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스포일러 포함


  지금은 애 둘의 엄마가 된, 도서관에 새로 들어온 소설이라면 아무 사전 정보 없이 그야말로 닥치는 대로 책을 읽던 친한 친구가 생각보다 괜찮았다고 해서 오래전 읽었던 책이다.

  불행한 자신의 운명을 견디며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했던 어떤 청년이 고독사하고, 그의 뼛가루가 욕조 안에서 소용돌이치며 빨려 들어가는 '프레시 피시맨'의 마지막 장면을 읽고선 한동안 엄청 우울했던 기억이 난다. 

  정말 그 어떤 희망도 없이 우울하게 끝나버렸던 소설. (수록 소설 전부가 그러진 않았던 것 같음)


  꼭 세계적으로 이름나고 유명해야만 독자에게 평생 기억되는 것은 아닌 것같다. '김종은'이라는 작가는 그 이후로 몇 권의 책을 냈고 별로 흥하지도 않았지만, 나는 아마도 그가 쓴 '프레시 피시맨'의 마지막 장면은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이다.


  점심 시간에 서점가서 창비 세계문학 새표지 구경하다가 갑자기 생각나서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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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0-05-29 11: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창비 세계문학 새 표지가 궁금하셨구나! ㅋㅋㅋㅋㅋ 걸레짝 같지는 않죠? ㅋㅋㅋㅋㅋ

케이 2020-05-29 11:44   좋아요 0 | URL
네 ㅋㅋㅋ전 바뀐 쪽이 더 예쁘던데요!

잠자냥 2020-05-29 12:21   좋아요 1 | URL
ㅋㅋ 걸레짝보다는 수건이 좋은 케이 님 ㅋㅋㅋㅋ

케이 2020-06-01 13:26   좋아요 1 | URL
그 표지를 싫어했던 제 취향이 마이너인거 팔스타프님 포스팅 댓글보고 처음 알았습니다요.
 


  원래는 100자 평 쓰려다가 그냥 짧게 잡담으로 쓴다.


소설 읽다가 중간중간에 쉬어가는 코너처럼 읽으려고 샀는데 전혀 재밌지 않았다.

계속 훌륭한 사람들 이야기만 나오니 지겹더라고. (칭찬 일색인 책에 이런 평하기 미안하지만 난 진짜로 재미가 없었어... ) 

내가 겪어본 적도 없고 본 적도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라 와닿지 않아서 그런 걸까? 소설 속 인물들한테는 나도 모르게 감정 이입이 되는 부분이 반드시 나오기 마련인데 이런 책을 읽을 땐 그저 저세상 사람들 얘기란 생각이 들더라.


또 한 가지. 뭐... 크게 상관은 없겠지만, 책 속에 자주 나오는 노골적인 영어 번역체도 쪼끔 거슬린다. 


결국 소설 열심히 읽기로 했다.


P.S 엄마가 다시 아프셔서 제정신 아니지만 돈은 벌어야 해서 사무실에 앉아는 있는데 집중이 안 되고 해서 이거라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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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회사 때려치고 출신 대학에서 계약직 학과 조교로 일할 때, 수강신청 관련해서 대강당에서 금년도 수강신청 계획 세미나를 항상 했다. 그때 수강신청 담당 교직원이 "사실 수강신청 무사히 끝내면 저희 1년 업무 90% 끝난 거 아닙니까?"  라고 말하는 걸 듣고 풋 하고 웃었다.


   사람들은 알까. 만명이상이 재학 중인 대학교의 시간표가 오직 인력에 의해서 작성된다는 사실을. 수학과 같은데는 시간강사만 몇십명인데 그 몇십명들에게 한명 한명 절대 수업하면 안되는 요일 시간대를 받고 도저히 모든 강사와 교수의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할 땐 한명 한명 전화해서 양보 좀 해달라고 읍소하고 달래야 한다. 가끔 금요일 7,8,9 교시나 월요일 1,2,3 교시도 다 상관없이 난 아무 때나 수업하겠다는 시간강사나 교수도 정말 드물게 있었는데 우리는 그 분들을 '천사' 라고 칭했다. 내가 간신히 몇 십개의 엑셀 시트를 거쳐 완벽한 시간표를 작성했다고 해도 그 시간표에 맞춰서 강의실을 확보해야 그 시간표를 학생들에게 공지할 수 있는데, 그게 또 보통일이 아니었다. 강의실 확보 역시 조교들끼리의 전쟁이었던 것이다. 강의실 신청일 땡하자마자 수백명의 조교가 광클 (=광란의 클릭)을 하는데 강의 규모에 맞는 강의실을 차지 하지 못하면 죽어라 고생해서 간신히 작성한 시간표를 다 갈아엎거나, 아니면 강의실이 넉넉한 기계과 같은데 전화걸어서 제발 남는 강의실 하나만 우리한테 빌려주면 안되겠냐고 또 빌고 또 빌고. 그 외에 다양한 상황들... 필수 과목을 겹치게 하지 않아야 하고, 필수 과목 연달아 개설시에는 쉬는 시간내 이동 가능한 같은 건물 내 강의실을 잡아야 하고 기타 등등.

