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의 공놀이 노래 시공사 장르문학 시리즈
요코미조 세이시 지음, 정명원 옮김 / 시공사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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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곳마다 피가 바다를 이루고 시체가 산처럼 쌓인다는 살성殺星 긴다이치 코스케(물론 그가 사람들을 죽인다는 건 아니다. 워낙 명탐정이다 보니 도처에서 벌어지는 살인사건에 두루 참가해서 그런 이야기가 나오는 듯). 끝없이 죽고 죽이는 인간군상들의 악귀 같은 모습에 지쳐서일까, 모처럼 쉬면서 휴양을 하기로 한다. 그가 선택한 장소는 예전 <옥문도>와 <팔묘촌>에서 난해한 연쇄살인사건을 해결한 적이 있어 인연이 깊은 오카야마 현. 돈 안 되는 탐정 일만 주로 맡았던 사람이라 주머니 사정도 별로기에 귀수촌이라는 산골 마을에 틀어박혀, 고급 온천도 아닌 2류 여관 '거북탕'에서 당분간 유유자적하려 했으나 추가로 지출이 계속 발생하게 되니, 꽃다운 이십대 처녀 3명이 하루에 하나씩 살해되는 터에 부의금으로 허리가 휘게 생긴 것이다(실제로 긴다이치는 부의금을 낸다). 역시 명탐정의 운명을 타고난 긴다이치 코스케, 이쯤되면 그가 사건을 뒤쫓는 것이 아니라 사건이 그의 뒤를 쫓아온다고 할 수 있으렷다.

작품의 시대적 배경인 1955년도는 이미 일본 사회가 패전의 멍에를 벗고 점차 발전의 기치를 높이 올리던 시기였으나, 귀수촌은 여전히 과거의 인습에 꽁꽁 묶여 있다. 전통적인 일본의 주군 문화에 영향을 받아서일까, 마을 사람들은 양대 세력인 니레 가와 유라 가로 편이 갈려 서로 반목하며 주도권을 잡으려 대결을 펼친다. 또한 원래 귀수촌을 지배했던 영주 가문의 후손인 다타라 호안은 아내를 8명이나 갈아치우며 유유자적하다 완전히 몰락했음에도 무시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평판을 듣는다. 하지만 두 가문의 치열한 싸움은 20년 전 유라 가가 사기꾼 온다의 꼬임에 넘어가 본의 아니게 마을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히고, 더군다나 그 사기꾼 온다가 자신의 사기를 눈치챈 거북탕(긴다이치가 현재 머물고 있는)의 아들까지 살해하고 잠적하면서 니레 가에게로 완전히 패권이 넘어간다. 과거는 망령처럼 언제까지고 죽지 않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미치는 법, 귀수촌에서 현재 발생한 연속살인사건에는 아픈 과거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는지도 모르겠다.

니레 가고 유라 가고를 떠나서 전후는 가문이 중심이 아니라 인물이 중심이 되는 사회. 어른들끼리의 반목은 떠나 그들의 후손들은 스물 전후의 진취적인 젊은이들답게 서로들 친하게 지내고 있다. 사기꾼 온다의 딸이자 현재 일본 최고의 인기 스타가 된 오조라 유카리가 귀수촌으로 귀향한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마을의 선남선녀들은 힘을 모아 떠들석한 축하 파티를 준비한다. 그러나 유카리가 돌아온 날, 다타라 호안이 집에서 실종되고, 사흘 연속으로 밤마다 살인이 계속되는데, 첫째 밤은 유라 가의 딸, 둘째 밤은 니레 가의 딸, 마지막으로 거북탕의 딸이다. 개가 변을 끊지 긴다이치가 어찌 사건을 끊으랴. 그는 휴양이라는 본래 목적도 잊고 사건에 뛰어드는데, 곧 귀수촌에는 전래의 '공놀이 노래'가 있다는 걸 알게 된다. 공놀이 노래의 내용과 비슷하게 살해당한 처녀들, 긴다이치는 이 사실을 바탕으로 곧장 사건의 핵심에 뛰어든다.

