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크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2
기리노 나쓰오 지음, 권일영 옮김 / 비채 / 2007년 6월
평점 :
절판


 
<다크>는 2002년작으로 베테랑 작가 기리노 나쓰오의 유일한 시리즈 캐릭터인 무라노 미로가 등장하는 현재까지 마지막 작품입니다. 초창기에는 돈을 벌기 위해 만화 대본이나 로맨스 소설을 썼다고 알려진 기리노 나쓰오가 진정한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고 평가받는 무라노 미로 시리즈 제1작 <얼굴에 흩날리는 비>는 1993년에 씌어졌고, 미스터리 신인상 격인 에도가와 란포 상을 받으며 주목할 만한 작가 탄생을 알렸습니다. 미스터리 신인상을 받은 데서 알 수 있듯이<얼굴에 흩날리는 비>는 여주인공 미로가 사립탐정이 된 계기와 처음 맡게 된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을 하드보일드 미스터리 스타일로 그리고 있습니다.



<다크>를 읽으며 약간 아쉬웠던 것은 시리즈 순서대로 출간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절판되어 거의 구할 수 없는 <얼굴에 흩날리는 비>를 운 좋게 구해 읽어본 저 같은 소수의 사람들은 미로를 비롯한 등장인물의 전사나 시리즈 전체를 관통하는 분위기 등에 어느 정도 익숙할 수 있겠지만, <다크>로 미로 시리즈를 처음 접해본 분들은 모든 것이 낯설게 느껴질지도 모릅니다. 더구나 <얼굴에 흩날리는 비>는 미로가 사건 관련자를 하나씩 만나 사건의 단서를 그러모으며 조금씩 진실에 접근해가다, 결말에 '네가 범인이다!'를 외치는 비교적 정통적인 하드보일드였기 때문에, <다크>에서 <얼굴에 흩날리는 비>의 범인의 이름이 초반부터 언급되는 것은 안타깝게 느껴집니다. <얼굴에 흩날리는 비>도 곧 새번역으로 재출간될 예정이기에 <다크>를 먼저 읽고 거슬러간 독자들이 흥미를 잃을 여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역시 '시리즈는 1권부터'라는 표어를 만들고 싶은 순간입니다(물론 <다크>만 따로 떼서 읽어도 이해에 지장이 가는 부분은 전혀 없습니다).



레이먼드 챈들러나 로스 맥도널드의 하드보일드에서 탐정 역을 맡은 필립 말로우나 루 아처의 이름을 도저히 뗄 수 없듯이 기리노 나쓰오의 하드보일드도 여탐정 무라노 미로의 개성 없이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간략하게 미로가 탐정이 된 계기를 설명해보자면, <얼굴에 흩날리는 비>에서 남편이 자살하고 비탄에 젖은 미로에게 불청객이 찾아옵니다. 그 남자 나루세는 미로의 소꿉친구 요코의 애인이었는데 맡긴 돈을 요코가 가지고 잠적해버렸기 때문에 그녀를 찾으려 하고 있습니다. 알고 보니 돈은 야쿠자의 것이었고, 미로와 요코 둘이 짜고 돈을 감춘 것이 아닌가 의심하는 야쿠자는 미로에게 요코와 돈을 찾아내라고 요구합니다. 미로는 야쿠자 '고쿠토카이'의 전 조사관이지만 현재 은퇴한 의붓아버지 무라젠(무라노 젠조)의 도움을 받아 나루세와 함께 요코의 삶을 파고듭니다. 요코는 프리랜서 작가로 사라지기 전 독일에서 '신 나치'의 실체를 취재하는 글을 남겼습니다. 미로는 살기 위해 아버지의 뒤를 이어 탐정이 될 결심을 하며 요코와 관계된 곳곳을 다니며 정보를 얻는데, 역시나 기리노 나쓰오의 작품답게 변태적인 섹스 쇼 현장부터 시체 해부 동영상에 탐닉하는 예술가까지 음습합니다.



무사히 첫 요코 사건을 해결한 미로의 모습은 이후 <천사에게 버림받은 밤>, 단편집 <로즈 가든>에서 더 볼 수 있고, 일종의 외전 격인 <물의 잠, 재의 꿈>에서는 60년대를 배경으로 미로의 아버지 무라젠이 잡지사 기자에서 야쿠자 조사관이 되는 과정이 그려진다고 합니다(미로 시리즈는 제목도 참 멋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어지는 것이 <다크>입니다. 위에서 <얼굴에 흩날리는 비>가 정통적인 하드보일드풍이라는 말을 썼는데, 사실 이 작품의 해결편은 거의 본격 미스터리를 방불케 합니다. 의외의 범인이 등장하는 반전도 있고, 미로의 논리적인 추리도 있지요. 그런데 작가 기리노 나쓰오는 오랜 세월을 거쳐 양식화되어 규칙대로 따를 수밖에 없는 미스터리의 구조에서 벗어나고 싶었나 봅니다. 책 표지에 실린 작가의 말을 보면 "새로운 사건이 일어나 탐정 미로가 해결하고 성장한다는 탐정 소설의 패턴에서 벗어나 무라노 미로라는 한 사람의 여성이 시대와 호흡하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위의 말처럼 <다크>는 기리노 나쓰오 작품 세계에서 분수령이 될 듯한 작품입니다. 향후의 걸작들을 예감케 하는 어두운 분위기와 인물들, 음울한 심리 묘사, 인간 관계에 대한 회의와 날카로운 통찰력까지 기리노 나쓰오의 트레이드 마크가 모두 들어가 있습니다. 미로는 전작에서 꼭꼭 숨겨두었던 적의와 증오, 분노를 드러내며 초반부에 아버지 무라젠을 사실상 살해합니다. 작품은 무라젠이 죽기 전까지 애인이었던 시각장애인 히사에와 무라젠과 함께 일했던 고쿠토카이의 전 간부이자 절친한 친구 데이, 미로에게 빌려준 돈을 받으려 하는 동성애자 도모베가 미로를 추적하고, 그녀가 도피하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끈질긴 손길을 피해 미로는 박미애라는 가명으로 한국의 부산과 서울에서 잠적하기도 합니다. 미로는 한국에서 서진호라는 남자와 위험한 사랑에 빠지는데 서진호의 기억을 통해 80년대 광주사태가 그려져 우리 입장에서는 한층 더 흥미롭게 읽을 수 있습니다.