  제일 문제는 다가오는 학기가 4학년 2학기여서 다음 해에 졸업해야 하는 학생들인데 꼭 똘똘하지 못한 애들이 있어서 마지막 학기가 되도록 졸업 필수 과목을 안들은 애들이 있었다. 그럼 또 그 몇 명을 위해 이번 학기에 꼭 필수 과목 개설을 해줘야 했다. 한 번은 다음 해에 꼭 졸업해야 하는 어떤 애가 들어야 할는 필수 과목을 개설해야 하는데  끝내 평일 강사 섭외 못해서 토요일 수업 개설한 적도 있었다.

  그렇게 죽어라 2년 일하면 대학교에서는 계약기간 만료니 나가라고 한다. 나도 그래서 짤렸다.  


  이제 학교에서 근무하진 않지만 지금 일하는 회사에서도 내 업무는 좀 비슷하다 내 업무는 3월 법인세 결산이 끝나면 1년 업무의 90%는 끝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3월 내내 더럽게 바빴고, 3월 시작과 동시에 회사 와서 업무시간 내내 그야말로 경주마처럼 일했다.  (재택근무 그게 뭔가요???) 그러다 어제 법인세 신고 직전까지 다 끝냈다. 너무 감격스럽다. 올해도 잘 넘겨서.


  그렇다. 이 글은 요즘 책도 많이 안 읽고 또다시 아무 감상문도 안 쓰는 지금 나에 대한 변명인 것이다. 어제까지 열심히 달렸으니 오늘은 조금 널럴하게 일하려고 하는데... 될까? 제발 되길. 오늘 소원은 퇴근 직전까지 아무도 나한테 말을 걸지 않는 것이다. (불가능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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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동생과 나는 가끔 우리 가족은 대한민국 기독교 0.01%라고 농담조로 말하곤 하는데, 그게 농담만은 아니다. 우리 친할아버지가 1901년생이시니깐 우리 증조할아버지는 조선시대 사람인 셈인데 그 이름도 모르는 증조할아버지가 남긴 자기 자서전 비슷한 게 옛날 할아버지 집에 있었다. 다 한자라 난 읽을 수 없었지만 아빠가 읽어보니 증조할아버지를 키울 능력이 없었던 나의 고조할아버지는 증조할아버지를 양자로 보낼만한 집을 물색하던 중 (그렇다.... 우리 집안은 대대손손 가난했던 것이었다... ㅜㅜㅜㅜ 불행히도 2020년까지 ING 중) 적당한 집안을 찾았는데 알고보니 그 집안에 동학에 가담한 사람이 있어 양자로 보내려던 걸 없던 일로 하고 어쩌고 저쩌고 이렇게 시작하여 증조할아버지 인생의 주요 사건들이 적혀 있다고 했다. 그런데 글쎄 거기에 증조할아버지가 전라도 나주 어귀에서 숨어서 예배를 드렸단 내용이 써져 있단 것이다. 