<악마의 공놀이 노래>는 일본의 국민탐정 긴다이치 코스케를 창조해 국민추리작가가 된 요코미조 세이시의 후기 수작이다. 작품을 발표한 시기는 1960년으로 사실상 요코미조 스타일의 본격 추리가 쇠퇴일로에 접어들었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마쓰모토 세이초가 <점과 선> <제로의 초점> 등의 작품으로 기존 추리소설의 낡은 면모를 일신하고 당대 현실을 작품 안에 끌어들여 비평적으로도 찬사를 받았던 사회파 추리소설을 대유행시킨 게 1957년경이니 이미 1930년대부터 활동했던 요코미조 세이시는 올드패션이 되어버린 셈이다. 이렇듯 인기가 밀린 요코미조가 절치부심 내놓은 작품이라 하겠으나 실제로 읽어보면 그다지 조급해하는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느긋한 필치로 익숙한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의 규칙들을 차근차근 펼쳐내고 있다.

전기가 들어오고 자동차가 다니며 비행기가 날아가는 시대에도 여전히 낡은 인습에 사로잡혀 자신들의 가치를 강요함으로써 필연적으로 비극을 부르는 등장인물들을 비롯해, 죽음조차 한없이 아름답게 그리는 극도의 탐미주의(이번 작품에서는 늪 속에 빠져 시체로 발견된 유라 가의 딸 야스코의 기모노가 물 속에서 하늘하늘 흔들리며 햇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는 모양을 특별히 공들여 묘사하는데, 어쩌면 요코미조 세이시가 즐겨 연쇄살인을 그리는 이유는 아름답게[?] 단장된 시체에 거의 패티시즘적인 집착을 보이는 그가 장기를 다양하게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주도면밀하게 단서를 배치하고 결말에서 그동안 모은 단서를 통해 범인을 밝혀내는 명탐정의 활약에 집중하는 서양 본격 추리소설의 일본화(<악마의 공놀이 노래>에서는 동요에 맞춰 살인이 일어나는 애거서 크리스티식 마더구스 추리소설을 일본화하는데 주력한다)까지 긴다이치 코스케 스타일은 크게 달라진 게 없다. 세태에 따라 달라진 추리소설 팬들의 입맛에 나까지 굳이 맞춰야 하냐는 노장의 자존심이 엿보인다고 해야 할 듯.

복잡한 문제를 복잡하게 보려면 한없이 복잡해지는 법, 되도록 하나하나 순서대로 단순하게 봐야 풀리는 게 세상의 이치다. <악마의 공놀이 노래>에서 긴다이치가 해결하는 사건의 진상도 실상은 정말로 단순해 외려 허를 찔리고 만다. 왜 이 생각을 못 했을까, 하며 스스로를 자책하고 머리를 쥐어뜯게 되기 십상인데, 다행히 요코미조는 중요한 단서가 나오는 장면장면마다 "여기에 긴다이치가 주목하지 못한 것이 한이었다. 긴다이치는 나중에 이 사실을 알고..." 운운하며 독자에게 공정한 힌트를 주려 노력한다. 역시 본격추리라고 지나치게 머리 싸매고 볼 필요는 없고 그저 잠깐 쉬어가는 마음으로 느긋하게 보라는 작가의 씀씀이같아 흐뭇해진다. 언제나 그렇듯 동기가 약간 허망하지만 어차피 요코미조의 세계에서 동기란 그리 중요한 요소가 아니다. 그에게 추리소설은 현실과 무관한 순수한 도락이요, 온전한 즐거움이 전부니까. 작품에 등장하는 가장 빠른 운송수단은 자전거, 비가 오면 하룻밤 쉬어가는 여유로운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그다지 복잡하지 않은 단순하면서도 의표를 찌르는 트릭을 만끽할 수 있는 <악마의 공놀이 노래>는 서서히 작가생활의 황혼기를 맞아가는 노 추리작가가 느긋한 마음으로 풀어낸, 그래서 독자 역시 느긋하게 즐길 수 있는 멋진 본격 추리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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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동 수집가 1
자비네 티슬러 지음, 권혁준 옮김 / 창해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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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부분의 이야기들이 앞부분에서 암시되고 짐작 가능한 소설이지만, 완벽하게 아무 정보없는 상태로 보시고 싶은 분들은 주의하시길. 
 

