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밀리언셀러 클럽 한국편 001 밀리언셀러 클럽 - 한국편 1
김종일 지음 / 황금가지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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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집 화장실 세면대가 물이 잘 안 빠졌던 적이 있었다. 지금이나 그때나 워낙 살림에는 무지한지라 어머니께 이유를 물었더니 막힌 것 같다며 파이프를 열고 청소하라고 하셨다. 파이프를 열었을 때 나는 보고야 말았다. 마치 뱀처럼 구불구불한 수백 개의 긴 머리카락이 공처럼 뭉쳐져 있었던 것을. 때를 비롯한 오래된 이물질들이 온통 머리카락에 붙어 지저분하기 짝이 없는 그것을 보고 나는 구토를 참을 수 없을 정도였다. 범인은 여동생이었는데, 그 아이의 긴 머리카락이 파이프에 걸려 물이 내려가지 않았던 것이다. 여성의 검고 긴 머리가 햇빛에 찬란하게 빛날 때는 아름답다. 하지만 긴 머리가 빠져 바닥에 꾸물꾸물 뒹굴고 있을 때는 어딘지 징그럽고 불쾌한 느낌이 든다. 신의 조화라고 밖에는 설명이 안되는 너무도 완벽하고 아름다운 우리의 몸에서 시선을 다른 방향으로 조금만 돌려보면 이처럼 낯설고 불쾌한 감정이 드는 것이다.

 

김종일 작가의 공포소설 <몸>은 바로 이런 류의 공포를 추구하고 있다. 아예 제목을 <몸>으로 붙인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의 통제를 벗어난 몸이라는 인상적인 소재를 선보이는 것이다. 이 작품은 일종의 연작 단편집이라 할 수 있는데, 영화감독 양정모 씨를 찾아온 정체불명의 남자가 던지고 간 <몸>이라는 원고에 담긴 내용을 액자식으로 소개하고 있다. 물론 양정모 씨는 우리 독자와 같은 입장에 서 있다. 원고를 읽으며 양정모 씨가 느낀 공포를 독자도 똑같이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몸>은 눈, 입, 얼굴, 귀, 머리카락 등으로 나뉘어진 10편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편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은 아니고, 각각 다른 주인공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가장 마지막 단편인 '공포'에서 모든 단편들을 하나로 통합하려는 시도가 있다. 각 단편마다 정글같이 냉엄한 현대사회 속에서 소외당한 등장인물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예컨대 '눈'에서는 한쪽 눈을 잃은 소년이 장애인에 대한 세상의 편견과 멸시에 눈을 뜨게 된다. '입'과 '얼굴'에서는 능력은 있지만 뚱뚱하거나 외모가 못난 여자가 등장해 사회를 이루는 주류세력들과 갈등을 겪는다. 잘못이 주인공들에게 있는 것이 아닌 경우지만 세상의 가혹한 시선은 여지없다. 결국 <몸>의 주인공들은 세상과의 갈등 속에서 점점 정신과 신체의 균형이 무너지며 이른바 파멸을 맞게 된다. 그 과정에서 지옥같이 끔찍한 신체 변형과 훼손이 그로테스크하게 그려지는데, 개인적으로 읽으면서 상당히 큰 충격을 받았다.

 