  증조할아버지의 자서전 때문에 우리 집안이 기독교를 받아들인 시점이 조선 말기라는 걸 알게 된 건데, 어떻게 생각하면 우리 증조할아버지는 굉장히 급진적이었던 분이었던 것 같다. 거기에 우리 친할아버지는 그 옛날에 침례교 목사님이었으니, 이쯤 되면 한 집안이 기독교를 믿은 역사로만 따지면 대한민국 0.01%가 맞을지도 모른다. 결과적으로 우리 집안은 조선 말기부터 집안의 모든 제사를 없애버린 셈인데, 그래서 그런지 우리 친가 식구들은 다른 집안들에 비해 남녀가 평등한 편이었다. (사실 명절 여성 노동의 원흉은 제사 아니던가) 지금도 친가 식구들은 만나면 그냥 나가서 외식하고 집에 와선 차 한잔 마시고 저녁 먹기 전에 다 집으로 돌아오는 분위기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우리 집안이 완전히 기독교에 갇혀버린 집안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내가 수십 년 교회를 다니며 느낀 건 흔히 말하는 모태 신앙으로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의 사고가 이제 금방 교회를 다닌 사람들보다 훨씬 더 유연하다는 점이다. 난 유럽과 미국을 보면서도 가끔 이런 걸 느끼는데 기독교를 믿은 역사가 미국과 비교도 안되게 긴 유럽이 오히려 종교에 있어선 더 개방적인 면이 많다. 오히려 미국 교회들이 훨씬 더 엄격하고 보수적인 편이고. 그거랑 우리집도 비슷하지않나 싶다.


  오랜 시간 예수님을 믿다 보면 예수님을 믿는 형식과 성경에서 말하는 규율이 사실상 아무것도 아니란 생각이 불현듯 들 때가 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도 규율에 사로잡힌 자들이 이건 이래서 안 되고 저건 저래서 안돼 라고 할 때마다 뭔 상관이냐 상관하지 말고 그냥 하라고 한 적이 더 많다. 뭐 내가 남의 신앙을 가지고 이래라저래라 할 급은 아니지만 신자라면 규율에 사로잡힐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항상 내 맘속에 계시다고 믿고 또 내가 믿는 예수님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셨을까 고민하며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목사들이 주장하는 각종 형식, 규율은 결국 그들만의 세계에서 자기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지 절대 주님의 뜻은 아닌 것이다.  (예수님이 바리새인을 얼마나 싫어했는데!)


  나도 그냥 일요일에 가서 예배만 드리는 사람이다가 3년 전 어느 날  제발 빠른 시일 내 죽게 해달라고 엉엉 울면서 기도하던 중 갑자기 무언가를 느낀 이후로 꽤 독실한 신자가 되었다. 남이 들으면 비웃을지도 모르지만 난 분명히 그것이 주님의 응답이었다고 믿고 있다. 신이 존재 증거는 그 어디에도 없기 때문에 종교라는 건 결국 누군가의 의견이고 신앙은 결국 그 의견을 취하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하나님과 주님이 있어 다행이고 구원이었다.


  이렇다 보니, 나에게 엔도 슈사쿠의 '깊은 강'은 몇 번이고 눈시울이 붉어졌고, 가슴이 뜨거워지곤 했다. 가톨릭 교단에서 이단으로 몰리는 신부 '오쓰'를 보며 나의 주님은 이 세상 모든 사람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명심하고 또 명심해야겠다고 다짐도 많이 했다.


  나 같은 신자가 아니더라도 소설 '깊은 강'의 등장인물 각자의 이야기가 먹먹하고 가슴에 남기 때문에 큰 거부감 없이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특히 기억에 남는 사람은 전쟁 중 인육을 먹은 죄책감으로 평생 괴로움에 시달리던 남자와 동화 작가다. 


  평소 엄청난 게으름뱅이에 식물조차도 제대로  키우지 못하는 나는 왜 인간은 엄청난 정성과 수고 그리고 병원비까지 기꺼이 지불하면서까지 동물을 키울까?라는 의문을 항상 품고 있었다. 그런데 '깊은 강'의 동화 작가 이야기를 읽으며 단박에 반려동물이 주는 위로가 뭔지 알게 되었다. 특히 검은 개가 슬픔에 빠져 있는 어린 시절 동화 작가에게 "어쩔 수 없잖아요." 라고 말하는 듯했다는 장면에서는 눈물이 핑 돌았다.


  이 세상에 각종 병과 전쟁을 만든 당신이 밉고 난 절대 당신을 믿지 않는다고 절규하는 XTC 의 Dear. God 이라는 곡을 들을 때면 언제나 가슴이 아프다. 어렸을 때라면, 그래 정말 예수님 미워! 당신 때문에 싸움이 나잖아!!! 라고 말하며 나 역시도 노래와 함께 절규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은 결국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아 서로 죽고 죽이는 이 세상을 보며 주님도 많이 가슴 아파하시지 않을까란 생각에 가슴이 아프다.