현대 영화계의 거장 알프레드 히치콕은 한창 활동할 때 애거서 크리스티나 앨러리 퀸 등의 미스터리 대가들의 작품들이 전 세계적인 인기를 끌었음에도 미스터리 영화를 만들지는 않았다. 누군가(아마도 프랑소와 트뤼포일 듯) 그 이유를 물어보자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충 이렇게 답했다. "예전에 어느 라디오 방송국에서 시골을 무대로 벌어지는 미스터리극을 시리즈로 만들어 많은 인기를 끌었는데, 그걸 시기한 다른 방송국에서 범인이 밝혀지는 최종회 몇 시간 전에 범인은 집사다, 라고 미리 발표해버렸습니다. 그토록 높은 청취율을 보인 프로그램이었지만 최종회는 거의 아무도 듣지 않았습니다. 미스터리는 역시 범인의 정체를 밝혀내는 데만 모든 신경을 곤두세워 막상 범인이 중간에 드러나면 힘이 떨어집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미스터리와 서스펜스는 다릅니다. 누가 누구를 죽였나에 몰두한다기보다는 극중에서의 긴장감을 강조하는 서스펜스는 초반에 범인이 등장해도 끝까지 관객을 몰입시킬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거지요."

독일의 신인 스릴러 작가가 쓴 <아동수집가>의 전략도 여기에 있다. 아주 간단히 내용을 요약하자면, 이탈리아로 휴가여행을 떠났다가 열 살 남짓한 아들을 유괴당하고 아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른 채 10년 동안 애태우며 사는 독일인 엄마가 있다. 남편 역시 절망적인 현실에 몹시 힘들어하지만 그는 서서히 비극에서 벗어나고 싶어한다. 아들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어쨌든 살 사람은 살아가야 하지 않나, 는 게 남편의 생각이다. 아내는 남편의 말에 승복할 수 없다. 잊는다는 건 곧 포기하는 게 되니까. 아내는 남편의 곁을 떠나 10년만에 끔찍한 범죄의 현장으로 되돌아온다.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이탈리아 토스카나 마을로. 그곳에서 머물며 아들을 다시 찾아보려는 일념으로 여자는 살 집을 구하는데, 마음에 꼭 드는 집이 곧 나타난다.

그 집을 내놓은 주인 남자는 어딘지 속세를 벗어난 듯한 신비스러운 매력이 있다. 익숙치 않은 여자의 시골 생활을 도와주며 친절을 베풀어 친구가 되어준 그 남자. 누구나 짐작할 수 있듯이 그 남자가 아들을 유괴하고 살해한 범인이다. 하늘의 그물은 성기지만 광대해 누구도 피해갈 수 없다는 말처럼 천만분의 일의 우연으로 그토록 찾아 헤맨 범인과 이렇게 만나게 된 것이다(그만큼 플롯이 우연에 의지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된다). 여자는 남자의 정체를 모르지만 독자는 모든 걸 알고 있다. 우리는 점점 가까워지는 두 사람을 보고 이렇게 외치게 될 것이다. "안 돼, 그 남자가 범인이란 말야. 가까이 하면 안 된다고!"

2권으로 나눠서 출간된 <아동수집가>의 1권은 어린 시절의 학대와 무관심으로 정신에 이상을 일으켜 아동들을 납치하고 성폭행한 후 살해하는 남자의 범행 과정을 다큐멘터리처럼 사실감있게 보여주는데 치중하고, 2권은 전술한 대로 살해당한 한 아이의 엄마가 범인의 정체도 모르면서 서로 가까워지게 되는 서스펜스에 몰두한다. 처음부터 모든 내용이 확 까발겨지기 때문에 그다지 머리쓸 구석은 없지만, 긴장감으로 손톱은 제법 물어뜯게 된다. 연쇄적으로 아동을 살해하는 남자의 심리나 그의 성장배경을 통해 범죄자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에 대한 질문에도 답하고, 아이를 잃고 세상이 끝난 듯 절망속으로 침잠하는 부모들의 이야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겠지만 눈시울이 붉어진다. 속도감이나 진행은 느릿느릿하지만 아무것도 모른 채 '적과의 동침'을 경험하는 여주인공의 이야기 자체가 주는 서스펜스도 그럴싸한 편이고. 

