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를 바라는 기도 밀리언셀러 클럽 48
데니스 루헤인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06년 9월
평점 :
절판


"박사님, 그녀가 보고 있습니다."
"누구 말이오?"
목에 걸린 듯한 소리였지만, 그렇다고 작은 소리는 아니었다.
"카렌이요. 전 믿습니다. 제 눈을 보십시오."
박사는 망설이듯 조금 고개를 돌려 흐린 눈으로 내 눈을 보았다.
"카렌이 보고 있습니다. 저는 카렌의 한을 풀어주고 싶습니다."
"딸애를 잘 알지도 못하잖소."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세상에 잘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사립탐정 켄지에게 한 여자 의뢰인이 찾아오면서 사건은 시작된다. 여자의 이름은 카렌 니콜스, 미인인데다 이 타락한 도시의 죄악에 물들지 않은 순수함을 가지고 있다. 켄지는 스토킹으로 고통 받고 있는 그녀의 의뢰를 받아들여, 친구인 부바와 함께 스토커를 묵사발로 만들어놓는다. 간단한 일이었다. 받은 것은 약간의 수고비와 그녀의 눈부신 미소뿐. 그러나 6개월 후, 켄지는 카렌의 이름을 신문에서 발견한다. 높은 빌딩 옥상에서 옷을 모두 벗고 뛰어내려 자살한 그녀. 

 

평범한 호텔 부지배인었던 그녀의 지난 6개월은 파란만장했다. 애인은 교통사고로 식물 인간이 되어 있었고, 그녀는 술과 마약에 취해 직장과 집, 전 재산을 잃고 몸을 팔기도 한다. 무엇이 그녀를 이렇게 나락으로 빠뜨린 것일까? 켄지는 그녀가 자살하기 얼마 전,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했던 일을 떠올린다. 그러나 켄지는 다른 여인과의 가벼운 하룻밤 관계를 위해 그 도움을 외면했었다. 죄책감과 더불어 왠지 부자연스러움을 느낀 켄지는 본격적으로 사건에 뛰어든다. 

 

<미스틱 리버>를 쓴 데니스 루헤인의 작품이다.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이자, 아카데미 주요부분을 수상한 대표작 <미스틱 리버>외에도, 5편의 켄지/제나로 시리즈와 <살인자들의 섬> 등의 작품으로 유명하고, 국내에도 총4권이 발간되어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작가다. 1966년생으로, 스물여덟 살인 1994년에 데뷔해 13년 동안 8권의 책을 펴냈다. 일년에도 여러 권씩 책을 내는 미국의 다른 스릴러 작가들과는 달리 과작이라 할 수 있으며, 플롯이나 문장, 주제 등에 굉장히 공을 들여 매번 '제대로 된' 작품을 써내는 일급 작가라고 할 수 있겠다. 개인적으로는 현재 미국 미스터리 스릴러 계열 작가군 중에서는 가장 신뢰하고 있다.

 

켄지/제나로 시리즈의 제4작 <가라, 아이야, 가라>에서는 유괴 범죄를 다루었다면, 이번 <비를 바라는 기도>는 살인자에게 조금 특이한 설정을 부여한다. 목표 대상의 심리를 이리저리 흔들고, 사랑하는 것들을 남김없이 빼앗아 상대를 벼랑 끝으로 몰아가면 피해자는 결국 자살을 할 수밖에 없다. 이런 범죄는 피해자의 몸이 아닌 마음을 산산히 부수는 것이기에 대단히 극악하지만, 결국 마음속 일이다보니 증거는 남지 않는다. 참으로 기발한 방법이라 감탄하고 말았다. 이 작품의 살인자는 범죄소설 역사상 가장 얄미운 인간 중 하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비를 바라는 기도>에서 재미를 느낄 부분은 대단히 많아 누가 봐도 만족할 것이다. 전편에서 안타깝게 헤어진 켄지와 제나로의 공적, 사적 파트너 관계가 다시 회복될지도 궁금하고, <좋은 친구들>을 보는 듯한 마피아 세계의 스케치도 재미있다. 켄지의 손을 떼게 만들려는 살인자는 마피아를 사주해 그를 협박하는데, 마피아 보스는 켄지를 자신의 집에서 벌어지는 가든 파티에 초대한다. 정원의 그릴에서 스테이크가 익어가는 가운데 마피아의 가족들은 웃고 즐기느라 정신이 없다. 보스는 켄지를 조용한 곳으로 데리고 가 느물느물 협박한다.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서 죽고 죽이는 살벌한 대화가 오가는 마피아 세계의 풍경을 그럴싸하게 보여주는 장면이다. 데니스 루헤인은 영화를 꽤 좋아하는 듯 작품 속에 영화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아마 갱스터 영화도 꽤 보는 것 같다.