기리노 나쓰오는 작풍을 바꾸기 위해 자신의 전작들까지 서슴치 않고 배신합니다. 이로써 기존 하드보일드에 양념처럼 등장하는 낭만적인 인물들은 모두 사라졌습니다. 미로는 냉소적이지만 이토록 위악적인 여자는 아니었고, 품위있던 무라젠도 어딘지 나약해졌습니다. 육욕에 불타는 히사에는 거의 괴물같이 느껴지며, 미로의 친구였던 도모베는 돈을 위해 배신을 일삼습니다. 아마 전작들을 읽은 분이라면 이들의 변모에 당황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듯 욕망과 악의로 가득차 있는 캐릭터들이 어두운 에너지를 내쏘는 <다크>는 오늘날의 기리노 나쓰오를 가능케 한 실험작이자 눈부신 성공작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줄창 어두운 이야기만 구상하고 쓰는 작가이기에 본인도 어둠에 함몰됐는지, <다크> 이후의 <그로테스크>나 <잔학기> 등의 작품에서는 일체의 희망을 발견할 수 없지만 적어도 <다크>의 결말에서는 미로의 선택을 통해 약간의 희망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미로에게 아직까지 인간성이 남아 있음을 확인하게 하는 결말이지요.


어쩌면 작가는 이 작품을 쓴 2002년 이후의 세상에 더욱 좌절한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최근의 인터뷰에서 "솔직히 이야기해서 앞으로는 더 어둡고 더 살기 힘든 세상에 살 거라고 생각합니다.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사회라고나 할까요?"라고 작가는 말했답니다. <다크>는 서진호와 미로의 희생적인 사랑과 결말에서 보여주는 미로의 인간적인 모습을 통해 어느 정도의 희망을 노래하며, 2002년을 기점으로 더욱 어두워진darkest 세계 이전의 그래도 비교적 좋았던 어느 한 때의 풍경을 그리고 있습니다. 한 번쯤 읽어볼 만한 수작이라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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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ngbong 2007-08-10 0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작품을 읽기전에 확실히 <얼굴에 흩날리는 비>을 읽어 보는데 작품감상에 큰 도움이 될거같아요...전 나루세의 편지내용이 어찌나 궁금하던지... 작가도 이런 독자의 감정을 파악한건지 중간중간 나루세편지를 상기시켜주더군요...단숨에 읽히고 미로의 앞으로의 행로가 진정궁금해지더군요...하루빨리 다음작품이 읽고시프요^^ 작가의 최근 인터뷰내용이 뼈에 사무치더군요..휴~~~~

jedai2000 2007-08-10 1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새디1229님도 정말 대단한 독서가시군요. 거의 안 보신 게 없네요. 저랑 책 보는 취향이나 평가하는 기준도 굉장히 비슷한 것 같구요. <얼굴에 흩날리는 비>를 읽어보시면 물론 좋죠. 근데 <다크>를 먼저 보시면 스포일러될 게 제법 있어 출간 순서가 영 아쉽네요. 기리노 나쓰오의 작품도 몇 편 더 나올 테니 곧 기다림이 충족되겠죠 ^^
 
소녀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직업
사쿠라바 가즈키 지음, 박수지 옮김 / 노블마인 / 2007년 6월
평점 :
절판


 
학교에서는 재치있는 언행으로 인기가도를 달리는 열세 살 소녀 오니시 아오이는 다른 친구들이 모두 기다리는 방학이 되면 오히려 괴로워진다. 아오이의 집에는 괴물이 살기 때문이다. 커다랗고 냄새나는 술에 쩔은 그 괴물은 아오이의 새아빠로 원래는 성실한 어부였지만 다리를 다쳐 집에 들어앉은 후로는 술만 푸며 아오이 모녀에게 고통만을 안겨준다. 또래 아이들처럼 게임을 좋아하는 아오이가 게임기도 사고 맥도널드에서 친구들과 놀려고 아르바이트까지 해서 모으는 용돈까지 손을 대는 새아빠로 인해 아오이는 통제할 수 없는 분노를 느낀다. 아마도 미스터리 소설에서 가족을 괴롭히는 폭군 알콜 중독자가 등장한다면 그는 이미 저승에 한 발 들여놓은 상태나 다름없다고 봐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죽이고 싶은 누군가를 대신 죽여 대리만족을 주는 미스터리 소설의 세계에서 흔히 살해당하는 신세가 되는 사람은 그를 죽이면 내게 이익이 된다거나 내가 더 이상 고통을 받지 않게 되는 누군가이기 때문이다.

집에서 무작정 빠져나온 아오이는 동네에서 놓아 기르는 염소를 치고 때리며 화풀이를 하는데, 같은 반의 한 소녀가 그 광경을 본다. 그 소녀의 이름은 미야노시타 시즈카. 학교에서는 전혀 눈에 띄지 않는 수수한 옷에 책만 읽는 도서위원인 시즈카는 방학 때는 뜻밖에 기묘한 취향의 옷을 입고 있으며, 아오이에게 살인의 욕망을 주입시킨다. 그 사람을 죽여 편안해지라고. 어느새 친해진 두 소녀는 이런저런 계획을 짜내 아오이의 새아빠를 죽이려 한다. 물론 살인자는 '소녀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직업'이고, 당연히 이런 일에 경험이 있을 턱이 없으므로 계획은 대체로 신통치 않지만 열의가 큰 만큼 또 모를 일이다. 의외로 쉽게 성공할 수도 있지 않겠나. 중학교 2학년에서 3학년으로 올라가는 짧은 1년 동안 두 소녀는 결국 두 건의 살인을 저지르게 된다.