이렇게 보면 유괴를 소재로 한 꽤 훌륭한 서스펜스 스릴러 소설이다, 하고 부족한 이 독후감을 끝마쳐야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엄지손가락을 주저없이 치켜들 순 없을 것 같다. 안타깝지만 그러기에는 부족한 구석이 제법 커 보인다. 무엇보다 커다란 문제는 주인공의 행동에 개연성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아동연쇄 유괴살해사건의 범인인 알프레드 피셔(그의 정체는 첫 장부터 나오기 때문에 스포일러라고 할 수 없다)의 행동은 도무지 설명하기에 요령부득인데 자신을 파멸시킬 가장 강력한 증거가 있는 장소를 아무 이유없이 팔아치워 위기를 자초하는가 하면, 특별한 설명도 하지 않은 채 아동 외에는 성욕을 느끼지도 않으면서 성인 여자를 유혹해 동거하기도 한다. 여러 명의 아이를 유괴하면서도 나름 치밀하게 범행을 저질러 발각되지 않았던 알프레드는, 결말에선 부모가 자기에게 오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는 한 아동에게 예의 그 끔찍한 짓을 저질러 결국 체포되고 만다. 제일 먼저 의심받을 걸 뻔히 알면서도 그런 행동을 보인 걸 그냥 이 남자의 광기가 도저히 통제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독자들이 알아서 이해해야 하나? 그건 좀 아닌 것 같다. 이런 몇 가지 개연성없는 부분들은 내 생각에 신인 작가가 처음에 구상했던 플롯에만 너무 매몰되어 그것들이 얼마나 어색한가를 파악할 수 있는 눈을 잃었기 때문인 것 같다. 몇몇 어색한 부분들을 수정한다면 지금보다는 훨씬 나아질 수 있는 작품이라 아쉬움이 더 크게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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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의시 2007-07-22 2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리뷰 감사합니다^^ 고민이 해결됐어요.

jedai2000 2007-07-22 2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살지 말지 고민을 하셨나보네요 ^^ 아이 유괴 같은 건 정말 최악의 범죄니까 그런 점에서 경각심을 일깨워주는 면은 있지만 구조적으로 아주 훌륭한 작품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마호로 역 다다 심부름집 - 제135회 나오키 상 수상작
미우라 시온 지음, 권남희 옮김 / 들녘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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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35회 나오키상 수상작으로 많은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미우라 시온의 작품. 작년인가 어느 단편집에 그녀의 아주 짧은 단편 하나가 실려, 나와는 그 작품으로 첫 대면을 했는데 한 남자 사극배우와 그의 애인이 등장하는 사랑이야기였다. 평범한 이야기지만 남자가 마침내 사랑을 고백하는 순간의 떨림이나 청춘만이 내뿜을 수 있는 들뜬 열기가 인상적인 괜찮은 소품이었다는 기억이 남아 있다. 그후 나름 주목하고 있었지만 의외로 다른 작품들이 소개되지 않아 항상 섭섭하다가 마침내 현재까지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작품을 만나게 되었으니, 이런 걸 전화위복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도쿄 변두리의 마호로 시(가공의 도시지만 모델이 된 실제 도시가 있다 한다)에서 심부름집을 홀로 운영하고 있는 다다. 아픈 사연을 간직한 삼십대 이혼남인 그는 안정된 회사를 박차고 나와 여행 간 주인을 대신해 치와와를 돌봐준다거나, 개집을 고쳐준다거나, 문짝을 수리해주는 등 별 볼 일 없는 일들을 대행해주며 살아간다. 매서운 바람이 차가운 어느 겨울날, 여느 떄처럼 시시한 업무를 마치고 사무실과 가정집을 겸하는 심부름집으로 귀환하려는 찰나 인생의 전환점이 될 누군가를 만나게 된다.