    

가장 인상 깊은 등장인물은 아무래도 켄지, 제나로의 친구인 '부바' 로고프스키일 듯.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인간야수인 그는 친구들만은 꽤 아껴, 위험한 처지에 놓인 친구들을 위해 M16 소총을 들고 돌진하는 호쾌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이 작품의 살인마가 비열하고 야비한 살해 방법을 쓰는 괴물인데 비해, 부바는 그보다 더 많은 살인을 저지른 악인이지만 오히려 단순하고 우직한 모습에 호감이 가 묘하게 매력적이다. 켄지/제나로의 현재까지 마지막 작품인 <비를 바라는 기도>의 출간 연도가 1999년이라 시리즈가 재개될지는 모르겠지만, 기묘한 매력을 가지고 있는 부바의 모습을 보지 못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렇지만 역시 <비를 바라는 기도>의 하이라이트는 살인자의 수법에 맞서 똑같이 응수하는 켄지의 복수일 것이다. 켄지는 살인자의 정체를 파악한 후, 한발한발 접근해 그가 사랑하는 것들을 파괴하고, 살인자의 심리를 엉망으로 뒤흔든다. 그야말로 눈에는 눈, 이에는 이다. 이 장면의 긴장감과 통쾌함은 숫제 기가 막힌다. 전편 <가라, 아이야, 가라> 만큼은 암울하지 않은, 재미있고 잘 씌어진 스릴러 소설이다. 데니스 루헤인은 절대 흔들리지 않는 소설계의 보증수표다. 누구도 환불할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잘못했소."
"뭘 말입니까?"
"카렌."
"어떤 잘못이요?"
"그앤 나약한 것이 아니라 착한 애였소."
"예. 그랬습니다."
"그앤 착해서 죽은 거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느님은 이런 식으로 악을 징벌하는 것 같소."
"무슨 뜻입니까, 박사님?"
그는 다시 고개를 젖힌 다음 두 눈을 감았다.
"살아 있게 하는 것으로 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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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06-10-25 14: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재미있게 봤습니다...데니스 루헤인이라는 작가는 다방면에 소질이 있는 듯^^
전 부바와 여검사의 러브모드(이게 스포일러는 아니겠죠?^^;;)가 젤로 웃겼죠..ㅋ

jedai2000 2006-10-25 2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셨군요. 루헤인 책은 뭐 다 재미있죠. ^^ 저도 부바의 러브모드에 너무 웃었습니다. 부바가 거의 짐승 같은 섹시함이 있나봐요. 웬만한 여자는 한 번 보면 다 뿅가죠..ㅋㅋ
 
마인드 헌터 모중석 스릴러 클럽 5
존 더글러스.마크 올셰이커 지음, 이종인 옮김 / 비채 / 2006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영화 <살인의 추억>에 보면 이런 대사가 나온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미국은 땅덩어리가 워낙 넓어 FBI도 만들고, 비행기도 타면서 수사를 하지만, 한국은 몇 발자국만 걸으면 끝에서 끝이라 두 발로 신나게 걸어서 범인을 잡아야 한다고. 과연 그 말대로 미국 땅은 넓고도 넓다. 게다가 인구도 어제 신문에서 보니 3억명을 돌파해 세계 3위의 인구 대국이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살다보니 필연적으로 잔인무도하고 흉악한 연쇄살인범도 많이 나올 수밖에 없는 모양이다. 더구나 총기 소유까지 자유로운 나라니 더 말해 무엇하랴.

 

<마인드헌터>는 잔학한 연쇄살인범들과 대결한 FBI수사관 존 더글러스의 실제 수사 기록을 담아낸 논픽션이다. 그는 최근에 소설이나 영화 등에서 자주 등장해 일약 유명해진 프로파일링 수사 기법을 고안한 인물이기도 하다. FBI 수사지원부의 부서장으로 재직하며 가장 많은 연쇄살인범을 체포한 기록을 가지고 있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수사관 중 한 명으로 보면 틀림이 없을 것이다.

 

논픽션이라니 딱딱하고 지루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는데 오산이었다. 이 책에는 실제 사건의 현장에서 뛰었던 자만이 알려줄 수 있는 범죄 현장의 생생함과 잡히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범인을 옭아매는 두뇌싸움, 추격전의 스릴이 흥미롭게 녹아들어가 있다. 특히 범죄학과 심리학, 교육학 등에 조예가 깊은 작가가 연쇄살인범과 인터뷰한 것을 토대로 정리한 행동과학이라는 연구의 면면이 알기 쉽게 정리되어 있는 점을 높이 사고 싶다. 당시 행동과학부에는 나중에 <살인자들과의 인터뷰>라는 책을 펴내기도 한 밥 레슬러를 비롯한 살아있는 수사관의 전설들이 포진해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행동과학과 범죄심리학 등에 대단한 흥미를 느꼈고, 관련 도서들을 좀더 읽어볼 계획이다.

 

이 책은 존 더글러스의 어린 시절부터 현재까지의 일화를 자서전 형식으로 풀어낸다. 수의사가 되고 싶었던 소년이 인생의 굴곡을 거쳐 FBI에 들어가게 된다. 당시 여대생만 골라죽여 세상을 떠들석하게 했던 에드 캠퍼 사건을 보며 그는 생각한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 어떤 이유로 이렇게 끔찍한 일을 저지르는 것일까? 그는 교도소를 출입하며 연쇄살인범계의 대스타들, 찰리 맨슨, '샘의 아들' 데이비드 버코위츠 등을 인터뷰하며 범죄자의 본성에 대해 깊이 깨닫게 된다. 직접 보고 들은 것을 토대로 그는 연쇄살인범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 그들의 심리를 읽고, 범죄 현장을 마음의 눈으로 재구성하는 프로파일링 기법을 고안한다.

