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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 가을 처음으로 정원이 있는 집으로 이사하면서 우리 가족 모두는 간절한 마음으로 봄을 기다렸다. 봄이 오면 텃밭을 가꾸어 상추며 고추며 토마토를 심자고, 꽃밭을 만들어 예쁜 꽃들을 많이 심자고 약속을 했다.
 

     드디어 봄이 되었고 우리는 약속대로 텃밭을 만들어 씨앗을 뿌리고 모종을 심었다. 초보 농사꾼이었지만 욕심을 부려 상추, 고추, 토마토 뿐 아니라 근대, 고구마, 파, 부추까지 심었다. 아이들과 약속한 대로 정원 한 편에는 갖가지 꽃 씨와 장미 모종을 심었다. 난생 처음이었지만 땅을 갈아업고 퇴비를 뿌리고 씨앗을 뿌리는 일이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오히려 즐거웠다. 아마도 땅을 갈고 씨앗을 뿌리는 힘겨움보다 풍성한 수확에 대한 기대감이 더 컸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문제는 나무들이었다. 씨앗을 뿌릴 때만 해도 앙상했던 나무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잎이 나고 자라고 무성해지기 시작했다. 무성해진 나무들은 그림자를 만들었고, 이 그림자로 인해 정성껏 심은 농작물들이 자라지를 못했다. 비가 와서 젖은 땅과 농작물들이 했볕을 받아 자라야 하는데  나무들의 그림자가 햇빛을 막아버리자 이 놈들이 썩거나 자라지 못하거나 힘이 없어 픽픽 쓰러져 버렸다. 
 
 겨우 상추 한 번 따먹는 기쁨밖에 얻지 못하고 우리의 첫 농사는 망가지고 말았다. 썩어가는 녀석들, 힘이 없어 제대로 일어서지 못하는 녀석들, 도무지 자라지 않는 녀석들, 아예 쓰러져버린 녀석들. 이 녀석들을 바라보는 마음이 쓰라렸다. 아침마다 빨리 갈아 엎어버려야지 하면서도 쉽게 실행으로 옮겨지지 못했다. 그림자가 원망스러웠고 햇볕이 몹시 아쉬웠다. 제 아무리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날이어도 그림자로 인해 이 녀석들은 햇볕을 한 모금도 받지 못했고 도무지 자라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얼마 안되는 기간이지만 농작물을 기르면서 햇볕의 소중함과 그림자의 모진 피해를 절실히 느꼈다. 농사뿐일까? 나는 부모로서 자식들을 기르고, 선생으로서 아이들을 키운다. 아이들을 키우는 일은 농사와는 비교할 수 없는 기쁨과 기대가 있다. 아이들이 건강하게 잘 자라는 것, 하루 하루 학업성취도가 높아지는 것, 예의 바르고 곱게 자라가는 것을 바라보는 일은 참으로 숨가쁜 희열이다. 그러나 아이들을 키울 때에도 그림자가 있다. 도무지 아이들을 자라지 못하게 가로막고 있는 그림자가 있다.
 

     아이들은 부모의 얼굴이다. 소극적인 아이들 뒤에는 지나치게 엄격한 부모가 있다. 자주 다투고 자기 맘대로만 하려고 하는 아이들 뒤에는 과잉보호하는 부모가 있다. 열등감이 심해 가진 재능을 펼치지 못하는 아이들 뒤에는 자주 다투는 부모들이 있다. 집중하지 못하고 학업성취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아이들 뒤에는 지나치게 기대하거나 지나치게 무관심한 부모들이 있다. 문제 있는 아이들 뒤에는 문제 있는 부모가 있고, 건강한 아이들 뒤에는 건강한 부모가 있다.

 

     아이들의 그림자는 어른들이 만든다. 어른들이 아이들의 성장을 가로막는다. 과도한 기대, 강압과 비교, 지나친 경쟁, 무관심. 이런 말들은 모두 어른들이 만들어낸 그림자들이다. 멀리 봐야 하는데 앞만 보게 하고, 상생과 상식과 원칙을 가르쳐야 하는데 경쟁만을 유도한다. 자유롭게 사고하기보다 간섭과 강제를 통해 아이들을 지배하려 하고, 관계보다 기능을 중시하는 풍토를 만든다. 결국 아이들은 어른들이 만든 그림자 때문에 햇볕을 받지 못해 자라지 못하고 꺽이고 쓰러지고 만다. 나도 그림자를 만드는 어른들 중의 한 명이다. 맘이 편치 않다.