그 추운 날, 맨발에 샌달을 신고 궁상맞게 앉아 있는 남자의 이름은 교텐. 공교롭게도 다다의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학창시절 내내 단 한번도 입을 열지 않았던 괴짜 교텐과는 사실 친구라고 할 수는 없는 관계지만 다다에게는 그에게 갚아야 할 마음의 빚이 있었다. 미술 시간에 장난을 치다가 재단기에 교텐의 새끼손가락을 잘라버린 것이다. 다행히 손가락은 붙일 수 있어 피는 통하지만 감각은 죽어버려 움직일 수는 없다. 항상 그게 미안했던 다다는 갈 곳이 없어 보이는 교텐을 집으로 데려온다(없어 보이는 게 아니라 사실 갈 곳이 없었다). 그날부터 교텐은 진득이 눌러앉아 다다의 심부름 일거리에 따라다니는데, 별로 일에 도움은 되지 않는다. 멀거니 서 있다 마지못해 도와주는 정도. 하지만 매사 즉홍적이고 감정적인 교텐은 일을 도와주기보다는 만드는 편이니 다다가 속이 좀 많이 타겠다.

언제나 지나간 아픔에 매여사는 다다와 작품에 직접적으로 등장하진 않지만 새끼손가락의 상흔만큼이나 역시 깊은 상처를 품고 있는 교텐이 어느 순간부터 서로에게 위안이 되고, 의지가 되어간다. 이외에도 다다 심부름집에 일을 맡긴 콜럼비아 창녀와 부모에게 버림받은 초등학생, 부모를 살해한 용의자의 친구 여고생, 가정 형편 때문에 기르던 치와와와 이별해야 하는 소녀 등 다양한 의뢰인들과의 만남이 두 사람에게 삶에 대한 깨달음을 준다. 내내 고독하고 허무했던 두 사람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온기를 느끼고 절망으로 가득찬 인생에서 한 발짝을 내밀어 마침내 탈출한다는 고전적인 문학의 주제를 유쾌하게 그리고 있다. 나오키상 수상작치고는 약간 가벼운 느낌이지만 무겁다면 무거울 수 있는 주제에 짓눌리지 않고 자유자재로 다다, 교텐, 그리고 독자를 이끌어가는 미우라 시온의 솜씨가 인상 깊었다. 깃털같이 가볍고 무난하다가도 어느 순간 귀 기울여 들을 만한 메시지를 던지는 느낌이 썩 괜찮은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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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의시 2007-07-17 0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볼까 말까 고민이 많은 책입니다^^;;

jedai2000 2007-07-17 0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큰 기대만 않는다면 읽는 재미도 있고, 여운도 남는 좋은 책입니다. 한번 읽어보세요^^

쥬베이 2007-08-06 15: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읽었습니다. 바로 위 제다이님 평이 와닿는군요. 큰기대 안하면 괜찮고. 기대하면 이하

jedai2000 2007-08-07 0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쥬베이님...그래도 전반적으로 따뜻한 이야기라 느낌은 좋았던 것 같아요. 아주 힘 안 주고 적당히 훈훈한 이런 이야기 좋지 않나요^^?
 
