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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미스터리한 일상
와카타케 나나미 지음, 권영주 옮김 / 북폴리오 / 2007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얼마 전 통계를 보니 우리나라 직장인들이 평균 한 달 6회 정도의 술자리를 갖는다고 나와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평균적인 직장인들의 한 달 술자리 횟수를 한 주에 벌써 달성하는 경이적인 스케쥴을 자랑합니다. 저의 경우는 주로 직장 근처나 지인이 계시는 서울에서 술자리를 많이 갖기에 집이 있는 인천까지 시외버스를 타고 새벽 2시나 되서야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느 때와 같이 버스를 타고 새벽에 오는데, 무심코 시선을 옆으로 돌려보니 우리 집 바로 맞은편 중학교의 모든 방(교실, 교무실, 화장실 할 것 없이 전부)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이었습니다. 야간 자율학습인가, 생각해봤지만 중학생들을 모두 새벽까지 붙잡아두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만약 야간자율학습을 하더라도 저렇게 필요없는 방까지 전부 불을 켜둘 이유는 없을 겁니다. 의아하다 하면서도 그날은 그냥 집에 들어갔지만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역시 술자리는 계속되었고, 학교 모든 방에 전깃불은 3일 연속으로 켜져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호기심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도대체 이유가 뭘까, 왜 불을 저렇게 다 켠 거지? 아마도 이러한 것이 일상의 미스터리가 아닐까 싶습니다. 살아가면서 겪는 소박한 의문들, 별 거 아니지만 한번 궁금증이 들면 알 때까지 잠도 안 오는 그런 답답한 질문들을 속 시원히 해결해 작지만 커다란 기쁨을 안겨주는 그런 미스터리의 한 장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제가 궁금증을 참다 못해 그 중학교에 몰래 잠입해 조사를 펼치다, 학교가 정부 지원금을 더 받기 위해 일부러 모든 방에 전기를 밤새도록 틀어놓아 전기요금을 올리려 했다는 음모(?)를 밝혀내는 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면 역시나 한 편의 일상 미스터리가 되는 셈이겠지요.
와카타케 나나미의 1991년 데뷔작 [나의 미스터리한 일상]은 '일상의 수수께끼' 계열의 작품 중 손 꼽힌다고 하는데 이제야 소개되었습니다. 도입부부터 참으로 신선합니다. 건설회사 사보 편집장인 와카타케 나나미(작가와 동명이네요)가 사보에 매달 한 편씩 실을 소설들을 대학 선배인 소설가에게 의뢰합니다. 선배 소설가는 고사하는 대신에 친구인 익명 작가를 소개시켜 주고 다음 달부터 익명 작가의 원고가 날아옵니다. 작품은 1년 동안 진행되는 소설 연재에 맞춰 4월부터 다음 해 3월까지 총 12편이 단편이 수록되어 있고, 연재 종료 시점에서 와카타케 나나미가 익명 작가를 만나러 가는 '편집자 후기'가 들어가며, 최후의 반전을 이끌어내는 '익명 작가의 마지막 편지'로 막을 내립니다.
참으로 교묘한 구성입니다. 매 단편은 사보의 형식을 그대로 따라 앞에는 사보 '르네상스'의 목차가 먼저 소개되고, 그 다음에 소설이 시작됩니다(보시기에 따라 전혀 쓸모없어 보이는 목차지만 최후 반전의 순간에 이마저도 활용하는 작가의 아이디어가 돋보입니다). 소설들은 계절감에 맞게 2월에는 발렌타인 데이에 얽힌 사건이, 4월에는 벚꽃놀이, 12월에는 크리스마스 케이크가 등장하는 식이라 우리네 일상과 한층 밀착된 느낌을 받을 수 있고, 내용적으로는 암호부터, 밀실 소실, 오싹한 괴담까지 다양해 맛있는 잔치상을 펼쳐놓은 느낌입니다.
가장 추천할 만한 작품은 쇼핑중독증에 걸려버린 친구를 미행하는 <1월 정월탐정>으로 근래 본 미스터리 단편 중 최고의 완성도라 생각합니다. 깔끔한 트릭과 잘 배치된 단서로 어느 미스터리 단편 앤솔로지에 실려도 충분할 듯 해요. 이외에도 상가 대항 야구 게임에서 사인을 훔친다는 혐의를 받는 야구 코치가 남긴 암호를 밝혀내는 <6월 눈 깜짝할 새애>는 암호 미스터리 역사상 가장 코믹하고 재치있는 트릭을 볼 수 있구요. 전화 통화로만 진행되는 <2월 밸런타인, 밸런타인>은 사소한 속임수지만, 이런 소담한 이야기야말로 진정한 일상 속의 보석이 아닐까 생각되어 너무 흐뭇해졌어요.
다만 몇몇 이야기는 일본의 정월 풍습이나 식습관 등의 문화적인 부분이나, 일본 말에 능통하지 못하면 쉽사리 이해할 수 없는 것들도 있습니다. 이건 어쩔 수 없는 부분인데, 만약 트릭이 시체를 사지절단해 팔 다리를 동서남북으로 늘어놓는다는 식으로 너무 거창해진다면 이미 일상의 미스터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일상의 미스터리는 예를 들어 우리가 살면서 흔히 겪을 수 있는 동음이의어로 인한 사소한 오해나 자주 겪는 실수담 등을 이용해 소박하게 만들어 나가는 것이 비결이므로 어쩔 수 없이 일본 문화의 자잘한 것들이나 일본 말의 음운의 유사성 등이 자주 나오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수밖에는 없겠네요.
조금 부족한 이야기나 약간 납득이 안 가는 설정의 단편들도 분명히 있지만, 전체적으로 따뜻하고 소박한 분위기에 가끔씩 까무라치게 재미있는 작품들이 등장하는 인상적인 단편집입니다. 90년대 초반 일상 미스터리 유행에 큰 역할을 했다고 하는데 제게는 이 장르가 어찌 보면 미스터리의 미래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미스터리가 특유의 과장이나 비현실적인 특징 때문에 폄하되기도 하는데, 일상 미스터리는 적어도 현실적인 공간과 배경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공감가게 그리는 특징이 있으니 말입니다.
[나의 미스터리한 일상]에 실린 이야기들은 비록 소박하고 정감있는 것들이 많지만 익명 작가의 마지막 편지로 밝혀지는 모든 사건의 전모는 그리 녹록하지 않습니다. 옮긴이의 말을 읽어보면 와카타케 나나미는 악의와 독으로 수놓아진 오싹한 뒷맛으로도 유명하다고 하는데, 과연 그런 모양입니다. 모든 이야기들을 관통하는 평화로운 분위기에서 그런 씁쓸한 결말이라니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단편집 하나로 와카타케 나나미의 앞맛과 뒷맛을 전부 파악하는 건 무리가 있겠고, 더 많은 작품을 보면 스타일이 분명해지겠죠. 새로이 알게 된 작가가 읽을 만한 가치가 있음이 확인되는 순간은 언제나 그렇듯 몹시 짜릿합니다. 와카타케 나나미의 짜릿한 소설들을 계속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