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술은 속삭인다 미야베 월드 (현대물)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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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한 작가의 초기작을 보는 일은 언제나 흥미로운 일입니다. 아직 덜 영근 미숙함에 웃음 짓기도 하고, 초기부터 싹수가 남달랐음을 확인하고 흐뭇해지기도 하죠. <마술은 속삭인다>는 일본 미스터리 소설에서 거장급의 명성을 갖고 있는 미야베 미유키의 초기작입니다. 과연 미야베 미유키의 작가 생활 초창기의 모습은 어땠을까요? 그녀의 팬이라면 흥미롭게 관찰해볼 만하겠습니다.

 

미야베 미유키는 처음부터 이야기 만드는 재능 하나는 타고난 작가였습니다. 먼저 이야기의 뼈대가 되는 아이디어의 착상이 좋습니다. <마술은 속삭인다>는 3명의 젊은 여자가 옥상에서 떨어져죽거나, 지하철에 뛰어들어 자살하고, 교통사고의 피해자가 되는 평범한(?) 사건, 사고로 출발합니다. 우리는 얼마 전 있었던 '영아냉동고 유기살해사건' 같은 엽기적이고 비상식적인 강력 범죄에는 온통 관심을 쏟고 흥분하지만 하루에도 수십 건씩 일어나며, 단신으로 사회면에 짤막하게 보도되는 범죄, 사건, 사고에는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미야베 미유키의 비범한 착상은 바로 여기서 출발합니다. 흔해빠진 사건, 사고가 서로 연관되어 있다면? 혹시 매일같이 일어나는 여러 건의 사건, 사고가 누군가의 계략에 의한 연쇄살인은 아닐까, 하는 단순하지만 효과적인 아이디어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미야베 미유키는 발상의 전환이 좋습니다. 위에 언급한 사건, 사고는 미야베 미유키 문학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던 일본 사회파 미스터리 소설에서도 충분히 다뤄지는 것들입니다. 예컨대 마츠모토 세이초 등의 대표적인 사회파 작가들의 작품에서도 해변가에서 동반자살한 남녀의 죽음에 심각한 음모가 숨어 있었다는 식으로 이야기는 진행됩니다. 하지만 종래 유행했던 이야기들을 다시 한 번 재현하는 것만으로는 영웅이 될 수 없습니다. 미야베 미유키는 익숙한 사회파 미스터리로 출발해 최면술이나 서브리미널 광고 등의 독특한 소재로 이야기의 대전환을 꾀합니다. 기존의 사회파 미스터리에 익숙할대로 익숙한 독자들도 여기서부터는 놀랄 수밖에 없습니다. 기존의 틀로 재단할 수 없는 새로운 이야기에 빨려 들어갈 수밖에 없는 거죠.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테크닉도 돋보입니다. 3명의 독신녀 살해사건에 발을 담그게 된 주인공 마모루는 우연히 서브리미널 광고에 대해 알게 됩니다. 서브리미널 광고는 다 아시다시피 영상물 등에 있어 몇 초에 한 프레임씩 광고를 삽입해 무의식적으로 판매를 유발하는 일종의 최면기법입니다. 마모루가 일하는 서점에서는 이 서브리미널 광고에 죄를 저지르고 잡히는 사람들의 영상을 삽입함으로써 무의식적으로 절도범들에게 압박감을 주고 있었습니다. 작품 진행에 있어 별 상관이 없어 보이는 이 서브리미널 광고는 그러나 미야베 미유키에게는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훌륭한 도구입니다. 뒤에 나올 더 황당무계한(독자 입장에서) 최면술에 대해 미리 정보를 줌으로써 웬지 그럴 듯해 보이는 설득력을 더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마모루에게 도움을 주는 조력자가 그 광고를 보고 기절함으로써, 혹시 이 조력자에게 범죄와 관련된 은폐된 사실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복선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 소재를 가지고 다양하게 활용할 줄 아는 작가의 이야기 테크닉인 셈입니다.

 

마지막으로 미야베 미유키는 결말 짓는 요령을 잘 알고 있습니다. 무슨 이야기든지 끝이 좋으면 다 좋게 느껴지는 법입니다. 그녀는 사건, 사고, 최면술, 서브리미널 광고, 죄를 저지르고 잠적한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에게 일어났던 일을 알고 격노하는 마모루라는 수많은 곁가지들을 결말에 이르러 하나로 통합하고 수렴해 독자에게 깊은 감동을 안깁니다. 원래 미야베 미유키는 인간의 선의를 믿고 있는 작가입니다. 이 작품에서의 모든 인물들은, 심지어 죄를 저지른 인물들까지도 반성하고 죄책감을 느끼며, 남을 돕고 싶어하는 성격으로 그려집니다. 지나치게 순진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이건 작가의 성향이니 어쩔 수 없겠죠. 읽는 이의 취향에 따른 문제입니다. 이렇듯 선의를 가진 인물들이 번민하고 방황하다 결국 최선의 선택을 하며 다시 한 번 인간이 품고 있는 옳은 성향을 증명하는 대단원은 그야말로 감동의 회오리입니다.