이런 말을 하면 실례겠지만 작가분의 뇌를 해부해보고 싶을 정도였다.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아오고 어떤 생각을 하며 살길래 이토록 엽기적이고 그로테스크한 상상을 할 수 있는지 말이다. 이 작품에 쓰인 공포 코드는 날카로운 칼에 손가락이 베이듯 직접적이고 예리하며 불쾌하다. 물론 일상에서 전혀 맛볼 수 없는 이런 불쾌감을 즐기기 위해 이 작품을 집어들 독자가 많겠지만. 작품마다 한 인간의 몸이 산산이 조각나고 파괴된다. 어떤 장면들은 구토가 나올 듯 잔인하고 징그럽지만 오체분시를 일삼는 헐리웃 공포영화의 그것처럼 뻔하거나 익숙하지는 않다. 상상을 해보라. 왜소한 체격으로 인한 세상의 냉대를 견디다 못해 유일한 위안거리인 컴퓨터에 심취한 남자를. 그는 날이면 날마다 컴퓨터를 끼고 살다, 마침내 컴퓨터와 한 몸이 되어버린다. 달팽이 눈처럼 튀어나온 눈이 모니터에 들러붙고, 시뻘건 실핏줄들은 모니터와 엉겨붙어 있다. 컴퓨터의 케이블은 남자의 몸에 가닥가닥 꽂혀 있고. '몸'이라는 단편의 내용이다. <몸>의 공포는 이처럼 우리의 오감을 강하게 자극한다. 상상하면 할수록 더 끔찍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10편의 단편이 모두 특색이 있고 각각 다른 내용들을 다루고 있어 쉽게 질리지 않는다. 신인작가로 알고 있는데 데뷔작부터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능력이 남다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한국에서 완전히 비인기 장르인(그래서 참조할 만한 선배들의 걸작이 거의 전무한 상황인) 공포소설 분야에서 이정도 수준의 처녀작을 내놓았다는 것은 특기할 만하다. 그러나 몇몇 문장이나 대사에서는 쉽사리 읽히지 않고 툭툭 걸리는 부분이 있긴 하다. 이런 점은 신인 작가임을 감안해야 할 것 같다. 무엇보다 서술 면에서 반복 기법을 자주 사용하는 것이 눈에 띈다. 이 작품에서 나온 문장은 아니지만,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찬란한 아침햇살이 빛나고, 시원한 바람이 분다. 마주오고 있는 여인의 미소 또한 눈부시다. 출근길, 용진의 마음은 더없이 좋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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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한 아침햇살이 빛나고, 시원한 바람이 분다. 마주오고 있는 여인의 미소 또한 눈부시다. 그러나 출근길, 용진의 마음은 더없이 무겁기만 하다. 어제밤 아내가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식의 반복법이 도처에 사용되는데 반복의 묘랄까, 기법 면에서 돋보이지만 너무 남발되는 것같다. 같은 문장을 너무 자주 보면 누구나 당연히 질리게 마련인 것이다. 처녀작을 내는데 있어 이것저것 많은 것을 보여주고 싶은 건 당연한 심사일 것이다. 그러나 무엇이든 과도하면 안 하느니만 못한 법이다. 앞으로의 작품에서는 화려함 보다는 안정감을, 테크닉보다는 진실성을 더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개인적인 바람을 드리며 부족한 독후감을 끝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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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추리문학 걸작선
한국추리작가협회 지음 / 태동출판사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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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한국 추리소설 읽기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읽어본 작품집입니다. 무려 28편의 단편이 실려 있고 페이지 수는 놀라지 마시라, 905쪽입니다. 이 모든 것을 단돈 세종대왕 두 장이 안되는 가격에 살 수 있다는 것이 이 작품집의 최대 매력이랄까요. 이러니까 완전 책장사네요. 하하. 아무튼 한국추리작가협회에서 가려 뽑은 수작들을 손쉽게 한 번에 만나볼 수 있는 기회임에는 틀림이 없을 것 같네요.책의 외양은 40년째 불멸의 베스트셀러로 남아 있는 <수학의 정석>과 흡사합니다. 그래서 책 표지 하단에 '한국 추리소설의 정석!'이라는 홍보 문구도 삽입했네요. 책 사이즈나 분위기가 정말 홍성대님의 정석과 흡사하지만 유일하게 다른 것은 판매량이겠지요. 흑,

 

선정 기준은 잘 모르겠지만, 시대별로 단편들을 나누었습니다. 추리소설의 봄, 여름, 가을, 겨울 이런 식으로 사계절로 분류하고 각 시기별 대표 작가들의 작품을 수록했습니다. 예컨대 추리소설의 봄에는 김내성님이나 김성종님 같은 원로작가들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고, 겨울에는 요즘도 활발히 활동하시는 황세연님이나 서미애님 등의 작품이 실려 있는 식입니다. 우리나라 추리소설의 역사도 이제 어언 70년이 넘는 듯 합니다. 앞으로도 뛰어난 작가들이 많이 나와 추리소설계를 이끌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추리소설의 봄'에는 오래된 작품이 많은 관계로 대화나 문장에서 낡은 표현도 많이 눈에 띄지만 두 작품 만큼은 아주 탁월합니다. 일제시대 때 추리소설을 썼던 김내성님의 <타원형 거울>이 그중 한편인데, 일본의 추리소설 선구자 에도가와 람포의 추천을 받았을 정도로 뛰어난 단편입니다. 작품의 트릭은 지금 봐도 전혀 낡지 않았을 정도예요. 2층 가옥에서 일어난 밀실 살인 사건을 잡지 현상 공모를 통해 해결한다는 내용인데 맨끝에도 반전이 한 번 더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 추리소설 작가 사상 가장 많은 책을 팔았다는 70~80년대 최고의 베스트셀러 메이커 김성종님의 <어느 창녀의 죽음>이 뛰어납니다. 사회파 미스터리에 가까운 이 작품에서 세상의 온갖 죄악에 괴로워하는 오형사는 말 그대로 어느 창녀의 죽음에 얽힌 비밀을 알게 됩니다. 씁쓸한 마무리가 인상적입니다. 솔직히 김성종님의 작품을 보면 사회파로 비슷한 시기에 일본에서도 인기가 많았던 모리무라 세이이치와 비교해 부족한 점이 뭔지를 모르겠습니다.