올해 일본추리작가협회상을 수상한 사쿠라바 가즈키의 작품이다. 원래는 청소년들을 위한 라이트노벨을 주로 썼으나, 최근 일반문학 쪽으로 순조롭게 안착한 여성작가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소녀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직업>도 주인공들의 연령이나 사고방식, 사용하는 말과 사물에 대한 묘사, 분출하는 십대들의 분노와 절망이라는 주제가 라이트노벨에 가까워 보인다. 대다수의 독자들은 열세 살 시절을 잊었겠지만, 또 그들에게 무슨 고통이 있으랴 하겠지만 사실 그 나이 때는 누구나 각자의 자리에서 치열한 전쟁을 치룬다. 아오이 역시 마찬가지라 집에서는 괴물 새아빠에게, 학교에서는 사소한 오해로 친구들과 소원해져 어디서도 발 붙일 곳이 없다. 열세 살에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아직 어리기 때문에 집을 나가도 혼자 살 수 없고, 좁은 인간 관계의 전부인 친구들에게조차 버림받으면 그야말로 온 세상 전부가 붕괴되는 충격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런 극한 상황에 빠진 아오이와 시즈카가 서로에게 우정을 느끼고 의지하며 강하게 연대하며 두 소녀를 위협하는 사람들과 맞서 싸운다는 내용이 장렬하게까지 느껴진다. 두 친구가 나름대로 치밀하게 살인 계획을 짤 때는 도서 미스터리나 범죄소설을 보는 듯 두근두근한 재미를 주며, 공들여 세운 계획에 허점이 계속 노출되어 결국 모든 게 어그러지는 두번째 살인의 긴장감은 최고다. 제목 자체가 영국의 여성 미스터리 대가 P.D 제임스의 <여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직업>을 패러디한 것처럼, 작품 안에도 카트린 아를레의 <지푸라기 여자>나 리차드 헐의 <백모살인사건>의 설정을 끌어와 미스터리 소설에 익숙한 사람들이라면 그런 쪽의 재미도 충분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라이트노벨로도 미스터리로도 충분히 즐길 만한 작품으로 작가에 대한 기대치가 약간은 높아졌다. 특히 올해 일본추리작가협회상을 탄 <아카쿠치바의 전설>은 꼭 읽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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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ngbong 2007-08-10 0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소설 정말 깔끔해요...이분 다른작품도 빨리 출간되었음 해요

jedai2000 2007-08-10 1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 말입니다. 제가 알기로는 큰 상을 탄 이 분의 대작이 하나 나올거랍니다 ^^
 

* 완벽하게 주관적인 순위입니다.

** 장르를 떠나 넓게 봤을 때 미스터리 요소가 있는 작품은 포함했습니다.

*** 국내 번역본이 나와 있는 책만을 대상으로 했고, 당연히 국내에 출간된 모든 일본 미스터리를 읽지는 못했습니다. 

 

5위. 불야성 - 하세 세이슈

 

 

   타오르는 환락의 불로 꺼질 줄 모르는 밤을 지새우는 도쿄 가부키초. 차별받는 대만인 혼혈아 류젠이는 어려서 고아가 됐고, 현재는 장물아비 노릇을 하며, 남의 등에 칼을 꽂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이 비정한 도시의 한 마리 들개처럼 살아간다. 처음으로 살인한 건 고등학교 때. 어느날 류젠이는 상하이 계파의 보스 유엔천쿠이의 호출을 받게 되고, 그로부터 옛 친구인 우휴춘이 가부키초로 돌아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휴춘은 유엔천쿠이의 오른팔을 죽이고 잠적한 상태였다. 마치 지옥의 사자 같은 유엔천쿠이는 류젠이를 이렇게 협박한다. "네 친구니까 네가 책임지고, 3일 안에 우휴춘을 내 앞에 데려와라. 그렇지 않으면 넌 죽는다."

 일본 하드보일드, 느아르의 귀재 하세 세이슈의 대표작이다. 일본 사회에서 천대받는 혼혈아인 류젠이(그래서 항상 혼자다)가 상하이와 북경, 대만의 계파 전쟁에서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는 게 기둥줄거리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책에 나오는 모든 등장인물은 철저한 악인들이다. 작가는 '불야성' 가부키초를 내가 먹지 않으면 먹힌다는 정글의 생태로 치환해 독자들에게 쉽사리 잊혀지지 않을 강렬한 에너지를 선사한다. 류젠이가 받은 사형선고일은 오로지 3일, 그 3일이라는 데드라인이 주는 넘치는 긴박감과 한다 하는 지략가들의 치밀한 암투와 간계, 배신으로 점철된 인간 관계, 총격전과 육박전의 박력까지 이 모든 것이 섞여 돌아가는 불꽃 같은 작품이다. 일단 한 번 페이지를 잡으면 절대로 놓을 수 없다. 하세 세이슈는 데뷔작인 이 작품을 더쉴 해미트의 <피의 수확>에서 착안했다고 밝혔으며, <진혼가> <장한가>로 이어지는 '류젠이3부작'으로 완성했다. 소문에 의하면 이 작품들의 판권을 가지고 있는 국내 출판사가 있다는데 도대체 꿩궈먹은 소식이다. 이 책들을 내지 못할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면, 당장 출간할 것을 엄중 경고하는 바이다.

 

 

 

4위. 점성술 살인사건 - 시마다 소지

 



  이시오카(그의 이름을 영어로 쓰면 아마 '왓슨'이 될 것이다)는 점성술사 친구 미타라이 키요시를 찾는다. 미타라이가 들으면 재미있어 할 이야깃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란 다름 아닌 '헤이세이 점성술 살인사건.' 태평양 전쟁 전 점성술에 홀려버린 서양화가 우메가와는 모든 미美의 정수인 '아조트'를 만들기 위해 자신의 여섯 명의 딸을 희생시킨다. 불가사의한 이 연쇄살인사건은 그후 몇 십 년 동안 누구도 풀지 못했다. 비상한 두뇌를 가진 미타라이는 곧 흥미를 느끼고 이 사건에 뛰어든다.

 <점성술 살인사건>은 퍼즐 미스터리의 정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작가는 다른 곁가지를 모두 배제한 채 점성술 살인사건이라는 단 한 가지 수수께끼에만 몰두하며, 사건의 배경과 단서를 주의깊게 노출시키고, 로지컬한 추리와 독창적인 트릭에 집중함으로써 사회파나 하드보일드가 유행하던 80년대 일본 미스터리계에 신본격 열풍을 몰고 왔다. 이 작품을 읽으면 누구나 코넌 도일이나 애거서 크리스티가 득세하던 황금기의 미스터리를 떠올릴 것이다. 무엇보다 대단한 건 작품의 핵심 트릭으로서, 크리스티나 앨러리 퀸이 읽어도 혀를 내두를 만큼 뛰어나다. 어쩌면 일본인만이 착상 가능할 지도 모르는 엽기적인 트릭이지만 너무나도 기발하고 참신해 시마다 소지의 천재성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3위. 망량의 상자 - 교고쿠 나츠히코

 

   

 고서점 '교고쿠도'를 운영해 별명도 교고쿠도인 수다쟁이 추젠지 아키히코는 조상 대대로 요괴를 퇴치하는 음양사 일도 병행하고 있다. 전작 <우부메의 여름>에서 밀실에서 연기처럼 사라진 남자와 18개월째 출산을 하지 못하고 있는 그의 아내의 사건을 멋지게 해결해낸 적이 있는 교고쿠도는 이 작품 <망량의 상자>에서 열차사고로 온 몸이 부서진 인형처럼 박살난 소녀가 병원에서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연기처럼 사라진 사건에 말려든다. 이 소녀의 믿지 못할 이야기와 더불어 연달아 벌어지는 기묘한 사건들을 하나로 꿰어 교고쿠도는 사건의 압도적인 비밀과 진실을 독자들 앞에 펼쳐놓는다.

