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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택의 어머니
김용택 지음, 황헌만 사진 / 문학동네 / 2012년 5월
평점 :
내 나이 40대 후반이고 어머니 세대는 대략 1920년대부터 1930년대에 태어나신 분들일 것이다.일제 강점기 중.후반에 태어나시고 어린 시절과 젊은 시절엔 한국 전쟁의 폭풍이 한바탕 휩쓸고 가면서 국토의 거개가 쑥대밭으로 변하면서 가장 시급한 문제는 '먹고 사는 문제'였다고 생각한다.경제력이 있는 가족 구성원들은 자고 일어나면 논과 밭으로 일을 나가야 하고 부모들은 생기는 데로 아이들을 낳았으니 바로 '베이비 붐'세대가 우리 세대가 아닐까 싶다.
우리 세대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오로지 가족들을 위해 죽도록 일만 했을 뿐 호사다운 호사는 누리지도 못한 채 자식들이 성인이 되고 결혼을 하여 훌쩍 떠나고부터는 시골 농촌은 나이 드신 노인들만 집을 지키고 주인 잃은 논과 밭은 풀만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게 요즘의 농촌 현실이다.어쩌다 성묘차 본가를 지나칠라면 젊디 젊었던 이웃집 아주머니는 완연한 할머니로 변하고 인사라고 하면 너무 반가운 나머지 투박한 양손으로 반겨 맞아주기도 한다.시간과 세월이 많이 변해 어린 시절과 현재의 모습이 오버랩되면서 격세지감과 세월의 무상이 온몸을 '쏴'하게 훑고 지나간다.
어린 시절의 나는 부모님이 객지에 나가 '양은 그릇'장사를 하시느라 할아버지,할머니의 훈육이 컸다고 생각된다.그러한 가정 환경 속에서 우리 형제자매는 할아버지,할머니의 잔소리를 듣고 그 분들의 일상을회고하니 '그런 날이 있었지'라고 상념에 잠기게 되는데,조부모님 두 분 모두 바지런하셔서 한시도 몸을 놀리지 않으신다.할아버지는 초저녁 잠이 많으셔서 꼭두새벽에 일어나셔서 논물을 대고 잡초를 뽑고 밭일도 잠깐 하시다 아침밥을 드시러 귀가하고 할머니께서는 정지(부엌의 사투리)에 앉아 불을 때시고 아침밥과 상추,배추 등을 겉절이 하여 상에 올리면 어린 우리들은 맛있게 먹고 학교를 향해 힘차게 달려 가던 시절은 동쪽에서 떠오른 아침해와 동무 삼던 정겹고 순수했다고 생각된다.
묘포장이 있고 밭이 있으며 산과 들에 피어난 온갖 잡초가 인간생명의 근원이고 식재료였기에 할머니는 때가 되면 산과 들로 온갖 식재료를 찾으러 대바구니와 호미,백반(산에 뱀이라도 나타나면 백반을 뱀 앞에 놓는다) 등을 준비하고 머리엔 흰 수건을 두르고 가벼운 브라우스와 몸빼 바지차림으로 보무도 당당하게 산과 들로 향한다.해가 중천에 뜨고 점심 무렵이 되면 할머니는 대바구니에 고사리,취 등을 마루에 내려 놓으며 송글송글 맺힌 땀방울을 손등으로 훑어 내리신다.
김용택시인의 어머니의 모습은 시종여일 내 어머니,할머니의 모습이었고 시인의 고향에서 멀지 않은 곳이기에 시인이 사용하는 말투도 정겨움과 친근감이 새록새록 다가왔다.시인의 어머니의 일상이 봄부터 겨울까지 빼곡하게 일기장에 적어 놓은 어머니에 대한 '고백담'과도 같고 사모곡과도 같다.어머니를 예찬하려는 의도보다는 어머니의 본모습이 무엇이고 자식과 가족을 위해 헌신과 희생을 마다하지 않으신 소탈하고 강인한 생명력이 살아 있음을 제대로 보여 주기에 잊혀져 가는 어머니의 모습과 진실이 제대로 살아나는거 같다.
나는 할머니께서 어떻게 자라졌는지는 모르지만 일상에서 '욕'을 참 많이 하셨던거 같다.특히 할아머지도 마찬가지인데 일제 강점기때 일본인이 조선인에 대한 무차별적이고 경멸하는 말투가 암암리에 세뇌되었던 탓이 아닐까 싶다.너무 말을 듣지 않으면 '육시할 놈,염병할 놈' 등의 욕이 많았던거 같고 예의범절에 관한 훈육이 맣았다.반면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표현을 잘 하지 않은 과묵한 형(型)이었고 속으로 삼키고 인내하는 분이셨으며 욕은 거의 하지 않으신 양반 기질을 갖으셨던거 같은데 지금은 홀로 되어 외로움과 고독 사이에서 여생을 살아가신다.
제 어머니도 일이라면 한 몫 하신다.동네에선 여장부라 칭했을 정도로 힘이 세서 등짐도 남자 못지 않게 서너다발을 너끈하게 이고 오시며 묘포장에서 같은 일을 하더라도 남보다 빨리 정확하게 하시기에 묘포장 주인은 간죠(일당 계산)하는 날엔 덤으로 더 춰 주시고 집에 오시면 남보다 더 받으신 탓인지 얼굴 표정은 밝으시고 자부심마저 있었던거 같다.논과 밭,품앗이,종가 며느리로서 온갖 애경사 등을 챙기시는 것도 모자라 늘그막에 아버지께서 중풍으로 쓰러지시고 11년간을 병수발을 하시던 어머니는 이제 혼자가 되셨다.
며느리 눈치 보기 싫고 자유롭게 사는 것이 좋다며 한사코 본가에 혼자 계신다.장독대가 있고 약간의 남새밭이 있어 소일거리를 하신다.심심하면 이웃 사촌 동생을 만나시고 계모임이 있는 날이면 참석도 하면서 사람과의 만남을 좋아하신다.가끔 뵈러 가는 날이면 며느리보다 내가 좋아하는 가재미 탕과 갓김치를 손수 준비해 놓으시고 "차 몰고 오느라 힘들었을텐데 많이 먹어라"고 주섬주섬 가깝게 내놓으신다.고맙게만 생각이 든다.이러다 어머니 돌아가시고 안계시며 내가 좋아하는 음식맛을 누구에게서 찾을 수가 있을까 혼자 생각해 보기도 하는데 헤어질 시간이 되면 늘 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드시고 그 자리에 우뚝 서계시는 모습이 애잔하게만 전해져 온다.나도 늙으면 어떠한 모습으로 자식들에게 내 모습이 남겨질지 손가락질 당하지 않는 당당한 아버지의 모습을 전해 주고 싶은데 시절은 참 어렵기만 하다.
김용택시인의 어머니와 내 어머니는 본질적으로 다르지만 천상 시골의 일꾼으로 살아오고 살아가는 분같다.손과 발이 머슴과 같고 마음은 자애롭고 인정 많으시니 고맙고 못해 드려 미안한 마음도 든다.할머니,어머니로부터 내려 받은 좋은 심성과 인간적인 면모는 잊지 않고 자식들에게 그대로 물려주고 싶다.이것은 돈과 물질이 팽배한 시대에서 매우 소중하고 귀한 정신적 유산이기 때문이다.대대손손 정신적 유산은 말없이 물 흐르듯 내와 강을 거쳐 크고 넓은 바다로 흘러가리라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