 

'추리소설의 여름'은 80년대 작품들이 많은 것 같은데 강형원님의 <여름 추리학교의 살인>을 보고 쓰러졌습니다. 추리작가들이 모여있는 여름 추리학교 숙소에서 작가들 사이에 살인이 벌어진다는 이야기죠. 실제 추리소설 작가들이 다수 등장합니다. 이건 완전 패러디 극장에나 나올 만한 이야기던데요. 이 작품이 실화가 아니길 간절히 바랍니다. 하하.아무튼 여름 쪽에서 제일 인상깊었던 작품은 유우제님의 <빛의 살인>입니다. 시간을 때우려고 극장에 간 한 사나이. 영화 보는 내내 졸던 뚱뚱한 남자가 신경이 쓰이는데 영화가 끝나고 보니 그 남자는 죽어 있습니다. 범인의 정체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내용도 공감가지만 섬세하달까, 매끈하달까 문장도 탁월합니다. 그 외에 이수광님의 <M의 사냥>도 볼만합니다. 80년대를 뒤흔들었던 화성 연쇄살인사건의 범인을 나름 추측하고 있는데 영국의 유명한 모단편과 흡사하다는 점을 빼면 상당히 그럴듯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나온 화성 범인의 정체 때문에 작가분께서 좀 시달렸을 것 같더군요. 특정 직업을 가지신 분이 항의를 많이 했을 것 같아요.

 

'추리소설의 가을'은 90년대 작품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편수도 다섯 편 밖에 안되고 수준도 그저그래서 확실히 한국 추리소설이 쓸쓸한 바람이 부는 가을로 접어들었음을 느끼게 됩니다. 백휴님의 <휠체어 여인>은 혼란스런 전개로 인해 끝나고 나서도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더군요. 이승영 님의 <숲속의 마녀>는 역시 화성 연쇄살인사건의 범인을 등장시켰는데 작품의 수준을 떠나 범인의 그로테스크한 행태가 기억에 남는 작품입니다. 확실히 화성 사건을 추리작가분들이 그냥 지나칠 수 없겠죠. 추리소설을 쓰기에 좋은(?) 소재인가 봅니다. 여기서는 장근양 님의 <도시의 신기루>가 볼만 했는데, 유학까지 다녀온 박사가 생활고에 못 이겨 은행을 터는 이야기입니다. 허황된 결말이 걸리지만 은행을 터는 과정이 상당히 치밀하고 박력있습니다.

 

'추리소설의 겨울'은 90년대 후반부터 현재까지 많은 활동을 하고 계시는 젊은 작가분들의 작품들입니다. 제 나이도 그렇고, 아무래도 이쪽이 읽기 쉬운 문장을 구사하시더라구요. 전체적으로 문장이나 구성이 예전의 작품들에 비해 낫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기서는 크게 떨어지는 작품이 없었어요. 그러나 한 작품만 골라 보라면 이기원님의 <라스트 카니발>. 이 작품은 이번 단편집의 발견입니다. '벼룩시장'같은 생활 정보지를 통해 희생자를 고르고 연쇄 살인을 저지르는 범인의 시점과 그를 추격하는 두 형사의 시점이 교차되는 작품인데 현실감 있는 내용 전개와 착착 감기는 대사도 좋고, 무엇보다 제대로 된 서술 트릭을 보여줍니다. 이기원님의 작품이 상당히 마음에 들었는데 그후 별다른 활약이 없어 안타깝네요. 

 

28편이라는 많은 작품이 실려 있는 관계로 옥석이 섞여 있습니다. 이건 추리소설이야, 낙서야 싶은 것도 있고 꽤 좋은 작품도 많습니다. 그래도 시기별로 한국 추리소설의 대표적인 작가의 단편들을 편하게 읽어볼 수 있음을 높이 평가하고 싶습니다. 이 중에서 한 10편 정도를 추려 일본이나 구미에도 소개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리고 앞으로 이런 단편집이 10개쯤 더 나올 수 있게 작가분들의 많은 노력을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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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6-05-23 2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본 단편들이 너무 많네요.

jedai2000 2006-05-24 0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두님께서야 뭐 워낙 많이 보셨으니까요. ^^ 저는 한 다섯 편쯤 빼고 다 처음 본 작품이라서 재미나게 보았습니다.
 
