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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렌 굴드, 피아노 솔로 동문선 현대신서 102
미셸 슈나이더 지음, 이창실 옮김 / 동문선 / 2002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몇 일전 평소 읽고 싶었던 책들을 인터넷 서점으로부터 구입하게 되었다.

그 중 하나가 미셀 슈나이더 작 <글렌 굴드, 피아노 솔로>였다. 이 책에 대한 기대감은 꽤나 큰 것이었고, 또 책의 판형도 굉장히 앙징맞게 만들어 진 터라 한참 동안을 요모조모 살펴보았다.(난 맘에 드는 책이 있으면 책장을 넘기며 냄새를 맡거나 쓰다듬는 등 묘한 버릇이 있다.)

그렇게 얼마간의 유희를 즐긴 후 살며시 첫 장을 넘겼다. 첫 장에는 평소 굴드가 가장 좋아하는 시인이었던 T.S Eliot의 황무지에서 발췌한 시가 나를 반겼고 이는 내가 이 책에 대한 기대감을 더욱 부채질 하는 계기가 되었다.

결과론적으로 평하자면 책 자체는 그저 그런 쪽이었다. 나쁘진 않았으나 그렇다고 뛰어나지는 못한 凡作 이었다고 할까. 굴드에 대한 전형적인 시각에서 절대 벗어나지 못한

 

난 이 책에서 전혀 다른 모습의 굴드를 보기를 원했다. 굴드에 대한 여러 평전이나 수많은 기사에 노출되어버린 <기괴한 천재> 굴드가 아닌 이 책을 통해서만 접할 수 있는 또 다른 모습을 보기를..

나의 이런 기대감을 이 책은 충족시켜 주지 못했고, 아쉬운 작은 후회는 그저 오랫동안 듣지 않았던 굴드의 골트베르크 변주곡을 다시 한번 듣게 해주었다는 것으로 달래야 했다.

 

굳이 골트베르크 변주곡을 좋아하지는 않더라도 클래식에 조그마한 관심이라도 가졌던 사람에게는 글렌 굴드는 꼭 거쳐야만 하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그의 음악에서도 뿐만 아니라 그가 그토록 증오해 마지 않던 음악 외적인 부분에서 더욱 그러하다. 어느덧 글렌 굴드라는 이름은 고도자본주의의 체제하에 잘 팔리는 문화적 상품이 되어버렸고, 그의 이런 기괴한 모습과 행적은 그의 아이콘으로 확고하게 자리잡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죽기 얼마전 굴드는 수줍게 이렇게 말했다.

 

나의 사생활은 간소하고 단조롭다. 그러므로 이 삶에 대한 책은 짧고 매우 지루할 것이다.

 

어쩌면 그건 그의 바램이었고 부탁이었을지도 모른다.

 

1964년! 32살의 젊은 피아니스트는 관객으로부터 영원히 떠나갔다. 그리고 그건 청중과의 결별이 아닌 관객과의 결별이었다. 자신의 연주장에 음악을 듣기 위해서가 아닌 연주회 이후에 벌어질 저녁 만찬을 기대하는 사람들, 다음날 자신이 굴드의 연주회에 있었다는 말을 하기 위해 거기 와 있는 그런 관객과의 결별을 선언했던 것이다.

대부분의 평전과 기사는 그가 청중을 싫어했다고 쓰고 있다. 하지만 난 그게 사실이 아니라고 믿는다. 그는 분명 심기증 환자여서 다른 사람과의 접촉을 매우 싫어한 것은 사실이다. 분명 그는 타인과의 육체적인 접촉은 매우 싫어했다 아니 매우 두려워했다. 하지만 그가 타인과의 일체적인 모든 단절을 원했던 건 절대 아니었다. 루체른에서 그의 연주에 심취한 한 늙은 클라브생 연주자를 알게 되었을 때 그는 그녀가 연주회에서 연주할 수 있도록 애써 힘써주었고, 그녀의 부족했던 재정적인 측면에서도 많은 걱정을 해주었다. 그런 일은 관심이 없다면 결코 할 수 없는 일이다. 자신의 연주를 진정으로 이해하고자 하며 사랑했던 청중을 결코 외면할 수 없었던 굴드였다.

