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위. 화이트 아웃 - 심포 유이치
폭설이 한 번 내리면 걷잡을 수 없는 지방의 댐에 근무하는 도가시는 같이 일하는 친구와 함께 순찰을 나가다 조난을 당한다. 부상당한 친구를 구하기 위해 혼자 눈 속을 헤치며 댐으로 귀환하려 하나 사방이 온통 흰 눈雪이라 빛의 난반사로 인해 눈眼에 이상이 생겨 일시적으로 시각을 상실하는 '화이트아웃'에 빠져버리고 만다. 결국 사망한 친구를 가슴속에 품고 항상 죄책감에 빠져 사는 도가시. 1년 후 죽은 친구의 애인이 그가 죽기 전에 일했던 곳을 찾아보고 싶다며 방문할 예정이다. 하지만 초대받지 못한 자들이 또 있었으니 6억 톤의 물이 잠긴 댐을 점거해 수십억 엔을 챙기려는 테러리스트들까지 따라온 것이다.
'설산의 다이하드'라고 불러주고 싶은 작품이다. 일본에서 영화화도 되어 크게 히트한 걸로 알고 있는데, 유감스럽게도 평은 그다지 좋지 않다. 영화를 보지 못했기에 이렇게 좋은 원작을 가지고 어떻게 훌륭하지 못한 영화를 만들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떠나지 않는다. 이 소설에서는 자동소총과 각종 특수무기로 무장한 9명의 전문 테러리스트를 맞아 민간인인 도가시가 강렬한 투혼과 허를 찌르는 두뇌 싸움을 통해 한 명 한 명씩 처치하는 장면들이 연속되며 잠시도 시선을 뗄 수 없을 정도로 독자를 몰입시킨다. 깊은 자책감에 빠져 허우적대던 도가시가 다시 한 번 과거의 실패를 만회하고 죽은 친구의 애인을 살려내 자신을 구원한다는 대강의 플롯은 뻔한 만큼 익숙한 정서로 독자를 충분히 감동시킨다. 단 한 가지의 분명한 목적을 위해 인간의 한계를 넘을 정도로 분투하는 도가시의 매력에 흠뻑 빠져보시길.
9위. 독원숭이 - 오사와 아리마사
경찰 간부 출신이지만 커리어를 위한 정치 싸움에는 애초에 등을 돌리고 현장 일선에서 뛰며 범죄를 원수처럼 미워하는 '골통' 경관이 있다. 별명도 한 번 물면 절대로 놓지 않아 '상어'다. 신주쿠 상어 사메지마가 이번에 상대할 적수는 자신을 배신한 범죄조직 보스를 처치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온 대만의 프로페셔널 킬러 '독원숭이.' 대만 조직의 보스는 살기 위해 결연을 맺은 야쿠자의 도움을 받아 독원숭이를 상대하려 하지만 전설의 킬러 독원숭이는 주머니에서 물건을 꺼내듯 야쿠자들을 가볍게 죽이며 점점 목표 대상에 접근한다. 하지만 하늘에 해가 두 개일수 없듯이 신주쿠 바닥에는 상어와 원숭이가 공존할 수 없는 법!
일본 하드보일드 미스터리의 대명사 오사와 아리마사의 대표작인 신주쿠 상어 시리즈의 두번째 작품. 전작 <소돔의 성자>를 일반적인 하드보일드 스타일로 그렸다면 <독원숭이>부터는 작풍이 조금 달라진다. 작가는 누가 악당인지, 누가 범인인지 그 정체를 밝히는 일에는 처음부터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고, 신주쿠 상어 사메지마와 한 판 제대로 겨룰 수 있는 호적수(독원숭이)를 설정해 두 사람의 대결구도 형식으로 몰아간다. 조금씩 맞수의 존재에 눈을 떠가는 두 사람이 스칠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엇갈리다가 결국 클라이막스에 이르러 한 판 제대로 맞붙게 만드는 것이다. 미스터리라고 하기엔 약간 어렵고, 어떻게 보면 통속적인 액션오락물에 가까울 수도 있지만, 워낙 페이지마다 박력이 넘쳐 그런 약점은 거의 눈치채기 힘들 것이다. 치명적인 부상을 입고도 자신의 원칙과 자존심을 지켜야 하기에 목표에 접근하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는 철저한 전문가 근성, 우연히 만나 사랑하게 된 한 여인에 대한 헌신, 놀라운 무술 실력 등 독원숭이의 마력적 매력은 끝이 없으며, 밀어주는 이 하나 없어도 사명감 하나로 범죄와 맞서 싸우는 고독한 상어 사메지마도 정말 멋진 주인공이다. 이들 중 한 명을 다시는 볼 수 없다는 것이야말로 정말 커다란 비극인 듯...
8위. 그로테스크 - 기리노 나쓰오
세간에서 보기에 부족한 것 하나 없는 유능한 대기업의 여사원 가즈에가 밤에는 창녀 생활을 하다 살해된다. 전국이 떠들석한 가운데 이 사건을 알게 된 그녀의 고등학교 시절 친구(?)인 화자 '나'는 가즈에의 당시 모습을 회상한다. 그외에도 나의 동생이자 괴물 같은 아름다움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결국 창녀가 된 유리코의 일기, 중국 불법 이민자로 고단한 삶을 살다 그녀를 살해한 장제중의 수기 등을 통해 혼란과 증오, 악의와 바닥 모를 외로움으로 점철된 가즈에의 삶이 베일을 벗는다.
