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 남편은 한국남자다. 그는 손가락에 묶은 실에 반지를 흘려보내지도 않았고, 차 트렁크 가득 풍선을 날리지도 않았으며, 빌딩 전면에 내 사진과 함께 "사랑해" 글씨가 박힌 현수막을 내 걸지도 않았다. 데이트 신청 대신에 나를 포함한 네댓명 모두에게 "술이나 한 잔 하자."하고 끌고 가서는 술값을 대느라 카드가 빵꾸 나고, 내가 아르바이트 하던 호프집에 무심히 출근도장을 찍어(그 때도 네댓명 동행 -.-;), 그 내막을 눈치 챈 사장님이 은근히 나를 이뻐하셨다.^^;
   그렇게 반 년 가량이 지난 어느 날, 그 날도 우리는 불특정 다수의 틈에 어울려 일상같은 술자리를 갖고 헤어진 후였다. 집에 들어간 내게 삐삐가 왔다. "잠깐만 나와라." 어...야밤에 무슨...하며 나간 내게 선배는
   "지금 꼭, 같이 가줘야 할 데가 있어."
라고 말했다. 그 눈빛이 어찌나 절절했던지... 그것은 거절할 수도, 반문할 수도 없는 그런 눈빛이었다.

   마침 스르르 와 선 택시 뒷좌석 문을 열어 나를 태우고, 얼라? 자기는 앞좌석에 올랐다. 그리고 기사에게 한 마디. "남산."
   으잉? 남산? 도대체 뭘까....이 밤중에 부모님께 인사 여쭈러 가는 것도 아닐테고, 남산? 남산에 뭐가 있지? 택시는 얼마 후 남산타워 밑에 도착했고, 선배와 나를 내려놓고 가버렸다. 시계는 자정을 넘어서고....남산에서 내려다 본 야경은 제법 근사했다. 하지만, 도대체 이유가 뭐야? 남산 야경을 보며 프로포즈라도 하려는 건가? "선배, 여긴 왜 오자고 했어?" 헌데....나를 돌아본 선배의 답변은
"에엥?"
헉......이미, 눈이 완전히 풀려 있었다!! "여긴 왜 데리고 왔냐구~~~" "에엥? 여기가 어딘데?"

   맙소사....선배는 이미 만취하여 눈이 다 풀려 있었다. 아까의 카리스마 넘치던 눈빛은, 스러지기 전 반짝한 촛불같은 것이었단 말인가..못 살아... 여하간 나는 집에 가려고 택시라도 잡으려 했지만, 자정을 넘긴 시각 남산 타워 밑에 택시가 있을리 만무했다.
   "어떻게 해~ 어떻게 내려가~~" 징징거리는 내게 선배는 계속 여기가 어디냐고만 헤롱거렸고(그걸 나한테 묻냐..으그....!) 남산이라고 말하자 간단히 답했다.
"걸어가면 돼지!" 

   칠흙같은 밤....남산 길은 어두웠다. 캄캄한 숲 속에선 금방이라도 뭔가 튀어나올 것 같았고, 간혹 드물게 서 있는 아베크족 차량은 도통 반갑질 않고 숲보다 더 무서웠다. 아무리 취했어도 믿을 건 선배 뿐, 나는 그 팔을 부둥켜 안고 급경사 내리막을 뛰듯이 걸었다. 헌데, 진짜 공포는 그 때부터 시작되었다. 취한 선배가 헤롱헤롱 웃으며  "내가 00이로 보이냐...." 자꾸 말하는 것이었다. 철 지난 공포, 때 지난 유머였지만 자정 넘긴 남산길에서는 예사로 들리지 않았다. 그 말 한 번 할 때마다 등을 철썩철썩 때려주며 내려가고 있는데, 얼마 후 선배가 말한다.
   "00이랑 &&이는 어디 갔냐?"
   "집에 갔겠지. 이제야 그 사람들은 왜 찾아?"
   "아냐, 같이 왔잖아."
   "무슨 소리야. 술 먹고 진작에 헤어졌구만."
   "아니야, 아까 택시 뒷자리에 너랑 같이 타고 왔잖아."  

