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크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2
기리노 나쓰오 지음, 권일영 옮김 / 비채 / 2007년 6월
평점 :
절판


 
<다크>는 2002년작으로 베테랑 작가 기리노 나쓰오의 유일한 시리즈 캐릭터인 무라노 미로가 등장하는 현재까지 마지막 작품입니다. 초창기에는 돈을 벌기 위해 만화 대본이나 로맨스 소설을 썼다고 알려진 기리노 나쓰오가 진정한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고 평가받는 무라노 미로 시리즈 제1작 <얼굴에 흩날리는 비>는 1993년에 씌어졌고, 미스터리 신인상 격인 에도가와 란포 상을 받으며 주목할 만한 작가 탄생을 알렸습니다. 미스터리 신인상을 받은 데서 알 수 있듯이<얼굴에 흩날리는 비>는 여주인공 미로가 사립탐정이 된 계기와 처음 맡게 된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을 하드보일드 미스터리 스타일로 그리고 있습니다.



<다크>를 읽으며 약간 아쉬웠던 것은 시리즈 순서대로 출간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절판되어 거의 구할 수 없는 <얼굴에 흩날리는 비>를 운 좋게 구해 읽어본 저 같은 소수의 사람들은 미로를 비롯한 등장인물의 전사나 시리즈 전체를 관통하는 분위기 등에 어느 정도 익숙할 수 있겠지만, <다크>로 미로 시리즈를 처음 접해본 분들은 모든 것이 낯설게 느껴질지도 모릅니다. 더구나 <얼굴에 흩날리는 비>는 미로가 사건 관련자를 하나씩 만나 사건의 단서를 그러모으며 조금씩 진실에 접근해가다, 결말에 '네가 범인이다!'를 외치는 비교적 정통적인 하드보일드였기 때문에, <다크>에서 <얼굴에 흩날리는 비>의 범인의 이름이 초반부터 언급되는 것은 안타깝게 느껴집니다. <얼굴에 흩날리는 비>도 곧 새번역으로 재출간될 예정이기에 <다크>를 먼저 읽고 거슬러간 독자들이 흥미를 잃을 여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역시 '시리즈는 1권부터'라는 표어를 만들고 싶은 순간입니다(물론 <다크>만 따로 떼서 읽어도 이해에 지장이 가는 부분은 전혀 없습니다).



레이먼드 챈들러나 로스 맥도널드의 하드보일드에서 탐정 역을 맡은 필립 말로우나 루 아처의 이름을 도저히 뗄 수 없듯이 기리노 나쓰오의 하드보일드도 여탐정 무라노 미로의 개성 없이는 성립되지 않습니다. 간략하게 미로가 탐정이 된 계기를 설명해보자면, <얼굴에 흩날리는 비>에서 남편이 자살하고 비탄에 젖은 미로에게 불청객이 찾아옵니다. 그 남자 나루세는 미로의 소꿉친구 요코의 애인이었는데 맡긴 돈을 요코가 가지고 잠적해버렸기 때문에 그녀를 찾으려 하고 있습니다. 알고 보니 돈은 야쿠자의 것이었고, 미로와 요코 둘이 짜고 돈을 감춘 것이 아닌가 의심하는 야쿠자는 미로에게 요코와 돈을 찾아내라고 요구합니다. 미로는 야쿠자 '고쿠토카이'의 전 조사관이지만 현재 은퇴한 의붓아버지 무라젠(무라노 젠조)의 도움을 받아 나루세와 함께 요코의 삶을 파고듭니다. 요코는 프리랜서 작가로 사라지기 전 독일에서 '신 나치'의 실체를 취재하는 글을 남겼습니다. 미로는 살기 위해 아버지의 뒤를 이어 탐정이 될 결심을 하며 요코와 관계된 곳곳을 다니며 정보를 얻는데, 역시나 기리노 나쓰오의 작품답게 변태적인 섹스 쇼 현장부터 시체 해부 동영상에 탐닉하는 예술가까지 음습합니다.



