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남동생과 나는 가끔 우리 가족은 대한민국 기독교 0.01%라고 농담조로 말하곤 하는데, 그게 농담만은 아니다. 우리 친할아버지가 1901년생이시니깐 우리 증조할아버지는 조선시대 사람인 셈인데 그 이름도 모르는 증조할아버지가 남긴 자기 자서전 비슷한 게 옛날 할아버지 집에 있었다. 다 한자라 난 읽을 수 없었지만 아빠가 읽어보니 증조할아버지를 키울 능력이 없었던 나의 고조할아버지는 증조할아버지를 양자로 보낼만한 집을 물색하던 중 (그렇다.... 우리 집안은 대대손손 가난했던 것이었다... ㅜㅜㅜㅜ 불행히도 2020년까지 ING 중) 적당한 집안을 찾았는데 알고보니 그 집안에 동학에 가담한 사람이 있어 양자로 보내려던 걸 없던 일로 하고 어쩌고 저쩌고 이렇게 시작하여 증조할아버지 인생의 주요 사건들이 적혀 있다고 했다. 그런데 글쎄 거기에 증조할아버지가 전라도 나주 어귀에서 숨어서 예배를 드렸단 내용이 써져 있단 것이다. 


  증조할아버지의 자서전 때문에 우리 집안이 기독교를 받아들인 시점이 조선 말기라는 걸 알게 된 건데, 어떻게 생각하면 우리 증조할아버지는 굉장히 급진적이었던 분이었던 것 같다. 거기에 우리 친할아버지는 그 옛날에 침례교 목사님이었으니, 이쯤 되면 한 집안이 기독교를 믿은 역사로만 따지면 대한민국 0.01%가 맞을지도 모른다. 결과적으로 우리 집안은 조선 말기부터 집안의 모든 제사를 없애버린 셈인데, 그래서 그런지 우리 친가 식구들은 다른 집안들에 비해 남녀가 평등한 편이었다. (사실 명절 여성 노동의 원흉은 제사 아니던가) 지금도 친가 식구들은 만나면 그냥 나가서 외식하고 집에 와선 차 한잔 마시고 저녁 먹기 전에 다 집으로 돌아오는 분위기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우리 집안이 완전히 기독교에 갇혀버린 집안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내가 수십 년 교회를 다니며 느낀 건 흔히 말하는 모태 신앙으로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의 사고가 이제 금방 교회를 다닌 사람들보다 훨씬 더 유연하다는 점이다. 난 유럽과 미국을 보면서도 가끔 이런 걸 느끼는데 기독교를 믿은 역사가 미국과 비교도 안되게 긴 유럽이 오히려 종교에 있어선 더 개방적인 면이 많다. 오히려 미국 교회들이 훨씬 더 엄격하고 보수적인 편이고. 그거랑 우리집도 비슷하지않나 싶다.


  오랜 시간 예수님을 믿다 보면 예수님을 믿는 형식과 성경에서 말하는 규율이 사실상 아무것도 아니란 생각이 불현듯 들 때가 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도 규율에 사로잡힌 자들이 이건 이래서 안 되고 저건 저래서 안돼 라고 할 때마다 뭔 상관이냐 상관하지 말고 그냥 하라고 한 적이 더 많다. 뭐 내가 남의 신앙을 가지고 이래라저래라 할 급은 아니지만 신자라면 규율에 사로잡힐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항상 내 맘속에 계시다고 믿고 또 내가 믿는 예수님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셨을까 고민하며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목사들이 주장하는 각종 형식, 규율은 결국 그들만의 세계에서 자기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지 절대 주님의 뜻은 아닌 것이다.  (예수님이 바리새인을 얼마나 싫어했는데!)


  나도 그냥 일요일에 가서 예배만 드리는 사람이다가 3년 전 어느 날  제발 빠른 시일 내 죽게 해달라고 엉엉 울면서 기도하던 중 갑자기 무언가를 느낀 이후로 꽤 독실한 신자가 되었다. 남이 들으면 비웃을지도 모르지만 난 분명히 그것이 주님의 응답이었다고 믿고 있다. 신이 존재 증거는 그 어디에도 없기 때문에 종교라는 건 결국 누군가의 의견이고 신앙은 결국 그 의견을 취하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하나님과 주님이 있어 다행이고 구원이었다.


  이렇다 보니, 나에게 엔도 슈사쿠의 '깊은 강'은 몇 번이고 눈시울이 붉어졌고, 가슴이 뜨거워지곤 했다. 가톨릭 교단에서 이단으로 몰리는 신부 '오쓰'를 보며 나의 주님은 이 세상 모든 사람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명심하고 또 명심해야겠다고 다짐도 많이 했다.


  나 같은 신자가 아니더라도 소설 '깊은 강'의 등장인물 각자의 이야기가 먹먹하고 가슴에 남기 때문에 큰 거부감 없이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특히 기억에 남는 사람은 전쟁 중 인육을 먹은 죄책감으로 평생 괴로움에 시달리던 남자와 동화 작가다. 


  평소 엄청난 게으름뱅이에 식물조차도 제대로  키우지 못하는 나는 왜 인간은 엄청난 정성과 수고 그리고 병원비까지 기꺼이 지불하면서까지 동물을 키울까?라는 의문을 항상 품고 있었다. 그런데 '깊은 강'의 동화 작가 이야기를 읽으며 단박에 반려동물이 주는 위로가 뭔지 알게 되었다. 특히 검은 개가 슬픔에 빠져 있는 어린 시절 동화 작가에게 "어쩔 수 없잖아요." 라고 말하는 듯했다는 장면에서는 눈물이 핑 돌았다.


  이 세상에 각종 병과 전쟁을 만든 당신이 밉고 난 절대 당신을 믿지 않는다고 절규하는 XTC 의 Dear. God 이라는 곡을 들을 때면 언제나 가슴이 아프다. 어렸을 때라면, 그래 정말 예수님 미워! 당신 때문에 싸움이 나잖아!!! 라고 말하며 나 역시도 노래와 함께 절규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은 결국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아 서로 죽고 죽이는 이 세상을 보며 주님도 많이 가슴 아파하시지 않을까란 생각에 가슴이 아프다.


  한번 신을 믿은 사람이 불신자가 되는 것은 불신자가 독실한 신자가 되는 것만큼이나 불가능할 것이다. 위에서 말한 노래의 화자도 당신을 안 믿는다면서 끝내 호소할 곳이 없어진 후엔 사람이 아닌 신에게 편지를 썼으니까 말이다. 

  종교 때문에 전쟁도 일어나고 심지어 요즘에는 바이러스까지 퍼진다. 그런데 이게 그 종교가 믿는 신 때문일까? 어쩌면 신이 시킨대로 살지 않은 어리석은 인간들의 잘못은 아닐까...

 

  신자로서 삶의 방향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해준 고마운 책 ' 깊은 강'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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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0-03-03 17: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처럼 한 번도 신을 믿은 적이 없는 사람에게도 <깊은 강>은 아주 큰 감명을 준 작품이었어요. 엔도 슈사쿠의 많은 작품들이 그런 것 같습니다.

케이 2020-03-04 10:00   좋아요 1 | URL
네. 특정 사람에게만 이해되고 감동적인 소설은 아닌 거 같아요. 물론 신자에게는 더 특별할 수 있겠지만.... 이 소설도 잠자냥님 추천으로 읽게 된 건데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