초콜릿칩 쿠키 살인사건 한나 스웬슨 시리즈 1
조앤 플루크 지음, 박영인 옮김 / 해문출판사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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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콜릿칩 쿠키 살인사건>은 앙증맞은 제목과 진저브레드맨 쿠키를 사용한 귀여운 표지가 먼저 눈길을 끄는 작품입니다. 제목과 표지만 봐도 웬지 편안한 분위기의 작품이라는 예상이 되시죠. 그렇습니다. 이 작품은 영국과 미국 등지에서 추리소설의 소장르 중 많은 인기를 끌고 있는 '코지 미스터리(Cozy Mystery)라는 장르를 차용하고 있습니다. 코지는 사전적 의미로 기분 좋은, 따뜻한, 아늑한,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답니다. 살인과 범죄가 등장하는 추리소설을 기분 좋고 편하게 읽는 것이 가능할 리 없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초콜릿칩 쿠키 살인사건>을 읽으시면 좋겠네요.

 

출판사 설명에 따르면 코지 미스터리란 추리소설에서 흔히 보이는 잔혹한 살해 장면들을 배제하고, 이웃간에 밥숟가락은 몇 개를 놓고 사는지도 다 아는 작은 소도시에서, 밝고 명랑한 주인공이 우연히 사건에 휘말려 좌충우돌하다 사건을 해결해내는 장르를 말한다고 합니다. 코지 미스터리의 기원은 역시 애거서 크리스티를 들 수 있겠습니다. 그녀의 무수한 명작 중 특히 미스 마플이 등장하는 작품들이 코지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네요. 마을 노처녀들과 벽난로가에서 수다를 떨다가 시덥잖은 대화 중에 단서를 잡고 사건을 해결하는 것이 미스 마플의 특기니까요. 또한 크리스티의 라이벌, 도로시 세이어즈의 작품들에서 흔히 보이는 로맨스도 코지 미스터리의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미네소타주의 레이크 에덴이라는 소도시에 살고 있는 한나 스웬슨이 작품의 주인공입니다. 그녀는 '쿠키단지'라는 이름의 쿠키 카페를 운영하고 있는데, 나이는 혼기 꽉 찬 서른이라 엄마한테는 늘 결혼하라는 잔소리를 듣고 삽니다. 두 여동생은 미모가 특출난데 비해 외모적으로는 별로 매력이 없는지라 남자들한테 그다지 인기도 없고요. 물론 본인도 연애에 별로 집착하지 않습니다. 평소와 같이 이른 아침에 출근하던 한나는 자신의 카페에 유제품을 납품하는 배달원이 차안에서 총에 맞아 죽어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한나는 자신의 바로 아래 동생 안드레아의 남편이자 경찰로 일하고 있는 빌의 승진을 위해 살인사건 조사에 발벗고 나섭니다.

 

짧은 내용 소개만으로도 어떤 분위기일지 짐작이 가시겠죠. 한나는 조사에 임할 때 특출한 추리력이나 우수한 두뇌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편하게 볼 수 있는 코지 미스터리의 특성상 고도의 두뇌싸움은 등장해서는 안될 테니까요.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낸 마을 사람들과의 수다를 통해 진실에 접근하는 한나. 예를 들어 살해 현장에서 발견된 스티로폼 컵에 묻은 분홍 립스틱 자국을 조사해 보니 미혼모로 어렵게 살고 있는 화장품 외판원이 그 립스틱을 판매한 것으로 밝혀집니다. 그 외판원은 한나의 막내 동생 친구입니다. 외판원의 집에 가서 화장품 몇 개 팔아주면서 분홍 립스틱을 사간 사람이 누구냐, 살살 구슬러 봅니다. 그렇게 밝혀진 분홍 립스틱을 사간 여자는 마을 고등학교 미식 축구 코치의 아내입니다.

 

이런 식으로 조금씩 단서를 얻고, 용의자를 한정해 범인을 잡는 과정이 알기 쉽게 그려집니다. 머리를 격하게 굴리지 않아도 책만 쭉 따라가다 보면 범인이 밝혀지기 때문에 퍼즐식의 본격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분은 좀 실망할 수도 있습니다. 가볍고, 편안하고, 기분 좋게가 모토인 코지 미스터리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보실 것을 충고드리고 싶네요. 결혼하라고 성화인 엄마의 잔소리나, 한나의 외로운 처지를 상쇄시켜주는 애완 고양이, 드레스나 화장품에 대한 수다, 나중에는 삼각 관계 로맨스까지 등장해 남성보다는 여성의 취향에 맞을 작품으로 보입니다. 작품 중간중간에는 한나가 만드는 쿠키의 레시피까지 따로 소개될 정도랍니다. 실제로 코지 미스터리를 쓰는 대부분의 작가가 여성이고, 독자도 여성이라고 하네요.   

