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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나멜을 바른 혼의 비중 - 카가미 료코와 변화하는 밀실
사토 유야 지음, 주진언 옮김 / 학산문화사(만화) / 2007년 7월
평점 :
절판
<에나멜을 바른 혼의 비중>은 <플리커 스타일>로 제21회 메피스토상을 수상하며 데뷔한 사토 유야의 작품이다. <플리커 스타일>의 부제는 '카가미 키미히코에게 어울리는 살인'이었고, <에나멜을 바른 혼의 비중>의 부제는 '카가미 료코와 변화하는 밀실'이다. 부제로 짐작할 수 있듯이 카가미 남매가 등장하는 일종의 속편 격의 작품으로 여동생을 강간범들에게 잃은 카가미 키미히코가 자신만의 참혹한 복수를 일삼는 <플리커 스타일>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키미히코의 누나 료코가 주인공이다. 이렇게 설명하니 굉장히 복잡한 느낌인데, 전작에서 이미 학교를 졸업했던 료코가 여고를 다니던 시절의 이야기라 사실은 프리퀄이라는 말이 맞을 것 같다(초등학생 카가미 키미히코가 카메오로 슬쩍 출연한다).
마이조 오타로, 니시오 이신 등과 더불어 라이트노벨 계열에서는 꽤 평가받는 작가라는 소개에도 불구하고 사토 유야의 <플리커 스타일>은 도저히 좋아할 수 없는 작품이었다. 동생의 복수를 위해 강간범들의 딸들을 납치, 폭행, 강간, 살인하는 키미히코의 행적은 솔적히 병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잔인하고 처참하고 불건전해 읽고 나면 내 머리까지 이상해지는 느낌일 정도였다. 하지만 <에나멜을 바른 혼의 비중>은 폭력과 성폭행이 동반되는 집단 이지메(정말 끔찍하게 그려진다)와 인육을 즐기는 소녀까지 등장해 전작을 뛰어넘는 수위를 자랑한다. 이런 소재들을 도저히 눈뜨고 넘길 수 없는 독자들은 여기서 조용히 책장을 덮는 수밖에. 어차피 사토 유야는 한계를 넘는 강렬함과 기이함, 파격으로 무장한 작가라 남녀노소 누구나 즐기기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런 소재 상의 여전한 엽기성을 제외한다면 확실히 <플리커 스타일>보다는 한층 발전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키미히코와 그의 소꿉친구인 야스미의 두 개의 이야기가 병행되다 하나로 합치되는 구성을 취했던 전작에 비해, <에나멜을 바른 혼의 비중>에서는 인육을 먹는 소녀와 코스프레에 매몰된 소녀, 도플갱어(?)에게 자신의 자리를 빼앗긴 소녀와 그녀를 돕는 탐정, 전작에서 미래를 보는 능력이 있음이 밝혀진 카가미 료코, 료코가 다니는 2학년 반을 전학온 첫날부터 제압하는 공주풍의 소녀까지 줄잡아 다섯 개의 이야기가 뻗어나가다 결말에 이르러 모든 인물이 한 장소에 모이면서 그간의 기이한 상황들이 설명된다. 시점도 언급한 여러 인물들이 1인칭과 3인칭을 오가며 번갈아가며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식이다. 구성의 묘랄까, 테크닉이랄까 그런 점에선 전작보다 훨씬 화려해진 것 같다.
부제에 '변화화는 밀실'이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밀실에서 벌어지는 살인사건도 중요한 비중으로 다뤄진다. 너무도 완벽한 밀실 상황이라 야, 사토 유야도 트릭을 구사할줄 아는구나, 하면서 반가워했는데, 역시나 전통+정통적인 미스터리 소설은 아니기에, 그 해결책도 예언, 기억 흡수, 변신 등 각종 특수 능력들이 난무하는 작품답게 약간은 비현실적인 방법이었다. 그러나 A라는 작품을 왜 B가 아니냐고 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기존의 미스터리 잣대로 재는 건 의미가 없어 보인다.
<에나멜을 바른 혼의 비중>이라는 제목 역시 기묘한데 아마도 직접적으로 작품의 주제를 드러내려 한 것 같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들(대부분 고등학생들이다)은 코스프레에 심취하거나, 혹은 타인의 기억을 흡수하면서, 또는 완전히 타인에게 동화되는 변신 등을 통해 현실세계 속에서 평범한 '나'를 애써 감추거나 외면하려 한다. 사실 주인공들이 갖고 있는 특수능력도 대부분 여기에 포커스가 맞춰진다. 어쩌면 작가는 작품이 씌어진 2001년 전일본 사회를 휩쓸었던 게임이나 코스프레, 애니메이션 등에 대한 열광 속에 현실의 무력한 나보다는 어딘지 대단해보이는 무언가가 되고 싶은 사람들의 비뚤어진 열망의 그림자가 숨어 있지는 않을까 지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번쩍이는 에나멜을 발라 실제보다 더 한없이 반짝이고 싶다는 실체 없는 공허한 욕망을 냉혹하게 응시하는 작가의 시선이 맵게만 느껴질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