 

존 더글러스와 그의 유능한 동료, 부하들은 이 프로파일링 기법으로 수많은 미궁에 빠진 연쇄살인 사건을 해결한다. 그가 맡았던 사건은 그야말로 별 게 다 있었는데, 숲 속으로 창녀를 유인해 벌거벗긴 다음 도망가는 여인들을 사냥한 자부터, 열 명의 흑인 어린이만 골라 죽인 자를 비롯해 끔찍하고 기상천외하다. 만약 존 더글러스가 없었다면 분명 더 많은 피해자가 발생했을 것이기에 그는 충분히 이런 회고록을 쓸 자격이 있다. 그는 누구나 선뜻 말하기 주저하는 사형 제도의 지지자라는 것을 숨김없이 밝힌다. 아닌 게 아니라, 여자의 배를 칼로 갈라 그 안에 사정하는 흉악범들을 두루 보아온 그에게 살인자의 인권 따위를 논하는 것이 우습게도 보인다.

 

나는 미국 사회를 떨게 만들었던 강력 범죄들이 거의 모두 나오는 이 책을 대단히 재미있게(?) 보았다. 때로는 오싹했으고, 가끔은 감동에 눈시울이 붉어지기도 했으며(한 사건의 희생자인 소녀가 보낸 마지막 편지가 특히 그렇다), 의분으로 주먹을 불끈 쥐기도 했다. 이 책에 나오는 대다수의 연쇄살인은 개인적인 원한에 의한 것이 아니다. 정신이 병든 자가 분노와 열등감을 해소하기 위해 닥치는 대로 '엉뚱한 자리에 엉뚱한 시간에 있었던 사람들'을 죽이는 것이다. 이런 무차별 범죄는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는 지금 현재 분명히 존재하는 위협이다. 최근 한국사회에서도 이러한 류의 범죄가 연일 신문지상을 장식하고 있다. 한국의 존 더글러스가 등장함이 필요한 시점이다. 수사 당국은 제2의 존 더글러스 양성을 위해 더욱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25년 동안 수천 건의 사건에 시달린 존 더글러스는 과로와 스트레스(그가 제시한 프로파일링이 빗나가면 엉뚱한 결과가 도출되고 결과적으로 다른 피해자가 생긴다)로 쓰러져 거의 죽을 뻔하기도 하며, 가정을 돌보지 못해 이혼 당하기도 했다. 이렇게까지 개인적인 희생을 치루면서도 그는 연쇄살인범 수사를 포기하지 못한다. 개인적인 공명심이나 직업적인 성공만을 위해서라면 결코 그럴 수 없었을 것이다. 악을 원수처럼 미워하고, 세상에서 몰아내기 위한 사명감이 있는 자만이 이 모든 걸 해낼 수 있다. 존 더글러스의 인생에 박수를 보낸다.

 

 

BONUS1: 이 책에 따르면 99.9%의 연쇄살인범은 남자라고 한다. 여자는 분노와 열등감 등의 정신병질적 요인을 안으로 삭여 살해에까지 이르지는 않지만, 남자는 테스토스테론의 영향과 선천적인 기질의 차이로 살해를 저지른다고 한다.

 

BONUS2: 강간범들에 대한 거세형벌 논의가 한창이다. 하지만 연쇄강간범들은 성욕이 아니라 자기 안의 분노를 폭발시키기 위해 강간을 저지르기 때문에, 거세를 해도 같은 범죄를 저지를 것이라고 한다.

 

BONUS3: 거의 모든 연쇄살인범들이 어려서 학대를 당했거나 가정이 매우 복잡했다고 한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25년 동안 흉악범들을 연구, 조사하면서 좋은 성장 환경, 우애 깊고 서로 도와주는 가정,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집안 분위기에서 자란 사람이 흉악범이 된 경우는 단 한 건도 없었다고 한다. 앞으로 가정을 꾸릴 모든 사람들은 이 말을 명심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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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솔로 2006-10-19 0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오죽했으면 대학교 이 책을 도서관에서 읽고 나중에 군병원 도서관에 이 책이 있는 걸 보고 그걸 집어왔겠습니까(라고 한들 절도는 절도군요-_-). 이 재밌다(라고 하면 좀 그렇습니다만) 책이 다시 나와서 정말 다행입니다ㅎ

jedai2000 2006-10-19 1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재미있게(?)보셔서 들고 오셨(다고 하지만 절도 맞습니다)군요. ^^ 저는 아주 만족했습니다. 이런 논픽션을 더 찾아보고 싶다는 생각도 했구요. 저도 못 볼 뻔했던 책을 이렇게 읽을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 ^^
 
셜록 홈즈 전집 5 (양장) - 셜록 홈즈의 모험 셜록 홈즈 시리즈 5
아서 코난 도일 지음, 백영미 옮김, 시드니 파젯 그림 / 황금가지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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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는데, 실상 판매 부수를 따져보면 오히려 여름이나 겨울보다 적다고 하네요. 그도 그럴 것이 파랗고 높다란 가을 하늘을 보면 소풍이나 등산에 나서고 싶지 집에서 가만히 책만 읽기는 힘들지 않겠어요? 괜히 싱숭생숭해지기도 하고요. 그런 이유로 일년에 200권 가까운 책을 읽는 저도 가을에는 활자가 눈에 잘 안 들어옵니다. 게다가 취미도 독서요, 직업적으로도 책만 읽어야 하는 저 같은 사람에게는 어느 순간 슬럼프가 찾아오기도 합니다. 집에서도 회사에서도 책에 치여 사니 어쩔 수 없이 물리는 거지요. 이럴 때 제가 늘 꺼내드는 책은 단 하나 셜록 홈즈입니다. 책이라면 지긋지긋한 순간에 셜록 홈즈를 펼쳐들고 단편 하나씩 곶감 빼어먹듯 맛을 보다보면 어느새 잊고 있던 독서의 재미를 다시 느끼게 됩니다.