   두둥.....걸음을 멈추고 선배를 쳐다보았다. 아까보다는 한결 맑아진 눈빛에, 정말 궁금해서 멍..한 표정. 상상력 빼면 시체인 내 머리 속이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래...이상해....아까 나를 택시 뒷좌석에 태우고 자기는 앞에 앉았지? 술 취한 사람은 개라고들 하잖아....개 눈엔 귀신이 보인다던데...혹시 취객 눈에도 뭔가가 보이는 거 아냐? 엄마야~~~~
   선배는 내려오는 내내(30분이 넘게 걸렸다!) 00선배와 &&선배를 찾아댔고, 나는 머리털이 쭈뼛 선 상태로 식은땀을 흘리며 거진 뛰었다.

    택시를 타고 집에 도착하고(선배? 어찌 갔는지 내가 알게 뭐야!!!) 불 켜진 방 안에 들어오자 그렇게 무서웠던 일이 농담같이 무색해 졌지만, 마음 한 편으로는 '혹시 내일 학교에 나가서....00선배와 &&선배의 부고를 듣게되는 것 아닌가...'하는 두려움이 스물스물 커져 갔다.

   그래서, 다음 날 어찌 되었냐고? 어찌 되긴...00선배와 &&선배는 숙취에 시달리는 얼굴로 멀쩡하게 등교했지 뭘. 썰렁하다고? 그래서 납량특집이지! 썰렁한게 춥잖아~~~^^
   그래도, 혹시 아는가? 술이 떡이 되었던 한 남자가 개처럼 귀신을 보는 눈을 지니게 된 그 시간, 역시 떡이 되었던 두 남자는 도플갱어가 되어 택시, 내 옆 자리에 앉아 있었을지도.
   지금 바로, 당신 당신 뒤의 그 사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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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nda78 2004-07-07 16: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 넘 무서워요.. T^T 안 썰렁해요, 무서운 걸요!

진/우맘 2004-07-07 16: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히히히...성공~ 근데, 어찌 그리 빨리 읽으셨수? 대단해요~~~

다연엉가 2004-07-07 16: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아악악악!!!!!!!!!!!난 무서워...살짝기 내 뒤를 돌아다 보고...밤에 혼자 있을때 들었으면 난 집에 갔다..옴마야..
참 걸어가면 돼지고 뛰어가면 뭐지.... 말인가^^^^^

진/우맘 2004-07-07 16: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울님...역시...무서움증도 부산하게 타시는군요.-.-;;;

조선인 2004-07-07 1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비슷한 경험 있어요. 자정도 훨씬 넘은 시각에 만취한 큰오빠를 마중하여 데리고 들어오는 길... 아무도 없는데 하필 4층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스르르 열렸다지요. 그런데 오빠가 계속 열림버튼을 누르는 겁니다. 전 닫힘 버튼을 눌러야 하는데 술 취해서 잘못 누르고 있는 줄 알고 문 안 닫냐고 짜증을 냈죠. 그랬더니... 오빠가... 내 뒤쪽을 보면서...
"아가씨, 내릴꺼야, 말꺼야?"
평소 귀신을 안 믿는 저지만 순간 소름이 끼쳐 뒤돌아보니 아무도 없고...
오빠는 혀꼬부랑이소리로 한참을 투덜거리더니,
"그 여자 동작 되게 굼뜨네" 이러면서 닫힘 버튼을 누르더군요.
그 사건이 오빠의 장난인지 아닌지 지금도 모르겠습니다. 다음날 오빠는 제가 마중나간 것도 기억 안 난다고 했거든요. -.-;;

panda78 2004-07-07 16: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T^T 조선인님...... 너무 무섭잖아요- 혼자 자야되는데 클라따.. 진짜..