타인과의 육체적 접촉을 할 수 없었던 굴드가 글쓰기,장난 전화,라디오,TV, 텔레파시에 집착하게 된 것은 그렇게라도 타인과의 교감을 원했던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Persona라는 말을 기억하시는지 정신 분석학자였던 융이 자주 언급했던 말로 사실은 고대 그리스 연극에서 쓰던 탈을 의미했다. 오늘날의 사회는 한 개인에게 수많은 페르소나을 요구한다. 가정에선 가족의 일원으로써, 사회에선 그 각기 구성원으로써 그 자신의 위치와 지위에 알맞은 페르소나를 받아들이게끔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수많은 페르소나를 짊어지고 살아가다 보면 어느날 정작 자신이 누구인가 하는 정체성의 혼란을 가져오게 된다.

마치 자신의 배역에 너무 빠져 정작 자신을 잃어버린 한 아리따운 여배우의 삶에서처럼

 

그런 짊어져야 할 다양한 페르소나를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굴드가 그러했다. 굴드는 언제나 굴드 그 자신이길 원했다. 그가 청중 앞에서 연주하길 싫어했던 것도 아마도 그런 이유에서 였을 것이다.  그는 외면에 치중하는 연주회를 비판하기 위해 늘 자신이 예로 들었던 바흐의 <파르티타 5번>을 들었다. 그는 이 연주가 가장 피아노다우며, 바흐가 아닌 리스트-바흐의 연주라고 강조했다

이에 책의 저자인 미셀 슈나이더는 이렇게 덧붙였다.

 

말하자면 대중 앞에서 연주를 할 경우 연주가 지니게 되는 왜곡이 잘못이라는 것이다. 즉 구와 절로 이루어진 악보의 음들을 뚜렷이 구분하기 위한 지나친 리듬의 강조나 크레센도, 디미누엔도, 강약의 불연속성이 자신의 연주를 더럽혔다는 것이다. 차이코프스키 홀의 2층석까지 음악이 들려야 했으니까, 장소에 따라 연주가 달라짐은 사실이다. 호로비츠 역시 자신의 연주 기법은 큰 연주홀에서의 연주를 위해 다듬어 졌음을 인정한다.. 중략

 

물론 저자는 굴드의 연주회 녹음이 그의 스튜디오 녹음보다 훨씬 생동감있고 아름다웠다는 것으로 글을 마무리 짓고 있기 하지만 말이다.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낸다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다. 정작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솔직한 나를 대면하기도 힘든 실정이다. 이미 너무 많은 페르소나에 잠식되어버려 이미 잊혀져 버렸으니까

굴드는 그런 솔직한 자신을 끊임없이 요구했다.

그가 청중앞에서의 연주를 그만두고 스튜디오 녹음에 매달린 것도 그것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굴드를 비난하는 사람들의 주요 논지는 그의 Studio에서의 일련의 작업들이 짜집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수많은 연주를 통해 가장 잘된 것만을 기술적으로 결합한 인공물에 지나지 않다는 것이다.

그들의 논점이 전혀 틀린 것만은 결코 아니다. 굴드는 그런 일련의 작업들을 무수히 많이 했다.

하지만 그런 편견에서 조금만 벗어나 한번 크게 살펴보자

 

만약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연애 편지를 써야한다면.. 당신의 진심을 사랑하는 그녀에게 절실하게 전달하고 싶다면 당신은 그 편지를 단 한번만에 써버릴 수가 있을까? 결코 아닐 것이다. 수없이 고쳐 써야하고, 때로는 쓴 편지를 모두 찢어버리고 다시 써야 하는 경우도 분명 있을 것이다. 굴드에게 그 작업들은 바로 그런 것들이었다. 최고의 것, 최선의 것만을 선택해 완벽한 것으로 만들어 낸다. 그것이 굴드의 목적이었다. 타인과의 교감을 직접 나눌 수 없는(그 자신의 특이한 병명으로인해) 간접적인 방법으로만 가능했던 굴드에게 그것은 삶의 희열이었다. 자신을 감추지 않고 왜곡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의 이런 진심을 수없이 퇴고해낸(?) 창작물로 타인에게 전할 수 있다는 것. 그건 분명 굴드에게 매력적인 일이었을 것이다.

 

바흐의 골트베르크 변주곡. Aria라고 불리는 단 하나의 주제가 끝없이 변주되다가 다시 한번 주제가 재현되면서 종결을 맞는 골트베르크 변주곡은 그에게는 더할 수 없이 딱 맞아 떨어지는 것이었다. 단 하나의 자신이 여러 모습으로 변주된다. 그 모습 하나하나가 그 자신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정작 나는 나일 뿐이다. 많은 다른 모습이 겹쳐진다해도, 다른 모습으로 왜곡 되어진다해도, 그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 그것이 다시 한번의 Aria로 굴드에 의해 표현되는 것이다.