 

여기까지 확인해보니 과연 미야베 미유키는 초기부터 남다른 작가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초기작에 따른 부족한 부분도 눈에 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종종 작품에 사용된 비유는 유치하고, 문장은 물이 오를 대로 오른 최근작보다는 떨어집니다. 이야기를 이끌어나가기 위한 다소 억지스런 설정도 보입니다. 예를 들어 작가는 마모루에게 얼굴 없는 살인자와 대결을 벌일 때 사용하기 위한 최소한의 무기로 열쇠따기 기술을 줍니다. 이 기술을 여러번 사용해 마모루는 위기에서 벗어나고 진실을 찾아내기도 합니다. 그런데 고등학생 마모루가 어떻게 열쇠따기 기술을 배웠냐구요? 어렸을 때 지나가던 할아버지가 가르쳐주었답니다. 필연성이 전혀 없는 설정으로 주인공에게 그럴 듯한 무기를 제공하기 위한 작가의 억지에 불과합니다. 무엇보다 최근작에서 볼 수 있는 흡입력도 약간 떨어져 어느 정도 지루하게 읽히기도 했습니다. 조이고 풀고, 줄달음쳐가다가 잠깐 멈춰서 숨을 고르는 최신작이 그런 만큼 흡입력이 강하다면 아직 완숙기에 이르지 못한 이 작품은 이야기의 호흡에 있어서 비교적 잔잔함 일변도라 독자를 빨아 들이는 힘이 조금 부족하지 않았나 생각해봅니다.

 

이상으로 <마술은 속삭이다>를 들여다보았습니다. 장점과 단점을 비교적 공정하게 짚어본 것 같은데 최종 판단은 새로 읽어볼 분들이 하시기 바랍니다. 제 기준으로 별점을 주라면 세개 반, 작가의 최고작은 결코 아닙니다. 다만 미야베 미유키가 어떻게 자신의 문학세계를 일구었나를 확인해보고 싶은 독자에게는 커다란 해결책이 될 의미가 있는 작품이라는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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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6-11-19 15: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초걸작은 아니지만 미미여사니까요^^

jedai2000 2006-11-19 2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맨 뒤 페이지 백면에 미미여사파이팅이라고 조그맣게 써 있더군요. ^^

2006-11-21 10: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jedai2000 2006-11-21 1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방금 보냈습니다. 어제 책이 나와서 여기저기 보내다보면 시간도 걸리고, 그쪽에서 자료 정리하는데 시간이 걸리더라구요. 신경써주셔서 감사합니다. ^^
 
시소게임 작가의 발견 1
아토다 다카시 지음, 유은경 옮김 / 행복한책읽기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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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아토다 다카시의 [시소게임]에는 '작가의 발견1'이라는 시리즈 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나오키상을 수상하고, 현재는 나오키상 심사위원이기도 한 단편의 명수로 이름이 높은 아토다 다카시지만 한국에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작가니만큼 발견이라는 말도 틀린 것은 아니네요. 이런 기획은 반길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초기 미스터리의 선구자격인 요코미조 세이시나, 마츠모토 세이초 등의 대표작들이 역사적 가치와 작품의 질을 인정받아 출간 기회를 잡는 것이나, 현재 잘 나가는 최신 미스터리 작가들의 작품이 쏟아져나오는 것에 비해, 유독 70-80년대 작품들은 국내에 소개될 기회를 얻지 못했으니까요.

 

요즘처럼 등단 기회가 많지 않았던 때이니만큼 당시 활동하던 작가들은 기본적으로 문장력 훈련이 잘 되어 있고, 비교적 높은 수준에 오른 작품들을 발표했습니다. 해서 이번에 소개된 아토다 다카시를 비롯한 70-80년대가 전성기였던 렌조 미키히코, 다카하시 가즈히코, 이자와 모토히코 등의 작품이 차후 더 소개되고 '발견'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네요.

