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찮지만 행복해 볼까 - 번역가 권남희 에세이집
권남희 지음 / 상상출판 / 2020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재밌다. 얼마 만에 재미있게 읽은 책인지 모르겠다. 읽는 도중에 소리 내어 웃기도 했다. 잠깐 훑어보기만 하려고 책을 처음 펼쳤는데, 나도 모르게 계속 읽고 있으니까 옆에 있던 20개월 딸아이가 책을 뺏어버리더라. 보통은 아이가 잘 때 책을 읽는 편인데, <귀찮지만 행복해 볼까> 이 책은 틈틈이 읽었다. 육아 스트레스를 조금이나마 풀었다.





번역가의 책은 아마도 처음 읽은 것 같다. 일본 문학을 많이 읽은 사람이라면, 권남희 번역가가 낯설지 않을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 무라카미 류, 마스다 미리, 오가와 이토, 무레 요코의 소설과 에세이를 비롯해 수많은 일본 작품을 우리말로 옮긴 28년차 번역가. 책장에서 일본 소설을 모아둔 칸을 오랜만에 찬찬히 보았다. 한창 일본소설을 읽던 때가 벌써 10년도 더 돼서 권남희 번역가의 책은 3권 뿐이더라. 영화와 소설 모두 좋아서 가보고 싶은 나라 목록에 핀란드를 올리게 한 <카모메 식당>(2011) 그리고 <프랭크자파 스트리트>(2009)와 <우연한 축복>(2008). 시간 날 때, 그녀가 번역한 책을 다시 한번 읽어봐야겠다.





그녀는 세상에서 없어져도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존재감 없던 아이였다고 한다. 게다가 부끄러움이 많은 아이여서 수업 시간에 책 읽기를 시키면 달달달 떨며 읽었단다. 나도 학창 시절에 자리에서 일어나 책을 읽게 되면 목소리가 떨렸다. 1999년 고2 문학 시간에 연구 수업을 했었는데, 아마도 20대였을 갓 부임한 문학선생님과 수업 작 에 얼굴을 마주쳐 화이팅을 외쳐드렸다. 근데 수업 중간에 내게 책읽기를 시키신 것이다. 그때도 목소리가 떨더랬다. (사족: 문학선생님과는 아직도 연락을 한다.) 그런데 또 수학 담당이던 중1 때 담임 선생님이 수학 시험이 끝나고 시험지 한 장을 칠판에 문제풀이 하라고 시켰을 땐, 친구들 앞에서 잘도 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학습지 교사를 할 때도 다른 선생님들 앞에서 한자 문제풀이를 했는데, 팀장님이 잘 했다고 해주었다. 하지만 지금은 많은 사람 앞에서 말할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며 사는 중이다.


책의 앞부분에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이야기가 나온다. 나도 스무살에「상실의 시대」를 읽었고, 책을 읽는 동안에는 정말 최고였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고민 상담소'가 열렸고 권남희 번역가도 질문을 올렸는데, 어느 날 무라카미 하루키의 이름으로 메일이 왔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읽고, 2010년 어느 날에 나도 무라카미 하루키에게 편지를 썼던 기억이 났다.『1Q84』100만부 돌파 기념으로 출판사 문학동네에서 이벤트를 했었다. 하루키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면 20명을 뽑아 하루키에게 전달한다는 이벤트였다. 문법에 맞는지 모르겠지만, 일본어와 한글로 편지를 썼고, 하루키에게 내 편지가 전달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20명 안에 들어서 음악 CD를 선물받았었다.




책을 읽으며, 읽기 쉽고 재미있는 권남희 번역가의 문체가 맘에 들었다. 상황 설명 후에 무심하듯 던지는 말 한마디가 귀에 쏙쏙 들어오며 웃음이 나더라. 왜 그녀의 글에 이제서야 빠진 거지. 그녀가 번역한 소설과 에세이는 물론이고, 번역 생활 이야기와 번역 팁이 넘쳐나는『번역에 살고 죽고』도 읽어보고 싶다. 책을 읽으며 재미있었던 부분을 적어보았다.