 

굴드의 삶은 고독하고 우울했다. 항상 혼자였고 또 혼자이길 바랬다. 혼자일 때 그는 왜곡되지 않은 그 자신으로서 있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혼자 있으십시오. 은총이라고 할 수 있는 명상 속에 머무르십시오.

가장 소리가 잘 들렸던 장소들은, 내가 나의 목소리를 더 이상 들을 수 없었던 곳들이었다. 

 

그의 이런 내면의 고백들이 더 이상 나에겐 낯설지 않다.

 

ps> who am I 라는 제목은 굴드가 자동차로 여행을 하다 페튤라 클라크라는 한 여가수의 동명의 노래를 듣고 충격을 받아 그 노래를 듣기 위해 경선을 따라 죽 자동차로 질주했다는 에피소드에서 따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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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입] 베토벤 : 교향곡 9번 - 푸르트뱅글러 - Great Recordings Of The Century
횡엔 (Elisabeth Hongen) 노래, 베토벤 (Ludwig Van Beethove / 이엠아이(EMI) / 1998년 10월
평점 :
절판


나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때론 靈感이라 불리는 기묘한 감정상태를 경험해 보았으리라 생각한다. 74살의 늙은 괴테가 고열을 심하게 앓고 난 후 울리케 폰 레베초프라는 19살의 젊은 처녀를 보고 첫눈에 사랑을 느낀 후 그 이루어 질 수 없는 사랑의 상실감을 <마리엔바트 시가>에 싣거나 방랑의 길에 올라야 했던 루소가 한 들판의 나무아래서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 없을 만큼 강렬한 영감에 빠져 위대한 저작 에밀을 탄생하게 했던 그런 영감에는 도저히 못 미칠지라도 어느날 새벽 알 수 없는 영감에 사로잡혀 여자친구에게 어처구니 없는 연애 편지를 쓴다거나 유치하기 짝이 없는 시를 끄적인다는 등의 그런 황당한 감정의 과잉상태에 빠져본 적이 없는 사람은 없을 거라 믿는다.(아님 나만 그런건가? 그런거야?)

나에게 그런 영감으로 다가온 음악이 있었다.

 

어느 따분한 일요일 오후였다. 읽고 있던 소설은 지겹기 짝이 없었고(앙드레 말로의 왕도로 가는 길이었다) TV나 볼까 하고 채널을 여기저기 틀어보니 드라마 재탕만 부지기수였다.

갑자기 너무 심심해진 난 음악이나 듣자 며 오디오에 CD를 걸었다. 아주 오래 전 산 CD였지만 한동안 JAZZ만 듣고 있던 터라 꽤나 묵혀두어서 꼬장꼬장한 몰골을 띄고 있었다.

 

Furtwangler의 베토벤의 교향곡 제 9번 이었다.

한동안 듣고 있던 난 어느새 CD플레이어가 지익하는 소리와 함께 조용히 멈추자 작은 손박수를 치고 있었고 두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맺혀있었다. 순간 누군가 방문을 열어 나의 이 꼬락서니를 지켜 본다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머리 속을 스쳐 지나갔고 난 황급히 이불을 뒤집어 썼다. 뒤집어 쓴 이불 속에서도 감동은 멈추지 않았고 난 빨리 내 감정을 추스려야 겠다는 일념 뿐이었다.

그게 나와 Furtwangler의 첫만남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아마 이렇게 생각할 것이라 믿는다.

에이 또 베토벤이야 게다가 또 푸르트벵글러냐? 그렇다 또 베토벤이고 게다가 또 푸르트벵글러다. 이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나에게 1951년 바이로이트 실황앨범은 이다.

몇몇 사람들은 이렇게 지적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바이로이트 실황은 역사적 배경만을 빼고 보자면 결점투성이의 엉터리 연주라고,, 3악장의 간간히 내비치는 금관의 실수는 접어두고서라도 어처구니 없을 만큼의 느린 템포설정에 4악장 Finale의 Chorus가 한 템포 늦게 들어오는데다가 오버한 Schwarzkopf의 내지르는 괴성소리라니..

맞다. 모두 다 맞는 사실이다. 바이로이트 실황은 연주 자체로 보자면 전혀 완벽하지 않다.

하지만 그곳에는 완벽함을 뛰어넘은 위대한 영감이 존재한다.