 

위에서 언뜻 단편의 명수라고 아토다 다카시를 소개했는데, 과연 그렇습니다. 아토다 다카시는 짧은 이야기에서 장기를 주로 발휘했고, 높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시소게임]은 1980년에 출간된 소설집이라는데 총 15편의 이야기들이 실려 있습니다. 아무래도 장편을 보면 부분적으로 문제되는 부분이 있어도 전체적으로 분위기가 좋거나, 재미있으면 사소한 결함은 눈감아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단편은 그야말로 짧은 분량이니만큼 자그만 결점도 작품의 완성도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죠. 그런 점에서 단편 잘 쓰는 작가는 비장의 아이디어를 잘 다듬어 최후의 반전 한 방으로 독자를 넉아웃시키는 요령을 알고 있는 셈입니다.

 

아토다 다카시의 [시소 게임]은 잘 쓴 단편이란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좋은 단편집입니다. 15편의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전부 흥미진진하고 블랙유머의 냉소, 결말의 의외성까지 훌륭한 단편의 테크닉을 전부 가지고 있습니다. 더구나 아토다 다카시 단편 특유의 오싹한 분위기도 충분히 살아 있어 '살 떨리는' 재미를 줍니다. 작품 말미에 실린 해설에서 아토다 다카시를 오 헨리에 비교하는 문장이 있는데 독자가 생각치 못한 기발한 결말로 뒷통수를 치는 점에서는 과연 두 사람이 비슷합니다. 그러나 오 헨리의 단편들이 따뜻하고 훈훈한 끝맺음이 많은데 비해 아토다 다카시는 일상 생활에 잠복해 있는 독버섯같은 인간의 악의와 그 악의가 뭉치고 뭉쳐 결국 파국에 이르는 데서 독자에게 카타르시스를 안깁니다.

 

이 소설집에 수록된 대부분의 이야기는 살의와 범죄라는 악 그 자체를 담고 있습니다. 예컨대 <사망진단서>라는 단편에서는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로 인해 가정에 웃음이 사라지자 시어머니가 사라졌으면 하는 가족들이 나오고, <부재 증명>등의 단편에서는 정이 없고 귀찮은 아내가 사라져주기를 바라는 남편들이 나옵니다. 저 사람만 없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 인생이 더 행복해질텐데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인간군상들이 출현해 범죄에 발을 담그는 이야기입니다. 어마어마한 부나 커다란 정치적 이유에서 등이 아닌 일상에서 자라나는 미움과 혐오 등 누구나 한 번쯤 생각해볼 수 있는 현실적인 악을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시소게임]은 호러소설의 오싹한 공포와 미스터리의 사건을 푸는 재미, 인간의 악을 고찰하는 심리소설과 당대 일본의 소시민들의 삶을 엿볼 수 있게 해주는 풍속소설로서의 재미를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심지어 <얼음처럼 차가운 여자> <천국에 가장 가까운 풀> 등은 본격 미스터리로 볼 수 있고, <기호의 참살>에는 애거서 크리스티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살해 현장 그림도 나옵니다. 짤막한 만큼 하나하나 짬날 때 마다 보다보면 어느새 페이지의 끝에 다달아 있을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추천하는 단편은 <사망진단서>지만 15편의 이야기 모두 재미있습니다. 그야말로 올해의 '발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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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11-18 19: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홋~ 그렇다면 보관함에~(__!!)

물만두 2006-11-18 2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단히 영광스러운 작품이었습니다^^

oldhand 2006-11-19 0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거랑 <마술은..>을 어제 배달 받았습니다. 으흐흐.

jedai2000 2006-11-19 1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롱범님...저는 아토다 다카시를 꽤 좋아하는 편이라 만족스러웠는데 아마 누가 보셔도 만족스러울 겁니다. ^^

