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나멜을 바른 혼의 비중 - 카가미 료코와 변화하는 밀실
사토 유야 지음, 주진언 옮김 / 학산문화사(만화) / 2007년 7월
평점 :
절판


<에나멜을 바른 혼의 비중>은 <플리커 스타일>로 제21회 메피스토상을 수상하며 데뷔한 사토 유야의 작품이다. <플리커 스타일>의 부제는 '카가미 키미히코에게 어울리는 살인'이었고, <에나멜을 바른 혼의 비중>의 부제는 '카가미 료코와 변화하는 밀실'이다. 부제로 짐작할 수 있듯이 카가미 남매가 등장하는 일종의 속편 격의 작품으로 여동생을 강간범들에게 잃은 카가미 키미히코가 자신만의 참혹한 복수를 일삼는 <플리커 스타일>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키미히코의 누나 료코가 주인공이다. 이렇게 설명하니 굉장히 복잡한 느낌인데, 전작에서 이미 학교를 졸업했던 료코가 여고를 다니던 시절의 이야기라 사실은 프리퀄이라는 말이 맞을 것 같다(초등학생 카가미 키미히코가 카메오로 슬쩍 출연한다).

 

마이조 오타로, 니시오 이신 등과 더불어 라이트노벨 계열에서는 꽤 평가받는 작가라는 소개에도 불구하고 사토 유야의 <플리커 스타일>은 도저히 좋아할 수 없는 작품이었다. 동생의 복수를 위해 강간범들의 딸들을 납치, 폭행, 강간, 살인하는 키미히코의 행적은 솔적히 병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잔인하고 처참하고 불건전해 읽고 나면 내 머리까지 이상해지는 느낌일 정도였다. 하지만 <에나멜을 바른 혼의 비중>은 폭력과 성폭행이 동반되는 집단 이지메(정말 끔찍하게 그려진다)와 인육을 즐기는 소녀까지 등장해 전작을 뛰어넘는 수위를 자랑한다. 이런 소재들을 도저히 눈뜨고 넘길 수 없는 독자들은 여기서 조용히 책장을 덮는 수밖에. 어차피 사토 유야는 한계를 넘는 강렬함과 기이함, 파격으로 무장한 작가라 남녀노소 누구나 즐기기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런 소재 상의 여전한 엽기성을 제외한다면 확실히 <플리커 스타일>보다는 한층 발전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키미히코와 그의 소꿉친구인 야스미의 두 개의 이야기가 병행되다 하나로 합치되는 구성을 취했던 전작에 비해, <에나멜을 바른 혼의 비중>에서는 인육을 먹는 소녀와 코스프레에 매몰된 소녀, 도플갱어(?)에게 자신의 자리를 빼앗긴 소녀와 그녀를 돕는 탐정, 전작에서 미래를 보는 능력이 있음이 밝혀진 카가미 료코, 료코가 다니는 2학년 반을 전학온 첫날부터 제압하는 공주풍의 소녀까지 줄잡아 다섯 개의 이야기가 뻗어나가다 결말에 이르러 모든 인물이 한 장소에 모이면서 그간의 기이한 상황들이 설명된다. 시점도 언급한 여러 인물들이 1인칭과 3인칭을 오가며 번갈아가며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식이다. 구성의 묘랄까, 테크닉이랄까 그런 점에선 전작보다 훨씬 화려해진 것 같다.

 

부제에 '변화화는 밀실'이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밀실에서 벌어지는 살인사건도 중요한 비중으로 다뤄진다. 너무도 완벽한 밀실 상황이라 야, 사토 유야도 트릭을 구사할줄 아는구나, 하면서 반가워했는데, 역시나 전통+정통적인 미스터리 소설은 아니기에, 그 해결책도 예언, 기억 흡수, 변신 등 각종 특수 능력들이 난무하는 작품답게 약간은 비현실적인 방법이었다. 그러나 A라는 작품을 왜 B가 아니냐고 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기존의 미스터리 잣대로 재는 건 의미가 없어 보인다.