 

베토벤이 교향곡 9번을 작곡할 당시에는 매우 힘든 상황에 놓여있었다. 1812년 교향곡 7,8번을 연이어 발표한 이후로 그는 조카의 교육에만 전념하고 있었다. 그 자신은 수많은 여인들과 사랑에 빠졌지만 결국 가정을 이루는데는 실패했고, 또 자식도 갖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그의 조카에의 집착은 유별난 것이었고, 심지어 조카의 친 엄마를 상대로 그녀의 좋지 못한 행실을 빌미 삼아 조카의 양육권 분쟁에 휩싸이기도 했다. 결국 그의 조카에 대한 과도한 집착은 중압감을 견디지 못한 조카의 자살미수로 이어졌고 이는 그에게 커다란 절망감을 안겨 주었다. 또한 그의 고질적인 귓병은 더욱 악화되어 남과 이야기를 나누려면 필기장이 필요했고, 폐렴,황달,눈병,위장장애가 거듭되어 나타나면서 그를 더욱 괴롭혔으며 경제적으로도 매우 곤궁한 상태였다. 또한 당시 로시니의 오페라가 크나큰 성공을 거두면서 베토벤의 창작열은 이제 끝이 난게 아닌가하는 세간의 비판도 자부심 높던 그를 더욱 힘든 상황으로 몰아갔다.

1824년 2월 베토벤은 이런 고통과 절망감을 딛고 서양음악사 사상 불멸의 저작 <합창교향곡>을 완성했던 것이었다.

 

푸르트벵글러는 어떤가? 자신의 출세를 위해 기꺼이 나치당원이 된 카라얀과는 달리 순수 아리안계의 독일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나치 Goebbels의 주도하에 벌어진 나치의 선전전술에 철저히 이용당했다. 모든 음악인들이 나치의 탄압을 피해 독일을 빠져나가는 상황에서도 나치 휘하의 독일보다 더 절실하게 베토벤이 필요한 곳이 어디 있겠는가?라며 기꺼이 사랑하는 조국의 옆에 머물렀다. 패전 후 그 이유로 비 나치 심리재판에까지 올라야만 했고 1947년에 이르러서야 그는 나치 동조 혐의에서 벗어나 연주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1951년 연합국의 폭격으로 부서진 바이로이트가 처음으로 다시 개관하는 날 그는 기꺼이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을 선택했다.

 

소프라노였던 슈바르츠코프가 회상하듯이 그 날의 바이로이트 페스티발은 신경쇠약에 걸리기 일보직전의 긴장감에 휩싸여 있었다. 바그너의 링 사이클이 주로 나치의 주요 선전물이었고(바그너는 인종주의자였고 지독한 반유태주의자이기도 했다) 이로인해 바이로이트 페스티발 또한 연합국의 좋지 못한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게다가 패전 이후 처음 갖는 바그너의 성지에서의 독일인의 위대한 영혼 베토벤이 연주 된다는 것! 세상의 시선은 바이로이트에 집중되었다.

 

장엄한 폭풍과도 같았던 1,2악장이 끝나고, 지난 전쟁의 참화를 암시하는 듯한 너무나도 슬픈 3악장의 아다지오가 끝이 났다, 그리고 4악장!

Edellmann이 쉴러의 환희에 부침을 엄숙한 목소리로 노래한다

O Freunde, nicht diese Tone!

Sondern lasst uns andenehmere anstimmen, und freudenvollere!

(오, 벗이여, 이 노래가 아닌 더 기분 좋은, 더 환희에 넘친 노래를 함께 부르자꾸나)

그리고 이어 터지는 4명의 독창자들에 의한 변주, 그리고 이은 대규모 합창!

Ja, wer auch nur eine Seele

Sein nunnt auf dem Erdunrund!

Und wers nie gekonnt der stehel

Weinend sich aus diesem Bund

(옳거니 다만 한 사람의 영혼일지라도 지상의 벗으로 부를 사람을 가진다면! 그러나 그것 마저도 가질 수 없는 자는 눈물을 흘리며 살며시 떠나는 것이 좋다.)

.

그리고 코다, 마지막 프레티시모!

 

우리 손을 잡자, 억만의 사람들이여 이 입맞춤을 온 세계에 주자꾸나!

형제여, 별의 저편에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아버지가 계시나니

엎드려 기도할까? 억만의 창생들이여

창조주를 느끼는가? 세상 백성들이여

별하늘 저편에서 주를 찾아보자꾸나!