  한번 신을 믿은 사람이 불신자가 되는 것은 불신자가 독실한 신자가 되는 것만큼이나 불가능할 것이다. 위에서 말한 노래의 화자도 당신을 안 믿는다면서 끝내 호소할 곳이 없어진 후엔 사람이 아닌 신에게 편지를 썼으니까 말이다. 

  종교 때문에 전쟁도 일어나고 심지어 요즘에는 바이러스까지 퍼진다. 그런데 이게 그 종교가 믿는 신 때문일까? 어쩌면 신이 시킨대로 살지 않은 어리석은 인간들의 잘못은 아닐까...

 

  신자로서 삶의 방향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해준 고마운 책 ' 깊은 강'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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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0-03-03 17: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처럼 한 번도 신을 믿은 적이 없는 사람에게도 <깊은 강>은 아주 큰 감명을 준 작품이었어요. 엔도 슈사쿠의 많은 작품들이 그런 것 같습니다.

케이 2020-03-04 10:00   좋아요 1 | URL
네. 특정 사람에게만 이해되고 감동적인 소설은 아닌 거 같아요. 물론 신자에게는 더 특별할 수 있겠지만.... 이 소설도 잠자냥님 추천으로 읽게 된 건데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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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있음>


28살이 되던 해, 나는 결혼할 뻔 했다. 당시 나에게 결혼을 제안한 남자는 오랜 시간 알고 지내던 대학 선배였는데 그 오빠를 안 이래, 단 한 번도 연애 상대로 생각해본 적 없는 나였기에 끝내 그 제안을 거절했다. 사건 이후, 그 남자와 나는 원래 사이, 그러니까 남들보다 조금 친한 대학 선후배 사이로 남았다.

시간이 흘러 2년이 지나고 내가 서른 살이 되었을 때, 그 오빠는 나에게 이제 너도 여자로서 끝났다.” 고 말했다. 꽤 이름난 회사에 다니는 사람이었는데, 서른 넘은 여자가 잘나가는 남자를 만날 확률은 제로에 가깝다면서 나보고 28살 때 자기를 잡지 않은 것을 평생 후회할 것이라고 저주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의 말도 거짓이 아니긴 했다. 나이 서른 살이 넘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죽도록 고생하다 결국 적응에 실패한 첫 회사를 때려 친 후, 계약직을 전전하다 보니 나에게 남자를 소개 시켜주겠다는 사람도 현저히 줄었고, 예전에 데이트하던 남자들에 비해 낮은 사회적 위치의 남자들만이 주변에 남았다.

  나는 비교적 엄마 말도 잘 듣고, 선생님 말도 잘 듣고, 몸이 약해서 남들처럼 신나게 노는 것도 체질에 안 맞아, 학생 때는 학교-집만 왔다 갔다, 회사 다닐 때도 회사-집만 왔다 갔다 하는 속 한번 안 썩인 딸이었다. 그런데 28살에 조건 좋은 남자를 걷어차고 서른 살이 넘었는데도 남자친구가 없다는 이유 하나로 30년 간 효녀의 시간은 있으나마나 한 것이 되고, 별안간 천하의 불효 자식이 되어버린 것이다. 30년간 부모님의 양육 RPG 게임에서 학업 스테이지, 수능 스테이지, 취업 스테이지 에서 그나마 평균 이상의 성적을 거두던 딸이 연애&결혼 스테이지에서 맥을 못 추니 우리 부모님은 그만 적응을 못하고 맥을 못 췄다.   

그런 상황에서 내 자존감은 점점 낮아져갔고, 그토록 비웃던 결혼정보회사까지 반강제로 등록하여 매주 강제 소개팅을 나가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제발 아무나 걸려서 결혼이란 걸 했으면 하는 생각이 얼마나 간절했는지. 당시 난 그냥 남들이 결혼하는 때 결혼을 해서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 섞이는 게 유일한 소원이었다.

별로 궁금하지도 않을 내 20대말, 30대초 잔혹사를 구구절절 풀어놓는 이유는 까딱하면 나도 이선 프롬의 주인공 이선처럼 살 뻔했다는 아찔함 때문이다. 난 상대방을 사랑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아주 나쁘진 않아 결혼을 선택하는 사람들을 욕하고 싶진 않다. 사회적 조건에 의지하여 결혼을 선택을 하는 자들은 어리석고, 꼭 사랑해야 결혼하겠다는 신념을 가진 자는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것 역시 얼마나 큰 오만인지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떠밀려 한 결혼이 생각 외로 엄청 행복할 수도 있는 거니까.