나의 미스터리한 일상
와카타케 나나미 지음, 권영주 옮김 / 북폴리오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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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통계를 보니 우리나라 직장인들이 평균 한 달 6회 정도의 술자리를 갖는다고 나와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평균적인 직장인들의 한 달 술자리 횟수를 한 주에 벌써 달성하는 경이적인 스케쥴을 자랑합니다. 저의 경우는 주로 직장 근처나 지인이 계시는 서울에서 술자리를 많이 갖기에 집이 있는 인천까지 시외버스를 타고 새벽 2시나 되서야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느 때와 같이 버스를 타고 새벽에 오는데, 무심코 시선을 옆으로 돌려보니 우리 집 바로 맞은편 중학교의 모든 방(교실, 교무실, 화장실 할 것 없이 전부)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이었습니다. 야간 자율학습인가, 생각해봤지만 중학생들을 모두 새벽까지 붙잡아두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만약 야간자율학습을 하더라도 저렇게 필요없는 방까지 전부 불을 켜둘 이유는 없을 겁니다. 의아하다 하면서도 그날은 그냥 집에 들어갔지만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역시 술자리는 계속되었고, 학교 모든 방에 전깃불은 3일 연속으로 켜져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호기심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도대체 이유가 뭘까, 왜 불을 저렇게 다 켠 거지? 아마도 이러한 것이 일상의 미스터리가 아닐까 싶습니다. 살아가면서 겪는 소박한 의문들, 별 거 아니지만 한번 궁금증이 들면 알 때까지 잠도 안 오는 그런 답답한 질문들을 속 시원히 해결해 작지만 커다란 기쁨을 안겨주는 그런 미스터리의 한 장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제가 궁금증을 참다 못해 그 중학교에 몰래 잠입해 조사를 펼치다, 학교가 정부 지원금을 더 받기 위해 일부러 모든 방에 전기를 밤새도록 틀어놓아 전기요금을 올리려 했다는 음모(?)를 밝혀내는 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면 역시나 한 편의 일상 미스터리가 되는 셈이겠지요.

와카타케 나나미의 1991년 데뷔작 [나의 미스터리한 일상]은 '일상의 수수께끼' 계열의 작품 중 손 꼽힌다고 하는데 이제야 소개되었습니다. 도입부부터 참으로 신선합니다. 건설회사 사보 편집장인 와카타케 나나미(작가와 동명이네요)가 사보에 매달 한 편씩 실을 소설들을 대학 선배인 소설가에게 의뢰합니다. 선배 소설가는 고사하는 대신에 친구인 익명 작가를 소개시켜 주고 다음 달부터 익명 작가의 원고가 날아옵니다. 작품은 1년 동안 진행되는 소설 연재에 맞춰 4월부터 다음 해 3월까지 총 12편이 단편이 수록되어 있고, 연재 종료 시점에서 와카타케 나나미가 익명 작가를 만나러 가는 '편집자 후기'가 들어가며, 최후의 반전을 이끌어내는 '익명 작가의 마지막 편지'로 막을 내립니다.

참으로 교묘한 구성입니다. 매 단편은 사보의 형식을 그대로 따라 앞에는 사보 '르네상스'의 목차가 먼저 소개되고, 그 다음에 소설이 시작됩니다(보시기에 따라 전혀 쓸모없어 보이는 목차지만 최후 반전의 순간에 이마저도 활용하는 작가의 아이디어가 돋보입니다). 소설들은 계절감에 맞게 2월에는 발렌타인 데이에 얽힌 사건이, 4월에는 벚꽃놀이, 12월에는 크리스마스 케이크가 등장하는 식이라 우리네 일상과 한층 밀착된 느낌을 받을 수 있고, 내용적으로는 암호부터, 밀실 소실, 오싹한 괴담까지 다양해 맛있는 잔치상을 펼쳐놓은 느낌입니다.

가장 추천할 만한 작품은 쇼핑중독증에 걸려버린 친구를 미행하는 <1월 정월탐정>으로 근래 본 미스터리 단편 중 최고의 완성도라 생각합니다. 깔끔한 트릭과 잘 배치된 단서로 어느 미스터리 단편 앤솔로지에 실려도 충분할 듯 해요. 이외에도 상가 대항 야구 게임에서 사인을 훔친다는 혐의를 받는 야구 코치가 남긴 암호를 밝혀내는 <6월 눈 깜짝할 새애>는 암호 미스터리 역사상 가장 코믹하고 재치있는 트릭을 볼 수 있구요. 전화 통화로만 진행되는 <2월 밸런타인, 밸런타인>은 사소한 속임수지만, 이런 소담한 이야기야말로 진정한 일상 속의 보석이 아닐까 생각되어 너무 흐뭇해졌어요.