 

치매에 걸린 아버지를 위해 밝은 미래를 포기하고 시골로 내려와 쿠키를 만드는 한나의 조수, 리사나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물건을 싸게 팔면서도 받는 사람의 자존심을 위해 원래 문제가 있는 물건이었다고 선의의 거짓말을 하는 드레스 가게 주인 등 등장하는 인물 모두가 밝고 따뜻한 인물들이라 기분 좋은 독서를 할 수 있지요. 물론 그만큼 현실감은 엷어집니다만. 사실 <초콜릿칩 쿠키 살인사건>에 나오는 따뜻한 사람들보다는, 여자의 피부를 벗겨 옷을 만드는 <양들의 침묵>식의 범죄가 더 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처음 50페이지를 읽을 때까지 수 명의 사람이 잔인하게 죽어 나가는 추리소설에 지치신 분들이라면 가볍게 읽어볼 만한 작품입니다. 가볍고, 기분 좋고, 편안하게 말예요. 그러나 그만큼 가볍고, 단순하고, 무난하다는 약점도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책 자체에 오타도 많고, 편집상의 실수도 많이 보여 약간 실망스럽네요. 표지만 이쁘고 본문에는 오타가 많은 책은 얼굴은 예쁘지만 머리가 빈 미인과 마찬가지라는 지적을 해주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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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6-05-22 2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별 세개는 짜요 ㅠ.ㅠ 이거 시리즈가 나왔음 바란다구요^^;;;

jedai2000 2006-05-22 2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별 세 개면 평균 아닌가 싶습니다. ^^ 저는 평균 정도의 작품이라 평작 별 세 개를 줬구요. 평균작 정도의 느낌인 이 작품에 별이 과도하게 붙으면 만에 하나 제 글을 읽고 이 책을 읽을 독자분들께서 실망하실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뭐야 별 4~5개라더니 뭐 이래, 하면서 말예요. 오히려 별이 3개인데 비해 재미있었어, 이런 식으로 반응을 할걸 기대하고 준 거예요.

시리즈가 나왔으면 좋겠지만, 요즘 해문출판사에서 너무 소식이 없어 솔직히 별 기대는 안되네요. 그래도 꼭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

상복의랑데뷰 2006-05-23 0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개인적으로는 별 세 개가 적당하다고 봅니다. 내용도 무난하지만,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는 것 같지는 않고, 무엇보다도 오탈자의 정도가 너무 심해요. 교열을 안본게 아닐까 하는 느낌까지 들더군요.

jedai2000 2006-05-24 0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나오는데 보통 몇 개월 이상 걸리는 것 같던데, 교정. 교열은 안보고 그 시간에 무엇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별점에 관해서는 요즘 제가 쓰는 리뷰글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가급적이면 별점을 빼려 합니다. 좀 폭력적이라는 생각도 들고, 별점 선정 기준도 애매하고요. 그런데 알라딘은 별점 없이는 등록이 안되니. 쩝. 어쩔 수 없이 나름 최대한 공정하게 주려 노력할 뿐입니다.
 

몇년 전부터 줄기차게 미스터리 소설만 읽은 관계로 필연적으로 책도 꽤 사서 모았는데 벌써 물경 천권에 육박한다. 새로 나오는 책들은 물론이지만 옛날에 나왔다가 절판된 책들도 꽤 모았는데 보통 온,오프라인 헌책방을 많이 이용했다. 대부분의 책들이 낡아빠지고 보기 불편하지만 그래도 소중한 나만의 보물이다. 그러나 이제 헌책방 헌터 생활을 마감하려 한다. 더이상 책을 놓을 공간도 부족하고, 또 절판된 책을 찾아 주말마다 헌책방을 돌아다니며 발품 팔 시간도 이제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평생의 염원인 책 8권을 모으면 잠정적으로 헌책계를 떠나려 한다. 물론 가끔 귀한 보물이 나오면 또 구입하겠지만 예전처럼 강박적으로 집착하지는 않으려 한다. 자유추리나 일신추리, 문공사 미스터리 등의 고전 문고본들은 워낙에 희귀하니까 기대도 안하고 그나마 좀 구할 확률이 높은 작품들로 8편을 뽑았다.

 

1.

 

 

시공사의 시그마 북스 중 <Y의 비극>이다. 엘러리 퀸의 명작 20편을 담은 시그마 북스는 당시 상당히 혁신적인 기획이었지만 발간될 시기만 해도 추리소설이 지금처럼 붐을 일으킬 때가 아니어서인지 실패하고 말았다. 어렵게 어렵게 짝을 맞춰 이제 4권만 남겨 두었지만 잘 구해지지 않고 있다. 엘러리 퀸의 대표작인 이 작품을 구하지 못했는데, 다행히 좋은 소식이 들려오고 있다. 본인의 에이전트로 활동하시는 분께서 어쩌면 구해주실수도 있다고 하니..^^

 

2.



역시 시공사 시그마 북스 중 <트럼프 살인사건>. 작품 자체의 평가는 그다지 좋지 못하고, 읽어본 결과 그저 그랬지만 시리즈의 짝을 맞춰 놓고 싶은 관계로 구하는 바이다. 유독 눈에 잘 안 띄는 작품이라 답답하다.

