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스포일러 있음>


28살이 되던 해, 나는 결혼할 뻔 했다. 당시 나에게 결혼을 제안한 남자는 오랜 시간 알고 지내던 대학 선배였는데 그 오빠를 안 이래, 단 한 번도 연애 상대로 생각해본 적 없는 나였기에 끝내 그 제안을 거절했다. 사건 이후, 그 남자와 나는 원래 사이, 그러니까 남들보다 조금 친한 대학 선후배 사이로 남았다.

시간이 흘러 2년이 지나고 내가 서른 살이 되었을 때, 그 오빠는 나에게 이제 너도 여자로서 끝났다.” 고 말했다. 꽤 이름난 회사에 다니는 사람이었는데, 서른 넘은 여자가 잘나가는 남자를 만날 확률은 제로에 가깝다면서 나보고 28살 때 자기를 잡지 않은 것을 평생 후회할 것이라고 저주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의 말도 거짓이 아니긴 했다. 나이 서른 살이 넘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죽도록 고생하다 결국 적응에 실패한 첫 회사를 때려 친 후, 계약직을 전전하다 보니 나에게 남자를 소개 시켜주겠다는 사람도 현저히 줄었고, 예전에 데이트하던 남자들에 비해 낮은 사회적 위치의 남자들만이 주변에 남았다.

  나는 비교적 엄마 말도 잘 듣고, 선생님 말도 잘 듣고, 몸이 약해서 남들처럼 신나게 노는 것도 체질에 안 맞아, 학생 때는 학교-집만 왔다 갔다, 회사 다닐 때도 회사-집만 왔다 갔다 하는 속 한번 안 썩인 딸이었다. 그런데 28살에 조건 좋은 남자를 걷어차고 서른 살이 넘었는데도 남자친구가 없다는 이유 하나로 30년 간 효녀의 시간은 있으나마나 한 것이 되고, 별안간 천하의 불효 자식이 되어버린 것이다. 30년간 부모님의 양육 RPG 게임에서 학업 스테이지, 수능 스테이지, 취업 스테이지 에서 그나마 평균 이상의 성적을 거두던 딸이 연애&결혼 스테이지에서 맥을 못 추니 우리 부모님은 그만 적응을 못하고 맥을 못 췄다.   

그런 상황에서 내 자존감은 점점 낮아져갔고, 그토록 비웃던 결혼정보회사까지 반강제로 등록하여 매주 강제 소개팅을 나가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제발 아무나 걸려서 결혼이란 걸 했으면 하는 생각이 얼마나 간절했는지. 당시 난 그냥 남들이 결혼하는 때 결혼을 해서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 섞이는 게 유일한 소원이었다.

별로 궁금하지도 않을 내 20대말, 30대초 잔혹사를 구구절절 풀어놓는 이유는 까딱하면 나도 이선 프롬의 주인공 이선처럼 살 뻔했다는 아찔함 때문이다. 난 상대방을 사랑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아주 나쁘진 않아 결혼을 선택하는 사람들을 욕하고 싶진 않다. 사회적 조건에 의지하여 결혼을 선택을 하는 자들은 어리석고, 꼭 사랑해야 결혼하겠다는 신념을 가진 자는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것 역시 얼마나 큰 오만인지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떠밀려 한 결혼이 생각 외로 엄청 행복할 수도 있는 거니까.

이선이 지나와 결혼을 결심할 때만 해도 지나는 나쁘지 않은 여자였다. 싹싹하고 명랑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지나는 자기만 아는 너무도 이기적인 여자였고, 사랑 없는 결혼 생활과 가난함에 이선은 그야말로 근근이 하루를 연명하며 살아간다. 그런 그의 앞에 젊고 아름다운 매티가 나타난다. 소설은 매티와 이선의 사랑의 안타까움을 아름다운 겨울 풍경과 결부시켜 서술한다. 나는 이선이 도둑질을 해서라도 매티와 서부로 떠나길 얼마나 바랐는지 모른다. 하지만 결국 그 둘은 같이 떠나는 데 실패하고 이선은 매티 역시 지나와 별다르지 않은 여자임을 온몸으로 보고 느끼며 형벌같은 삶을 살게 된다.

이 소설의 비범함은 소설의 결말에 있는 것 같다. 몇 년 전인가 초속 5Cm’ 라는 일본 애니메이션을 보며 확 짜증이 난 적이 있다. 애니메이션의 주인공인 남자는 대학도 졸업하고 이미 직장생활을 하는데도, 고등학생 시절 첫사랑을 잊지 못하여 성인이 된 후에도 제대로 된 사랑을 못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20대 초반에는 첫사랑에 대한 아련한 이야기가 좋았다. 그런데 서른 살이 넘고 보니 다 큰 남자 어른이 (나쓰메 소세키의 산시로식 표현으로) “끝까지 가보지 못한자신의 첫사랑을 계속 대단한 것으로 확대, 재생산하면서 징징거리는 거 이젠 신물난다.

이선 프롬도 이선과 매티가 자살을 기도하여 둘다 죽거나, 아니면 둘 중 하나만 살아남아 평생 그리워하면서 사는 결말로 끝났다면 오히려 그렇고 그런 소설이라 생각했을 것 같다.

이선이 불행하게 살게 된 데에는 28살 당시 이선에게 처한 상황이 그의 이성을 마비시켜 결국 잘못된 선택을 했기 때문인데, 글쎄 다른 선택을 했으면 또 그 나름의 고통이 있었겠지. 이선과 비슷한 나이에 이선과 다른 선택을 했던 나도 이후 말 모를 고통이 있었듯.

짧지만 춥고 시린 겨울 풍경에 참 잘 어울리는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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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0-02-25 09: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이 작품 <겨울>이라고 문학동네에서 번역된 책으로 읽었는데요, 정말 ‘겨울‘이라는 단어와 어울리는 결말... ㅠㅠ 넘나 마음 시린... 휴. 케이 님 말씀대로 이 작품은 결말 때문에 평범함을 넘어선 비범한 작품 경지에 오른 것 같아요.

그나저나 28살에 결혼할 뻔했다는 그 대학 선배 안 하길 천만다행이지 뭐예요. “이제 너도 여자로서 끝났다.” 니 말이야 빙구야. 흐 노답.........-_- (제 생각에 인간은 서른이 넘어야 좀 자기만의 매력이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남자나 여자나. 모두~!)

케이 2020-02-25 10:50   좋아요 1 | URL
이선은 한창 젊었던 28살부터 죽는 날까지 그렇게 형벌같이 살아야만 하는 거잖아요. 정말 가혹한 결말이었어요. 안타까운 사랑이야기 끝에 그런 결말이라니! 좀 많이 놀랐답니다.

그리고 그 선배는 제가 죽도록 후회하길 간절하게 바란 거 아니었을까... 싶어요. 대학 때 45키로 미만 여성만 찾아 헤맬 때부터 좀 낌새가 보이긴 했어요 ㅋㅋㅋ(근데 나중에 보니 정말 45키로 미만인 여자랑 결혼하긴 하더라고요 ㅋㅋㅋ)
대학 졸업하고 좀 좋은 직장으로 취업한 남자들 세상 모든 여자가 자기를 좋아할 것이라 착각하는데 정말 노답이란 말이 딱.

저는 서른살 넘어 제 매력이 나타났는진 잘 모르겠는데, 20대보단 확실히 정신차린 거 같아요.ㅋㅋㅋ 저의 20대... 생각하면 정말 부끄럽습니다.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