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일상을 찾아, 틈만 나면 걸었다
슛뚜 지음 / 상상출판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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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북유럽에 대한 로망이 있었고, 학교 수업 중 커다란 사진 한 장으로 인해 가고시마행 표를 바로 예매했고, 영국을 좋아하다못해 사랑한다는 그녀. 뭔가를 하기로 결심했다면 바로 끝내버려야 하고, 남들이 많이 하는 것보다는 내가 진짜 하고 싶어하는 걸 추구한다. 그녀의 여행 스타일이 맘에 들어서 책을 읽는 동안 너무 좋았다. 다양한 곳의 여행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서 신 났다. 파리, 로마, 교토, 세비야, 아를, 제주 등 내가 갔던 곳에 대한 추억이 떠올랐고, 브라이턴, 아이슬란드, 가고시마, 런던, 포르투 등 내가 가보지 않았던 곳에 대한 마음 울림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의 이야기에 빠져드는 동안 내 여행 추억도 스멀스멀 떠올랐다. 일단 저질러놓으면 뭐라도 되겠지, 하는 마음이었다. (중략) 그렇게 고민하는 사이 출국일이 눈 앞으로 다가왔다. 캐리어를 끌고 공항에 가면서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발권을 하고 비행기에 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17-18) 대학교 마지막 여름 방학에 친구와 보름간 그리스 여행을 계획했다. 가족이 아닌 친구와 성인이 되어 떠나는 첫 해외여행이었다. 첫 여행뿐 아니라 대부분의 여행이 그랬다. 비행기에 탈 때까지도 실감 나지 않다가 현지 공항에 도착하고서야 두근거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내가 해왔던 모든 여행이 그러하듯 제주도에서 한 달 살기를 결심하게 된 것도 다분히 충동적이었다. (298) 회사를 그만두고 갔던 5박 6일 제주도 여행 마지막 날, 어느 게스트하우스 스탭을 만났고 짧은 대화로 나도 제주도에서 살아볼 수 있겠구나 했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게스트하우스 스탭도 되기 전에 비행기표부터 예매했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지금이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는 것을. 어느 하나 부족함 없이 완벽했다. 온통 하얀 세상, 아늑한 숙소, 좋아하는 친구들, 맛있는 음식…. (257) 3개월간 스탭을 하기로 하고 제주도로 내려갔다. 하루 일하고 하루 쉬었는데, 일하는 날은 숙소에서 여행자들과 맛있는 음식을 먹고 여행 이야기를 하고, 쉬는 날은 제주 곳곳을 여행하며 보냈다. 한여름 밤, 숙소 창문으로 손톱 같은 달을 마주했을 때 지금 이 순간 참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영어보다는 일본어가 좀더 편해서 나홀로 첫 해외여행지는 도쿄로 정했다. 가기 전까지 걱정을 했고, 누군가와 함께이길 바라기도 했지만 혼자서 잘 다녔다. 그 후에 간사이 지방과 나가사키도 혼자 갔다. 차분한 색의 집들이 끝없이 펼쳐지고 모든 게 정갈하다. 그 풍경을 보고 있으면 정말 일본에 왔구나, 하면서 걷잡을 수 없이 두근거린다. (89) 긴 비행 끝에 탈리아 로마에 도착했는데, 캐리어도 찾지 못한 채 몸도 마음도 지친 상태였다. 숙소 입실 전에 들른 동네 작은 Bar. 비까지 내려 우울했는데, 따뜻한 카푸치노를 마시며 심신을 녹일 수 있었다. 카페와 카푸치노만 존재하는 메뉴와 협소한 가게 내부는 관광객의 흥미를 끌기 쉽지 않지만, 일단 이곳에 한 번 들어오면 이탈리아 바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된다. (80) 프랑스에서 파리만 보고 가긴 아쉬워서 일정에 넣었던 도시 아를. 고흐의 <해바라기>와 <별이 빛나는 밤>을 좋아하고, <아를르의 포룸 광장의 카페 테라스>의 배경이 된 카페가 보고 싶어서 아를에 가자고 했다. 리에 비해 너무나 평화롭고 조용한 도시 풍경을 보면 모든 스트레스가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57)