어둠의 소용돌이에 빠진 여성을 주인공으로 즐겨 그리는 작가 기리노 나쓰오가 일본 사회를 떠들석하게 만든 실제 사건을 토대로 한 여성의 매춘의 연대기를 기록한다. 어린 시절부터 고교시절을 거쳐 현재까지 한 여자가 남성 위주의 사회 속에서 좌절하고, 여성들 사이의 눈에 보이지 않는 질투와 외모에 대한 열등감 등으로 서서히 파멸해가는 과정이 처절하도록 소름끼치게 그려지는 이 작품은 제목 그대로 놀랄 만큼 그로테스크하다. 어디서도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지 못해 밤거리를 헤매는 가즈에의 외면적 방황과 내면적 자아의 붕괴가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독자들에게 잊혀지지 않을 비애감을 남긴다. 칼날처럼 날카로운 기리노 나쓰오의 세계에 구원 따윈 없다. 세계적으로 명성을 쌓아가고 있는 기리노 나쓰오의 걸작.
7위. 모방범 - 미야베 미유키
도쿄의 한적한 공원에서 토막난 여자의 팔 한쪽과 핸드백이 발견된다. 대대적인 수사가 벌어지는 가운데 방송국으로 걸려온 한 통의 전화가 사건의 물줄기를 바꿔놓는다. 자신을 범인이라 지칭한 이 남자는 자신이 사건을 저질렀으며 팔의 주인은 이미 죽었지만, 핸드백의 주인은 자기가 데리고 있다고 밝힌다. 살인은 연이어 계속되고 그때마다 방송국에 떠들석하게 전화를 거는 범인은 마치 사건의 반향이 커져가는 걸 즐기는 것처럼 보인다. 잘못된 방법으로 세상의 주목을 한 몸에 받길 원하는 비뚤어진 심리가 바탕에 깔린 '극장형 범죄'의 서막이 오른 것이다.
인기와 실력 면에서 현재 공히 일본 최고의 작가로 부를 수 있을 듯한 미야베 미유키의 역작. 엄청난 분량의 작품으로 3부작의 구성을 취하고 있다. 1부는 사건의 향방을 르포처럼 외부에서 관찰하고, 2부는 범인의 시점에서 그들의 정신이 점점 병들어가는 모습과 결국 범죄라는 치명적인 선택을 하게 되는 과정이 묘사되며, 3부는 범인의 몰락과 평생 아픔을 안고 살아야 하는 희생자 가족의 끝없는 슬픔이 그려진다. 전대미문의 사건을 맞아, 누구도 원치 않았음에도 어쩔 수 없이 흉악한 범죄에 휘말려들게 된 평범한 사람들 모두가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데 작가는 이 많은 등장인물들에 골고루 시선을 나눠줌으로써 현대 일본 사회와 그 안에서 살아가는 다양한 사람들을 때로 세심하게, 때로 장중하게 묘사하는데 성공한다. 심지어 범인에게까지 일말의 동정의 여지를 남겨둔 미야베 미유키의 인간적인 면모에는 누구라도 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6위. 점과 선 - 마쓰모토 세이초
규슈 해안에서 두 명의 남녀 시체가 발견된다. 남자는 건실하게 직장 잘 다니던 남자고 여자는 술집에서 일하는 호스티스다. 이뤄질 수 없는 사랑에 절망한 남녀가 동반자살을 한 게 아닐까 결론을 내린 수사팀. 하지만 집념의 노형사 도리가이와 도쿄의 민완형사 미하라의 끈질긴 추적으로 사건의 진상이 이내 떠오른다.
공히 일본 미스터리의 선구자 3명 중 한 사람으로 꼽힐 자격이 충분한 마쓰모토 세이초의 걸작 미스터리(나머지 두 명은 당연히 에도가와 란포와 요코미조 세이시가 될 것이다). 원래 역사소설이나 순문학을 썼던 세이초는 종래의 미스터리 소설이 허황된 배경에 말도 안 되는 동기와 요란뻑적지근한 트릭이 남발되어 한 바탕 깜짝쇼로 요상하게 변질되어 가는 현실을 개탄했다. 그는 이 작품 <점과 선>과 <너를 노린다> <제로의 초점> 등의 소설을 잇달아 발표해 현실적인 배경과 그럴싸한 동기, 충분히 실현 가능한 트릭을 통해 기존 미스터리의 환상적인 요소들을 배제했으며, 당대 일본 사회의 여러 가지 문제점을 작품 안에 끌여들어 환경오염이나 금융 사기 등 사회 문제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까지 아울러 보여주었으니, 이를 '사회파 미스터리'라고 부른다. 사회파의 비조인 마쓰모토 세이초의 명성은 오늘날까지 굳건하며, 미스터리를 애들이나 읽는 것이 아닌 어른들도 진지하게 접할 수 있는 읽을거리로 지위 상승시킨 공은 백번 칭찬해도 부족함이 없다할 것이다. <점과 선>은 점과 점이 멀리 떨어져 있어도, 그것을 보는 사람들이 머릿속에서 두 점을 멋대로 이어 선을 만들어버리는 선입견을 이용해 멋진 트릭을 선보인다. 또한 크로프츠 식의 열차 시간표 알리바이 깨기 트릭도 충실하게 일본 풍으로 이식하는데 성공했다. 50년대에 나온 고전이지만 지금 봐도 얼마든지 재미있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