 일본 전통의 요괴를 미스터리와 결합하고, 독특한 개성을 가진 등장인물들을 창조해 일종의 '교고쿠 월드'안에서 뛰어놀게 만드는 교고쿠 나츠히코는 일본 내에서 현재까지 신드롬적인 인기를 구가하는 작가다. 주인공 교고쿠도의 입을 통해 요괴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동, 서양의 온갖 현학을 어마어마하게 펼쳐놓는 취향이 있어 1,000페이지를 예사로 넘는 엄청난 볼륨이지만 현실에서 접할 수 없는 기이하고 환상적인 분위기가 충분히 독자를 몰입시킨다. 이제는 슬슬 물리는 감도 있고, 너무 길어 읽기 힘들다는 독자도 조금씩 나오지만 <망량의 상자> 단 한 편만으로도 작가는 존경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기묘한 사건들이 하나로 합쳐져 진실의 밑그림이 그려지는 결말의 스펙타클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이고, 지옥의 풍경을 잠깐 엿본 듯한 그로테스크함도 일품이다. 일본 미스터리 사상 손꼽힐 만한 역작.

 

 

2위. 마크스의 산 - 다카무라 가오루

 

        

    씨가 있어야 꽃도 피고 나무도 되는 것처럼 모든 비극에는 그 출발점이 있기 마련이다. 1976년 일본의 미나미 알프스에서 한 가족이 자동차 배기가스 자살을 시도해 사내아이 하나만 구사일생으로 살아난다. 곧 시간적 배경은 1991년 현재로 돌아와 사회의 엘리트들이 연속으로 살해되는 사건이 그려진다. 수사 1과 7계 고다 주임 외 경관들이 밝혀낸 바에 의하면 그들은 한 대학교의 등산회원으로 동기생들이다. 왜 그들은 죽어야 했을까? 고다가 밝혀내는 사건의 진상에 독자들은 아연해질 것이다.

 1993년 제109회 나오키상 수상작. 현대 일본 경찰소설의 최고봉으로 작가 다카무라 가오루의 지금의 입지를 만들어준 결정적인 작품이다. 과거의 사건들과 현재의 사건이 맞물려 돌아가는 절묘한 구성과 일가족 자살사건, 전공투 등의 소재를 통해 당대 일본 사회를 소설 안에 오롯이 재현하려는 노력이 돋보이며, 엄청난 취재가 선행되었으리라 여겨지는 수사 과정의 정밀한 묘사가 입을 다물게 한다. 끝모를 허무감과 비애에 젖어 있는 고다에 대한 묘사도 훌륭하며, 산으로 시작해 산으로 귀결되는 결말의 감동 역시 일품이다. 고다 시리즈는 <석양에 빛나는 감>과 <레이디 조커>로 이어지는데, 국내에서는 '일본 미스터리의 여왕'으로 일컬어지는 다카무라 가오루의 작품들을 별로 만나볼 수 없어 늘 안타깝게 생각한다.

 

 

1위. 화차 - 미야베 미유키

 

 

 은퇴할 나이에 부상을 당해 휴직 중에 있는 혼마 형사에게 처조카가 찾아와 자신의 약혼녀를 찾아 달라고 부탁하면서 사건은 시작된다. 결혼을 얼마 남겨두지 않고 실종된, 단지 소박한 행복을 느끼는 게 꿈의 전부였던 그 여자 세키네는 과연 어디에 있을까?  미스터리 소설의 세계에서는 어찌 보면 평범하다 할 수 있는 한 여자의 실종이라는 사건의 조사에서 속속 드러나는 사실들은 자못 충격적이며, 담배나 술이 절로 떠오를 만큼 우울하고 애절하다.

 이 작품은 거대 자본주의에 매몰된 현대 사회의 여러 병폐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 특히 무엇보다 집중하고 있는 건 신용카드를 이용한 손쉬운 대출과 그 대출금을 막지 못해 젊은 나이에 나락으로 떨어지고 마는 가련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마쓰모토 세이초의 손녀'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미야베 미유키는 좀더 현대적이고 우리의 일상과 밀접하게 연결된 신용카드라는 소재를 통해 침체에 빠진 사회파 미스터리의 면모를 혁신하고, 결국 애초에 돈 있는 자만 배를 불리고, 돈이 없는 사람은 끝없이 착취당하며 살아야 하는 자본주의의 본질에 접근한다. 그야말로 화차(지옥의 불수레)에 탄 것처럼 완전히 모든 걸 빨리기 전까지는 절대로 놓아주지 않는 현대 자본주의라는 괴물을 성공적으로 그리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노련한 미야베 미유키는 사회 비판에만 매몰되어 작품을 딱딱하게 만드는 멋없는 짓거리는 하지 않는다. 안개 속을 헤매는 것처럼 단서 하나없는 실종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은 일급 미스터리로 손색이 없다. 등장하는 인물 하나 하나 개성이 넘치고 인간을 잘 그린다는 세평답게 심리 묘사도 완벽에 가깝다. 개인적으로는 몇 년 전 미스터리를 다시 잡았을 때만 해도 웬지 유치한 걸 읽는다는 부끄러움에 주변 사람들에게 떳떳이 권하지 못했는데, 메시지와 재미를 완벽하게 결합한 <화차>를 읽고 나서야 미스터리를 잡는 손이 부끄럽지 않게 되었다. 내게는 <화차> 이전과 이후가 분명하게 나눠질 만큼 의의가 큰 작품이라 1위로 선정했음을 아울러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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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7-06-09 15: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다 읽은 작품들^^ 화차를 예상했어야 했는데요^^:;;

nemuko 2007-06-09 16: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크스의 산>이랑 <불야성>은 소문만 무성하게 듣고 결국 못 구해서 못 봤어요. 이런 속상한 경우가....

jedai2000 2007-06-10 15: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만두님...보신 지 좀 되서 기억이 잘 안 나셨나 보네요. ^^