이선이 지나와 결혼을 결심할 때만 해도 지나는 나쁘지 않은 여자였다. 싹싹하고 명랑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지나는 자기만 아는 너무도 이기적인 여자였고, 사랑 없는 결혼 생활과 가난함에 이선은 그야말로 근근이 하루를 연명하며 살아간다. 그런 그의 앞에 젊고 아름다운 매티가 나타난다. 소설은 매티와 이선의 사랑의 안타까움을 아름다운 겨울 풍경과 결부시켜 서술한다. 나는 이선이 도둑질을 해서라도 매티와 서부로 떠나길 얼마나 바랐는지 모른다. 하지만 결국 그 둘은 같이 떠나는 데 실패하고 이선은 매티 역시 지나와 별다르지 않은 여자임을 온몸으로 보고 느끼며 형벌같은 삶을 살게 된다.

이 소설의 비범함은 소설의 결말에 있는 것 같다. 몇 년 전인가 초속 5Cm’ 라는 일본 애니메이션을 보며 확 짜증이 난 적이 있다. 애니메이션의 주인공인 남자는 대학도 졸업하고 이미 직장생활을 하는데도, 고등학생 시절 첫사랑을 잊지 못하여 성인이 된 후에도 제대로 된 사랑을 못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20대 초반에는 첫사랑에 대한 아련한 이야기가 좋았다. 그런데 서른 살이 넘고 보니 다 큰 남자 어른이 (나쓰메 소세키의 산시로식 표현으로) “끝까지 가보지 못한자신의 첫사랑을 계속 대단한 것으로 확대, 재생산하면서 징징거리는 거 이젠 신물난다.

이선 프롬도 이선과 매티가 자살을 기도하여 둘다 죽거나, 아니면 둘 중 하나만 살아남아 평생 그리워하면서 사는 결말로 끝났다면 오히려 그렇고 그런 소설이라 생각했을 것 같다.

이선이 불행하게 살게 된 데에는 28살 당시 이선에게 처한 상황이 그의 이성을 마비시켜 결국 잘못된 선택을 했기 때문인데, 글쎄 다른 선택을 했으면 또 그 나름의 고통이 있었겠지. 이선과 비슷한 나이에 이선과 다른 선택을 했던 나도 이후 말 모를 고통이 있었듯.

짧지만 춥고 시린 겨울 풍경에 참 잘 어울리는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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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0-02-25 09: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이 작품 <겨울>이라고 문학동네에서 번역된 책으로 읽었는데요, 정말 ‘겨울‘이라는 단어와 어울리는 결말... ㅠㅠ 넘나 마음 시린... 휴. 케이 님 말씀대로 이 작품은 결말 때문에 평범함을 넘어선 비범한 작품 경지에 오른 것 같아요.

그나저나 28살에 결혼할 뻔했다는 그 대학 선배 안 하길 천만다행이지 뭐예요. “이제 너도 여자로서 끝났다.” 니 말이야 빙구야. 흐 노답.........-_- (제 생각에 인간은 서른이 넘어야 좀 자기만의 매력이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남자나 여자나. 모두~!)

케이 2020-02-25 10:50   좋아요 1 | URL
이선은 한창 젊었던 28살부터 죽는 날까지 그렇게 형벌같이 살아야만 하는 거잖아요. 정말 가혹한 결말이었어요. 안타까운 사랑이야기 끝에 그런 결말이라니! 좀 많이 놀랐답니다.

그리고 그 선배는 제가 죽도록 후회하길 간절하게 바란 거 아니었을까... 싶어요. 대학 때 45키로 미만 여성만 찾아 헤맬 때부터 좀 낌새가 보이긴 했어요 ㅋㅋㅋ(근데 나중에 보니 정말 45키로 미만인 여자랑 결혼하긴 하더라고요 ㅋㅋㅋ)
대학 졸업하고 좀 좋은 직장으로 취업한 남자들 세상 모든 여자가 자기를 좋아할 것이라 착각하는데 정말 노답이란 말이 딱.

저는 서른살 넘어 제 매력이 나타났는진 잘 모르겠는데, 20대보단 확실히 정신차린 거 같아요.ㅋㅋㅋ 저의 20대... 생각하면 정말 부끄럽습니다.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