 

이렇듯 수많은 사람들에게 독서의 참재미를 알려준 셜록 홈즈는 칭찬 받아 마땅합니다. 아마 이런 사람도 꽤 될걸요. 어렸을 때 셜록 홈즈를 읽고 나서 책이 얼마나 재미있나 하는 걸 깨달았다는 사람들이요. 우선 제가 그랬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저는 한 권도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친한 친구가 단편 전부를 소장하고 있었어요. 저는 거의 매일같이 그 집에 놀러가 한 편 한 편 야금야금 읽어내려갔지요. 처음에는 친구 어머님이 차비 하라며 얼마간 돈도 주셨지만 그것도 하루이틀이지 매일이 되자 노골적으로 싫은 기색을 내비쳤지요. 그래도 굴하지 않고 방과 후면 친구를 졸라 졸래졸래 따라가곤 했었습니다. 저에게 어린 시절 셜록 홈즈 이상 가는 친구는 없었답니다.

 

책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사랑하는 셜록 홈즈를 창조한 건 영국의 아서 코난 도일 경입니다. 원래 의사였는데, 손님이 너무 없자 생활고 해결과 아내의 치료비를 마련하기 위해 셜록 홈즈 시리즈 제1탄 <주홍색 연구>를 썼다고 합니다. 그러나 셜록 홈즈가 확고히 독자들의 마음에 자리를 굳힌 건 다음 편인 <4인의 서명> 때부터라고 합니다. 그 뒤로 신사를 위한 잡지 '스트랜드 매거진'에 홈즈가 활약하는 단편들을 매호 연재했고, 그 순간부터 셜록 홈즈의 전설은 시작됩니다. 작가는 자신보다 훨씬 유명한 셜록 홈즈로 인해 폭발적인 인기와 남부럽지 않은 명예를 얻었지요. 그러다가 다른 작품을 써보고 싶은 열망에 홈즈를 숙적 모리아티 교수와 동반자살 시키기도 합니다만, 독자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에 힘입어 다시 부활시키기도 했지요. 요즘 인터넷 등으로 주인공의 운명을 바꿔달라, 누구와 누구를 맺어달라고 성화를 부리는 극성맞은 일부 드라마 팬들의 원조가 여기 있는 셈입니다. 

 

셜록 홈즈는 에드거 앨런 포 이후 명맥이 거의 끊기다시피 한 탐정소설 장르를 확실히 부활시켰고, 향후 100년 동안 탐정소설, 추리소설이 융성하게 만든 기초를 충실히 다졌습니다. 도대체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탐정의 대명사 셜록 홈즈에게는 대관절 어떤 매력이 있기에 이런 영광을 얻을 수 있었을까요? 셜록 홈즈는 기묘할 정도로 다양한 얼굴을 가진 사람입니다. 분석력과 논리력, 추리력 등 탐정이 가져야 할 기초적인 능력은 두말할 필요도 없고, 화학 실험과 지질학 등 근대에 태동한 과학에 대한 지식도 풍부합니다. 그러나 그외에도 셜록 홈즈가 인기 있는 요인은 영국 전통의 기사다운 품위가 있는 사람이라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여성과 약자에 대한 배려, 육체적인 완력 등이 그것이지요. 그는 곤경에 처해 있는 약자를 그냥 보아넘기지 않으며, 자신의 시간과 정력을 모두 투자해 도움을 베풉니다. 단편집 <셜록 홈즈의 모험>에 수록된 '너도밤나무집' 사건에서 홈즈는 위험해보이는 집에 가정교사로 들어간 의뢰인의 소식이 궁금해 전전긍긍합니다. 혹시 무슨 일이 생기지는 않았을까, 초조해하는 것입니다. 홈즈는 알고보면 이렇게 다정다감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홈즈는 사건을 해결한 뒤 범인을 무작정 경찰에 넘기지 않고, 그 나름의 합리적인 방식으로 끝을 맺습니다. 예컨대 범인도 충분히 고통 받았다 싶으면 '그 사람도 나름 고통을 받았으니까 이쯤에서 잊어주지'하는 식입니다. 남성적 매력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얼룩 띠의 비밀'이라는 작품에서는 홈즈의 개입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거한이 쇠부지깽이를 두 손으로 굽히는 경고를 하고 사라집니다. 홈즈는 그가 사라지자 조용히 굽혀진 부지깽이를 도로 펴놓지요. 멋지지 않습니까? 이런 다채로운 모습들은 홈즈의 인기를 나누고자 탄생한 무수한 논리기계들과 홈즈를 결정적으로 다른 지점에 위치시켜 둔 홈즈만의 매력이랍니다. 참고로 홈즈는 가장 많이 영화화된 인물입니다. 아마 200번이 넘을 겁니다. 단순히 추리하고 논리하는 기계라면 이런 인기를 얻기란 불가능할겁니다.

