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완벽하게 주관적인 순위입니다.
** 장르를 떠나 넓게 봤을 때 미스터리 요소가 있는 작품은 포함했습니다.
*** 국내 번역본이 나와 있는 책만을 대상으로 했고, 당연히 국내에 출간된 모든 일본 미스터리를 읽지는 못했습니다.
5위. 불야성 - 하세 세이슈
타오르는 환락의 불로 꺼질 줄 모르는 밤을 지새우는 도쿄 가부키초. 차별받는 대만인 혼혈아 류젠이는 어려서 고아가 됐고, 현재는 장물아비 노릇을 하며, 남의 등에 칼을 꽂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이 비정한 도시의 한 마리 들개처럼 살아간다. 처음으로 살인한 건 고등학교 때. 어느날 류젠이는 상하이 계파의 보스 유엔천쿠이의 호출을 받게 되고, 그로부터 옛 친구인 우휴춘이 가부키초로 돌아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휴춘은 유엔천쿠이의 오른팔을 죽이고 잠적한 상태였다. 마치 지옥의 사자 같은 유엔천쿠이는 류젠이를 이렇게 협박한다. "네 친구니까 네가 책임지고, 3일 안에 우휴춘을 내 앞에 데려와라. 그렇지 않으면 넌 죽는다."
일본 하드보일드, 느아르의 귀재 하세 세이슈의 대표작이다. 일본 사회에서 천대받는 혼혈아인 류젠이(그래서 항상 혼자다)가 상하이와 북경, 대만의 계파 전쟁에서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는 게 기둥줄거리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책에 나오는 모든 등장인물은 철저한 악인들이다. 작가는 '불야성' 가부키초를 내가 먹지 않으면 먹힌다는 정글의 생태로 치환해 독자들에게 쉽사리 잊혀지지 않을 강렬한 에너지를 선사한다. 류젠이가 받은 사형선고일은 오로지 3일, 그 3일이라는 데드라인이 주는 넘치는 긴박감과 한다 하는 지략가들의 치밀한 암투와 간계, 배신으로 점철된 인간 관계, 총격전과 육박전의 박력까지 이 모든 것이 섞여 돌아가는 불꽃 같은 작품이다. 일단 한 번 페이지를 잡으면 절대로 놓을 수 없다. 하세 세이슈는 데뷔작인 이 작품을 더쉴 해미트의 <피의 수확>에서 착안했다고 밝혔으며, <진혼가> <장한가>로 이어지는 '류젠이3부작'으로 완성했다. 소문에 의하면 이 작품들의 판권을 가지고 있는 국내 출판사가 있다는데 도대체 꿩궈먹은 소식이다. 이 책들을 내지 못할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면, 당장 출간할 것을 엄중 경고하는 바이다.
4위. 점성술 살인사건 - 시마다 소지
이시오카(그의 이름을 영어로 쓰면 아마 '왓슨'이 될 것이다)는 점성술사 친구 미타라이 키요시를 찾는다. 미타라이가 들으면 재미있어 할 이야깃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란 다름 아닌 '헤이세이 점성술 살인사건.' 태평양 전쟁 전 점성술에 홀려버린 서양화가 우메가와는 모든 미美의 정수인 '아조트'를 만들기 위해 자신의 여섯 명의 딸을 희생시킨다. 불가사의한 이 연쇄살인사건은 그후 몇 십 년 동안 누구도 풀지 못했다. 비상한 두뇌를 가진 미타라이는 곧 흥미를 느끼고 이 사건에 뛰어든다.
<점성술 살인사건>은 퍼즐 미스터리의 정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작가는 다른 곁가지를 모두 배제한 채 점성술 살인사건이라는 단 한 가지 수수께끼에만 몰두하며, 사건의 배경과 단서를 주의깊게 노출시키고, 로지컬한 추리와 독창적인 트릭에 집중함으로써 사회파나 하드보일드가 유행하던 80년대 일본 미스터리계에 신본격 열풍을 몰고 왔다. 이 작품을 읽으면 누구나 코넌 도일이나 애거서 크리스티가 득세하던 황금기의 미스터리를 떠올릴 것이다. 무엇보다 대단한 건 작품의 핵심 트릭으로서, 크리스티나 앨러리 퀸이 읽어도 혀를 내두를 만큼 뛰어나다. 어쩌면 일본인만이 착상 가능할 지도 모르는 엽기적인 트릭이지만 너무나도 기발하고 참신해 시마다 소지의 천재성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3위. 망량의 상자 - 교고쿠 나츠히코
고서점 '교고쿠도'를 운영해 별명도 교고쿠도인 수다쟁이 추젠지 아키히코는 조상 대대로 요괴를 퇴치하는 음양사 일도 병행하고 있다. 전작 <우부메의 여름>에서 밀실에서 연기처럼 사라진 남자와 18개월째 출산을 하지 못하고 있는 그의 아내의 사건을 멋지게 해결해낸 적이 있는 교고쿠도는 이 작품 <망량의 상자>에서 열차사고로 온 몸이 부서진 인형처럼 박살난 소녀가 병원에서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연기처럼 사라진 사건에 말려든다. 이 소녀의 믿지 못할 이야기와 더불어 연달아 벌어지는 기묘한 사건들을 하나로 꿰어 교고쿠도는 사건의 압도적인 비밀과 진실을 독자들 앞에 펼쳐놓는다.