왐마, 하루키 님도 재수 옴 붙은 느낌이 드는 이 상황에서는 긍정적일 수 없을 거다. 그렇게 개념 없는 사람한테 긍정력을 발동해서 뭐하나. 타는 전철마다 연착되라고 빌었다. (32)


오래된 일이다. 아마 지금쯤 그녀는 예의 바르고 노련한 편집자가 되어 있지 않을까. 나도 아마 요즘 같으면 그러려니 하고 넘겼을…… 아, 그건 아니네.(46)


A, B선생님 다음에 내 이름을 떠올려 주어서 고오맙습니다. (75)


이런저런 퇴사 위로 멘트 고민을…… 대체 취준생 엄마가 왜 하고 있는지 말입니다. (82) 

 

정말로 착하고 똑똑하고 개념 있고 효녀다. 그러나 지랄 총량의 법칙이 있다고 하지 않는가. 예쁠 때 이외에는 엄마를 괴롭히는 게 자식이다. 지랄 총량을 맞추느라. (143)


혹시 저를 만나서 얘기하다 갑자기 눈물 흘리더라도 옆집 개가 하품할 때처럼 무시해 주세요. (162)




패키지투어는 시간에 쫓기며 점만 찍고 다닐 뿐 즐기지도 못하고, 단체로 다니니 불편하고, (중략) ……라고 생각했는데 '패키지투어성애자'가 된 마스다 미리의 여행기 (219)『마음이 급해졌어, 아름다운 것을 모두 보고 싶어』를 번역하며 패키지투어에 가진 선입견이 깨졌다고 한다. 나 역시 패키지투어 보다는 자유여행, 배낭여행을 좋아하는데, 싱글인 작가가 더 늙기 전에 한 곳이라도 더 여행 다녀오고 싶다는 일념으로 혼자 씩씩하게 패키지투어를 다니며 알차게 설명해놓았다는 그 책을 읽어보고 싶다.


가마쿠라를 배경으로 한 소설『츠바키 문구점』을 번역하며 역자 후기로 가마쿠라 기행문을 썼다는 그녀. 이 책도 꼭 읽어 봐야지. 나도 소설이나 에세이를 읽으며 작품 속 도시에 반해서 여행을 떠난 건 아니고, 여행지를 결정할 때 도움 된 적이 몇 번 있다. 예를 들면,「그리스인 조르바」와「도쿄펄프픽션」이 그렇다.


딸을 임신했을 때 모자교실에서 만난 세 명의 친구들과 21년 만에 도쿄에서 만났던 날이 살면서 가장 행복했던 이라는 그녀. 일본어과 학생이 된 딸이 세 명이나 되는 제2의 엄마들 덕분에 교환학생으로 간 도쿄에서 무사히 한 해를 보냈단다. 한국에서도 4자 회동을 하자고 했다던데, 나는 왜 그 모임이 잘 진행되었는지가 궁금할까? 


외국 배우 줄리 델피 닮았다는 얘기를 가끔 듣는다기에 줄리 델피를 검색해 보았고, 정적을 좋아하는 그녀가 어느 노래에 반해서 유튜브에서 10년 치 영상을 다 보고 말았다는 록밴드 국카스텐도 바로 찾아보았다. 에세이집을 읽고 글쓴이에 대해 이렇게 궁금했던 적이 있었나 싶다. 처음 책을 펼치기 전, 앞표지에 적혀 있는 "권남희 번역가의 글은 정말 재미있다!"는 한 마디를 보고 궁금했다. 그런데 책을 읽으면서, 책을 다 읽고 나서 고개가 끄덕여졌다. 아, 진짜 재밌다!


막막한 바다를 바라보는 누군가에게, 그 바다를 건너는 누군가에게 한 줄쯤 도움이 되길 바라며 (9) 글을 썼다는 권남희 번역가의 에세이집 <귀찮지만 행복해 볼까> 강력 추천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