 

셜록 홈즈 시리즈는 장편이 4권, 단편집이 5권입니다. 개인적으로 꼽는 장편은 <공포의 계곡>, 단편은 '얼룩 띠의 비밀'입니다. 보통 평자들이 우수하다고 꼽는 단편집은 <셜록 홈즈의 모험>인 것 같더군요. 이 단편집에는 셜록 홈즈 모험담의 백미인 '얼룩 띠의 비밀' '입술 삐뚤어진 사나이' '빨간 머리 연맹' 등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각각의 이야기들은 고딕적인 으스스함, 탁월한 논리성, 사건의 기묘함, 홈즈의 매력 등이 잘 배합되어 잊을 수 없는 고전의 깊고 풍부한 맛을 제공합니다. 독서의 가장 원초적인 매력, 즉 재미가 있는 소설이라는 거지요.

 

모쪼록 어렸을 때 읽고 치워뒀던 셜록 홈즈 이야기를 다시 펼쳐보기 바랍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빠져보세요. 시간이 아무리 지났어도 여전히 그는 마술 같은 능력으로 당신을 한 번 쓱 훑어보기만 해도 어디서 왔는지, 어떤 일을 하는지, 어떤 성격인지를 맞출 것입니다. 그거야말로 셜록 홈즈의 진짜 장기죠. 비록 지금 기준으로 사건과 트릭이 다소 단순한 면이 있을테고, 과학적으로 말이 안 되는 부분도 많겠지만 그 점이 100년 넘게 지속된 셜록 홈즈의 인기를 훼손할 정도는 아닙니다. 당신이 책장을 펼치는 곳이 파랗고 높다란 가을 하늘 아래 벤치이든, 불가의 뜻뜻한 벽난로가든, 이불을 뒤집어쓴 침대이든 어디든 좋습니다. 책장을 펼치자마자 당신은 짙은 안개가 낀 베이커 가 221B로 안내될 것입니다. 가스등과 이륜마차, 증기기관차, 프록코트, 드레스는 소품으로 제공됩니다. 오늘 당신은 그곳에서 세계에서 제일 유명한 탐정 셜록 홈즈를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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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테스크
기리노 나쓰오 지음, 윤성원 옮김 / 문학사상사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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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일본 소설이 워낙에 많은 사랑을 받고 있어 미야베 미유키나 오쿠다 히데오, 츠지 히토나리, 히기시노 게이고 등의 작가 이름이 그다지 낯설게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 무라카미 류 등만이 활개를 치던 몇 년 전과 비교해보면 격세지감이 들 정도이다. 일본 소설이 이렇게 유독 우리나라에서 인기를 끄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큰 것은 아무래도 두 나라의 사회상이 비슷하기 때문일 것이다. 촘촘이 뜯어보면 다른 점이 더 많겠지만, 그래도 가까운 만큼 서로에게 많은 영향을 주고 받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물론 일본 작가들에게서 국내 작가들이 보여주지 못하는 재미와 감동, 리얼리티 등을 발견할 수 있어서이기도 할 것이다. 솔직히 사회나 개인의 문제에 있어 비슷한 고민을 두 나라의 소설이 안고 있다고 봤을 때, 더 재미있는 쪽에 손이 가는 것은 당연하지 않을까. 그런 이유로 앞으로도 당분간은 일본 소설의 전성기가 더 지속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우리나라 작가들의 분발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이렇게 우수한 일본 소설가들(물론 시시껄렁한 작가들도 무척 많다)의 공습 편대가 이미 서울 하늘을 새까맣게 뒤덮고 있는 상황에서 기리노 나쓰오라는 작가는 편대장의 자리에 조그만 손색도 없는 특출난 작가이다. 1951년 생으로 원래는 아동문학, 연애문학, 르포작가의 길을 걸었다. 하지만 지금의 성취로 봤을 때 초창기에는 먹고 살기 위해 되도록 붓을 가리지 않고 쓰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가 결정적으로 유명해진 계기는 '기리노 나쓰오 표' 미스터리 소설이었기 때문이다. 미스터리 쪽 데뷔작인 <얼굴에 흩날리는 비>로 여성 사립탐정 무라노 미로 시리즈를 시작한 그녀는 여성 하드보일드 미스터리의 선구자격인 존재가 되었다. 동 작품으로 그해 데뷔한 가장 뛰어난 미스터리 소설가에게 수여하는 신인상 '에도가와 란포상'을 탄 그녀는 몇 편의 미로 시리즈 외에도 4명의 주부가 연쇄 살인과 시체 해체와 친밀해져가는 과정을 드라이하게 그린 <OUT>으로 일본추리작가협회상을 받는다. 이 작품은 미국으로 영역되어 절찬을 받고, 미국추리작가협회 최우수상인 '에드거 상'의 최종 후보에도 올랐다. 1999년에는 일본 대중문학의 최고 권위 나오키 상을, 실종된 아이를 찾아가는 과정을 인간 삶의 본질적인 여정과 빗댄 <부드러운 뺨>으로 타내는 쾌거를 거두기도 했다. 그외에도 장편만 20편이 넘고 거의 전부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요즘엔 굳이 자신을 미스터리 작가로만 한정하지 말아달라고 주문하고 있는데, 대중 문학과 순 문학을 모두 아울러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대단한 실력의 작가로 보면 틀림이 없을 것이다.