정군님...어서 넣으세요. ^^

물만두님...예. 간만에 본 단편집이라 더 좋았던 것 같아요. ^^

올드핸드님...저와 비슷한 독서 행보를 걸으시네요. ^^
 
환야 - 전2권 세트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권일영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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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지금도 기억에 선명한 1995년의 고베 대지진에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수많은 인명 피해와 물질직 피해가 있었던 고베 대지진은 당시 거품 경제의 붕괴로 인해 주머니가 얄팍해진 일본 시민들의 마음을 더욱 신산스럽게 만들었던 비극적인 재해였다. 금속 기술자로 평범하게 살던 마사야의 인생이 180도 바뀐 것도 고베 대지진의 영향 때문. 아버지가 운영하던 공업사의 직원으로 일하던 마사야는 회사의 도산과 아버지의 자살로 인해 공허한 상태였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외삼촌이 찾아와 아버지의 빚을 대신 갚으라고 종용하기까지 하는 데는 정말 두손 두발 다 든 상황. 그런데 그 순간 지진이 시작된 것이다. 마사야가 지진으로 붕괴된 건물에 깔린 외삼촌의 차용증서를 꺼내 없애버리려던 순간 공포영화의 한 장면처럼 외삼촌이 눈을 뜬다. 당황한 마사야는 무심결에 벽돌로 외삼촌을 때려 죽인다.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던 건 미후유라는 여자. 치명적인 매력을 가진 팜므 파탈 같은 존재다. 이제 미후유가 경찰에 신고하면 인생이 나락으로 떨어지겠구나, 걱정하던 마사야는 미후유가 사건을 은폐하는 것을 도와주는 것에 묘한 심정이 된다. 왜 나를 도와주는지, 마사야는 그 때는 알 수 없었다. 훗날 많은 대가를 치루고서야 알게 되겠지만. 이제 두 사람은 잿더미가 되어버린 고베를 떠나 돈과 환락과 성공의 기운이 요사스럽게 소용돌이치는 일본의 심장 도쿄로 향한다. 작품은 두 사람의 인생 항로를 따라 흥미진진하게 욕망과 파멸의 이야기를 펼쳐 놓는다.

 

제134회 나오키상 수상작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이다. 1999년의 히트작이자, 작가의 대표작이라 일컬어지는 <백야행白夜行>의 비공식 속편 격인 작품이다. 작품에도 그런 힌트가 나온다. <환야>에는 마사야 말고도 미후유의 정체를 추적하는 가토라는 형사가 나오는데, 그의 조사에 따르면 미후유가 전에 근무하던 회사는 'White Night'란다. 하얀 밤, 즉 백야다. 미후유가 하얀 밤을 거쳐 이제 '환야幻夜'의 세계로 들어왔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속편 격인 작품이라 그런지 두 작품은 굉장히 유사하다. 위험한 매력을 가진 한 여자와 그런 그녀를 사랑하는 한 남자의 사랑과 범죄의 연대기적 구성이 바로 그것이다.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는 자신의 성공작을 다시 한 번 재현하는 걸 즐기는 버릇이 있는 듯하다. <백야행>과 <환야>가 그렇고, 인터뷰를 보니 가장 최신작인 <붉은 손가락>을 작년의 히트작인 '수학천재' <용의자 X의 헌신>의 '평범한 아저씨'버전일 수도 있다고 밝혔다. 어떻게 보면 성공작을 다시 한 번 재현하려는 얄팍한 속셈일수도 있겠지만, 상업작가로서 평가할 부분도 있다고 본다. 맞는 예인지 모르겠는데 예전 임권택 감독이 <노는 계집 창>이라는 영화를 찍을 때 이런 인터뷰를 했다. <노는 계집 창>이라는 제목을 보고 극장을 찾는 사람의 그런 쪽의 욕구도 충족시켜줘야 하기 때문에 몇 번의 베드신이 꼭 필요했다고. 이미 예술영화 감독이라는 레테르가 붙은 임감독에게 베드신은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간단히 말해 싸구려 에로영화로 보일 수 있으니까. 하지만 순수하게(?) 여배우의 노출이나 정사 장면을 보기 위해 표를 끊은 사람들의 욕구도 충족시켜줘야 하므로 부득이 그런 장면을 넣었다는 말이다.  

 

어차피 돈을 받고 영화나 소설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상업 예술가들에게 있어 독자나 관람객이 자신의 어떤 작품을 좋아하는지, 왜 좋아했는지 분석하고, 독자가 원하는 바로 '그것'을 안겨주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런 일로 보인다. 독자가 <백야행>을 좋아한다면, 그래 <환야>가 간다. 독자가 <환야>도 좋아한다면 또다른 세번째 밤이야기가 나가는 것이다. 상업작가라면 자신이 쓰고 싶은 것뿐 아니라, 독자의 욕구를 충족시켜줄 줄도 알아야 하는 법이라 생각한다. 물론 거의 비슷한 얼개를 가진 긴 장편소설을 재현하는 셈이라 작가의 피로도가 느껴지기도 한다. <백야행>에 비하면 <환야>는 뒤로 갈수록 흡입력이 떨어지고, 결말은 심지어 어이없게 보이기까지 한다. 팜므 파탈이라는 미후유의 캐릭터도 <백야행>의 유키호에 비하면 매력이 덜하고, 줄거리의 흥미진진한 곡절도 <백야행>에는 미치지 못한다.