네무코님...일어 잘 하시잖아요 ^^ 원서로라도 한 번 읽어보세요. 후회는 안 하실 것 같아요 ^^

oldhand 2007-06-10 2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행스럽게도(?) 최상위 다섯개는 다 읽은 거네요. 아주 잘 읽었습니다. 카페가서 답글 놀이 해야 하려나.. ^^

jedai2000 2007-06-11 1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드핸드님...제가 워낙 예전부터 좋아했던 작품들이죠. 이 순위는 쉽게 바뀔 것 같지가 않네요 ^^ 답글놀이하세요. 구경 가게 ^^

paviana 2007-06-12 1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국 미미여사네요. (아직 안읽었어요.읽을거에요.ㅎㅎ)
망량을 몇번이나 들었다놨다 했는데 , 언젠가는 꼭...불끈입니다요.^^

이매지 2007-06-12 14: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망량, 화차만 읽어봤네요^^ 점성술 살인사건은 조만간 읽으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날개 2007-06-12 2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점성술 밖에 못읽었어요... 그 유명한 화차를 얼른 봐야할텐데!

Koni 2007-06-13 1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전 안 읽은 일본 미스터리가 정말 많아요~ 재미있어보이는 걸 골라서 읽어봐야겠어요.

jedai2000 2007-06-13 1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비아나님...<망량의 상자>나 <화차> 다 재미있어요. 일단 손이 잘 안 가서 그렇지 한 번 잡으면 금세 다 보실 수 있을 거예요 ^^

이매지님...<점성술 살인사건>은 트릭이나 퍼즐 풍의 본격 미스터리를 좋아하신다면 아주 만족스러울 거예요 ^^

날개님...<화차>는 정말 강력하게 추천드려요. 꼭 보시기 바랍니다 ^^

냐오님...저도 안 본 게 많은 걸요 ^^ 앞으로도 많이 쏟아져 나올 테니까 지갑 관리 잘 해여죠. 굳이 일본쪽만 아니라 우리나라 미스터리도 그럴싸한 게 많이 나왔음 좋겠습니다. ^^
 

10위. 화이트 아웃 - 심포 유이치

 

 

  폭설이 한 번 내리면 걷잡을 수 없는 지방의 댐에 근무하는 도가시는 같이 일하는 친구와 함께 순찰을 나가다 조난을 당한다. 부상당한 친구를 구하기 위해 혼자 눈 속을 헤치며 댐으로 귀환하려 하나 사방이 온통 흰 눈雪이라 빛의 난반사로 인해 눈眼에 이상이 생겨 일시적으로 시각을 상실하는 '화이트아웃'에 빠져버리고 만다. 결국 사망한 친구를 가슴속에 품고 항상 죄책감에 빠져 사는 도가시. 1년 후 죽은 친구의 애인이 그가 죽기 전에 일했던 곳을 찾아보고 싶다며 방문할 예정이다. 하지만 초대받지 못한 자들이 또 있었으니 6억 톤의 물이 잠긴 댐을 점거해 수십억 엔을 챙기려는 테러리스트들까지 따라온 것이다.

 '설산의 다이하드'라고 불러주고 싶은 작품이다. 일본에서 영화화도 되어 크게 히트한 걸로 알고 있는데, 유감스럽게도 평은 그다지 좋지 않다. 영화를 보지 못했기에 이렇게 좋은 원작을 가지고 어떻게 훌륭하지 못한 영화를 만들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떠나지 않는다. 이 소설에서는 자동소총과 각종 특수무기로 무장한 9명의 전문 테러리스트를 맞아 민간인인 도가시가 강렬한 투혼과 허를 찌르는 두뇌 싸움을 통해 한 명 한 명씩 처치하는 장면들이 연속되며 잠시도 시선을 뗄 수 없을 정도로 독자를 몰입시킨다. 깊은 자책감에 빠져 허우적대던 도가시가 다시 한 번 과거의 실패를 만회하고 죽은 친구의 애인을 살려내 자신을 구원한다는 대강의 플롯은 뻔한 만큼 익숙한 정서로 독자를 충분히 감동시킨다. 단 한 가지의 분명한 목적을 위해 인간의 한계를 넘을 정도로 분투하는 도가시의 매력에 흠뻑 빠져보시길.

 

 

9위. 독원숭이 - 오사와 아리마사

 

 

 경찰 간부 출신이지만 커리어를 위한 정치 싸움에는 애초에 등을 돌리고 현장 일선에서 뛰며 범죄를 원수처럼 미워하는 '골통' 경관이 있다. 별명도 한 번 물면 절대로 놓지 않아 '상어'다. 신주쿠 상어 사메지마가 이번에 상대할 적수는 자신을 배신한 범죄조직 보스를 처치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온 대만의 프로페셔널 킬러 '독원숭이.' 대만 조직의 보스는 살기 위해 결연을 맺은 야쿠자의 도움을 받아 독원숭이를 상대하려 하지만 전설의 킬러 독원숭이는 주머니에서 물건을 꺼내듯 야쿠자들을 가볍게 죽이며 점점 목표 대상에 접근한다. 하지만 하늘에 해가 두 개일수 없듯이 신주쿠 바닥에는 상어와 원숭이가 공존할 수 없는 법!

 일본 하드보일드 미스터리의 대명사 오사와 아리마사의 대표작인 신주쿠 상어 시리즈의 두번째 작품. 전작 <소돔의 성자>를 일반적인 하드보일드 스타일로 그렸다면 <독원숭이>부터는 작풍이 조금 달라진다. 작가는 누가 악당인지, 누가 범인인지 그 정체를 밝히는 일에는 처음부터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고, 신주쿠 상어 사메지마와 한 판 제대로 겨룰 수 있는 호적수(독원숭이)를 설정해 두 사람의 대결구도 형식으로 몰아간다. 조금씩 맞수의 존재에 눈을 떠가는 두 사람이 스칠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엇갈리다가 결국 클라이막스에 이르러 한 판 제대로 맞붙게 만드는 것이다. 미스터리라고 하기엔 약간 어렵고, 어떻게 보면 통속적인 액션오락물에 가까울 수도 있지만, 워낙 페이지마다 박력이 넘쳐 그런 약점은 거의 눈치채기 힘들 것이다. 치명적인 부상을 입고도 자신의 원칙과 자존심을 지켜야 하기에 목표에 접근하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는 철저한 전문가 근성, 우연히 만나 사랑하게 된 한 여인에 대한 헌신, 놀라운 무술 실력 등 독원숭이의 마력적 매력은 끝이 없으며, 밀어주는 이 하나 없어도 사명감 하나로 범죄와 맞서 싸우는 고독한 상어 사메지마도 정말 멋진 주인공이다. 이들 중 한 명을 다시는 볼 수 없다는 것이야말로 정말 커다란 비극인 듯...