 

     농작물들을 다시 잘 자라게 하기 위해서는 그림자를 제거해야 한다. 그림자를 제거하지 않고는 그 어떤 노력을 다 해도 햇볕을 받지 못하는 농작물들이 자랄 길이 없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아직 그림자를 제거하지 못했다. 나무를 베어내는 일은 나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들을 위해서는 그림자를 하나씩 걷어낼 것이다. 나무보다 농작물이 소중하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우리의 아이들은 그 어떤 것보다 소중하기 때문이다. 그 어떤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아이들을 잘 키우는 것은 가치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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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은 농구화 버리는 날이다. 15년이 넘은 내 농구화이다. 잠시 어찔하며 눈물이 핑 돈다. 

     쓰레기 분리 수거함에 넣으려다 가지고 들어왔다. 문득 나이 들어가는 것이 무서워진다. 한 살 한 살 더 들어갈수록 할 수 없는 일들이 많아지겠지 하고 생각하니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 

      남자 인생은 어느 순간부터 바빠지기 시작한다. 대부분은 브레이크를 밟지 못하고 전진만 한다. 나 역시 그랬다. 공부를 오래 했기에 남들에 비해 더욱 바빴다. 학교를 졸업하고 유학을 갔고 30대 중반까지 공부를 했다. 얼마나 치열하게 살았는지 결혼도 서른 다섯에야 했다. 결혼하고 아이들을 낳은 후에는 이전보다 몇 배나 더 바빠졌다.  

        대학원 다닐 때까지만 해도 내 별명은 '운동권'이었다.  많은 시간을 농구장에서 보냈기 때문이다. 당시 교수님과 원우들은 농구장에 가면 언제든지 찾을 수 있다며 나를 운동권이라 불렀다. 땀 흘리고 몸을 부딪히며 농구를 하는 것이 그렇게 즐거울 수 없었다. 그 무렵 먹고 자고 씻는 등의 기본적인 생활 외에 내 생활의 대부분은 농구장과 도서관에서 이루어졌다. 농구는 어릴 때부터 내 삶의 가장 중요한 우선순위였다. 중학교 때부터 대학원을 졸업할 때까지 내 손에는 늘 책 아니면 공이 들려 있었다. 

      바빠지면서 농구도 서서히 내 생활에서 사라져갔다. 치열하게 살아야 생존할 수 있는 사회에서 나는 옆을 돌아볼 여유가 많지 않았다. 앞만 보고 달려가도 시간이 모자랐다. '나만의 시간'은 사치였다. 일해야 했고, 벌어야 했고, 윗사람들의 환심을 사야 했고, 뒤쳐지지 않도록 끊임 없이 정보를 모으고 나를 개발해야 했다. 나는 그렇게 '경쟁의 세대'에서 살아남기 위해 눈을 부릅뜨고 전진해야만 했다. 

     시간은 흘렀고 결국 오늘은 내 마지막 농구화를 버려야 하는 날이 되었다. 지금 여러 가지 생각이 내 머리를 어지럽히고 있다. 그깟 농구화 한 켤레에 뭐 그리 많은 의미를 부여하느냐고 핀잔을 놓을 수도 있겠으나 나는 오늘 매우 슬프다. 어지럽다. 답답하다.

     이제 나는 공을 퉁퉁 튀겨 가며 멋지게 날아 올라 슛을 던질 수 있는 남자가 아니다. 남들보다 높이 뛰어 올라 리바운드를 잡아내거나 쏜살같이 달려가 몸을 뻗어 레이업을 올려놓을 수도 없다. 10년도 더 넘게 공을 만져보지도 못했다. 그리고 마흔이 넘어버렸다.
 
    오랫동안 신발장의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내 농구화. 아내의 구박을 견뎌내면서도 언젠가는 신을 날이 있을 것이라고 굳게 다짐하며 지켜왔던 내 농구화. 신발장에서 가장 덩치가 크지만 가장 긴 시간 동안 주인의 선택을 받지 못했던 내 농구화. 오늘 나는 그 농구화를 버려야만 한다.  