 

다만 <백야행>이 60년대부터 90년대 초까지 컴퓨터나 게임기 등의 일본 기술 산업을 소재로 다루었다면 <환야>에서 미후유가 성공을 꿈꾸었던 곳이 90년대 후반의 미용 산업이었다는 것은 매우 돋보인다. 90년대 초반까지 발전 일로를 걸었던 일본의 기술 산업이 현재의 풍요를 이끌어낸 결과 90년대 후반부터는 성형이나 미용, 액세서리 등 꾸미고 치장하는 산업이 발전 일로를 걸었기 떄문이다. <백야행>과 <환야>의 주인공들-두 명의 팜므 파탈과 두 명의 헌신적인 남자-은 자신들이 몸담고 있는 경제적 환경 속에서의 성공을 위해 필연적으로 살인과 음모, 배신과 협잡 등의 범죄를 꾸민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백야행>과 <환야>라는 두 자매를 통해, 60년대부터 90년대 말까지 일본 산업의 발전 및 변화 과정을 들여다보며, 일본 사회의 지금과 같은 풍요와 경제 발전의 뒤안길에는 혹시 범죄가 잠들어 있지 않나 하는 의구심을 표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지금의 물질적 풍요 어딘가에 범죄의 기운이 잠복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작가의 질문에 답을 잘 생각해보기 바란다. 내가 세번째 밤이야기를 기대하는 것도 바로 이 이유에서다. 히가시노 게이고가 2000년대에 주목하는 산업은 무엇이며, 그곳에서 어떤 범죄의 음험한 징후를 발견하고 우리 앞에 펼쳐놓을까 하는 순수한 호기심. 세번째 밤이야기가 그 호기심을 상당 부분 충족시켜주리라 믿는다.

 

 

p.s/ 마사야가 가장 이해 안 되는 점 한 가지. 나 같으면 유코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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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06-11-13 06: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재미있겟군요 히가시노 게이코

jedai2000 2006-11-13 0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습니다. ^^ 히가시노 게이고의 밤시리즈는 대표작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것 같아요. ^^

2006-11-13 09: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6-11-13 10: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야시 - 눈을 감으면 다른 세상이 열린다
쓰네카와 고타로 지음, 이규원 옮김 / 노블마인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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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회 일본호러소설 대상작이란 홍보 문구를 보고 흥분하고 말았다. <링>과 <검은 집>이후 그럴싸한 일본호러소설을 보지 못했는데 또 한 번 공포의 오르가즘을 느끼겠구나, 했다. 그러나 막상 읽어보니 무서운 구석은 별로 없어 호러소설이라기엔 조금 부족했다. 다만 악몽을 꾸는 듯한 끈끈함과 요괴가 출몰하는 기묘한 밤의 정취는 돋보였다.  한 마디로 우리가 사는 세계와는 다른 기괴한 제2의 세계를 그리는 일종의 환상소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야시>에는 표제작 '야시'와 '바람의 도시'의 두 중편이 실려 있는데, 문체나 주제, 스타일이 대동소이해 연작으로 봐도 무방할 것 같다. '야시夜市'는 한자 그대로 밤의 시장이라는 뜻이다. 10년도 더 전에 보았던 에로영화 <야시장>이 갑자기 떠오른다. 아무튼 야시에는 요괴나 영구방랑자, 악마 등이 판을 벌인 다음 뭐든지 팔고 있다. 그런데 가격이 상상을 초월한다. 황천에서 주워온 돌이 1억엔이란다. 그걸 어따 쓰라고? 한 남자가 여자 친구와 함께 야시를 방문한다. 그런데 야시의 규칙은 들어온 이상 반드시 사고 파는 거래를 해야 한다는 것. 거래가 성사되지 않으면 야시에 먹혀 버린다. 알고보니 남자는 몇년 전에 야시를 온 적이 있었고, 자신이 빠져나가기 위해 동생을 납치업자에게 팔아버리고, 야구를 잘하는 재능을 샀었다. 남자는 동생을 찾으러 다시 돌아온 걸까?