 

 

8위. 그로테스크 - 기리노 나쓰오

 



 세간에서 보기에 부족한 것 하나 없는 유능한 대기업의 여사원 가즈에가 밤에는 창녀 생활을 하다 살해된다. 전국이 떠들석한 가운데 이 사건을 알게 된 그녀의 고등학교 시절 친구(?)인 화자 '나'는 가즈에의 당시 모습을 회상한다. 그외에도 나의 동생이자 괴물 같은 아름다움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결국 창녀가 된 유리코의 일기, 중국 불법 이민자로 고단한 삶을 살다 그녀를 살해한 장제중의 수기 등을 통해 혼란과 증오, 악의와 바닥 모를 외로움으로 점철된 가즈에의 삶이 베일을 벗는다.     

 어둠의 소용돌이에 빠진 여성을 주인공으로 즐겨 그리는 작가 기리노 나쓰오가 일본 사회를 떠들석하게 만든 실제 사건을 토대로 한 여성의 매춘의 연대기를 기록한다. 어린 시절부터 고교시절을 거쳐 현재까지 한 여자가 남성 위주의 사회 속에서 좌절하고, 여성들 사이의 눈에 보이지 않는 질투와 외모에 대한 열등감 등으로 서서히 파멸해가는 과정이 처절하도록 소름끼치게 그려지는 이 작품은 제목 그대로 놀랄 만큼 그로테스크하다. 어디서도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지 못해 밤거리를 헤매는 가즈에의 외면적 방황과 내면적 자아의 붕괴가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독자들에게 잊혀지지 않을 비애감을 남긴다. 칼날처럼 날카로운 기리노 나쓰오의 세계에 구원 따윈 없다. 세계적으로 명성을 쌓아가고 있는 기리노 나쓰오의 걸작.

 

 

7위. 모방범 - 미야베 미유키

 



도쿄의 한적한 공원에서 토막난 여자의 팔 한쪽과 핸드백이 발견된다. 대대적인 수사가 벌어지는 가운데 방송국으로 걸려온 한 통의 전화가 사건의 물줄기를 바꿔놓는다. 자신을 범인이라 지칭한 이 남자는 자신이 사건을 저질렀으며 팔의 주인은 이미 죽었지만, 핸드백의 주인은 자기가 데리고 있다고 밝힌다. 살인은 연이어 계속되고 그때마다 방송국에 떠들석하게 전화를 거는 범인은 마치 사건의 반향이 커져가는 걸 즐기는 것처럼 보인다. 잘못된 방법으로 세상의 주목을 한 몸에 받길 원하는 비뚤어진 심리가 바탕에 깔린 '극장형 범죄'의 서막이 오른 것이다.

 인기와 실력 면에서 현재 공히 일본 최고의 작가로 부를 수 있을 듯한 미야베 미유키의 역작. 엄청난 분량의 작품으로 3부작의 구성을 취하고 있다. 1부는 사건의 향방을 르포처럼 외부에서 관찰하고, 2부는 범인의 시점에서 그들의 정신이 점점 병들어가는 모습과 결국 범죄라는 치명적인 선택을 하게 되는 과정이 묘사되며, 3부는 범인의 몰락과 평생 아픔을 안고 살아야 하는 희생자 가족의 끝없는 슬픔이 그려진다. 전대미문의 사건을 맞아, 누구도 원치 않았음에도 어쩔 수 없이 흉악한 범죄에 휘말려들게 된 평범한 사람들 모두가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데 작가는 이 많은 등장인물들에 골고루 시선을 나눠줌으로써 현대 일본 사회와 그 안에서 살아가는 다양한 사람들을 때로 세심하게, 때로 장중하게 묘사하는데 성공한다. 심지어 범인에게까지 일말의 동정의 여지를 남겨둔 미야베 미유키의 인간적인 면모에는 누구라도 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6위. 점과 선 - 마쓰모토 세이초

 

규슈 해안에서 두 명의 남녀 시체가 발견된다. 남자는 건실하게 직장 잘 다니던 남자고 여자는 술집에서 일하는 호스티스다. 이뤄질 수 없는 사랑에 절망한 남녀가 동반자살을 한 게 아닐까 결론을 내린 수사팀. 하지만 집념의 노형사 도리가이와 도쿄의 민완형사 미하라의 끈질긴 추적으로 사건의 진상이 이내 떠오른다.

 공히 일본 미스터리의 선구자 3명 중 한 사람으로 꼽힐 자격이 충분한 마쓰모토 세이초의 걸작 미스터리(나머지 두 명은 당연히 에도가와 란포와 요코미조 세이시가 될 것이다). 원래 역사소설이나 순문학을 썼던 세이초는 종래의 미스터리 소설이 허황된 배경에 말도 안 되는 동기와 요란뻑적지근한 트릭이 남발되어 한 바탕 깜짝쇼로 요상하게 변질되어 가는 현실을 개탄했다. 그는 이 작품 <점과 선>과 <너를 노린다> <제로의 초점> 등의 소설을 잇달아 발표해 현실적인 배경과 그럴싸한 동기, 충분히 실현 가능한 트릭을 통해 기존 미스터리의 환상적인 요소들을 배제했으며, 당대 일본 사회의 여러 가지 문제점을 작품 안에 끌여들어 환경오염이나 금융 사기 등 사회 문제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까지 아울러 보여주었으니, 이를 '사회파 미스터리'라고 부른다. 사회파의 비조인 마쓰모토 세이초의 명성은 오늘날까지 굳건하며, 미스터리를 애들이나 읽는 것이 아닌 어른들도 진지하게 접할 수 있는 읽을거리로 지위 상승시킨 공은 백번 칭찬해도 부족함이 없다할 것이다. <점과 선>은 점과 점이 멀리 떨어져 있어도, 그것을 보는 사람들이 머릿속에서 두 점을 멋대로 이어 선을 만들어버리는 선입견을 이용해 멋진 트릭을 선보인다. 또한 크로프츠 식의 열차 시간표 알리바이 깨기 트릭도 충실하게 일본 풍으로 이식하는데 성공했다. 50년대에 나온 고전이지만 지금 봐도 얼마든지 재미있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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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7-06-08 1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6,7,8,9 봤네요. 어쩜, 그로테스크는 나온지도 그리 오래되지도 않았는데, 내용이 하나도 생각 안나요 -_-;;;

jedai2000 2007-06-08 14: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0위도 마저 보시죠 ^^ <그로테스크>의 내용은 강렬한데 왜 기억이 안 나실까요^^

paviana 2007-06-08 17: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1위 발표는 왜 안하시는건가요? 궁금하게.^^

jedai2000 2007-06-08 17: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비아나님...아직 다 못 썼습니다 ㅋㅋ

