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색에 물들다
강미승 지음, 장성철 감수 / 눈과마음(스쿨타운) / 2008년 3월
평점 :
절판


 
어렸을 때부터 색연필을 좋아했다. 아니, 색깔을 좋아했다. 현란한 빛깔(原色)보다는 은은함이 느껴지는 파스텔 톤의 색을 좋아한다. 색연필이나 크레파스를 나만의 색의 리듬으로 정리하기도 했고, 중학교 때 접은 천 마리의 거북이를 긴 원통형의 유리병에 색에 따라 층층이 구별하여 담기도 했다. 언젠가는 책꽂이를 가득 채운 책들을 장르별로 정리할까 제목 순으로 정리할까 고민하다가 표지의 색상별로 정리한 적도 있다. 색(色)때문에 미술을 좋아했고, 그림을 좋아하고 미술관 나들이를 좋아하고 나아가 사진과 여행을 좋아하는지도 모르겠다. 

여행을 색으로 분류하다. 여행과 색을 함께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책을 읽고 나서, 이 두 가지가 정말 잘 어울리는구나, 생각했다. 어느 책이든 제목이 내가 좋아하는 단어들로 이루어졌다면 읽고 후회한 적은 없다. 여행, 색, 물들다. 빨주노초파남보 무지개 색깔의 풍차 그림에 형광빛 분홍색 굵은 띠가 눈이 부신다. 날짜와 장소를 불문하고 오직 색으로 사진을 분류하여 여행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발상이 참신하다. 여느 여행책과 차별화된 이 책이 정말 예쁘고 매력적이다. 

저자와 비슷하게 나도 일반 사람들이 관심있게 보지 않고 지나칠 수 있는 것들을 사진기에 남기는 것을 좋아한다. 단지 색이 예쁘다는 이유만으로. 혹은 지극히 일상적이고 따분할 수도 있는 그것을 잠시나마의 추억으로 간직하고픈 마음이 있는지도 모른다. 길을 가다 특별할 것도 없는 파랑 표지판을 찰칵, 누군가 밤새 마시고 모아두었을 투명 초록빛 술병을 찰칵, 진하고 강렬한 색상의 공중전화를 찰칵, 듬직한 주인집 아저씨의 숙소에서 분홍빛 열쇠를 찰칵. 

나도 그랬었다. 저자와 다른 점이라면 내가 여행한 곳은 그리스 한 나라뿐이었다는 것, 나는 색을 염두에 두지 않고 마음에 드는 것이라면 무조건 카메라를 들이댔다는 것. 크레타섬 하냐 항구의 쪽빛 바다, 크노소스 궁터의 뙤약볕 아래 상아색 모래, 영화에서나 보았던 높은 천장과 기다란 창문과 커튼이 있는 이라클리온 숙소의 은빛 낡은 열쇠, 달지 않은 초코 우유, 산토리니 음식점 니콜라스의 메뉴가 적힌 흑빛 칠판, 더운 날씨에 목마름을 달래준 빨간 음료, 코린트에서 마신 우유빛 우조와 기본 안주로 나온 노릇노릇 감자칩, 프랑크푸르트 공항의 분홍빛 수화기가 눈에 띈 공중전화 등. 열거하다보니 여행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라 그리움이 더해진다. 여행 사진들을 하나하나 살피며 색과 관련하여 찾아보니 내 여행 또한 색으로 분류가 가능할 것 같다. 물론 저자의 책만큼은 아니겠지만.   

책을 읽으면서 아니 책을 보는 내내 보름간의 그리스 배낭여행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가 않았다. 저자의 사진과 나의 여행 사진과 닮은 점이 꽤 많았던 것이다. 델피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릴 때 파란 하늘의 하얀 구름을 바라보며 환한 미소를 지었고, 산토리니 신항구에서 배를 기다리며 허기를 달랬고. 아테네 신타그마 광장과 피레우스 항구에서 밤을 지새우기도 했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보름간 시커멓게 타버린 손등을 애처로운 눈으로 바라보기도 했다. 길에서 만난 귀여운 삼남매를 몰래 촬영하기도 했고, 어두운 밤 주황빛 조명 아래 늦은 식사를 하기도 했다. 결국 내 여행 이야기로 빗나가긴 했지만 내게는 한번뿐이었던 그리스 여행을 <여행, 색에 물들다>로 인해 다시금 떠올릴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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