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위. 살육에 이르는 병 - 아비코 다케마루
이 소설은 무언가 끔찍한 범행을 저지른 한 남자가 체포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곧 몇 달 전으로 되돌아가 정신에 병이 든 이 남자가 살육에 이끌리게 되는 심리와 여성 희생자를 하나 하나씩 물색해 살인을 저지르는 과정이 자세하게 묘사되며, 어딘지 수상한 행동을 일삼는 이 남자를 의심하는 그의 가족 중 한 명의 여성이 나름대로 조사를 벌이는 모습이 교차된다. 마지막으로 은퇴한 형사가 우연히 이 사건에 말려들어 범인을 추격한다. 이 세 명의 시선으로 진행되는 <살육에 이르는 병>은 끝으로 갈수록 긴장이 고조되다 충격적인 결말로 매조지된다.
올해 초, 많은 화제가 되었던 작품으로 최강의 반전과 엽기적인 살인 행각의 가감없는 묘사가 시선을 잡아끈다. 하지만 단순히 눈길을 끌기 위해 처절한 살육 장면을 그렇게 길고 자세하게 그렸다고 보기는 힘들다. 사실 이 작품은 현대 일본 사회와 가정이 한 사람의 정상적이고 온전한 성인 남성을 길러내기 힘든 구조적 모순을 가지고 있다는 주제의식을 그것과 호응하는 훌륭한 반전을 통해 공감가게 그려내고 있다. 그동안 많은 미스터리를 보았지만 주제를 이렇게 잘 살려주는 트릭, 트릭을 이렇게 훌륭하게 뒷받침해주는 주제를 가진 작품은 흔치 않았다. 그렇다고 결코 딱딱한 작품은 아니며 반전의 '깜짝쇼'만으로도 충분히 즐길 만하다.
14위. 시계관의 살인 - 아야쓰지 유키토
십각관부터 인형관까지 천재 건축가이자 일가족 살인사건을 저지르고 자살해버린 나카무라 세이지가 죽기 전에 지었다는 10채의 저택에 얽힌 비밀을 풀기 위해 그곳들을 방문하는 아마추어 탐정이 있다. 그의 이름은 시마다 키요시. 다섯번째인 이번 저택의 이름은 거대한 시계탑이 있어 이름하여 '시계관'이다. 수많은 시계들로 가득찬 시계관에 사흘 동안 9명의 사람들이 갇히게 되고, 필연적으로 연쇄살인이 벌어진다. 현장에 있던 출판사 편집자(<십각관의 살인>에서는 대학생이었다)의 증언을 토대로 명추리를 전개해 마침내 진상을 꿰뚫는 시마다의 대활약을 만끽할 수 있는 작품이다.
80년대 초반 '신본격' 열풍을 불러 일으켰던 '관 시리즈'의 다섯번째 작품으로 교토대 미스터리 클럽에서 활동하며 젊은 미스터리 작가의 기수로 떠올랐던 아야쓰지 유키토의 대표작이다. 풀기 힘든 수수께끼를 논리적으로 해결하는 명탐정의 활약이라는 고전적인 미스터리의 즐거움을 오늘에 되살리자는 신선한 모토를 들고나온 이들 신본격파는 80년대 일본 미스터리의 기운찬 파도였다고 봐도 틀림이 없을 것이다. 관 시리즈의 다른 작품들이 서술트릭이 많고 조금 조잡한 느낌을 주는 것도 분명히 있는데 반해 <시계관의 살인>은 작가 본인도 밝히고 있듯 스트레이트한 물리적 트릭에 중점을 두고 있다. 다른 작품들과 달리 스케일이 큰 트릭과 고전기의 명탐정 느낌을 주는 시마다의 매력에 빠져 즐겁게 볼 수 있는 작품이다. 1992년 제45회 일본미스터리작가협회상 수상작으로 미스터리 팬이라면-특히 기발한 트릭을 좋아한다면- 누구나 만족할 것이다.