이매지 2007-06-08 2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방범을 빼고 본 게 없는 리스트! 오홋! 이런거 완전 좋아요 ㅎㅎㅎ
(점점 보관함이 가득해지고 있는 중 ㅎ)

jedai2000 2007-06-09 0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매지님...가계에 악영향을 끼쳐 죄송합니다 (__) 이매지님 덕분에 글 쓰는 보람이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

날개 2007-06-12 2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소한 10위안에 든건 다 봐야겠다는 생각이.........^^;;;; 볼게 많군요..

jedai2000 2007-06-13 1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날개님...10위 안에 든 것 중 <독원숭이>와 <불야성> <마크스의 산>은 절판입니다. 도서관이나 헌책방을 잘 알아보세요. 볼 거 많음 좋져 ^^
 

15위. 살육에 이르는 병 - 아비코 다케마루

 

이 소설은 무언가 끔찍한 범행을 저지른 한 남자가 체포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곧 몇 달 전으로 되돌아가 정신에 병이 든 이 남자가 살육에 이끌리게 되는 심리와 여성 희생자를 하나 하나씩 물색해 살인을 저지르는 과정이 자세하게 묘사되며, 어딘지 수상한 행동을 일삼는 이 남자를 의심하는 그의 가족 중 한 명의 여성이 나름대로 조사를 벌이는 모습이 교차된다. 마지막으로 은퇴한 형사가 우연히 이 사건에 말려들어 범인을 추격한다. 이 세 명의 시선으로 진행되는 <살육에 이르는 병>은 끝으로 갈수록 긴장이 고조되다 충격적인 결말로 매조지된다.

 올해 초, 많은 화제가 되었던 작품으로 최강의 반전과 엽기적인 살인 행각의 가감없는 묘사가 시선을 잡아끈다. 하지만 단순히 눈길을 끌기 위해 처절한 살육 장면을 그렇게 길고 자세하게 그렸다고 보기는 힘들다. 사실 이 작품은 현대 일본 사회와 가정이 한 사람의 정상적이고 온전한 성인 남성을 길러내기 힘든 구조적 모순을 가지고 있다는 주제의식을 그것과 호응하는 훌륭한 반전을 통해 공감가게 그려내고 있다. 그동안 많은 미스터리를 보았지만 주제를 이렇게 잘 살려주는 트릭, 트릭을 이렇게 훌륭하게 뒷받침해주는 주제를 가진 작품은 흔치 않았다. 그렇다고 결코 딱딱한 작품은 아니며 반전의 '깜짝쇼'만으로도 충분히 즐길 만하다.

 

 

14위. 시계관의 살인 - 아야쓰지 유키토

 

십각관부터 인형관까지 천재 건축가이자 일가족 살인사건을 저지르고 자살해버린 나카무라 세이지가 죽기 전에 지었다는 10채의 저택에 얽힌 비밀을 풀기 위해 그곳들을 방문하는 아마추어 탐정이 있다. 그의 이름은 시마다 키요시. 다섯번째인 이번 저택의 이름은 거대한 시계탑이 있어 이름하여 '시계관'이다. 수많은 시계들로 가득찬 시계관에 사흘 동안 9명의 사람들이 갇히게 되고, 필연적으로 연쇄살인이 벌어진다. 현장에 있던 출판사 편집자(<십각관의 살인>에서는 대학생이었다)의 증언을 토대로 명추리를 전개해 마침내 진상을 꿰뚫는 시마다의 대활약을 만끽할 수 있는 작품이다.

 80년대 초반 '신본격' 열풍을 불러 일으켰던 '관 시리즈'의 다섯번째 작품으로 교토대 미스터리 클럽에서 활동하며 젊은 미스터리 작가의 기수로 떠올랐던 아야쓰지 유키토의 대표작이다. 풀기 힘든 수수께끼를 논리적으로 해결하는 명탐정의 활약이라는 고전적인 미스터리의 즐거움을 오늘에 되살리자는 신선한 모토를 들고나온 이들 신본격파는 80년대 일본 미스터리의 기운찬 파도였다고 봐도 틀림이 없을 것이다. 관 시리즈의 다른 작품들이 서술트릭이 많고 조금 조잡한 느낌을 주는 것도 분명히 있는데 반해 <시계관의 살인>은 작가 본인도 밝히고 있듯 스트레이트한 물리적 트릭에 중점을 두고 있다. 다른 작품들과 달리 스케일이 큰 트릭과 고전기의 명탐정 느낌을 주는 시마다의 매력에 빠져 즐겁게 볼 수 있는 작품이다. 1992년 제45회 일본미스터리작가협회상 수상작으로 미스터리 팬이라면-특히 기발한 트릭을 좋아한다면- 누구나 만족할 것이다.

 

 

13위. 검은 집 - 기시 유스케

 

보험회사에 근무하는 신지는 보험에 든 아들이 자살해도 보험금을 탈 수 있느냐는 부부의 문의전화를 받는다. 직접 현장으로 조사를 나가 만나본 부부는 딱히 설명할 순 없지만 어딘지 느낌이 좋지 않다. 사건 현장에서 몇 가지 의문점을 발견한 그는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그 다음 순간부터 지옥문이 열린다. 신지뿐 아니라 그의 애인까지 두 번 다시 맞닥뜨리기 싫은 악몽 같은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최근 우리나라에서 영화화되어 곧 개봉될 예정이라 많은 화제를 불러 모으고 있다. 1997년 제4회 일본호러소설대상을 탄 이 작품은 상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호러의 분위기가 강한 작품이다. 당시에는 감정이 존재하지 않아 심각한 범죄를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르는 '사이코패스'라는 정신이상자들이 세간에 많이 알려지지 않을 때라 일본 내에서 많은 화제를 불렀다고 한다. 물론 클라이막스인 '검은 집'에서 펼쳐지는 한 폭의 지옥도는 뛰어난 호러소설의 한 장면으로 손색이 없지만, 두 부부 가운데 누가 사이코패스이고 한 명은 희생자(혹은 동조자)인지를 그들이 어렸을 때 써낸 일기를 분석해 알아내는 등 미스터리적인 재미도 충분하다. 엔터테이너 기시 유스케는 이 작품으로 유명해졌지만, 바이오 호러 <천사의 속삭임>, 도서 미스터리 <푸른 불꽃>, 트릭이 있는 정통 미스터리 <유리 망치>까지 다채로운 작품에서 다재다능함을 보여주고 있다.