 

이야기가 짧은 게 조금 아쉬웠다. 야시가 돌아가는 모습을 좀더 세밀하게 그린다면 잔재미가 더 살았을텐데 말이다. 작가 쓰네가와 고타로는 문장에서도 이야기에서도 군더더기를 줄이고 단순하게 가는 편인데, 짧은 만큼 효과적으로 독자의 관심을 끌지만 아마추어의 글을 보는 느낌을 주는 단점도 보인다. 멋부린 문장이 꼭 뛰어난 작가의 필수조건은 아니겠지만, 문장의 맛이라는 것도 분명 있는 거니까. 반면 다카하시 가쓰히코 같은 베테랑 작가들도 칭찬한 종반부의 반전은 과연 훌륭했다. 사실 이야기가 진행되는 중간에 단서나 복선 등을 전혀 주지 않기에 논리적인 반전이라고 하긴 힘들고, 비상한 국면 전환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한 마디로 기발한 뒤집기 한판이라고나 할까. 이 이야기의 진행을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바람의 도시'도 독특하다. 우리가 걷는 길의 어딘가에는 묘하게 일그러진 지점이 있어 다른 세계와 맞닿아 있다. 그 길은 '고도'라 불리우며 요괴와 신 등이 살고 있다. 초등학생인 주인공은 친구와 함께 고도로 들어갔다가 그곳의 방랑자와 얽힌 사건으로 친구를 잃고 만다. 고도에는 죽은 자를 되살려주는 사원이 있어 방랑자와 주인공은 함께 사원으로의 여행을 떠난다. '야시'만은 못해도 이 작품에도 의외의 상황 전개와 급작스런 상황 변화가 있다. 뻔한 이야기를 비틀어 어디로 튀게 만들지 모르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쓰네카와 고타로라는 작가의 트레이드 마크인 듯 하다. 그외에도 두 작품 다 눈을 조금만 돌려보면 현실과는 다른 세계가 있다는 일관된 주제를 선보이고, 그 세계의 규칙-'야시'는 거래가 이뤄지지 않으면 나갈 수 없고, '고도'는 고도에 속해있는 자는 나갈 수 없다'-을 잘 활용해 이야기를 끌고나가는 점도 비슷하다. 무엇보다 일종의 상실감, 허무, 슬픔, 애절함 등을 바탕에 깔아 정서적 울림을 주는 수법에 특히 주목하고 싶다.  

 

묘하고 환상적인 분위기에 이야기도 재미있는 편이라 꽤 흥미롭게 봤다. 그러나 만인이 인정할 만한 재능은 발견하지 못했고, 그저 다음 작품이 나오면 한 번쯤 더 읽어봐야겠다, 정도의 인상만을 받았다. 이 작품이 134회 나오키상 후보작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약간 어리둥절했다. 90년대 나오키상 수상작은 <마크스의 산> <이유> <부드러운 볼> 같은 작품들이었다. 비록 <야시>가 수상은 못하고 후보에 그쳤다지만 언급한 작품들에 비하면 질과 양 면에서 상당히 떨어진다. 그러고 보니 2000년대 이후에 데뷔한 최신 일본 작가들의 작품에서는 별로 감탄한 적이 없다(많이 읽지도 못했지만). 그 동네도 이제 밑천이 떨어져가는가 싶다. 일본소설을 즐겨 읽는 독자로서 재능있는 젊은 피에 의한 참신한 충격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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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6-10-31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그런 점이 있었군요. 전 오히려 짧아서 상상으로 느끼게 되는 공포를 담아낸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jedai2000 2006-10-31 1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론이죠. ^^ 상상으로 느끼는 공포가 더 큰 법이니까요. 단지 제 생각입니다. 제가 뭐 대단한 사람도 아니고 그냥 느낀 대로 쓴 거예요. ^^

2006-11-17 01: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광골의 꿈 - 전2권 세트
쿄고쿠 나츠히코 지음, 김소연 옮김 / 손안의책 / 2006년 9월
평점 :
절판


추젠지 아키히코와 친구들이 돌아왔다. 전작 <망량의 상자>에 이어 꼬박 1년은 흐른 것 같은데, 이렇게 <광골의 꿈>을 쥐고보니 그 오래된 기다림은 다시금 만족으로 바뀌었다. 작가 교고쿠 나츠히코의 '교고쿠도' 이야기는 이제 신작이 나올 때마다 한일 양국을 들썩거리게 만드는 인기 시리즈가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교고쿠 나츠히코는 원래 디자이너였는데, 묘하게도 요괴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나이도 먹을만큼 먹은 사람이 요괴를 좋아한다니 철없다고 꾸짖지 마시기 바란다. 기독교나 천주교, 불교 등의 거대 종교가 큰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일본 사회에서는 아직도 생활 곳곳에서 요괴의 존재를 발견하고, 인정하고, 전통 문화의 한 분야로 연구한다고 한다. 전통 요괴라야 기껏 도깨비 정도만 생각나는 한국과는 사뭇 다른 일본만의 고유한 문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교고쿠 나츠히코는 1994년 아이를 낳다 죽은 어미의 한이 요괴로 변한다는 '우부메'라는 전통 요괴를 소재로 한 <우부메의 여름>이라는 작품을 직접 출판사로 들고갔고, 이내 작품의 진가를 알아본 출판사 측에서 출간하여 숱한 화제를 뿌렸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고서점 '교고쿠도'의 주인이자, 인간에게 들러붙은 요괴를 떼어내는 퇴마사인 추젠지 아키히코와 그의 독특한 친구들이 활약하는 이야기는 현재 9편의 시리즈로 이어져 작가 '교고쿠 현상'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폭발적인 인기가 현재진행중이다. 또한 교고쿠 나츠히코는 제2작 <망량의 상자>로 일본추리작가협회상, <속, 항간에 들리는 기이한 이야기>로 나오키상을 탈 정도로 평단의 절찬, 동료작가의 인정, 그리고 작가로서 가장 행복한 독자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작가다.

