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추리문학 걸작선
한국추리작가협회 지음 / 태동출판사 / 2002년 11월
평점 :
절판


한국 추리소설 읽기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읽어본 작품집입니다. 무려 28편의 단편이 실려 있고 페이지 수는 놀라지 마시라, 905쪽입니다. 이 모든 것을 단돈 세종대왕 두 장이 안되는 가격에 살 수 있다는 것이 이 작품집의 최대 매력이랄까요. 이러니까 완전 책장사네요. 하하. 아무튼 한국추리작가협회에서 가려 뽑은 수작들을 손쉽게 한 번에 만나볼 수 있는 기회임에는 틀림이 없을 것 같네요.책의 외양은 40년째 불멸의 베스트셀러로 남아 있는 <수학의 정석>과 흡사합니다. 그래서 책 표지 하단에 '한국 추리소설의 정석!'이라는 홍보 문구도 삽입했네요. 책 사이즈나 분위기가 정말 홍성대님의 정석과 흡사하지만 유일하게 다른 것은 판매량이겠지요. 흑,

 

선정 기준은 잘 모르겠지만, 시대별로 단편들을 나누었습니다. 추리소설의 봄, 여름, 가을, 겨울 이런 식으로 사계절로 분류하고 각 시기별 대표 작가들의 작품을 수록했습니다. 예컨대 추리소설의 봄에는 김내성님이나 김성종님 같은 원로작가들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고, 겨울에는 요즘도 활발히 활동하시는 황세연님이나 서미애님 등의 작품이 실려 있는 식입니다. 우리나라 추리소설의 역사도 이제 어언 70년이 넘는 듯 합니다. 앞으로도 뛰어난 작가들이 많이 나와 추리소설계를 이끌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추리소설의 봄'에는 오래된 작품이 많은 관계로 대화나 문장에서 낡은 표현도 많이 눈에 띄지만 두 작품 만큼은 아주 탁월합니다. 일제시대 때 추리소설을 썼던 김내성님의 <타원형 거울>이 그중 한편인데, 일본의 추리소설 선구자 에도가와 람포의 추천을 받았을 정도로 뛰어난 단편입니다. 작품의 트릭은 지금 봐도 전혀 낡지 않았을 정도예요. 2층 가옥에서 일어난 밀실 살인 사건을 잡지 현상 공모를 통해 해결한다는 내용인데 맨끝에도 반전이 한 번 더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 추리소설 작가 사상 가장 많은 책을 팔았다는 70~80년대 최고의 베스트셀러 메이커 김성종님의 <어느 창녀의 죽음>이 뛰어납니다. 사회파 미스터리에 가까운 이 작품에서 세상의 온갖 죄악에 괴로워하는 오형사는 말 그대로 어느 창녀의 죽음에 얽힌 비밀을 알게 됩니다. 씁쓸한 마무리가 인상적입니다. 솔직히 김성종님의 작품을 보면 사회파로 비슷한 시기에 일본에서도 인기가 많았던 모리무라 세이이치와 비교해 부족한 점이 뭔지를 모르겠습니다.

 

'추리소설의 여름'은 80년대 작품들이 많은 것 같은데 강형원님의 <여름 추리학교의 살인>을 보고 쓰러졌습니다. 추리작가들이 모여있는 여름 추리학교 숙소에서 작가들 사이에 살인이 벌어진다는 이야기죠. 실제 추리소설 작가들이 다수 등장합니다. 이건 완전 패러디 극장에나 나올 만한 이야기던데요. 이 작품이 실화가 아니길 간절히 바랍니다. 하하.아무튼 여름 쪽에서 제일 인상깊었던 작품은 유우제님의 <빛의 살인>입니다. 시간을 때우려고 극장에 간 한 사나이. 영화 보는 내내 졸던 뚱뚱한 남자가 신경이 쓰이는데 영화가 끝나고 보니 그 남자는 죽어 있습니다. 범인의 정체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내용도 공감가지만 섬세하달까, 매끈하달까 문장도 탁월합니다. 그 외에 이수광님의 <M의 사냥>도 볼만합니다. 80년대를 뒤흔들었던 화성 연쇄살인사건의 범인을 나름 추측하고 있는데 영국의 유명한 모단편과 흡사하다는 점을 빼면 상당히 그럴듯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나온 화성 범인의 정체 때문에 작가분께서 좀 시달렸을 것 같더군요. 특정 직업을 가지신 분이 항의를 많이 했을 것 같아요.

 

'추리소설의 가을'은 90년대 작품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편수도 다섯 편 밖에 안되고 수준도 그저그래서 확실히 한국 추리소설이 쓸쓸한 바람이 부는 가을로 접어들었음을 느끼게 됩니다. 백휴님의 <휠체어 여인>은 혼란스런 전개로 인해 끝나고 나서도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더군요. 이승영 님의 <숲속의 마녀>는 역시 화성 연쇄살인사건의 범인을 등장시켰는데 작품의 수준을 떠나 범인의 그로테스크한 행태가 기억에 남는 작품입니다. 확실히 화성 사건을 추리작가분들이 그냥 지나칠 수 없겠죠. 추리소설을 쓰기에 좋은(?) 소재인가 봅니다. 여기서는 장근양 님의 <도시의 신기루>가 볼만 했는데, 유학까지 다녀온 박사가 생활고에 못 이겨 은행을 터는 이야기입니다. 허황된 결말이 걸리지만 은행을 터는 과정이 상당히 치밀하고 박력있습니다.

 

'추리소설의 겨울'은 90년대 후반부터 현재까지 많은 활동을 하고 계시는 젊은 작가분들의 작품들입니다. 제 나이도 그렇고, 아무래도 이쪽이 읽기 쉬운 문장을 구사하시더라구요. 전체적으로 문장이나 구성이 예전의 작품들에 비해 낫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기서는 크게 떨어지는 작품이 없었어요. 그러나 한 작품만 골라 보라면 이기원님의 <라스트 카니발>. 이 작품은 이번 단편집의 발견입니다. '벼룩시장'같은 생활 정보지를 통해 희생자를 고르고 연쇄 살인을 저지르는 범인의 시점과 그를 추격하는 두 형사의 시점이 교차되는 작품인데 현실감 있는 내용 전개와 착착 감기는 대사도 좋고, 무엇보다 제대로 된 서술 트릭을 보여줍니다. 이기원님의 작품이 상당히 마음에 들었는데 그후 별다른 활약이 없어 안타깝네요. 

 

28편이라는 많은 작품이 실려 있는 관계로 옥석이 섞여 있습니다. 이건 추리소설이야, 낙서야 싶은 것도 있고 꽤 좋은 작품도 많습니다. 그래도 시기별로 한국 추리소설의 대표적인 작가의 단편들을 편하게 읽어볼 수 있음을 높이 평가하고 싶습니다. 이 중에서 한 10편 정도를 추려 일본이나 구미에도 소개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리고 앞으로 이런 단편집이 10개쯤 더 나올 수 있게 작가분들의 많은 노력을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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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6-05-23 2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본 단편들이 너무 많네요.

jedai2000 2006-05-24 0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두님께서야 뭐 워낙 많이 보셨으니까요. ^^ 저는 한 다섯 편쯤 빼고 다 처음 본 작품이라서 재미나게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