다연엉가 2004-07-07 17: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인님 겁나요.... 진우맘. 울 남자가 애미인지 얼라인지 구별이 안간다고 하거든...그러면 말 다했지요.^^^^^

sooninara 2004-07-07 1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우맘하고 조선인님..책임져!!!!
대학때 들은 통통이 이후로 제일 무섭구만요..실화라니..더욱..
아이들이라도 같이 있었으니 다행이지..잘못하다 심장마비 걸릴뻔 했구만..
진우맘은 그 벌로..남편하고 알콩 달콩 연애기 꼭 쓰기요..
프로포즈도 어찌했나 꼭 쓰도록..숙제...

반딧불,, 2004-07-07 1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헉..재밌었다고꼬리 달려는 찰나...

조선인님..책울님.
엉엉~~

책읽는나무 2004-07-07 1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뭡니까??
진짜 무섭습니다........ㅡ.ㅡ;;

가끔은 밤에.....잠자는 신랑얼굴을 쳐다보면 말입니다....가끔은...가끔은...신랑이 아닌 생각이 들더라구요!!....귀신이 아닐까??란 생각에 어두운방에서 가만히 쳐다보고 있는데....신랑은 잠결에 몸부림치다 내눈을 보고 신랑이 더 놀라더라구요!!
깜깜한 밤에 사람눈이 엄청 빛이 나나보더라구요.....ㅡ.ㅡ;;
암튼....한밤중이 되면....울부부는 서로를 사람으로 보지 않는 이상한 습성에 시달리고 있죠!!

오늘밤에도...전 또 신랑얼굴을 노려보게 되겠군요......ㅡ.ㅡ;;

진/우맘 2004-07-07 2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 책나무님, 너무 웃겨요!! 엽기예요, 엽기!!!
수니님> 우리는...그리 알콩달콩한 얘기가 없는댑쇼. -.-;;;

마냐 2004-07-07 21: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악...진/우맘님...죄송하지만...오늘 하이라이트는 조선인님께 내드려야 겠슴다....이건 끝이 안 썰렁하잖아요...에잇. 클났다.

진/우맘 2004-07-07 21: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이렇게 옹기종기 코멘트를 다노라니, 꼭 진짜 이불 뒤집어쓰고 모여 앉아 귀신 얘기 하는 기분이네요.^^

바람꽃 2004-07-08 0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 ! 남산.
전 개나리 흐드러지게 필 때 간 기억이 있는데.
필수 데이트 코스죠.
전 왜 하나도 안 무섭죠?
지가 남편 술상무였는데 한 번도 흐느적거리며 취한 적이 없어서리....
근디 지금은 소주 반병도 못마시니....

조선인 2004-07-08 0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제가 진/우맘님 서재에서 이렇게 들먹거려지다니... 민망해라.
제 얘기 무서워할 필요 절대 없어요.
전 큰오빠의 장난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습니다요. ㅎㅎㅎ

코코죠 2004-07-08 04: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 아아, 로맨틱해 로맨틱해(발그레)
2. 술 취한 사람은 개고, 개 눈에는 귀신이 보인다는 이상한 논리에 올인!

미완성 2004-07-08 1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모야, 나를 보호해줘 >.<

진/우맘 2004-07-08 1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마나, 오즈마님! 이 어인 방문이십니까!!! 반가워라~~~
멍든사과님> 흐음.....마태님 때문에 여기 환자 하나 더 늘었군...TT

superfrog 2004-07-08 1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헌데.. 그 으슥한(안 가봐서 모르지만..;;) 남산길에서 그냥 그냥 걸어내려오시기만 한 거에요!! 에이.. 무선 얘기 말고 딴 얘기도 해 주세요..!!
근데.. 조선인님 오빠 얘기는 정말 무서워요.. 엘리베이터 탈 때마다 생각이 나네요.. 흠.. 내 뒤에 굼뜬 아가씨 있으면 어쩌나..;;;

마태우스 2004-07-08 2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게 무섭다는 진우맘님이 무섭습니다^^

진/우맘 2004-07-08 2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금붕어님, 무얼 기대하는 겝니까!!
마태님.....안 무서워요? 이상하다....당해 보면 무섭다구요!!

책읽는나무 2004-07-09 09: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무서운걸 무섭게 보지 않고 딴소리하는 마태님이 더더 무섭습니다..ㅡ.ㅡ;;
어떤 강심장이길래?.........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