일본 전통의 요괴를 미스터리와 결합하고, 독특한 개성을 가진 등장인물들을 창조해 일종의 '교고쿠 월드'안에서 뛰어놀게 만드는 교고쿠 나츠히코는 일본 내에서 현재까지 신드롬적인 인기를 구가하는 작가다. 주인공 교고쿠도의 입을 통해 요괴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동, 서양의 온갖 현학을 어마어마하게 펼쳐놓는 취향이 있어 1,000페이지를 예사로 넘는 엄청난 볼륨이지만 현실에서 접할 수 없는 기이하고 환상적인 분위기가 충분히 독자를 몰입시킨다. 이제는 슬슬 물리는 감도 있고, 너무 길어 읽기 힘들다는 독자도 조금씩 나오지만 <망량의 상자> 단 한 편만으로도 작가는 존경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기묘한 사건들이 하나로 합쳐져 진실의 밑그림이 그려지는 결말의 스펙타클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이고, 지옥의 풍경을 잠깐 엿본 듯한 그로테스크함도 일품이다. 일본 미스터리 사상 손꼽힐 만한 역작.
2위. 마크스의 산 - 다카무라 가오루
씨가 있어야 꽃도 피고 나무도 되는 것처럼 모든 비극에는 그 출발점이 있기 마련이다. 1976년 일본의 미나미 알프스에서 한 가족이 자동차 배기가스 자살을 시도해 사내아이 하나만 구사일생으로 살아난다. 곧 시간적 배경은 1991년 현재로 돌아와 사회의 엘리트들이 연속으로 살해되는 사건이 그려진다. 수사 1과 7계 고다 주임 외 경관들이 밝혀낸 바에 의하면 그들은 한 대학교의 등산회원으로 동기생들이다. 왜 그들은 죽어야 했을까? 고다가 밝혀내는 사건의 진상에 독자들은 아연해질 것이다.
1993년 제109회 나오키상 수상작. 현대 일본 경찰소설의 최고봉으로 작가 다카무라 가오루의 지금의 입지를 만들어준 결정적인 작품이다. 과거의 사건들과 현재의 사건이 맞물려 돌아가는 절묘한 구성과 일가족 자살사건, 전공투 등의 소재를 통해 당대 일본 사회를 소설 안에 오롯이 재현하려는 노력이 돋보이며, 엄청난 취재가 선행되었으리라 여겨지는 수사 과정의 정밀한 묘사가 입을 다물게 한다. 끝모를 허무감과 비애에 젖어 있는 고다에 대한 묘사도 훌륭하며, 산으로 시작해 산으로 귀결되는 결말의 감동 역시 일품이다. 고다 시리즈는 <석양에 빛나는 감>과 <레이디 조커>로 이어지는데, 국내에서는 '일본 미스터리의 여왕'으로 일컬어지는 다카무라 가오루의 작품들을 별로 만나볼 수 없어 늘 안타깝게 생각한다.
1위. 화차 - 미야베 미유키
은퇴할 나이에 부상을 당해 휴직 중에 있는 혼마 형사에게 처조카가 찾아와 자신의 약혼녀를 찾아 달라고 부탁하면서 사건은 시작된다. 결혼을 얼마 남겨두지 않고 실종된, 단지 소박한 행복을 느끼는 게 꿈의 전부였던 그 여자 세키네는 과연 어디에 있을까? 미스터리 소설의 세계에서는 어찌 보면 평범하다 할 수 있는 한 여자의 실종이라는 사건의 조사에서 속속 드러나는 사실들은 자못 충격적이며, 담배나 술이 절로 떠오를 만큼 우울하고 애절하다.
이 작품은 거대 자본주의에 매몰된 현대 사회의 여러 병폐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 특히 무엇보다 집중하고 있는 건 신용카드를 이용한 손쉬운 대출과 그 대출금을 막지 못해 젊은 나이에 나락으로 떨어지고 마는 가련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마쓰모토 세이초의 손녀'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미야베 미유키는 좀더 현대적이고 우리의 일상과 밀접하게 연결된 신용카드라는 소재를 통해 침체에 빠진 사회파 미스터리의 면모를 혁신하고, 결국 애초에 돈 있는 자만 배를 불리고, 돈이 없는 사람은 끝없이 착취당하며 살아야 하는 자본주의의 본질에 접근한다. 그야말로 화차(지옥의 불수레)에 탄 것처럼 완전히 모든 걸 빨리기 전까지는 절대로 놓아주지 않는 현대 자본주의라는 괴물을 성공적으로 그리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노련한 미야베 미유키는 사회 비판에만 매몰되어 작품을 딱딱하게 만드는 멋없는 짓거리는 하지 않는다. 안개 속을 헤매는 것처럼 단서 하나없는 실종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은 일급 미스터리로 손색이 없다. 등장하는 인물 하나 하나 개성이 넘치고 인간을 잘 그린다는 세평답게 심리 묘사도 완벽에 가깝다. 개인적으로는 몇 년 전 미스터리를 다시 잡았을 때만 해도 웬지 유치한 걸 읽는다는 부끄러움에 주변 사람들에게 떳떳이 권하지 못했는데, 메시지와 재미를 완벽하게 결합한 <화차>를 읽고 나서야 미스터리를 잡는 손이 부끄럽지 않게 되었다. 내게는 <화차> 이전과 이후가 분명하게 나눠질 만큼 의의가 큰 작품이라 1위로 선정했음을 아울러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