 

 3.

 




 시그마 엘러리 퀸의 <엘러리 퀸의 모험>이다. 단편집으로 상당히 재미있는 단편들이 다수 수록되어 있다. 시그마 넘버 19권으로 비교적 뒤에 출간된 작품인데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4.
 
 

  개인적으로 구하는 네 번째 시그마 <엘러리 퀸의 새로운 모험>. 역시 단편집으로 유명한 단편인 <신의 등불>과 다양한 스포츠 관련 미스터리 들이 실려 있다. 이것도 꽤 재미있는데 역시 구하기 하늘의 별따기.

 

 

 5.

 



영국의 유명한 미스터리 작가 콜린 덱스터의 <붉은 언더라인>이다. 그가 창조한 모스 경감은 거의 영국의 국민 탐정으로 셜록 홈즈의 인기를 능가한단다. 몇 편 읽어봤는데 개인적인 취향은 아니지만 상당히 재미있었다. 이 작품을 구하고 싶은 이유는 개인적으로 덱스터는 후기작보다 초기작이 더 낫다고 믿기 때문이다. <우드스톡으로 향하는 마지막 버스>나 <사라진 소녀>같은 초기작이 <숲을 지나가는 길>이나 <옥스퍼드 운하 살인사건>보다 훨씬 재미있었기 때문에, 시리즈 네 번째 작품인 <붉은 언더라인>도 구하고 싶은 것이다.

 

 6.

 

 
 
 
 사노 요의 단편집 <완전 범죄 연구>. 이 단편집을 예전에 고등학교 때 읽어 보고 상당히 만족했던 적이 있다. 6개인가 실려 있는데 모두 수준급이었던 기억이 난다. 예전 기억을 믿고 꼭 구하고 싶은 작품인데 잘 안 보인다.
 
 
 
 7.
 
카렐 차페크 <단지 조금 이상한 사람들>. 이건 정말 보고 싶은 작품이다. 민음사라는 거대 출판사에서 나온 작품이 이처럼 구하기 어렵다니 답답한 노릇이다. 심지어 출판사에서 일할 때, 이 작품을 번역하신 분과 같이 일하면서도 구하지 못했다니 진정 비극이다. 미스터리를 떠나서 정말 좋은 작품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꼭 구해야 할텐데...
 
 
8.
 
유라 사부로 <운명교향곡 살인사건>. 본격 추리소설이라길래 괜히 읽어보고 싶은 작품이다. 막상 읽어보신 분들의 평은 그럭저럭인 것 같지만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해보고 싶은 건 역시 미스터리 마니아의 어쩔 수 없는 병이리라...꼭 구해보고 싶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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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6-05-22 14: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붉은언더라인은 별로라고 하더군요. 아동틱하게 출판되었다구요. 그래도 저도 구하고 싶어요. 운명교향곡살인사건 저도 찾는 중인데 안보여요 ㅠ.ㅠ 나머지는 다 있답니다^^;;;

물만두 2006-05-22 14: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단지 조금 이상해 보이는 사람들입니다~

상복의랑데뷰 2006-05-22 15: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붉은 언더라인은 소설은 좋은데, 번역이 엉성하죠. 모우스...

jedai2000 2006-05-22 15: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붉은 언더라인>은 모우스 경감이라는군요..^^ 번역이 아주 꽝이라던데, 해문 출판사에서 다시 내주면 정말 좋을텐데요. 그런데 워낙 해문출판사가 요즘 활동이 없어 다시 나오긴 힘들 것 같습니다. 제가 찾는 여덟편 중에 6편이 있으시다니 타율이 높으시네요. ^^;; 아, 원제가 <단지 조금 이상해 보이는 사람들>이었군요. 잘 알겠습니다. ^^

상복의랑데뷰 2006-05-22 16: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해문 내부 방침이 기존에 출간된 책은 나중에 내자인지라, <붉은 언더라인>이 나오기는 쉽지 않아 보입니다. 아무리 봐도 해문의 출간순서도 영 이상하죠...옥스퍼드...가 제일 먼저 나온 것도 이상하고.

하이드 2006-05-22 19: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해문 출판순서는 미쳤어요.
전 콜린 덱스터 모스 경감 시리즈는 원서로 꽤 모아 놓은 편인데 ( 드라마도 재미있어요 )
우드스톡행 마지막 버스는 별로던데, ^^

jedai2000 2006-05-22 2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상복의 랑데뷰님...해문이 내부 방침은 잘 알겠는데, 어찌 그리 신간 소식은 없는지 모르겠습니다. 일년에 한두권 내고 있으니 답답한 노릇이네요.

