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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
살만 루슈디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2월
평점 :
분노한 사람보다 더 많은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없다.
Written by Nietzsche 선악의 저편 중에서
술에 잔뜩 취한 어느 날 밤, 솔랑카 교수는 사랑하는 가족의 앞에 선다.
한 손에는 식칼을 든 채, 우두커니 서서 그들을 지긋이 내려다본다.
살의(殺意)로 똘똘 뭉쳐진 그의 앞을 막아서는 것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곧이어 벌어질 잔혹한 살인과 폭력 앞에서 그저 무방비로 잠들어 있는 그들, 그 넘치는 살의로부터 자신의 하나 뿐인 아들과 사랑하는 아내를 지키기 위해선 무작정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는 모든 것에 분노한 사나이가 되었다.....
지독스레 시시한 거짓말이다.
살만 루슈디가 약발이라곤 전혀 듣지 않았던 호메이니의 암살 위협으로부터 안전해 진 뒤 최근에 내놓은 이번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시시한 거짓말만을 내뱉을 뿐이다. 죽음의 문 턱 앞까지 가 본 작가들을 찾아보자면 사실 꽤 많이 있는데, 사형집행 직전에 가까스로 사면된 도스토예프스키, 스페인 내전에 참전했던 조지 오웰, 제 1차 세계대전 당시 서로 다른 진영에 속했지만 같은 경험을 공유했었던 레마르크와 어니스트 헤밍웨이,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의 참호 속에서 톨스토이를 읽었던 비트겐슈타인, 나치 강제 수용소에서 생사(生死)를 넘나들었던 빅터 프랭클, 2차 세계대전 중 군용기 조종사로 종군했었던 생텍쥐페리 등등 수없이 많다.
그들이 제 일선에서 죽음과 맞닥뜨린 대표적인 사람들이라면, 살만 루슈디는 소설 속 솔랑카 교수처럼 어퍼 웨스트 사이드의 안락한 복층식 임대 아파트에서 TV를 통해 죽음을 감상한 대표적인 사람이다. 그 차이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생활자의 수기’와 살만 루슈디의 ‘분노’ 를 낳았다. 전자가 표면부터 밑바닥까지 영혼을 울리는 진실 그 자체라면, 후자는 진실을 가장한 허풍이요, 엄살에 불과하다.
솔랑카 교수가 ‘사랑했다고 가장했었던’ 가족의 곁을 황급히 떠난 건 사실 살의 때문이 아니요, 그저 권태로웠기 때문이다. 자신이 창조한 인형 ‘리틀 브레인’이 매스 미디어의 강력한 세례로 말미암아 새 생명을 얻고 자신의 손 안을 벗어나자 그는 리틀 브레인에 대한 지독한 경멸감과 수치심을 견디지 못한다. 결국 그의 분노의 정체는 자신의 창조물인 리틀 브레인이 창조주인 자신을 벗어나, 오히려 그 자신이 창조물에 종속되고 말았다는 것이며 또한 그 상황을 역전시킬 그 어떤 힘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무력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 무력감이 바로 권태이며, 권태가 바로 분노로 표출된 것뿐이었다.
그런 시시하기 짝이 없는 분노였기에 그 해소 또한 시시하기 그지없다. 밀라 마일로의 조언으로 시작된 새로운 인형 ‘퍼핏 킹’을 제작하면서부터 사랑하는 가족에 대한 살의에까지 이르렀던 끔찍했던 분노는 어느새 사그라지기 시작하며, 친구의 애인이었던 아름다운 미녀 ‘닐라’를 소유하면서 그 분노는 어이없이 해소되어 버린다.
500페이지가 넘는 시시한 거짓말을 늘어놓으면서까지 살만 루슈디가 말하고자 했던 진실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무엇을 위한, 누구를 향한 분노였을까? 그 500페이지가 넘는 분노의 정체는 말이다.
살만 루슈디의 분노의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이상의 ‘권태’의 한 구절이 생각났다
끝없는 권태가 사람을 엄습하였을 때 그의 동공(눈동자)은 내부를 향하여 열리리라. 그리하여 망쇄할(몹시 바쁘다) 때보다도 몇 배나 더 자신의 내면을 성찰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인의 특질이요 질환인 자의식 과잉은 이런 권태치 않을 수 없는 권태 계급의 철저한 권태로 말미암음이다. 육체적 한산, 정신적 권태, 이것을 면할 수 없는 계급이 자의식 과잉의 절정을 표시한다.
자의식 과잉! 이것만큼 이 소설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평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다만 위안을 삼을 수 있는 일은 그 거짓말들이 그다지 지루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