 

기리노 나쓰오의 작품 세계는 한 마디로 날카롭게 베고, 집요하게 후벼 판다가 아닐까 싶다. 거대하고 육중한 현대 사회를 살아가면서 누구나 마음 속에 가지고 있는 어두운 부분을 현미경으로 세밀하게 관찰하듯 드러내놓고, 그 곪아터져 냄새나는 환부를 예리한 메스로 베고, 뾰족한 집게로 누런 고름을 긁어내어 우리 눈 앞에 펼쳐놓는다. 자, 보세요. 끔찍하지만 이것이 우리랍니다. 악의로 가득찬 우리의 내면이랍니다. 기리노 나쓰오는 이렇게 말하며 왠지 웃고 있을 것 같다. 지독하고 불쾌한 경험이 되겠지만 정말 우리가 갖고 있는 모습이기에 부정할 수도 없고 외면할 수도 없다. 이렇듯 애써 감춰둔 진실에 결국 눈을 돌리게 만드는 기리노 나쓰오의 역량에 우리는 그렇게 고통스러워하면서도 그녀의 작품을 잡고, 허겁지겁 읽고, 탄복하고 마는 것이다.        

 

<그로테스크>에서 기리노 나쓰오는 실화를 소재로 예의 그 메스를 다시 한 번 휘두른다.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겠지만, 전 일본을 떠들석하게 만든 '동경전력 여사원 매춘부 살인 사건'이란다. 대기업의 잘 나가는 커리어 우먼이 밤에는 푼돈 몇 푼에 상대를 가리지 않고 매춘을 저지른다(정말로 돈은 주는 만큼 받았다 한다). 그 비밀로 가득찬 삶에 호기심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러나 기리노 나쓰오는 거의 전 매스컴이 열광하다시피하는 보도 행태에 자못 의구심을 표한다. '낮에는 요조숙녀, 밤에는 창녀'라는 남성적인 가치관이 저변에 깔려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말이다. 작가는 말한다. 어쩌면 이 세상 남성들의 이런 류의 열광이 지금껏 그녀를 괴롭혀온 것은 아닐까, 그래서 여자인 내가 직접 이 사건에 대해 써보기로 했다고. 물론 <그로테스크>는 충격적인 실화를 그대로 옮기는 논픽션은 아니다. 작가의 상상력과 세계관이 그대로 투영된 온전한 기리노 나쓰오만의 소설이다. 그런 이유로 작가는 괴물 같은 아름다움을 갖고 태어난 '유리코'와 그녀와 비교되어 늘 고통 받는 추녀인 언니 '나', 나의 동창생이자 유리코를 한 때 숭배했던 주인공 '가즈에', 당대의 엘리트였지만 결국 몰락한 인생을 사는 역시 나의 동창생 '미쓰루'라는 인물들을 창조해 소설이라는 실험관 안에 가두고 냉정하게 그 관찰 일지를 적는다. 작가의 말을 잠시 들여다보면 그 점이 더욱 분명해질 것이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쓰는 것만으로는 주인공 가즈에의 모습이 입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을 것 같아서, 다각도의 시점에서 중층적으로 이야기를 풀어갔습니다. 그리고 '매춘 일기'의 일인칭 시점을 이용해 주인공 가즈에의 내면을 나름대로 진지하게 생각해보았습니다. 요컨대 못생긴 언니인 '나'가 이야기의 주축이 되어 관찰자적-다분히 악의적인-시점에서 가즈에를 묘사하고, '유리코'의 수기를 통해 매춘과 남자들로부터 가치가 평가되는 여자의 입장을 이야기하고, 피의자 장제중의 진술서를 통해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들의 외롭고 고달픈 삶을 전하고, 마지막으로 매춘 일기를 통해 가즈에의 붕괴 과정을 담았습니다. 전체적으로 이 책을 읽어가며 당신 마음 속에 '괴물'의 이미지가 떠오른다면 제 의도가 어느 정도는 전해진 셈입니다."

 