하이드님...출간 순서가 정말 최악이죠. 그런데 워낙 움직임이 없는걸로 봐서 출판사가 많이 어렵나 봅니다. 신간이 나올 생각을 안하네요. 전 <우드스톡행 마지막 버스>는 작품 자체로는 별로였지만, 마지막 모스의 대사를 좋아합니다. 모스의 아픈 마음이 절절하게 드러나는 대사들이라 괜히 좋아합니다. ^^

상복의랑데뷰 2006-05-23 0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년에 네 권을 내고는 감감 무소식이죠 ㅋ

jedai2000 2006-05-24 0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분기별로 한 권 꼴이네요. 출판사 사정이 굉장히 어렵나 봅니다. 전통의 추리소설 명가가 어쩌다 그리 됐는지 말예요.

메이즈리크 2006-06-02 0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렐 차페크의 작품 제목은 "단지 조금 이상한 사람들", "단지 조금 이상해 보이는 사람들" 둘 다 맞습니다. 처음 나올때 제목이 "단지 조금 이상해 보이는 사람들"이었고, 나중 나온 판본은 "단지 조금 이상한 사람들"로 바꿨지요. 훗, 저는 "이상해 보이는" 판본으로 갖고 있습니다.

jedai2000 2006-06-05 1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답변이 늦었습니다. 죄송해요. 요즘 잘 안들어와서요. ^^
2판을 찍었나 봅니다. 그렇다면 제법 팔렸다는 이야기인가요? 그런데 왜 이리 눈에 띄지 않는지 답답하네요. ^^

메이즈리크 2006-06-05 1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보기엔 많이 팔린게 아니고, 처음 제목이 부자연 스러웠는지 바꾼것 같습니다. 민음사에서 다시 찍기를 기대할 수 밖에요...

jedai2000 2006-06-08 1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랬군요. 민음사에 계속 메일을 보내볼까요? ^^ 제 생각에 꽤 반응이 좋을 것 같은데 왜 안내는지 모르겠습니다.
 
용은 잠들다
미야베 미유키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6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일본에서 미야베 미유키라는 작가의 위상은 우리의 생각보다 한층 더 대단한 것 같다. 우선 미스터리 대중 작가가 받을 수 있는 상은 전부 다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본 작품 <용은 잠들다>로 일본 미스터리작가 협회상, <화차>가 야마모토 주고로상, <이유>로는 나오키 상을 수상하면서 명성의 정점에 올라 있다. 이 외에 자잘한 것(?)도 여러 개가 넘는다. 아마 집에 수상 트로피를 진열해 놓는 전시실이 있지 않을까 싶다. 작가로서 평론가나 심사 위원들이 주는 이런 상보다 더 기쁜 것은 일본 유수의 출판 잡지 <다빈치>에서 독자가 사랑하는 여성 작가 투표에서 7년 연속 1위를 한 것일테다. (참고로 작년의 남성 작가 1위는 무라카미 하루키였다. 2위가 히가시노 게이고) 일본의 수많은 평론가와 독자들에게 모두 사랑받고 인정받는 행복한 작가가 바로 미야베 미유키인 것이다.

 

인기 작가답게 작품 수도 많은 편인데 귀동냥해서 들은 짧은 지식으로는 대략 3가지의 작품군으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먼저 그녀의 대표작들이 몰려 있는 사회파 미스터리 계열이다. 사회적 병리 현상을 범죄의 틀에 담아 그리는 사회 밀착형 미스터리 소설로 보면 되는데 <화차>에서는 카드 문제, <이유>에서는 부동산의 문제를 담고 있다. 두 번째는 아마도 시대소설이 될 것이다. 국내에서는 소개된 적이 없고, 앞으로도 소개될 일이 거의 없을 것 같은데 일본의 옛 시대를 배경으로 우리로 따지면 포졸(?)같은 탐정이 활약하는 내용들이 많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일종의 판타지 계열이 있는 것 같은데, 본서 <용은 잠들다>나 <크로스 파이어>같은 초능력자를 다룬 이야기도 많이 쓴다고 한다. 워낙 게임광으로도 유명해서 아예 검과 마법이 등장하는 판타지 <이코>를 쓰기도 했다. 이처럼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니 독자들이 질릴 새가 없는 것이다.

 

<용은 잠들다>는 위에 잠깐 언급한 것처럼 초능력을 소재로 하고 있다. 타인의 마음과 기억을 읽을 수 있는 '사이킥'이라는 능력자들의 이야기이다. 태풍이 부는 어느 날, 신지라는 신비로운 소년을 만난 잡지 기자가 주인공이다. 우연한 사건을 계기로 신지가 사이킥이라는 것을 알게 된 잡지 기자는 소년의 능력을 분명히 보았음에도 기존의 사고 틀에 묶여 여전히 반신반의하고 있다. 그 뒤 기자는 또 한 명의 소년을 알게 되는데, 그는 자신이 신지의 사촌형이라 말하고 신지가 어렸을 때부터 거짓말이 심했다고 증언한다. 신지가 보여준 능력의 트릭을 조목조목 밝히며 기자를 설득하는 소년. 기자는 그럼 그렇지, 하고 말지만 자신의 능력으로 인해 고통받는 신지의 진심어린 고백을 듣고 그의 능력을 조사해보기로 결심한다. 한편 기자는 정체불명의 협박장을 받는 등 두 소년과 관계하기 시작한 뒤부터 여러 가지 사건들이 그의 주위에서 일어나게 된다.