 

 

12위. 아웃 - 기리노 나쓰오

 

도시락 공장에서 마치 기계의 부속품처럼 쉬지 않고 일을 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네 중년 여자가 있다. 포악한 남편을 둔 그중 한 명이 우발적으로 남편을 살해하자 이들은 그녀를 도와 남편을 그야말로 '해체'해 몰래 버린다. 뜻하지 않은 이 사건은 당연히 그녀들의 인생을 바꿔버리고, 그녀들은 연이어 벌어지는 사건에 휘말린다. 종점에 도달하기 전까지 결코 하차를 허락하지 않는 총알택시에 탄 것처럼 그녀들 주변을 빠르게 내달리는 사건들의 소용돌이... 심지어 그녀들의 솜씨에 반한 야쿠자에 의해 또다른 시체 해체 사업까지 하게 되니, 역시 한 번 어둠에 발을 담근 사람은 쉽게 발을 뺄 수 없는 모양이다. 작품은 네 여자 중 리더 격인 마사코에게 반해 그녀를 죽여 소유하려는 킬러까지 등장하면서 점입가경으로 나아간다.

 1998년 제51회 일본추리작가협회상 수상작이자 영역되어 아시아에서 최초로 에드거상 후보에 오른 작품. 명성만큼 압도적인 작품으로 기리노 나쓰오가 가진 파워를 느낄 수 있다. 네 명의 평범한 여자들이 어떻게 시체와 해체, 살인에 익숙해져 가는지를 따라간 이 작품에는 현대 일본의 중년 여성들이 느끼는 고독과 절망, 끝없이 계속되는 암담한 현실에서 탈출(out)하고 싶어하는 욕망이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날카로운 심리 묘사와 어디로 튈지 모르는 도발적인 전개, 빼어난 문장력까지 잘쓴 소설의 삼박자를 모두 갖춘 역작.

 

 

11위. 백야행 - 히가시노 게이고

 



1970년대 한창 개발의 물결이 밀어닥치고 있는 작은 동네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한다. 완공이 되지 않은 건물에서 한 남자가 살해된 것이다. 사건 장소는 완벽한 미궁이고 용의자는 모두 알리바이가 있다. 담당 형사는 조사를 계속하다 피해자와 관련된 두 어린 소년소녀를 알게 되는데, 그들의 이름은 료지와 유키호다. 작가는 범죄로 얼룩진 삶을 살아왔지만 서로를 깊이 사랑하고 헌신한  료지와 유키호의 20년을 따라 현대 일본 사회의 명암을 들여다본다.

 '하얀 밤을 걷다'라는 뜻으로 풀이될 수 있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대표작. 최근 드라마화되었고 일본에서 100만부 이상의 판매를 올렸다. 눈에 보이는 심리 묘사는 거의 없고, 오로지 이야기를 통해 두 남녀 주인공의 아슬아슬한 사랑을 독자에게 미묘하게 전달해낸 테크닉이 돋보인다. 이야기의 달인이 견고한 이야기의 성을 쌓아 이야기에 목마른 독자들을 초대해 베푼 만찬이라고 할 수 있을 듯. 당대의 이야기꾼 히가시노 게이고의 자존심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료지의 헌신과 유키호의 눈물 외에도 이 작품에는 70년대부터 현재까지의 일본 이공계 산업의 발전상이 병행되어 흥미진진하게 그려진다(슈퍼 마리오도 나온다). 사랑 만으로는 행복해질 수 없었던 여자를 위해, 그녀의 물질적인 욕망을 만족시켜주기 위해 몸담고 있는 이공계 산업의 현장에서 범죄를 저질러 성공 가도를 달리는 주인공을 통해 작가는 기술 산업의 발전이 가능하게 한 현대 일본의 번영의 뿌리 속에는 이렇듯 범죄의 기운이 잠복하고 있지는 않나 하는 의구심을 표현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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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7-06-08 1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웃 하고 시계관 빼고 봤네요. 아웃은 서울집으로 주문해 놓은 상태. 관시리즈는 다 모아 두었는데, 하나도 안 봤어요. 왠지 지루하다는 선입견이;;

jedai2000 2007-06-09 0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로테스크>가 별로 맞지 않으셨다면 <아웃>도 마찬가지일 겝니다. 기리노 나쓰오도 취향을 많이 타는군요. 관 시리즈는 트릭이나 퍼즐 풍의 작품을 좋아하신다면 잼있게 보실 수 있을 거예요.

oldhand 2007-06-08 1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이 제일 댓글이 적으니 여기다 달아야지.. ^^
11-15위가 유일하게 다 본 리스트네요. 1-5위는 이따가 집에가서 확인해야 되려나요. 화차, 불야성은 꼭 들어갈것 같고, 망량의 상자도 들어갈것 같죠? 내맘대로. ㅎㅎ

jedai2000 2007-06-08 18: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원래 알라딘에는 페이퍼 안 쓰는데 이번 기회에 추리소설 좀 추천해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퍼왔습니다. ^^ 여기가 제일 적으니 말씀드리는데 세 가지 다 있습니다 ^^

이매지 2007-06-08 2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리노 나쓰오는 예전에 아임소리마마를 보고 왠지 찝찝한 느낌이 많이 남아서 꺼려지고 있는. 아웃은 이래저래 좋다는 평들이 많아서 관심이 가네요^^

jedai2000 2007-06-09 0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매지님...<아임 소리 마마>는 국내에 소개된 기리노 나쓰오 작품 중에 가장 떨어진다는 게 중론인데, 하필(?) 그게 잘 나가서 우리나라에 기리노 나쓰오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어느 정도 전한 것 같아 좀 억울하기도 하네요(작가도 아니면서 ㅋㅋ).
<내 아이는 어디로 갔을까> <그로테스크> <아웃>이라면 강력하게 추천드릴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