13위. 검은 집 - 기시 유스케
보험회사에 근무하는 신지는 보험에 든 아들이 자살해도 보험금을 탈 수 있느냐는 부부의 문의전화를 받는다. 직접 현장으로 조사를 나가 만나본 부부는 딱히 설명할 순 없지만 어딘지 느낌이 좋지 않다. 사건 현장에서 몇 가지 의문점을 발견한 그는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그 다음 순간부터 지옥문이 열린다. 신지뿐 아니라 그의 애인까지 두 번 다시 맞닥뜨리기 싫은 악몽 같은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최근 우리나라에서 영화화되어 곧 개봉될 예정이라 많은 화제를 불러 모으고 있다. 1997년 제4회 일본호러소설대상을 탄 이 작품은 상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호러의 분위기가 강한 작품이다. 당시에는 감정이 존재하지 않아 심각한 범죄를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르는 '사이코패스'라는 정신이상자들이 세간에 많이 알려지지 않을 때라 일본 내에서 많은 화제를 불렀다고 한다. 물론 클라이막스인 '검은 집'에서 펼쳐지는 한 폭의 지옥도는 뛰어난 호러소설의 한 장면으로 손색이 없지만, 두 부부 가운데 누가 사이코패스이고 한 명은 희생자(혹은 동조자)인지를 그들이 어렸을 때 써낸 일기를 분석해 알아내는 등 미스터리적인 재미도 충분하다. 엔터테이너 기시 유스케는 이 작품으로 유명해졌지만, 바이오 호러 <천사의 속삭임>, 도서 미스터리 <푸른 불꽃>, 트릭이 있는 정통 미스터리 <유리 망치>까지 다채로운 작품에서 다재다능함을 보여주고 있다.
12위. 아웃 - 기리노 나쓰오
도시락 공장에서 마치 기계의 부속품처럼 쉬지 않고 일을 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네 중년 여자가 있다. 포악한 남편을 둔 그중 한 명이 우발적으로 남편을 살해하자 이들은 그녀를 도와 남편을 그야말로 '해체'해 몰래 버린다. 뜻하지 않은 이 사건은 당연히 그녀들의 인생을 바꿔버리고, 그녀들은 연이어 벌어지는 사건에 휘말린다. 종점에 도달하기 전까지 결코 하차를 허락하지 않는 총알택시에 탄 것처럼 그녀들 주변을 빠르게 내달리는 사건들의 소용돌이... 심지어 그녀들의 솜씨에 반한 야쿠자에 의해 또다른 시체 해체 사업까지 하게 되니, 역시 한 번 어둠에 발을 담근 사람은 쉽게 발을 뺄 수 없는 모양이다. 작품은 네 여자 중 리더 격인 마사코에게 반해 그녀를 죽여 소유하려는 킬러까지 등장하면서 점입가경으로 나아간다.
1998년 제51회 일본추리작가협회상 수상작이자 영역되어 아시아에서 최초로 에드거상 후보에 오른 작품. 명성만큼 압도적인 작품으로 기리노 나쓰오가 가진 파워를 느낄 수 있다. 네 명의 평범한 여자들이 어떻게 시체와 해체, 살인에 익숙해져 가는지를 따라간 이 작품에는 현대 일본의 중년 여성들이 느끼는 고독과 절망, 끝없이 계속되는 암담한 현실에서 탈출(out)하고 싶어하는 욕망이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날카로운 심리 묘사와 어디로 튈지 모르는 도발적인 전개, 빼어난 문장력까지 잘쓴 소설의 삼박자를 모두 갖춘 역작.
11위. 백야행 - 히가시노 게이고
1970년대 한창 개발의 물결이 밀어닥치고 있는 작은 동네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한다. 완공이 되지 않은 건물에서 한 남자가 살해된 것이다. 사건 장소는 완벽한 미궁이고 용의자는 모두 알리바이가 있다. 담당 형사는 조사를 계속하다 피해자와 관련된 두 어린 소년소녀를 알게 되는데, 그들의 이름은 료지와 유키호다. 작가는 범죄로 얼룩진 삶을 살아왔지만 서로를 깊이 사랑하고 헌신한 료지와 유키호의 20년을 따라 현대 일본 사회의 명암을 들여다본다.
'하얀 밤을 걷다'라는 뜻으로 풀이될 수 있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대표작. 최근 드라마화되었고 일본에서 100만부 이상의 판매를 올렸다. 눈에 보이는 심리 묘사는 거의 없고, 오로지 이야기를 통해 두 남녀 주인공의 아슬아슬한 사랑을 독자에게 미묘하게 전달해낸 테크닉이 돋보인다. 이야기의 달인이 견고한 이야기의 성을 쌓아 이야기에 목마른 독자들을 초대해 베푼 만찬이라고 할 수 있을 듯. 당대의 이야기꾼 히가시노 게이고의 자존심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료지의 헌신과 유키호의 눈물 외에도 이 작품에는 70년대부터 현재까지의 일본 이공계 산업의 발전상이 병행되어 흥미진진하게 그려진다(슈퍼 마리오도 나온다). 사랑 만으로는 행복해질 수 없었던 여자를 위해, 그녀의 물질적인 욕망을 만족시켜주기 위해 몸담고 있는 이공계 산업의 현장에서 범죄를 저질러 성공 가도를 달리는 주인공을 통해 작가는 기술 산업의 발전이 가능하게 한 현대 일본의 번영의 뿌리 속에는 이렇듯 범죄의 기운이 잠복하고 있지는 않나 하는 의구심을 표현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