무사히 첫 요코 사건을 해결한 미로의 모습은 이후 <천사에게 버림받은 밤>, 단편집 <로즈 가든>에서 더 볼 수 있고, 일종의 외전 격인 <물의 잠, 재의 꿈>에서는 60년대를 배경으로 미로의 아버지 무라젠이 잡지사 기자에서 야쿠자 조사관이 되는 과정이 그려진다고 합니다(미로 시리즈는 제목도 참 멋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어지는 것이 <다크>입니다. 위에서 <얼굴에 흩날리는 비>가 정통적인 하드보일드풍이라는 말을 썼는데, 사실 이 작품의 해결편은 거의 본격 미스터리를 방불케 합니다. 의외의 범인이 등장하는 반전도 있고, 미로의 논리적인 추리도 있지요. 그런데 작가 기리노 나쓰오는 오랜 세월을 거쳐 양식화되어 규칙대로 따를 수밖에 없는 미스터리의 구조에서 벗어나고 싶었나 봅니다. 책 표지에 실린 작가의 말을 보면 "새로운 사건이 일어나 탐정 미로가 해결하고 성장한다는 탐정 소설의 패턴에서 벗어나 무라노 미로라는 한 사람의 여성이 시대와 호흡하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위의 말처럼 <다크>는 기리노 나쓰오 작품 세계에서 분수령이 될 듯한 작품입니다. 향후의 걸작들을 예감케 하는 어두운 분위기와 인물들, 음울한 심리 묘사, 인간 관계에 대한 회의와 날카로운 통찰력까지 기리노 나쓰오의 트레이드 마크가 모두 들어가 있습니다. 미로는 전작에서 꼭꼭 숨겨두었던 적의와 증오, 분노를 드러내며 초반부에 아버지 무라젠을 사실상 살해합니다. 작품은 무라젠이 죽기 전까지 애인이었던 시각장애인 히사에와 무라젠과 함께 일했던 고쿠토카이의 전 간부이자 절친한 친구 데이, 미로에게 빌려준 돈을 받으려 하는 동성애자 도모베가 미로를 추적하고, 그녀가 도피하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끈질긴 손길을 피해 미로는 박미애라는 가명으로 한국의 부산과 서울에서 잠적하기도 합니다. 미로는 한국에서 서진호라는 남자와 위험한 사랑에 빠지는데 서진호의 기억을 통해 80년대 광주사태가 그려져 우리 입장에서는 한층 더 흥미롭게 읽을 수 있습니다.


기리노 나쓰오는 작풍을 바꾸기 위해 자신의 전작들까지 서슴치 않고 배신합니다. 이로써 기존 하드보일드에 양념처럼 등장하는 낭만적인 인물들은 모두 사라졌습니다. 미로는 냉소적이지만 이토록 위악적인 여자는 아니었고, 품위있던 무라젠도 어딘지 나약해졌습니다. 육욕에 불타는 히사에는 거의 괴물같이 느껴지며, 미로의 친구였던 도모베는 돈을 위해 배신을 일삼습니다. 아마 전작들을 읽은 분이라면 이들의 변모에 당황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듯 욕망과 악의로 가득차 있는 캐릭터들이 어두운 에너지를 내쏘는 <다크>는 오늘날의 기리노 나쓰오를 가능케 한 실험작이자 눈부신 성공작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줄창 어두운 이야기만 구상하고 쓰는 작가이기에 본인도 어둠에 함몰됐는지, <다크> 이후의 <그로테스크>나 <잔학기> 등의 작품에서는 일체의 희망을 발견할 수 없지만 적어도 <다크>의 결말에서는 미로의 선택을 통해 약간의 희망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미로에게 아직까지 인간성이 남아 있음을 확인하게 하는 결말이지요.


어쩌면 작가는 이 작품을 쓴 2002년 이후의 세상에 더욱 좌절한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최근의 인터뷰에서 "솔직히 이야기해서 앞으로는 더 어둡고 더 살기 힘든 세상에 살 거라고 생각합니다.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사회라고나 할까요?"라고 작가는 말했답니다. <다크>는 서진호와 미로의 희생적인 사랑과 결말에서 보여주는 미로의 인간적인 모습을 통해 어느 정도의 희망을 노래하며, 2002년을 기점으로 더욱 어두워진darkest 세계 이전의 그래도 비교적 좋았던 어느 한 때의 풍경을 그리고 있습니다. 한 번쯤 읽어볼 만한 수작이라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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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ngbong 2007-08-10 0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작품을 읽기전에 확실히 <얼굴에 흩날리는 비>을 읽어 보는데 작품감상에 큰 도움이 될거같아요...전 나루세의 편지내용이 어찌나 궁금하던지... 작가도 이런 독자의 감정을 파악한건지 중간중간 나루세편지를 상기시켜주더군요...단숨에 읽히고 미로의 앞으로의 행로가 진정궁금해지더군요...하루빨리 다음작품이 읽고시프요^^ 작가의 최근 인터뷰내용이 뼈에 사무치더군요..휴~~~~

jedai2000 2007-08-10 1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새디1229님도 정말 대단한 독서가시군요. 거의 안 보신 게 없네요. 저랑 책 보는 취향이나 평가하는 기준도 굉장히 비슷한 것 같구요. <얼굴에 흩날리는 비>를 읽어보시면 물론 좋죠. 근데 <다크>를 먼저 보시면 스포일러될 게 제법 있어 출간 순서가 영 아쉽네요. 기리노 나쓰오의 작품도 몇 편 더 나올 테니 곧 기다림이 충족되겠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