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여행책 - 휴가없이 떠나는 어느 완벽한 세계일주에 관하여
박준 지음 / 엘도라도 / 2010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그게 아마 2005년 따뜻한 봄날이었던 것 같다. 예전부터 말버릇처럼 배낭여행 한번 다녀오자고 말했었고, 졸업 사진을 찍을 무렵 우린 학교 근처 카페에 있었다. 몇 군데의 여행사에 전화를 했고 무작정 그리스행 왕복 티켓을 예약해버렸다. 왜 그리스였는지 왜 보름이라는 기간으로 정했는지 이유는 없었다. 출국 날짜가 두 달도 남지 않은 그때 도서관에서 그리스 관련 책들을 쌓아놓고 읽었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으면서 그리스에 빠져들었고, 크레타섬의 카잔차키스를 찾아가기로 했다. 권삼윤의 '꿈꾸는 여유, 그리스'와 르네 그리모의 '매혹의 그리스'는 그리스인의 생활을 엿볼 수 있었고, 유재원의 '신화의 땅 인간의 나라 그리스'는 그리스에 관한 묘사가 좋았다. 이두영의 '신화보다 아름다운 그리스'는 각 지역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었다. 여행 후에 읽은 curious 시리즈 그리스 편은 여행을 추억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니까 그때였던 것 같다. 단지 어떤 곳에 관한 책을 읽었을 뿐인데, 마치 실제로 그곳에 다녀온 것 같은 기분이 들며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게. 사실, 여행을 할 때보다 여행 전에 책을 읽으면서 일정을 짜고 계획을 세울 때가 더 신나고 재미있었다.

알랭 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을 넘기면 가장 먼저 나오는 <기대에 대하여>에서 프랑스 작가 위스망스의 소설《거꾸로》가 언급된다. 이 작품의 퇴폐적이고 염세적인 주인공인 데제생트 공작은 디킨스를 읽고 영국인의 삶의 모습을 직접 보고 싶었다. 들뜬 마음으로 여행 준비를 하고 파리로 가서 런던으로 출발하기 전에 런던 여행 서적을 산다. 런던의 볼거리를 읽으며 달콤한 백일몽에 빠져들고, 영국인 단골 주점에서 디킨스 소설에 나온 그대로의 분위기를 느낀다. 그러나 데제생트는 실제로 여행을 하면 얼마나 피곤할까,라는 생각에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간다. '의자에 앉아서도 아주 멋진 여행을 할 수 있는데 구태여 움직이며 다닐 필요가 뭐가 있는가?'라면서.

저자 박준은 떠나고 싶지만 떠날 수 없는 날들이 이어지던 중 책과 지난 여행의 기억 속으로 떠나는 몽상가의 여행을 시작했다. 그의 거실에서 갈 수 없는 곳은 없었고, 그 여정이《책여행책》이 되었다. 그가 말하는 책여행에서 내가 읽은 책과 겹치는 것은 둘 뿐이다. 앞에서 말한 '여행의 기술'과 '청춘 · 길'. 나 역시 '청춘 · 길'에서 마음에 드는 문장을 적어두었다.


       열네 살 무렵, 거리를 걸을 때면 나는 누군가가 나를 납치해주기를 꿈꾸곤 했다. 내 등 뒤로 다가오는 자동차 소리를 들으면서, 이번이야, 라고 혼잣말을 하곤 했다.

 
       더운 계절 아침 10시경에 사헬의 거리로 나간다는 것은 현기증 나는 열기와 눈부신 빛 가운데로 뛰어드는 것과 같다. 거리의 메마른 흙 위를 걸으면서 나는 이곳의 높은 기온과 너무도 강렬한 빛에 짓눌리기보다는 오히려 내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에, 온전히 이곳에 있다는 사실에 흥분했고, 그러자 견디기가 별로 힘들지 않았다.



그가 읽은 책들 대부분이 흥미로워 보인다. 특히, 지하철 바뱅역 바로 앞, 몽파르나스대로와 바뱅거리가 만나는 코너의 카페 셀렉트(40p)에 앉아 진하고 고소한 에스프레소를 마시며 '파리 카페'를 읽고 싶다. 델리에서 바라나시행 기차를 타고 혹은 짜파티와 라씨로 가볍게 배를 채운 뒤, 후지와라 신야의 '인도방랑'을 읽고 싶다. 모로코의 옛 수도이며 세상에 하나뿐인 중세도시 페스를 거닐면 어떤 느낌일까? 페스의 구시가지에 있는 '메디나'에는 만 개의 골목이 있다고 한다(160p). 지도가 있어도 소용 없는 곳, 하루에 다섯 번씩 기도하는 사람들……. 모로코의 전통가옥인 리아드에서 '페스의 집'을 읽는다면 어떤 기분일지 궁금하다. 

저자 박준의 지난 여행을 고스란히 담은 여행책의 이야기도 재미있다. 그의 첫 번째 책 'On the Road'를 읽고서 나도 카오산로드에 가고 싶었다. 전세계에서 모여든 여행자들로 넘쳐나는 곳, 그곳에서 여행의 에너지를 느껴보고 싶다. 일본 교토는 벚꽃이 피었을 즈음에 가서 료칸에서 꼭 하룻밤 묵고 싶다. 홋카이도는 겨울에 가면 좋다고 들었는데, 하코다테에서 노란 전차를 타고 오마치역 근처에서 내려 오래된 목조건물 2층의 카페 '카모메suq'에 가보고 싶다. 그곳에서 만난 친구에게 가볼만한 곳을 물어봐야지. 핀란드의 수도 헬싱키에서는 야간열차 산타클로스익스프레스를 타고 싶다. 산타클로스가 산다는 로바니에미의 모습은 어떨까. 조용하고 내향적이라는 핀란드인 친구를 사귀어 숲속의 통나무집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도 좋겠다. 프랑스의 작은 동네 아를에서는 고흐의 흔적을 찾아 걷고 싶다. 별이 빛나는 밤에 아를의 밤하늘을 바라보며 그를 기억하는 시간도 가져야지.

정말 휴가 없이 세계일주를 했다. 보스턴에서 43킬로미터 떨어진 프로빈스타운에 갔다가 체 게바라의 여정을 따라 아르헨티나, 칠레, 페루를 여행한다. 파리, 인도, 몽골, 알래스카, 멕시코를 갔다가 시베리아 횡단 열차도 타고, 후지산도 보러 간다. 정말 그의 말대로 여러 도시를 여행하기 위해 집을 떠날 필요 없이 안락의자와 8,894페이지의 책이 있다면 좋겠다. 여유롭게 두 달 정도면 멋진 여행을 할 수 있을테니까. 하루하루를 창조적으로 산다면 일상이 곧 여행이라는 그의 말을 몇 번씩 되뇌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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