기리노 나쓰오가 그리는 괴물이란 다름 아닌 네 여성 모두일 것이다. 작가는 괴물의 탄생과 성장 과정을 비교적 초기부터 묘사하고 있다. 그것은 네 여성이 모두 만나 관계를 맺는 사립 Q학원에서의 이야기를 통해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인정하는 것처럼 보통 사람과 사람 사이에 계급이 나뉘어짐을 확인하는 첫번째 장소는 바로 학교에서다. 모든 소녀들이 선망하는 Q학원이지만, 이미 처음부터 격차는 벌어져 있다. 부모의 재산과 지위, 혹은 미모로 학생들 사이에서는 이미 보이지 않는 계층이 형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태양과도 같이 빛나는 외모의 소유자인 동생 유리코를 질투하고 증오하는 우툴두툴한 태양의 이면 같은 나는 독버섯 같은 악의를 키워 동생, 친구, Q학원, 세상 모두를 혐오하고 공격한다. 유리코는 아름다웠지만, 그것은 결국 남성의 욕망의 대상에 다름 아니었다. 그 욕망의 무게에 짓눌려서일까, 유리코는 모든 남성의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창녀가 된다. 그녀가 살해된 때는 서른 일곱 살, 이미 미모가 모두 시든 뚱뚱하고 초라한 중년 여성이 된 상태다. 미쓰루는 전교1등을 놓치지 않는 수재였지만, Q학원에서의 이용 가치는 노트 복사가 전부다. 공부해서 1등을 놓치지 않아야만 존재 가치를 증명받게 되는 상황이다. 볼품 없는 외모의 가즈에는 어땠을까. 그녀는 인정할 수 없었다. 학생들 사이에 처음부터 보이지 않는 선이 그어져 있음을. 노력하고 또 노력하면 못 이룰 건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녀는 몰랐다. 결국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라는 걸. 가즈에는 Q학원을 졸업하고 대기업에 취직하지만 또 한 번 남성 위주의 기업 문화 속에서 자신을 잃어가고 결국 자신의 존재를 발견하려는 일념 하에 몸을 판다. 그러니까 괴물을 탄생시킨 것은 Q학원, 혹은 세상 그 자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로테스크>는 전체 600페이지가 아주 빽빽이 들어차 있는 매우 긴 소설이다. 그러나 작가의 말처럼 나의 일인칭 시점과 유리코의 수기, 가즈에의 매춘 일기, 살인자 장제중의 진술서 등으로 서술의 다변화를 꾀하고 있어 굉장히 빨리 읽히며 박력이 있다. 무엇보다 등장인물인 네 여성이 눈에 보이지 않는 계급 갈등과 남성 위주의 가치관, 질투와 악의라는 이상 심리로 인해 점차 붕괴되는 과정이 압도적이며 소름끼친다. 그야말로 '그로테스크'한 작품으로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이다. 특히 가즈에의 매춘 일기는 외모 지상주의의 세태 속에서 소외되고, 남성 위주의 사회 속에서 고립된 현대 직장 여성이 느끼는 증오와 혼란이 처절하게 그려져 있어 깊은 인상을 남기며, 단지 다정함만을 갈구했던 한 여성의 내면의 붕괴 과정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입을 다물게 만든다. 그토록 진짜 나를 찾고 싶었지만 결국 어디서도 발견할 수 없었던 나라는 존재가 파멸되어 가는 과정이 가즈에의 매춘 일기가 품고 있는 비극일 것이다. 개인적으로 아직도 미스터리 소설을 어린아이의 흥밋거리로 치부하는 사람이 있다면 기리노 나쓰오의 소설을 보여주고 싶다. 이것이야말로 도도히 흐르는 현대 문학의 최일선에 위치할 바로 그런 작품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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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6-10-08 18: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확실하게 파내니까 더 좋은거 같아요^^

하이드 2006-10-08 1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사실 알고보면, 여전히 미야베미유키아 히가시노 게이고나 등등등은 우리끼리만 안다면서요? -_-a

jedai2000 2006-10-08 2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만두님...예. 기리노 나쓰오의 작품은 힘이 있죠. 끝까지 파고 드니까요. ^^

하이드님...그쪽 일을 하는 입장에서 봤을 때 히가시노 게이고는 아직 우리끼리만 아는 작가에 가깝겠지만, 미야베 미유키는 상당히 자리를 잡았다고 볼 수 있죠. ^^

oldhand 2006-10-09 1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압도적이고 소름끼치는 작품입니다.. 두 번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jedai2000 2006-10-09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말씀대로 강한 소설이죠. 그런데 전 뭐 소설은 소설이라 금방 잊혀지더라구요. 몇 년 뒤 무심코 잡았다가 또 한 번 소름 쫙 끼치고 말 것 같네여. ^^
 
범인에게 고한다 1
사즈쿠이 슈스케 지음, 윤혜원 옮김 / 마루&마야 / 2006년 9월
평점 :
품절


<범인에게 고한다>는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최악의 범죄인 유괴 사건을 소재로 한 경찰 소설입니다. 바로 직전에 미국 유괴소설의 걸작인 <가라, 아이야, 가라>를 읽어서 필연적으로 비교가 될 수밖에 없는데, <범인에게 고한다>도 꽤 재미있고 괜찮은 작품이더라구요. 그다지 부족한 점이 없는 페이지터너로 비록 2권이라지만 사건이 본 궤도에 올라가는 1권 중반부 쯤에 이르면 정신없이 빨아들이더군요. 

 

마키시마 경시에게 깊은 미련과 끝내 어쩔 수 없는 한을 남긴 유괴 사건은 7년 전에 일어납니다. 다섯 살 짜리 남자 아이를 유괴한 건 '와시'라고 자신의 가명을 밝힌 유괴범. 능수능란한 수법으로 수사진들을 따돌리며 몸값 교환을 이끌어냅니다. 침착하게 현장을 지휘하던 마키시마는 천추의 실수로 눈 앞에서 '와시'를 놓치고 다음 날 아이는 시체로 발견됩니다. 마키시마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는 윗선의 경찰 캐리어(간부)들은 그에게 기자 회견장에서 직격탄을 맞으라고 요구합니다. 당시 마키시마의 딸은 임신 후유증으로 생명이 위태로운 상태. 어제의 실수로 아이를 잃었고, 딸은 죽어가고, 그 기분이 어떨까요? 그러나 미디어는 집요합니다. 마키시마의 실수와 경찰의 무능함을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비열한 미디어의 생리 앞에 그는 마침내 폭발합니다. 마키시마는 회견장을 난장판으로 만드는 최악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결국 마키시마는 시골로 좌천되고, '와시' 사건은 그렇게 잊혀지고 맙니다.