 

작품에서 즐겨 요괴를 소재로 하기에, 아직도 요괴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은 일본에서 그의 작품들이 인기가 많은 건 당연하다고 하겠지만, 우부메니 '망량'이니 '광골'이나 하는 일본 요괴를 전혀 모르는 한국에서도 팬이 늘어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알아두어야 할 것은 교고쿠 작품의 제재가 요괴라고는 하지만 실제 요괴가 나오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작품에서는 요괴를 모티브로 한 기이한 일들이 벌어진다. 탐정격인 추젠지 아키히코가 그 기이한 일들을 '논리적으로' 말이 되게끔 풀어내기에 독자에게 짜릿함을 안기는 것이다. 그러나 작품에서 다루는 기이한 일들은 그야말로 이 세상의 일이라고는 생각이 안 되는 환상적인 사건이다. 예컨대 <우부메의 여름>에서는 20개월째 해산을 못한 여자의 방(밀실)에 같이 있던 남편이 연기처럼 사라져버린다. 남편은 아내의 뱃속으로 들어가버린 것일까? 두번째 작품 <망량의 상자>는 더욱 대단하다. 기차 사고로 온몸의 뼈가 남김없이 조각난 소녀가, 병원에서 여러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하늘로 날아간 것인지, 땅으로 꺼진 것인지 실종되어 버린다. 물리적, 과학적으로 도무지 말이 안 되는 상황이다. 그러나 추젠지 아키히코는 이 모든 일들에 대하여 자신만의 해답을 준비해놓고, 득의양양하게 웃고 만다.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를 두고 해답을 찾으려 노력하고, 마침내 해답을 찾으면 뛸듯이 기뻐하는 것은 호기심 많은 인간의 본성이다. 더군다나 이 수수께끼가 복잡하면 복잡할수록 더욱 빠져드는 것이 인간의 두뇌이다. 작가 교고쿠 나츠히코는 아주 영악한 사람이라, 이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는 대부분의 작품이 1,000 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이야기를 여러 갈래로 꼬고, 매듭을 묶고, 이리저리 비틀어 한계까지 복잡하게 만든다. 이미 독자의 두뇌는 포화상태이다. 수많은 정보와 복선과 함정들(그러나 한계를 넘을 정도로 복잡하게 꾸미지는 않는다. 독자가 포용하고 이해할 수 있는 한계를 넘으면 책을 집어던질 테니까. 이 선을 잘 알고 있는 것이 교고쿠 나츠히코의 영리함이다)...그러나 복마전같이 얽혀있는 스토리를 헤치고 나가다보면, 결말에서는 추젠지 아키히코가 특유의 명쾌함으로 해답을 제시한다. 시달릴 대로 시달린 우리의 뇌는 모든 것이 정리가 되면서 느껴지는 순수한 만족감에 기분이 좋아지게 된다. 교고쿠 나츠히코의 책에서는 이런 원초적인 두뇌 만족의 쾌감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독자들은 교고쿠 나츠히코의 그 두껍고, 복잡한 이야기들을 계속 찾는 것이다. 마지막의 상쾌함을 기억하기 때문에...

 

