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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야 - 전2권 세트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권일영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6년 10월
평점 :
품절
지금도 기억에 선명한 1995년의 고베 대지진에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수많은 인명 피해와 물질직 피해가 있었던 고베 대지진은 당시 거품 경제의 붕괴로 인해 주머니가 얄팍해진 일본 시민들의 마음을 더욱 신산스럽게 만들었던 비극적인 재해였다. 금속 기술자로 평범하게 살던 마사야의 인생이 180도 바뀐 것도 고베 대지진의 영향 때문. 아버지가 운영하던 공업사의 직원으로 일하던 마사야는 회사의 도산과 아버지의 자살로 인해 공허한 상태였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외삼촌이 찾아와 아버지의 빚을 대신 갚으라고 종용하기까지 하는 데는 정말 두손 두발 다 든 상황. 그런데 그 순간 지진이 시작된 것이다. 마사야가 지진으로 붕괴된 건물에 깔린 외삼촌의 차용증서를 꺼내 없애버리려던 순간 공포영화의 한 장면처럼 외삼촌이 눈을 뜬다. 당황한 마사야는 무심결에 벽돌로 외삼촌을 때려 죽인다.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던 건 미후유라는 여자. 치명적인 매력을 가진 팜므 파탈 같은 존재다. 이제 미후유가 경찰에 신고하면 인생이 나락으로 떨어지겠구나, 걱정하던 마사야는 미후유가 사건을 은폐하는 것을 도와주는 것에 묘한 심정이 된다. 왜 나를 도와주는지, 마사야는 그 때는 알 수 없었다. 훗날 많은 대가를 치루고서야 알게 되겠지만. 이제 두 사람은 잿더미가 되어버린 고베를 떠나 돈과 환락과 성공의 기운이 요사스럽게 소용돌이치는 일본의 심장 도쿄로 향한다. 작품은 두 사람의 인생 항로를 따라 흥미진진하게 욕망과 파멸의 이야기를 펼쳐 놓는다.
제134회 나오키상 수상작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이다. 1999년의 히트작이자, 작가의 대표작이라 일컬어지는 <백야행白夜行>의 비공식 속편 격인 작품이다. 작품에도 그런 힌트가 나온다. <환야>에는 마사야 말고도 미후유의 정체를 추적하는 가토라는 형사가 나오는데, 그의 조사에 따르면 미후유가 전에 근무하던 회사는 'White Night'란다. 하얀 밤, 즉 백야다. 미후유가 하얀 밤을 거쳐 이제 '환야幻夜'의 세계로 들어왔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속편 격인 작품이라 그런지 두 작품은 굉장히 유사하다. 위험한 매력을 가진 한 여자와 그런 그녀를 사랑하는 한 남자의 사랑과 범죄의 연대기적 구성이 바로 그것이다.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는 자신의 성공작을 다시 한 번 재현하는 걸 즐기는 버릇이 있는 듯하다. <백야행>과 <환야>가 그렇고, 인터뷰를 보니 가장 최신작인 <붉은 손가락>을 작년의 히트작인 '수학천재' <용의자 X의 헌신>의 '평범한 아저씨'버전일 수도 있다고 밝혔다. 어떻게 보면 성공작을 다시 한 번 재현하려는 얄팍한 속셈일수도 있겠지만, 상업작가로서 평가할 부분도 있다고 본다. 맞는 예인지 모르겠는데 예전 임권택 감독이 <노는 계집 창>이라는 영화를 찍을 때 이런 인터뷰를 했다. <노는 계집 창>이라는 제목을 보고 극장을 찾는 사람의 그런 쪽의 욕구도 충족시켜줘야 하기 때문에 몇 번의 베드신이 꼭 필요했다고. 이미 예술영화 감독이라는 레테르가 붙은 임감독에게 베드신은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간단히 말해 싸구려 에로영화로 보일 수 있으니까. 하지만 순수하게(?) 여배우의 노출이나 정사 장면을 보기 위해 표를 끊은 사람들의 욕구도 충족시켜줘야 하므로 부득이 그런 장면을 넣었다는 말이다.
어차피 돈을 받고 영화나 소설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상업 예술가들에게 있어 독자나 관람객이 자신의 어떤 작품을 좋아하는지, 왜 좋아했는지 분석하고, 독자가 원하는 바로 '그것'을 안겨주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런 일로 보인다. 독자가 <백야행>을 좋아한다면, 그래 <환야>가 간다. 독자가 <환야>도 좋아한다면 또다른 세번째 밤이야기가 나가는 것이다. 상업작가라면 자신이 쓰고 싶은 것뿐 아니라, 독자의 욕구를 충족시켜줄 줄도 알아야 하는 법이라 생각한다. 물론 거의 비슷한 얼개를 가진 긴 장편소설을 재현하는 셈이라 작가의 피로도가 느껴지기도 한다. <백야행>에 비하면 <환야>는 뒤로 갈수록 흡입력이 떨어지고, 결말은 심지어 어이없게 보이기까지 한다. 팜므 파탈이라는 미후유의 캐릭터도 <백야행>의 유키호에 비하면 매력이 덜하고, 줄거리의 흥미진진한 곡절도 <백야행>에는 미치지 못한다.
다만 <백야행>이 60년대부터 90년대 초까지 컴퓨터나 게임기 등의 일본 기술 산업을 소재로 다루었다면 <환야>에서 미후유가 성공을 꿈꾸었던 곳이 90년대 후반의 미용 산업이었다는 것은 매우 돋보인다. 90년대 초반까지 발전 일로를 걸었던 일본의 기술 산업이 현재의 풍요를 이끌어낸 결과 90년대 후반부터는 성형이나 미용, 액세서리 등 꾸미고 치장하는 산업이 발전 일로를 걸었기 떄문이다. <백야행>과 <환야>의 주인공들-두 명의 팜므 파탈과 두 명의 헌신적인 남자-은 자신들이 몸담고 있는 경제적 환경 속에서의 성공을 위해 필연적으로 살인과 음모, 배신과 협잡 등의 범죄를 꾸민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백야행>과 <환야>라는 두 자매를 통해, 60년대부터 90년대 말까지 일본 산업의 발전 및 변화 과정을 들여다보며, 일본 사회의 지금과 같은 풍요와 경제 발전의 뒤안길에는 혹시 범죄가 잠들어 있지 않나 하는 의구심을 표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지금의 물질적 풍요 어딘가에 범죄의 기운이 잠복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작가의 질문에 답을 잘 생각해보기 바란다. 내가 세번째 밤이야기를 기대하는 것도 바로 이 이유에서다. 히가시노 게이고가 2000년대에 주목하는 산업은 무엇이며, 그곳에서 어떤 범죄의 음험한 징후를 발견하고 우리 앞에 펼쳐놓을까 하는 순수한 호기심. 세번째 밤이야기가 그 호기심을 상당 부분 충족시켜주리라 믿는다.
p.s/ 마사야가 가장 이해 안 되는 점 한 가지. 나 같으면 유코 잡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