별들 위에 주님은 계시나니!

 

푸르트벵글러의 이 휘몰아치는 코다가 쉴러의 환희에 부침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단 말인가?

난 이 4악장을 들었을 때 합창교향곡이 빈의 케르트나토아 극장에서 처음 초연될 모습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귀를 먹은 베토벤의 심취한 지휘 모습이! 베토벤 자신은 귀를 먹었기에 연주자체는 또 다른 지휘자였던 Umlauf의 지휘를 따랐다. 4악장의 장엄한 코다가 끝이 났을 때 청중은 이 위대한 작곡자에게 열렬한 박수로 하염없는 존경심을 표현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들리지 않아 마냥 등을 돌리고 서있던 베토벤에게 앨토 가수였던 Frau Unger 가 조용히 다가와 그의 손을 잡고 청중쪽으로 돌려 세웠다. 그리고 떨리는 몸짓으로 조용히 고개를 숙이는 베토벤!( 영화 불멸의 연인을 보면 베토벤의 이런 모습이 잘 표현되었다.)

 

1951년 바이로이트!

전쟁은 독일과 연합국 모두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전쟁은 그것이 가해자였건 피해자였건 모두 소중한 사람들을 잃게 만들었고 서로의 불타오르는 증오만을 남겼을 뿐이었다.

지금 바이로이트에서 베토벤은 말한다. 이제 우리 그만 이런 증오의 노래는 그만 부르고 환희의 노래를 함께 부르자고!

 

! 슬픔이 넘쳐흐르는 3악장의 아다지오에서 전쟁을 겪은 사람이라면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있을까? 호른을 맡고 있던 연주자가 격정에 빠져 실수를 하지 않을 수  있으랴! 슈바르츠코프가 이 위대한 영감에 취해 오버하며 괴성(?)을 지르지 않을 수 있으랴!

그런 그들에게 그것이 형편없는 연주라고 주장한다면

당신은 음악(音樂)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음학(音學)을 하고 있는 것이다!

따지지 말고 분석하려 하지 말고 그냥 just listen하자!

푸르트벵글러의 마력에 한번쯤은 취해 보는 것! 이성을 마비시키고 푸르트벵글러의 흐느적거리는 지휘봉을 따라 지나친 감정의 과잉상태에 빠져보는 것!

그것이 음악을 진정 즐기는 것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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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태엽 오렌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12
앤소니 버제스 지음, 박시영 옮김 / 민음사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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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탠릭 큐브릭 감독의 동명영화로 잘 알려져 있는 작품이지만 난 사실 영화는 보지 못했다.

아니 영화를 보지 못한것이 아니라 보지 않았다고 하는게 옳다. 몇번이고 볼 기회는 주어졌지만 그 때마다 웬지 지루할 것 같아서 다음에 라고 미루어 두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건 나만의 편견에 불과했다는 것을 이 책을 읽고 난 다음의 작은 후회로 확실히 알게 되었다.

시계 태엽 오렌지는 전혀 지루하지 않다. 오히려 아주 재미있는 소설이다. 비록 1962년에 출간된 꽤 철지난 작품이긴 하지만 결코 촌스럽지도 따분하지도 않은 싱싱한 이야기들이 책 안에 가득 담겨있다.

이 책에 담겨진 이야기가 촌스럽지 않고 싱싱할 수 있는 이유는 그 주제가 오늘날까지도 유효한 메세지들을 담고 있기 때문이고 또한 그 주제를 표현해 냄에 있어서 결코 강요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흔히들 고전이라고 하면 일단 따분하고 지루하다라는 느낌을 가지기가 쉽다. 내가 생각하는 고전의 지루함은 작가가 독자들을 마치 어린아이 취급을 하며 뭔가를 억지로 가르치려는 의도를 공공연하게 노출시킬때 이루어진다.

