청장치가 되어있을지도 모른다'는 섬짓한 예측마저 하게 한다.

무엇보다 화가 났던 것은 김두식이 풀어 헤친 법률가들의 세계였다. 그들의 특권의식을 읽고 있자니 참으로 분노와 개탄을 금할 수 없었다. 법률가들이 겸손하게 특권의식의 왕좌에서 내려오지 않는한 우리 사회는 정의의 희망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정의를 실현해야 할 법률가들이 철저하게 이익집단으로 전락해버린 지금, 저자의 말대로 똥개 법률가들이 더욱 기대될 수 밖에 없다. 똥개 법률가들 화이팅!

  자칭 '기독교 중환자'인 저자이지만, 그는 종교문제와 동성애 문제를 비롯한 많은 차별의 문제들을 아주 균형잡힌 시각으로 다루고 있으며, 시민으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법상식과 사회정의 차원에서 법률문제에 관한 튼실한 판단력을 제공해준다. 또한 인간이 누릴 기본적인 권리와 정의와 불의에 대한 판단 기준을 가르쳐준다. 법률에 관한 교양으로서 뿐만 아니라, 시민으로서의 당연한 권리를 찾기 위해서, 또한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비판능력을 기르기 위해서도 이 책은 읽을만한 가치가 충분하다. 게다가 쉽고 재미있기까지 하니 이 책을 못 읽는 독자들은 그만큼 손해를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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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5-27 01: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참으로 신실하게 믿음의 글들 191
이재철 지음 / 홍성사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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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리스천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궁극적으로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오랫동안 숙고하던 저자가 얻은 결론은 "신앙이란 신실이고, 신실이란 본질에의 신실함이다"라는 것이었다.  이 결론을 얻은 저자가 본질로 제시한 네 꼭지는 "말씀, 믿음, 구원, 삶"이다. 말씀의 절대성, 믿음의 완전성, 구원의 영원성, 삶의 현장성으로 크리스챤의 본질을 명쾌하고도 적실하게 설명하였다. 다른 책에서와 마찬가지로 본서에서도 이재철 목사의 선지자적 영성과 사도적 카리스마는 여전했는데, 나는 그의 글의 힘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재철 목사의 책에서 느껴지는 전율은 무엇보다도 그의 탁월한 성경해석에서 비롯된다. '행간을 읽는 능력'이 유감없이 발휘되는 것은 그의 오랜 독서력에서 나오는 힘일테고, 폐부에 와 닿을 정도로 적확한 적용은 그의 깊은 묵상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그의 글을 읽고 있노라면 성경이 살아움직인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느낄 수 있을 뿐더러, 성경이 가슴에 박혀 오랜 울림으로 남게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재철 목사의 책을 읽고 있으면 그의 해박한 지적 능력에 감탄을 하게 된다. 아마도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의 서재를 기웃거리며 읽기 시작했던 수많은 책들과, 홍성사를 경영하며 많은 작가와 책들을 접한 것이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탁월한 성경해석, 해박한 지적 능력과 함께 그가 겪어온 풍부한 삶의 경험들은 그의 선포를 더욱 견고하게 하며, 독자들이나 청중들에게 설득력을 배가시킨다. 학습을 통해 습득한 이야기와 삶의 경험을 통해 체득한 이야기의 힘이 같을 수 없다. 그의 한 마디 한 마디가 독자의 가슴을 울리고 회개하게 하는 것은 그의 경험이 독자들을 강하게 설득하고 자극하고 고발한 탓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의 선포가 힘을 발휘하는 것은 그의 가르침과 삶이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깨달음이 더 중요한가  삶이 더 중요한가 하는 문제는 설교자들 사이에서는 오랜 화두이다. 깨달음이 많아도 삶이 없으면 위선에 머무를 수 있고, 삶은 있으나 깨달음이 없으면 어긋난 방향으로 갈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깨달음이나 삶이나 모두 중요할 수 밖에 없다. 결국 설교자의 힘은 깨달음과 삶의 조화에서 우러나올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재철 목사의 설교가 그토록 많은 사람들을 움직이는 힘을 발휘하는 것은 그의 깨달음과 삶의 조화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 할 수 밖에 없다. 실제로 그의 글 곳곳에서 나는 그의 신실함을 감지할 수 있었다.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깨닫고, 그에 신실하게 반응하고 살아가려고 애쓰는 설교자가 전하는 설교이기에 내 영혼이 떨리고 회개의 눈물이 흐르고 삶의 결단이 나올 수 밖에 없다고 나는 믿는다.

  참으로 신실하게 살아가는 한 설교자가, 독자들로 하여금 참으로 신실하게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기록한 뜨거운 글을 읽는 것은 좀처럼 만나기 힘든 크리스천 독자의 특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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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5-27 01: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시31:14)


  산악인 허영호씨가 에베레스트 정상을 정복한 뒤에 쓴 글에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대목이 있습니다.

 

  “8,700미터 지점에 도달하였을 때의 일이다. 아직까지 남은 거리는 148미터-전 구간이 깍아지른 얼음절벽이고 보면 앞으로 얼마나 많은 시간이 소요될 지, 과연 살아서 정상 정복에 성공할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마침 8,700미터 지점은 밖으로 돌출되어 있어 휴식을 취하기 안성맞춤이었다. 함께 휴식을 취하던 셰르파(짐을 나르는 인부)앙리타가 느닷없이 말했다. 공연히 목숨 걸고 정상까지 올라 갈 필요 없이, 그냥 여기에서 사진만 찍고 내려가자고 말이다. 돌출된 그 지점에서 하늘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면 에베레스트 정상에 서 있는 것과 똑같다고 말이다. 그리고 그가 중요한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동안 자기가 셰르파를 해 주었던 사람들도 실은, 다 여기에서 사진만 찍고 곧장 내려갔다고 말이다”.

 

  그 때 허영호씨가 앙리타의 제안을 받아들여, 그 곳에 태극기를 꽂고 그 뒤에서 양팔을 치켜든 채 기념 촬영을 한 뒤에 하산했더라도, 아무도 그 사진의 진위 여부를 확인할 수 없기에 얼마든지 사람들을 속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허영호씨는 앙리타의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했습니다. 그의 마음 속에는 8,700미터의 지점이 아니라 8,848미터의 에베레스트 정상이 담겨 있었기 때문입니다. 에베레스트의 정상을 마음에 담고 있는 사람은, 그 이외의 모든 에베레스트의 유혹으로부터 자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남들도 다 그렇게 사는데, 남들도 다 그러는데” 라고 하면서 우리는 삶의 기준을 다른 사람으로 두어버릴 때가 참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속에는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의 말씀이 담겨있습니다. 수없는 유혹들이 삶의 곳곳에서 우리를 공격해 오겠지만, 우리는 그 곳에서 머물러 있을 수 없습니다. 모두가 다 그 길로 간다 해도 하나님이,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이 내게 주신 양심이 허락지 않는다면 그 길을 거부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나도 그들처럼 살아야지”하고 말했다면, 나는 주님의 자녀들을 배신하는 일을 하였을 것입니다 시73:15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옳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남들이 가기 때문에 그 길을 따라간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조롱하고 하나님의 자녀들을 배신하며 나 자신을 속이는 일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러므로 아래와 같은 시편기자의 고백은 곧 우리 자신의 고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주님만 의지하며, 주님이 나의 하나님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시3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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