좋아하는 나라 영국에서 크리스마스를 맞이하고, 생일을 보냈다는 그녀. 얼마나 좋았으면 그랬을까. 영국이라는 나라가 궁금해졌다. 결혼하지 않았다면 영국에서 게스트하우스를 했을지도 모른다던 남편의 말이 문득 떠올랐다. 살면서 한 번쯤 가볼 기회가 있을까. 그녀가 추천하는 여행지들을 슬며시 체크해놨다. 혹시 누군가 브라이턴에 간다면, 세븐 시스터스에 갈 계획이 없더라도 그 버스는 꼭 탔으면 좋겠다. 고작 몇 천 원의 버스비를 내고 볼 수 있는 풍경고는 너무나 아름다우니까. (중략) 마침내 그 길 끝에 마주한 거대한 흰 절벽은 말문이 막히도록 황홀했다. (27) 7년 전인가, 여행작가 글쓰기 수업을 들었던 적이 있다. 수강생들 각자 여행 에피소드를 써왔는데, 그 중에 아이슬란드 이야기도 있었다. 멀게만 느껴졌는데, 아이슬란드도 궁금해졌다. 다음 날 이른 아침부터 비몽사몽으로 투어 버스에 올라 마주한 아이슬란드는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곳이었다. 마치 영화 속에 들어와 있는 것만 같다가도 '내가 진짜 여기에 있는 게 맞긴 해?'라는 생각이 바로 꼬리를 물고 따라왔다. 사진으로 담을 수 있는 곳보다 담을 수 없는 곳이 훨씬 더 아름다워 자연스레 카메라를 내려놓고 두 눈으로 담담히 마주 보게 만드는 이곳, 아이슬란드. (110)




내가 자주 하는 말이다. 여행은 계획이 아니라 실천이라고. 여행을 떠나기도 전에 일정, 예산 등을 고민하다보면 자꾸만 주저하게 된다. 그러니 저질러버려야 한다. 일단 비행기표를 끊어버리면 그에 맞춰서 일정도, 예산도 준비할 수밖에 없다. (128) 이 말에 동의한다. 나도 여행을 결심하면 비행기표부터 검색하고는 했다. 내가 사회초년생일 때부터 적은 월급의 반 이상을 저축했고, 부모님과 살고 있었기 때문에 돈 쓸 일이 크게 없었다. 더군다나 여행에는 돈을 아끼지 않았기 때문에 돈이 없어서 여행을 못 간다, 여행 다니는 거 보니 돈이 많구나, 이런 말들을 싫어하는 편이다. 세제 냄새가 물씬 풍기는 이불 속에서 눈을 뜨고, 평소에 먹지 않았던 식사를 하고, 거리를 나서면 어제와는 또 다른 새로운 풍경이 펼쳐지고, 매 순 사소한 모험과 약간의 용기가 필요하며 때로는 실수가 예상치 못한 행운을 가져다주기도 하는, 그렇게 낯선 일상이 반복되는 곳, 여행지. (71) 여행 초보자일 때는 여행 중에 잠에서 깰 때마다 신기했다. 내 집이 아닌 한국이 아닌 먼 나라에 와있다니. 혼자 하는 여행은 시작부터 특히 더 긴장했는데, 막상 여행지에 발을 디디면 어디서 용기가 나는지 열심히 돌아다녔다. 원한다면 언제든 이렇게나 아름다운 바다를 볼 수 있는 곳에 산다는 건 정말 낭만적일 것이다. 매일 봐도 무뎌지거나 지겨워지지 않을 아름다움. (305) 그녀의 문체가 마음에 들었다. 어느 책을 읽다보면 내가 좋아하는 여행에세이인데도 불구하고 혼란스러울 때가 있다. 글을 읽는데 머리가 아파오기도 한다. 어느 분야든 읽기 쉬운 글이 최고인 것 같다. 한 달간의 유럽 여행은 나에게 어떤 기억으로 남게 될까. 어떤 의미를 지닐까. 태어나 처음 보는 유럽의 오래된 건물들과 와는 꽤 다른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곳의 사람들. 하지만 한 달 동안 과거에 대한 후회나 미련, 미래에 대한 걱정 혹은 불안을 다 접어두고 오롯이 눈앞에 현재의 것들에만 집중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행복인지 깨닫고, 그래서 지난 한 달 내 가득 행복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나에겐 가장 값진 일이 아니었을까. (86)



책 표지부터 제목, 여행 사진, 그녀의 글까지 모두 좋았다. 다니던 직장을 그만 둘 때면, 낯선 일상을 찾았다. 어딘가 가기로 마음먹고 있었다. 30대 초반까지의 나는 걷기를 좋아한다고 말하곤 했는데, 여행에서도 참 많이 걸어다녔다. 그리스에서 일본에서 터키에서 둘이서 혹은 혼자서 신발이 닳도록 걸었다. 제주에 100여 일 머물면서는 올레길을 두 코스 빼고 다 걸었다. 뜨거웠던 계절에 팔다리가 까매지도록. 그래서 <낯선 일상을 찾아, 틈만 나면 걸었다> 이 책이 좋을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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