 

7년이 흐른 현재, 언제나 그렇듯 하나가 사라지면 그 자리를 대체하듯 새로운 흉악범이 등장합니다. 이번의 범인은 더욱 끔찍한 남아 연쇄 살인 사건을 벌입니다. 이미 4명의 아이가 죽었습니다. 게다가 '뉴스 나이트 아이즈'라는 방송국에 편지를 보내 새로운 범행을 예고하기도 합니다. 그는 자신을 '배트맨'이라는 이름으로 호칭합니다. '배트맨' 사건에 연인원 4만명이 투입됐지만 여전히 미궁입니다. 그러다 예전에 마키시마를 토사구팽했던 간부가 묘안을 떠올립니다. 이건 작품 속 구절을 그대로 발췌하면 이해하기 편하겠네요.

 

"그래. 네번째 사건에서는 범인이 TV 방송국으로 성명문을 보내와, 새로운 현장을 밝힘과 동시에 한 여자 아나운서를 협박했지. 범인은 자기주장을 내세워, 그 사건을 세간의 화젯거리로 바꾸어놓았어. 이것을 속칭 극장형 범죄라고 하네. 자네에게도 괴로운 기억이 있지?"

마키시마는 아무 대답 없이 턱을 살짝 움직여 다음을 재촉할 뿐이었다.

"여기에 대항을 하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나? 난 생각했어. 그리고 다다른 대답은..."

소네는 검지손가락을 세워 보였다.

"극장형 수사일세."

 

그렇습니다. 극장형 범죄vs극장형 수사가 이 작품의 포인트입니다. 보통 현재 처지가 별 볼 일 없는 사람들이 극장형 범죄를 많이 저지른다죠. 주목받고 싶고, 관심받고 싶고, 또 그만큼 모든 미디어가 집중하는 자신이 대단해 보일테니까요. 마치 자신이 한 사람의 생사여탈권을 가진 신이라도 된 것처럼 우월감을 느끼고 있겠죠. 그런 범인의 심리에 기반한 극장형 수사로 새로운 물꼬를 트는 것입니다. 경찰 관계자가 TV에 나가 범인과 대화를 시도하며 사건을 완전히 전국적인 뜨거운 감자로 만들어버리는 것입니다. 한 편의 쇼를 만드는 거죠. 

 

자, 범인의 심리는 어떨까요? 가뜩이나 주목받고 싶었는데, 그 무대가 만들어졌다! 아무리 냉정한 범인이라도 두근두근 흥분되겠죠. 가슴이 뛸 거고, 계속 무대에서 주인공으로 남고 싶을 것입니다. 이 흥분감과 고양감이 냉정한 범인의 주도면밀함을 흔들어 놓을테고 결국 치명적인 실수로 이어질 것입니다. 극장형 수사가 노리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의 마키시마 경시는 작게는 7년 전의 실패로 인한 명예회복과, 크게는 더이상 희생당하는 아이가 없기를 바라는 정의의 수호자로서 극장형 수사에 임합니다. 온갖 어려움이 그에게 다가오지만 절대 물러서지 않는 그의 모습은 충분히 감동적입니다.

 

작품의 초반부는 경찰 소설에서 흔히 등장하는 커리어와 논커리어의 갈등이나 수사 과정의 불합리성, 경찰 조직 내부의 알력 등을 폭로하고 있는데 꽤 그럴싸해 학사 수준은 됩니다(이 부분의 석사는 요코야마 히데오, 박사는 다카무라 카오루입니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얄팍한 미디어의 본질을 역이용한 극장형 수사가 핵심으로, 미디어에게 당할 대로 당한 마키시마 형사가 결국 미디어를 이용해 복수한다는 설정이 참으로 재미있습니다. 박력도 있고, 감동도 제법인 작품이지만 거의 직역에 가까운 번역이나 책 만듦새의 성의는 약간 눈쌀을 찌푸리게 만드는 수준이네요.

 

거의 파편화되다시피 한 현대의 개인주의 속에서, 마치 톱니바퀴 돌아가듯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경찰 조직의 모습은 그 자체로 우리들의 마음에 일정 부분의 안정감과 편안함을 제공하는 것 같습니다. 경찰 소설이 사랑 받는 건 그래서가 아닐까 싶네요. 왜 독무도 멋있지만, 집단 군무도 그 나름의 웅장한 멋이 있으니까요. 이 책에도 마키시마를 정점으로 한 '경찰 조직'이 배트맨을 포위해가는 과정이 실감나게 그려집니다. 더구나 경찰들은 이러니저러니 해도 좋은 일을 하는 사람들, 현대의 기사나 다름 없습니다. 하기야 경찰소설이 많이 나와 그 책을 보고 경찰을 지망하는 사람도 생기고 그러면 그거야말로 소설이 사회에 줄 수 있는 순기능이겠죠. 앞으로도 진짜 '좋은' 경찰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줄 수 있는 경찰소설이 더 많이 출간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마키시마는 한 번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테이블에 팔꿈치를 붙이고 몸을 내밀었다. 그리고 빨간 램프가 들어온 정면 카메라를 노려보듯이 쳐다봤다.

"배트맨에게 고한다."

의식적으로 살기를 발산시켰다.

"너는 포위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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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ngbong 2007-04-19 2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읽는 내내 하루빨리 범인이 제발 잡히길 바라는 마음을 가지게 만드는 힘을 가진 소설이네요....후반부로 갈수록 정말 재밌고 감동적입니다.

jedai2000 2007-04-20 16: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디1229님...그렇죠. 뒤로 갈수록 정말 박력있고, 재미있죠. 제발 잡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나는 작품이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