다만 몇몇 이야기는 일본의 정월 풍습이나 식습관 등의 문화적인 부분이나, 일본 말에 능통하지 못하면 쉽사리 이해할 수 없는 것들도 있습니다. 이건 어쩔 수 없는 부분인데, 만약 트릭이 시체를 사지절단해 팔 다리를 동서남북으로 늘어놓는다는 식으로 너무 거창해진다면 이미 일상의 미스터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일상의 미스터리는 예를 들어 우리가 살면서 흔히 겪을 수 있는 동음이의어로 인한 사소한 오해나 자주 겪는 실수담 등을 이용해 소박하게 만들어 나가는 것이 비결이므로 어쩔 수 없이 일본 문화의 자잘한 것들이나 일본 말의 음운의 유사성 등이 자주 나오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수밖에는 없겠네요.   

조금 부족한 이야기나 약간 납득이 안 가는 설정의 단편들도 분명히 있지만, 전체적으로 따뜻하고 소박한 분위기에 가끔씩 까무라치게 재미있는 작품들이 등장하는 인상적인 단편집입니다. 90년대 초반 일상 미스터리 유행에 큰 역할을 했다고 하는데 제게는 이 장르가 어찌 보면 미스터리의 미래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미스터리가 특유의 과장이나 비현실적인 특징 때문에 폄하되기도 하는데, 일상 미스터리는 적어도 현실적인 공간과 배경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공감가게 그리는 특징이 있으니 말입니다.

[나의 미스터리한 일상]에 실린 이야기들은 비록 소박하고 정감있는 것들이 많지만 익명 작가의 마지막 편지로 밝혀지는 모든 사건의 전모는 그리 녹록하지 않습니다. 옮긴이의 말을 읽어보면 와카타케 나나미는 악의와 독으로 수놓아진 오싹한 뒷맛으로도 유명하다고 하는데, 과연 그런 모양입니다. 모든 이야기들을 관통하는 평화로운 분위기에서 그런 씁쓸한 결말이라니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단편집 하나로 와카타케 나나미의 앞맛과 뒷맛을 전부 파악하는 건 무리가 있겠고, 더 많은 작품을 보면 스타일이 분명해지겠죠. 새로이 알게 된 작가가 읽을 만한 가치가 있음이 확인되는 순간은 언제나 그렇듯 몹시 짜릿합니다. 와카타케 나나미의 짜릿한 소설들을 계속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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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7-07-09 15: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 마지막이 최고의 강점같더군요^^

비로그인 2007-07-09 15: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 저도 맨마지막에서 짜릿했어요. 다시 읽어보려고 했는데 다른 책이 손짓해서 그만두었지만..요. =..=;

jedai2000 2007-07-09 17: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만두님...동감입니다. 가만히 보면 작가가 무척 머리를 많이 굴린 작품이예요. 신경써서 여러가지 장치를 마련했더군요 ^^

새초롬너구리님도 이미 보셨군요. 와, 미스터리 무척 사랑하시는 분 같아 굉장히 반갑네요. 저도 미스터리에 살고 죽는 놈이라, 동지분 만나면 무척 반가워요 ^^
 
봄철 딸기 타르트 사건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박승애 옮김 / 노블마인 / 2007년 6월
평점 :
절판


 
어렸을 때 셜록 홈스 깨나 읽은 사람이면 다 마찬가지겠지만 나도 어렸을 때 꿈은 홈스 같은 명탐정이었다. 비범한 두뇌에 강렬한 개성을 바탕으로 평범한 사람들은 모두 나자빠지는 어려운 문제를 좌중 앞에서 멋지게 풀어내 박수갈채를 받는 명탐정 말이다! 그런 점에서 추리소설은 어쩌면 영웅설화나 판타지에 한 발짝씩 걸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범인을 뛰어넘는 초인의 등장과 그의 영웅적인 활약에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독자들이 꾸준히 있는 한 추리소설의 인기는 영원하리라.

그런데 [봄철 딸기 타르트 사건]의 남녀 주인공인 고바토와 오사나이는 다르다. 두 사람은 비범한 추리력과 예리한 관찰력, 논리적인 추론 능력 등 탐정이 겸비해야 할 자질을 모두 갖추고 있음에도 절대로 추리를 하지 않으려 한다. 알고 보니 이제 고등학교 1학년생이 된 두 사람은 중학교 때도 탐정으로 날리다 뼈아픈 패배를 당한 적이 있고 자신들이 많이 부족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 나댔구나, 하는 쓰라린 자각을 해 고등학생이 된 이제부터는 '소시민'으로 살아가야겠다고 결심한 것이다(두 사람이 겪었던 실패담은 이 책에선 나오지 않는다. 아마 시리즈가 더 진행되면 나오게 되지 않을까).    