     요즘은 사람이 그립다. 잠시 멈추어서 사람들을 만나고 싶다. 마흔이 넘은 지금 브레이크를 한 번 쯤은 밟아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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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en Jesus saw their faith, he said to ther paralytic, "Son, your sins are forgiven" 막2:5

네 명의 남자가 자기들의 친구를 예수 앞으로 데리고 가길 원했다. 군중이 너무 많아 예수님 앞에 친구를 데려다 놓을 수 없자, 지붕에 구멍을 뚫고 예수님 앞에 친구를 내려놓는다. 그 때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 친구를 고쳐주신다. 중풍병자의 믿음이 아니라 친구들의 믿음을 보고 중풍병자를 고쳐주신다. 대체 예수님은 친구들의 어떤 믿음을 보신 것일까?

  그 친구들은 예수님이라면 자기들의 친구를 고쳐주실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더 중요한 믿음은 그 친구를 고쳐주고 싶다는 그들의 간절한 바람이었을 것이다. 친구를 사랑하는 그들의 우정이 있었기에 지붕이라도 뚫어서 예수님께 데리고오고자 했을 것이다. 고쳐주실 수 있을 것이라는 예수 의존의 믿음도 중요하지만 그 이면에 사람을 사랑하는 믿음이 더 중요했을 것이다. 예수님은 그 믿음을 인정하고 그 친구를 고쳐주신 것이 아닐까? 실제로 예수님의 삶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종교적 전통이나 형식보다 사람이 더 중요하다고 누누히 강조하셨다. 세리와 어부를 제자로 부르시고, 비난에도 불구하고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연회를 즐기시고(16),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위해 안식일이 있는 것이라고 분명히 밝히시지 않았는가(27)! 예수님은 제사가 아니라 자비를 원하시며 형식보다 사람사랑이 중요하다고 복음서 곳곳에서 밝히셨다.

그렇다면 예수를 따라가는 제자로서 사람 사랑의 본질을 먼저 추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어느새 바른 그리스도인이란 주일성수 잘하고 십일조 잘하고 교회의 전통을 잘 따르고 목회자의 말에 순종하고 조직의 논리에 충실한 사람으로 정의되고 있다. 예수님이 깨뜨린 바로 그 모습을 회복(?)하고 있다. 자기들과 다르면 틀린 것이고, 자기들의 정한 규칙과 형식을 따르지 않으면 매도하기 일쑤이다. 예수님이 보시면 얼마나 한탄하실까?

  사람들을 끌어안자. 세리와 죄인들과 기꺼이 친구가 되신 예수의 발자취를 따르자. 형식이나 전통에 얽매이지 말고 본질을 추구하자. 예수님처럼 사람사랑에 걸림돌이 되는 것은 다 무너뜨리자. 전심으로 사람들을 대하자.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섬기고 돕고 사랑하기 위해 애쓰자. 예수님처럼 만인의 친구가 되자. 그것이 예수를 따르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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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man with leprosy came to him and begged on his knees, "If you are willing, you can make me clean." Filled with compassion, Jesus reached out his hand and touched the man. "I am wiliing," he said. "Be clean!" Immediately the leprosy left him and he was cured. 막1:40-42

간절한 마음으로 예수 앞에 무릎꿇은 한 문둥병자, 지극한 마음으로(Filled with compassion) 손을 뻗어 만져주시며(touched) 고쳐주시는 예수 .

수십번을 읽었지만 그야말로 명장면이 아닌가. 만일 내가 화가라면 꼭 그려보고 싶은 장면이다. 이 장면이야말로 예수님이 누구신지 대변해주고 있는듯하다.

살아갈수록 결핍을 느낀다. 감정, 정서, 돈, 사람, 관계, 꿈, 심지어 가족까지. 채워지지 않는 결핍은 나를 죄 속으로 밀어넣는다. 결핍을 메우기위해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갖은 노력을 다 하지만, 한 결핍이 채워지면 또 다른 더 큰 결핍이 생성되어 나를 옭죈다. 결국 결핍은 채워지지 않고 더 많은 결핍을 안은채, 설상가상으로 더러워지고 난잡해진 나를 발견케된다. 이 모습이야말로 정확히 문둥병자가 아닌가. 더 이상 스스로는 결핍을 메울 수 없어 위험을 무릎쓰고 예수 앞으로 달려나온 그 문둥병자의 모습이 바로 내 모습 아니던가.