그렇다면 <광골의 꿈>이 전하는 복잡한 이야기는 무엇일까? 첩첩산중 시골에서 자란 여자가 있다.그러나 그녀는 어린 시절 바다에서의 기억들로 고통받고 있다. 분명히 어렸을 때, 바다에는 간 적이 없는데 말이다. 다른 누군가의 기억이 침투한 것일까. 한편 그녀에게는 8년 전, 목이 잘려나가 살해당한 전남편이 있었다. 그런데 바다에서의 기억이 찾아온 순간부터 전남편이 다시 나타난다. 요괴일까, 사령일까. 그녀는 공포에 질려 전남편을 다시 목 졸라 죽인 다음 목을 잘라 바다에 던져버린다. 그러나 전남편은 무려 네 번이나 다시 나타나고 그때마다 아내에 의해 목이 잘린다. 참으로 불쾌한 사건이다. 그러나 일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아내가 목을 던져버린 그 바다에서 금색해골이 목격된 것이다. 며칠이 지나고 이번에는 바다에서 머리카락과 살이 붙은 머리가 발견된다. 전남편의 해골에 다시 살이 붙어 온전한 머리가 되고, 다시 부활한 것일까? 기묘하다는 말로는 부족한 환상적인 사건이다. 이 사건에 관여하게 된 추젠지 아키히코와 친구들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광골의 꿈>은 교고쿠 나츠히코 만의 여전한 특성이 잘 살아 있다. 무엇보다 다루고 있는 사건과 요괴와의 절묘한 배합이다. 아이를 낳다 죽은 요괴, 우부메와 20개월째 아이를 낳지 못한 여자가 한 쌍을 이루는 <우부메의 여름>처럼 <광골의 꿈>에 등장하는 '광골'은 뼈만 남은 해골 상태로 이승과 저승을 오가는 요괴다. 네 번이나 죽은 전남편이 마치 이승과 저승을 오가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참으로 절묘한 배합이다. 또한 교고쿠도 시리즈의 고정 출연진들의 등장도 반갑다. 수다쟁이 추젠지부터 소심한 소설가 세키구치, 다른 이의 기억을 들여다볼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인 탐정 에노키즈, 행동파 기바 형사까지 익숙한 멤버들이 여전히 출연한다. 그외에도 새로 가세한, 세상일에 달관한 듯한 낚시터 주인 아사마, 프로이트에 경도된 전직 정신과 의사 후루하타까지 '교고쿠 월드'는 점점 확대되어 간다. 독특한 등장인물에 기묘한 사건, 요괴에 대한 담론과 추젠지 아키히코의 장기인 종교, 사회, 과학 등의 장광설까지 이전 작품들의 모든 맛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조금 달라진 구석도 있다. 작가 교고쿠 나츠히코는 교고쿠도 시리즈의 세번째 작품인 <광골의 꿈>부터 본격적으로 탄탄한 시리즈를 이끌어갈 것을 구상한 듯 보인다. 제1작 <우부메의 여름>과 <망량의 상자>가 요괴 마니아의 개인적인 역작이었다면, 제3편 <광골의 꿈>부터는 그간 입증된 자신의 상업적인 역량을 극대화화려는 계획이 보인다. 무엇보다 시점이 소설가 세키구치가 친구 추젠지 아키히코를 관찰하는 1인칭 관찰자 시점에서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변했다. 기존 작품들에서는 세키구치가 기묘한 사건에 맞닥뜨리고, 해결에 고심하다 추젠지를 찾아가면서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세키구치가 가져올 수 있는 사건과 추젠지 아키히코의 개입에는 한계가 있다. 더구나 이전 작품들에서는 추젠지 아키히코의 장광설은 그걸 직접 듣는 세키구치와의 대화에서만 들어갈 수 있었는데, 시점이 자유자재가 된 이번 작품에서는 도처에 장광설이 깔린다. 신처럼 전지전능해진 작가가 무차별적으로 개입해 사건의 배경 지식, 등장인물 상호간의 대화(꼭 추젠지와 세키구치의 대화가 아니라) 등에서 온갖 지식을 쏟아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렇게 되면 자연히 추젠지 아키히코와 세키구치가 등장하지 않아도 사건은 확대되며, 이야기는 더욱 넓게 벌어질 수 있게 된다. 이에 따라 제4작, 제5작으로 얼마든지 이어질 수 있게 된 것이며, 도처에 장광설이 삽입되다 보니 자연히 페이지도 늘어난다. 원고지 매수가 늘어나면 작가 고료가 늘어나게 되는 것은 당연지사이니 이것도 교고쿠 나츠히코의 귀여운 계략이라 할 수 있겠다.

 

<광골의 꿈>은 추젠지 아키히코 이야기를 장기적으로 이끌어가려는 작가의 계획에 따라 조금 성격이 달라졌다. 예전 분위기나 시점을 마음에 들어했던 독자라면 조금 실망할 수도 있겠지만, 그 핵심은 변지지 않았다. 여전히 분위기는 음침하고, 사건은 기괴하고, 등장인물들은 매력적이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복잡한 수수께끼의 해답을 찾아냈을 때 느껴지는 그 원초적인 두뇌의 쾌감을 기억한다면, 이후의 이야기들에도 손이 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반드시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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