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흩어진 날들
강한나 지음 / 큰나무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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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겉모습만 보고 사랑에 관한 소설일 거라고 생각했다. 보통의 여행에세이와 다르게 제목에 여행을 연상케 하는 단어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설 속 주인공인 듯한, 마치 그림처럼 보이는 표지의 아름다운 여인은 책을 쓴 그녀의 사진이었다. 제목 아래 작은 글씨로 쓰여진 '빈티지 감성 여행에세이, 일본'을 보고 소설이 아니란 걸 알았다. 그리고 꼭 읽고 싶었다. 오사카, 고베, 나라, 히로시마, 나가사키, 교토, 도쿄를 여행한 이야기인데 도쿄에만 다녀온 나로서는 나머지 여행지에 대한 궁금증이 생길 수밖에. 두 번째 일본 여행을 하게 된다면 간사이 지방을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오사카, 고베, 나라, 교토, 네 곳이 간사이 지방에 속하는 것도 책을 읽고 싶은 데에 한 몫 했다. 

새하얀 얼굴에 커다란 눈을 가진 그녀는 예뻤다. 여자가 봐도 너무 사랑스러워서 몇 번씩 다시 보았다. 오사카, 고베, 나라의 이야기가 끝나면 30페이지에 걸쳐 그녀의 모습이 담긴 사진을 볼 수 있다. 사진과 함께 적힌 짤막한 문장들도 예쁘다. <우리 흩어진 날들>을 읽고 그녀를 처음 알았다. 쉬러 가는 여행보다 열심히 걸어다니는 여행을 좋아하고, 20살이 넘도록 밖에서 혼자 밥 먹는 걸 못 했고, 낡은 동네의 길을 좋아하는, 그녀와 나의 공통점 때문인지 책을 읽는 동안 (그녀의 바람대로) 내 마음이 평온해졌다. 

여행은 고달파야 한다. 내 여행의 고집스런 지론이다. 훗날 젊음이 변색될 기미를 보이면 모를까, 난 쉬러 가는 여행엔 관심이 별로 없다. 발이 부르트도록 돌아다니며 더 많은 세상을 품을 수 있다면 갑절의 고생도 반갑다. 그게 젊은 내가 여행을 하는 목적이고 가치일 테니 말이다. (64p)

그녀는 '만약 일본 열도 가운데 딱 한 곳에서 살 선택권이 주어진다면 어느 곳을 고를지' 고민해본 적이 있다고 한다. 도쿄도 교토도 아니고, 오사카라면 조금 망설여지지만 고베라면 망설이지 않고 선택할 수 있겠다고 한다. 고베는 그 자체로도 살아보고 싶은 도시라고. 고베에서 살게 된다면, 하고 그녀가 상상하는 부분을 읽으면서 나 또한 같은 상상을 하며 즐거워진다. 

역시, 산다는 것의 가치와 여행한다는 행위는 정말 다른 거였다. 고베에서의 여행은 추억하기엔 미비했고 그리워하기엔 잔잔했건만, 산다고 생각하면 더없이 행복해지는 곳이니 말이다. (149p)

그녀가 본 처음 일본은 도쿄가 아니라 히로시마였다. 일본이 참 수수했고, 평온했고, 기대를 저버릴 만큼 낡았다는 느낌을 준 히로시마가 일본에서의 첫 기억이라는 사실에 감사하다고 한다. 난 처음 가는 일본이니 도쿄를 제일 먼저 여행해야겠다고 생각해왔다. 시골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때에 대학은 수도권으로 가야 한다는 의식이 박혀있던 것처럼 말이다. 우리나라 서울과 비슷하다는 사실을 알고 도쿄에 갔다. 결혼하면 시골에서 살고 싶은 소망을 가진 나는, 도쿄 여행을 하면서 사람으로 북적이고 활기찬 긴자나 시부야는 별로였다. 도쿄에 도착한 다음 날, 오전에는 아사쿠사와 우에노를 둘러보고 오후에 이케부쿠로에서 친구를 만날 예정이었다. 월요일이어서 미술관이 모두 휴관이라 시간이 많이 남은 나는 좀 걷기로 했다. 이강훈 소설 <도쿄 펄프픽션>을 읽으며 가보고 싶었던 야나카에 가기로 했다. 넓디 넓은 우에노 공원을 나와서 지도와 표지판을 보며 '야나카영원'으로 향했다. 그녀의 도쿄 이야기에 한 부분으로 야나카영원이 등장해 반가웠다. 계속 걷다가 닛포리역에 도착하여 모스버거로 허기를 달래고, 니시닛포리를 지나 타바토역 츠타야 서점에서 책구경을 하며 잠시 쉬었다. JR 노선을 보며, 사람들에게 물어보며 코마고메역까지 걸었고, 거기서 이케부쿠로 가는 전철을 탔다. 일본 여행하며 기억에 남는 것 중 하나가 그 조용한 마을을 걷던 시간이다. 젊은 사람들이 많지 않았던 동네였고, 시장을 지나가다 길을 물으면 친절하게 알려주시던 할머니 모습이 정겨웠던 동네였다.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어디가 좋았냐는 질문에 내가 거침없이 처음 대답하는 곳, 구라시키. 낡고 오래됨이 유독 더 자연스러운 곳. 때 묻지 않은 일본인들을 만날 수 있는 곳. 유난히 평화로워 보이는 동네. 몇십 년 된 핸드드립 커피숍과 레스토랑을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곳. 문화가 흐르고, 전통이 머물며, 고풍스러움이 잘 간직된 곳. 낮의 햇살에도 아름답고, 밤의 달빛에도 눈부신 곳. 또한 낡은 일본을 여행하고 싶게 만든 내 첫 번째 동기부여. 시간이 멈춰 있는 곳. 때문에 내 잃어버린 시간도 찾아줄 것 같은 느낌. 아주 먼 어느 날, 진심으로 꼭 한 번 다시 찾고 싶은 곳. (262p)

맛있는 건 죄다 모인 오사카, 오사카 중에서도 마치 보물섬에 놀러 온 기분이라는 도톤보리와 난바 지역에 가보고 싶다. 빵이 제일 맛있기로 소문난 고베의, 이쿠타 로드에서 빵집 순례도 해보고 싶고, 거대한 명작이 전시되어 있는, 작은 도시 구라시키의 '오하라 미술관'에도 가고 싶다. 나가사키에서 먹는 나가사키 짬뽕맛은 어떨까? 교토를 돌아다니다 말린 청어를 넣어 먹는 '니신소바'도 맛보고 싶고, 거리에서 게이샤와 마주치면 환하게 웃어주고 싶다.

여행에서 가장 찌릿한 순간은, 지도를 펼쳐들 때이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 그 광대한 영역 중 내 발길이 닿는 땅에 추억이 생겨난다고 생각하면 그 흥미가 더하다. 온갖 상상력을 발휘해가며 가고 싶은 곳을 결정짓는 것도 신이 나고, 마음에 안 들면 중간에 방향을 틀어도 되니 지도만 익히면 아무 문제없다. (194p)

나도 지도를 펼쳐놓고 여행을 계획할 때가 가장 신 난다. 그녀의 '낡은 일본'에 관한 이야기를 모두 읽고서 일본 전역을 둘러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먼저 일본 전도(全圖)부터 구해야겠다. 책을 덮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낡은 사랑'은 어떤 사람일까. 혹시 책 중간의 사진 화보를 위해 도쿄에서 함께 동분서주했다는, 이 책을 쓰도록 응원해준 그 사람이 아닐까 짐작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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