 

<용은 잠들다>는 공히 작가의 대표작이라 말할 수 있는 <화차>의 1년 전에 쓰여졌다. 서서히 작품 세계를 발전시켜 나가고 있는 작가의 자신감과 역량을 도처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작가는 우선 '사이킥'이라는 흥미진진한 소재를 선택해 독자의 시선을 잡아끌고 있다. 초능력은 우리가 알 수 없는 세계의 것이다. 잘 모르는 것이니만큼 시종일관 집중하며 읽게 된다. 그 외에도 후반부의 유괴 사건에서 보여주는 긴장감 넘치는 전개와 독특하면서도 현실감을 잃지 않는 등장 인물들의 면면을 보면 과연 미야베 미유키로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보통 초능력자가 등장하는 작품을 쓸 때, 작가 스스로 자기가 쓰는 초능력자들의 능력에 도취되어 요란한 초능력 경연장이 되기 쉬운데 반해 <용은 잠들다>에서는 그런 우를 범하지 않고 있다. 초능력자도 인간이다. 이 작품은 그런 인간을 그리고 있다. 읽다보면 남들과는 다른, 남들에게는 없는 능력으로 인해 오히려 고통받는 사이킥들의 절절한 슬픔이 아프게 다가온다.  

 

미야베 미유키는 특유의 따뜻함으로 사랑받고 있다. 작품 속에 살인과 범죄가 자주 등장하지만 그럼에도 그녀가 인간을 보는 시각은 따뜻하고 순수하다. 비슷한 연배의 기리노 나츠오의 작품이 칼로 긋는 듯 날카롭고 예리하다면 미야베 미유키는 봄날 햇살처럼 어딘지 포근하다. 예를 들어, 똑같은 범죄가 등장하는 작품이라도 쓰는 방식에 따라 아다르고 어다른 법이다. 그 사람이 그런 범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는 이유를, 그렇게 극단적인 방식을 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조목조목 짚어주면 우리는 치명적인 범죄를 저지른 사람도 이해하게 되고 어쩔 수 없어서 그랬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미야베 미유키가 잘하는 게 바로 그런 거다. 그녀 작품에 들어있는 인간에 대한 순수한 애정을 우리는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용은 잠들다>도 결국 초능력으로 고통받던 소년이 그 힘으로 옳은 일을 하는 이야기다. 요즘 세상 인심에 비추어 말도 안되는 이야기라고 할지 몰라도 한번쯤 읽어보고 싶은 내용이 아닌가? 인간에 대한 숭고한 애정을 간직한 주인공이 번민 끝에 결국 '옳은' 일을 한다는 것이 말이다.

 

이 작품에서 작가는 초능력을 누구나 마음 속에 갖고 있는 '용'으로 묘사하고 있다. 용은 누구나 다 가지고 있지만 어떤 이의 용은 잠들어 있고, 어떤 이의 용은 활발히 깨어 있다. 용은 달리 말하면 누구나 가지고 있지만 잊고 사는 옳은 일에 대한 용기와 신념일 수도 있다. 작가는 마음 속의 용을 깨워 불의와 맞설 것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마음 속의 용(초능력)으로 기껏 스푼이나 구부려서야 되겠는가. 누구나 갖고 있는 작지만 큰 힘으로 옳은 일을 행할 때 우리 사회가 한층 더 아름다워질것이라는 점을 작가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너무 순진하다고? 그러나 그것이 바로 미야베 미유키의 메시지이고, 진심을 담고 있음에 우리는 작가의 호소에 귀 기울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는 각자 몸 안에 용을 한 마리씩 키우고 있다. 어마어마한 힘을 숨긴, 불가사의한 모습의 잠자는 용을. 그리고 한 번 그 용이 깨어나면 할 수 있는 것은 기도하는 일밖에 없다. 부디, 부디 올바르게 살아갈 수 있게 되길, 무서운 재앙이 내리는 일이 없기를-. 내 안에 있는 용이 부디 나를 지켜주기를-. 오로지 그것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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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6-05-19 1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벌써 읽으셨다니 놀라워요~

jedai2000 2006-05-19 1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번역자 선생님과 친분이 있어 조금 일찍 읽었네요. 만두님께도 곧 배송이 될 겁니다. 재미있게 읽어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