예를 들자면 톨스토이의 작품을 들 수 있겠다. 톨스토이는 분명 위대한 작가이지만, 오늘날 톨스토이의 작품을 읽다보면 웬지 모르게 진부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19세기의 독자들은 톨스토이의 말하는 교훈이 감명있게 다가올 지 모르지만 21세기의 독자들은 너무 영악해져 버려서 이미 톨스토이가 나를 가르치려 드는구나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 더이상 읽고 싶은 마음이 저멀리 달아나 버리기 때문이다. 설교는 교회나 학교에서 이미 충분히 들었기 때문에 더이상 책으로서까지 설교를 듣고 싶진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은 다르다. 누굴 가르치려 하지도 않고 설명하려 하지도 않는다. 그저 독자는 주인공인 알렉스의 시선을 따라 알렉스에게 일어나는 사건들을 지켜보기만 하면 그걸로 충분하다. 알렉스가 저지르는 폭력,절도,강간, 살인 등의 범죄를 보면서 분노를 느낄 수도 있을 것이고, 쾌락을 느끼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어느 쪽이든 그건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책의 마지막 겉장을 덮은 후에 우리에게 던져지는 수많은 질문들에 대해서는 반드시 고민해 봐야 한다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그래, 그래 바로 그거지. 청춘은 가버려야만 해, 암 그렇지. 그러나 청춘이란 어떤 의미로 짐승 같은 것이라고 볼 수 있지. 아니 그건 딱히 짐승이라기 보다는 길거리에서 파는 쬐그만 인형과도 같은 거야. 양철과 스프링 장치로 만들어지고 바깥에 태엽 감는 손잡이가 있어 태엽을 끼리릭 끼리릭 감았다 놓으면 걸어가는 그런 인형. 일직선으로 걸어가다가 주변의 것들에 꽝꽝 부딪히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청춘이라는 것은 그런 쬐그만 기계 중의 하나와 같은거야...."

 

 시계태엽 오렌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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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3-12 19: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금각사
미시마 유키오 지음, 허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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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마 유키오! 그를 설명함에 있어서는 여러가지 수식어가 붙는다.

극우주의자며 탐미주의자.. 우리에겐 극우주의자라는 수식어가 낯설진 않지만 (최근 독도 사건도 있고 해서) 하지만 탐미주의자라는 수식어는 그다지 익숙치 않다.

탐미주의자! 美를 추구하는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란 뜻인데 그가 금각사에서 말하고자 하는 미는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삶에 대한 삶을 살아가고자하는 의지에 대한 찬미가 아니었을까한다.

일본인하면 문득 떠오르는 단어가 있다. 바로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 그만큼 일본인의 정서에는 죽음에 대한 미학이 짙게 깔려있다는 말인데 하지만 최근 일본인의 문화상품을 지켜보면 그렇지도 않은 듯하다. 미야자키 하야오와 안노 히데야키의 ANIMATION에는 삶에의 의지를 강력히 주창하고 있으니까 .. 그들의 가치관과 정서도 시대에 따라 변화해간 것일까?

금각사에서는 미시마 유키오의 이런 가치관이 잘 나타나있는데 주인공은 어릴때부터 아버지로로부터 금각사의 아름다움에 대해 듣고 금각사의 절대적인 미를 추구하게 된다. 하지만 주인공 그 자신은 말더듬이에다가 생김새또한 추하기 그지 없다. 그래서 그는 그를 둘러싼 외부세계와는 철저히 담을 쌓고 그 자신의 고독에만 침잠해 들어간다. 그러다 금각사의 아름다움에 닿을 수 없다면 그것을 철저히 파괴해버리고자 하는 욕망을 품게 되고 그것을 실천하려 한다. 하지만 그 시도는 실패로 끝이나고 문득 살아야지 살아가야지라는 의지를 내보이면서 소설은 끝이 난다.

이는 실제의 사건과는 다르다. 실제의 사건의 주인공은 감옥에서 숨을 거두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설의 결말은 어디까지나 미시마 유키오 자신의 창작이며 그가 소설내내 말하고자 했던 주제를 상기시키는 설정이다. (작가 그자신은 자위대의 궐기를 주장하며 할복으로 삶을 마감함으로써 작품내의 주제와는 상이한 결말을 맞고 말았지만... )

금각사에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는 일순 평범해보이지만 그 전개는 결코 평범하지 않다. 주인공과 그를 둘러싼 인물들의 치밀한 심리묘사와 때론 비참하고 추악하기까지한 여러 배경적 장치들을 몇마디 문장으로 아름답게 승화시켜버리는 작가의 역량은 정말 놀랍기 까지 하다.(어머니를 증오하게 되는 부분은 정말 감탄을 금치 못하게 한다.)

다만 번역에는 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는  번역자 자신이 밝힌바와 같이 미시마 유키오는 뛰어나고 유려한 문체로 유명한 작가라고 하는데 번역상에선 그러한 탁월성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또한 소설의 설정상 불교용어가 무척 많이 나오는데 전혀 주가 달려있지 않다. 그런것은 출판에 앞서 좀더 세심하게 신경을 써야하는 부분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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