생각할수록 명장면이다. 그 어떤 상상력으로도 만들어낼 수 없는 명장면이다. 그 어떤 예술도, 장관도 감당해낼 수 없는 눈물나도록 아름다운 장면이다. 직접 보지 못했지만, 글로써 만나 머리로만 그려볼 수 있는 장면이지만, 나는 오늘 아침 이 장면을 그려보며 감동에 못이겨 몸부림치고 있다. 나는 더 이상 아름다운 광경을 발견할 수가 없다. 그는 예수, 그는 문둥병자, 그리고 문둥병자는 바로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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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수룩한 사람들이 언제까지 어수룩한 것을 좋아하려느냐? 비웃는 사람들아, 언제까지 비웃기를 즐기려느냐? 미련한 사람들아 언제까지 지식을 미워하려느냐? 너희는 내 책망을 듣고 돌아서거라. 보아라 내가 내 영을 너희에게 보여주고, 내 말을 깨닫게 해주겠다. 잠1:22-23

내가 언제까지 이러고 살아야할까? 지난 몇 개월간 혼돈의 세월을 살고 있다. 뒤죽박죽이 되어버렸다.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위해 사는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모르겠다. 사실은 아픔을 잊기 위해, 현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서, 되새기면 상처가 더 깊어질까 두려워서 일부러 정신없이 살았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너무 멀리 왔다. 죄에 무감각해지고, 영적 방향감각을 상실하고, 의미와 가치가 짓밟히고, 비웃음과 무관심으로 아픔을 덮으려하고 있다. 오늘 아침 하나님은 나에게 "언제까지 그렇게 살것이냐? 라고 책망하신다. 그 책망이 사랑임을 나는 알고 있다. 그 책망이 기다림임을 나는 알고 있다. 하나님은 "이제 그만 돌아서거라"라고 자상하게 말씀하신다.

If you had responded to my rebuke, I would have poured out my heart to you and made my thoughts known to you. 23절.

이제 그만 방황을 멈추고 하나님께로 돌아선다면, 하나님의 마음을 나에게 쏟아부어주겠다고, 하나님의 생각을 나에게 알려주시겠다고 말씀하신다. 자신에게 돌아선다면, 자신의 마음을 다 쏟아부어 나를 위로하시고 나에게 벌어진 모든 일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알려 주시겠다고 말씀하신다. 내게 마음을 주시겠다고, 자신의 생각을 알려 주시겠다고 이제 그만 돌아서라고 말씀하시는 아버지를 대하는 이 아침 나의 심장은 죄송함과 고마움으로 떨리고 있다.

아버지의 마음을 기억하자. 아버지에게 돌아선다면 따뜻한 품을 벌리고 반겨주실 것이다. 마음을 다 쏟아부어 사랑해주실 것이다. 어리숙하고 미련하게 살면서 죄에 짓눌려 살았다 할지라도, 원망과 분노로 가슴이 갈기갈기 찢겼다 할지라도,상처로 얼룩져 정상적으로 사람과 세상을 대할 수 없다 할지라도 아버지는 나를 안아주실 것이다. 어루만져 주시고 같이 아파하시고 마음을 다 쏟아 나를 사랑해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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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29 01: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방해하 2007-11-23 18:28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오빠,안녕하세요.
동경교회 조선족 자매 방해하 입니다.
이렇게나마 오빠의 소식을 알수 있어서 너무
감사한것 같아요.
짧았지만 하나님에 대해서 함께 나누고 감동했던
시간들이 저희들에게는 참 소중했어요.
어디에 가든지 항상 하나님의 강한 메세지를
전하는 동시에 기뻐할수 있는 삶을 살수 있도록
기도할게요.
힘내요!




강은희 2007-11-20 14: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진현근 오빠 ,안녕하세요?
동경교회 조선족 자매 .기억나시죠?
우리들 한테 큰 메세지를 남기고
많은 격려를 주어서 감사합니다.
인터넷에서 오빠 설교 듣지 못해서 섭섭했어요.
근데 하나님을 온 마음으로 사랑하는 오빠가
어디가든 하나님의 나라와 의 를 위해서 열심히
살거라고 믿고 있었어요.
항상 믿음의 승리자가 되고
하나님의 축복이 넘치길 기도 할게요.
오빠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