하지만 초등학교 때 고바토의 친구였던 겐고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는다. 재수없을 정도로 복잡한 문제를 딱딱 풀어내던 고바토가 너무 얌전해진 것이 수상하다. 겐고는 해결하기 힘든 문제가 나타날 때마다 고바토를 찾고, 오호 통재라 여전히 들끓는 탐정의 피를 억제하지 못하는 고바토는 그림자같이 항상 붙어다니는 오사나이와 함께 사건을 해결하지 않고는 못 견딘다. 그러고는 다음 날이면 자괴감에 몸부림친다. "또, 또 추리를 했어!" 하지만 두 사람의 자질이 그리 출중하니 앞으로도 추리는(그리고 반성은) 계속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드는 걸.

예쁜 제목의 [봄철 딸기 타르트 사건]은 아무래도 고등학생이 탐정으로 등장하는 작품이다 보니 등장하는 사건들은 절대 사람이 죽거나 다치지 않는다는 특징을 보여준다. 학교 친구의 가방을 되찾아준다거나, 봄철에만 한정 판매하는 딸기 타르트를 실은 자전거를 훔쳐간 범인을 찾는다거나, 그림을 엄청 잘 그리는 미술부 선배가 그린 조잡한 그림을 보고 왜 저딴 그림을 그렸을까 하는 궁금증을 풀어내는 식이다. 일본에서 크게 유행하는 장르인 일상의 수수께끼 계열의 작품이라 보면 틀림이 없겠다.

추리하기 싫어하는 두 탐정의 귀여운 고민과 소박하지만 그 또래 학생들에게는 중요한 사건들이 쓱쓱 풀려 나가는 재미가 있는 책으로, 전부 5편의 단편이 모여 있지만 각 편이 계속 이어지는 구조라 장편으로 봐도 무방하다. 너무 짧고 간단한 퀴즈 같은 <맛있는 코코아를 타는 법>과 <컨닝 페이퍼의 비밀>은 좀 시시하지만 50페이지를 넘는 나머지 세 사건들은 추리소설의 구조를 오롯이 간직하고 있고 트릭도 그럴듯해 만족스럽게 읽힌다. 나 같은 멋도 맛도 잘 모르는 사람에게는 타르트가 뭔지 밀푀유가 뭔지 영 다가오지 않지만 그런 쪽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아마도 봄에만 파는 딸기 타르트도 몹시 먹고 싶어지지 않을까 싶다.

전부 250페이지 분량으로 짧아 가독성도 좋고, 소박하면서도 은근히 유쾌한 분위기가 기분 좋다. 학교를 배경으로 한 일상 미스터리라 지금 학교에 다니는 젊은 친구들이 보면 더 재미있을 듯. 수준이 아주 높다고는 할 수 없지만 가볍게 읽어볼 만한 청춘 미스터리로 경쾌하고 유쾌한 시간을 보장한다. 원래 타르트나 케익 같은 건 매일 먹을 수는 없지만 가끔 먹으면 무지 맛나지 않나. 다들 맛있는 독서 하시길. 

p.s/ 후속편은 <여름철 트로피컬 파르페 사건>이란다. 이쯤되면 가을, 겨울은 어떤 제목으로 나올지 무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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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7-09 1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 귀여운 코지물인가 보군요 ^^

jedai2000 2007-07-09 1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아주 귀여운 코지 미스터리입니다 ^^

레몬향기 2007-07-09 1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용은 다르겠지만 한나시리즈랑 비슷한 느낌이 듭니다~ 꼭 한번 읽어보고싶어요..

jedai2000 2007-07-09 14: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적님...한나 시리즈랑 밝고 유쾌한 분위기랑 디저트가 중시된다는 점은 비슷하네요. 사실은 전 한나 시리즈보다 이 책을 더 재미있게 읽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