 

<에나멜을 바른 혼의 비중>이라는 제목 역시 기묘한데 아마도 직접적으로 작품의 주제를 드러내려 한 것 같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들(대부분 고등학생들이다)은 코스프레에 심취하거나, 혹은 타인의 기억을 흡수하면서, 또는 완전히 타인에게 동화되는 변신 등을 통해 현실세계 속에서 평범한 '나'를 애써 감추거나 외면하려 한다. 사실 주인공들이 갖고 있는 특수능력도 대부분 여기에 포커스가 맞춰진다. 어쩌면 작가는 작품이 씌어진 2001년 전일본 사회를 휩쓸었던 게임이나 코스프레, 애니메이션 등에 대한 열광 속에 현실의 무력한 나보다는 어딘지 대단해보이는 무언가가 되고 싶은 사람들의 비뚤어진 열망의 그림자가 숨어 있지는 않을까 지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번쩍이는 에나멜을 발라 실제보다 더 한없이 반짝이고 싶다는 실체 없는 공허한 욕망을 냉혹하게 응시하는 작가의 시선이 맵게만 느껴질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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넥스트
마이클 크라이튼 지음, 이원경 옮김 / 김영사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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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넥스트>는 오래간만에 소개된 마이클 크라이튼의 2006년 신작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들이 드물었지만 최근에는 좀 뜸했으니 간략히 소개해보자면, 모든 사람이 이름만 들어도 무릎을 칠 <쥐라기 공원>의 원작자로 20권이 넘는 저서들을 통해 전 세계에서 어마어마한 양의 책을 팔아치운 초대형 베스트셀러 작가라 할 수 있다. 이슈가 될 만한 기발한 소재를 발빠르게 작품 속에 포함시켜 작품이 발표될 때마다 끊이지 않는 논란을 만들어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이른바 하이 콘셉트를 잘 잡는 작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작품 대부분이 영화화되어 소설뿐 아니라 영화 판권료로도 천문학적인 수익을 올리는 행복한 작가기도 한데, 아마도 <쥐라기 공원> <잃어버린 세계> <타임 라인> <스피어> <콩고> 등의 크라이튼 원작 영화를 한 번이라도 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잘 알려져 있지 않은 한 가지, 그는 제프리 허드슨이라는 필명으로 1968년에 발표한 <긴급할 때는>이라는 작품으로 미국추리작가협회 최우수상을 받은 미스터리 소설가이기도 하다는 것(그 작품은 안타깝게도 아직 보지 못했다).

 

원래 하버드 의대를 졸업한 의학도라 작품 속에 자주 과학과 의학에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며 영화화하기 좋게끔 속도감 있는 진행과 거대한 규모의 액션 장면을 즐겨 삽입하는 크라이튼의 신작 <넥스트>에서 작가가 천착하는 소재는 생명공학이다. 모든 생물의 설계도나 다름없는 유전자를 연구해 질병을 치료하고 안정된 식량 공급원을 만드는 등 21세기 최고의 블루 오션으로 각광받는 생명 산업을 타깃으로 설정한 것이다. 사실 가볍게 읽고 마는 소설에서 다루기엔 다소 어려운 소재라고 할 수 있지만 다행히도(?) 우리나라에서는 황우석 박사 파문으로 인해 국민들의 예습이 철저히 된 상태니 세계 어느 나라 독자들보다 이해하기 쉽다는 이점이 있는데, 역시나 실제와 허구가 절묘하게 배합된 이 책에서도 황우석 박사가 실명으로 자주 거론되어 일말의 반가움까지 안겨준다(연구보다는 포토샵에 능한 과학자로 설명되지만 말이다). 

 

<넥스트>에는 방대한 이야기와 수많은 등장인물이 나온다. 이익에만 눈이 멀어 도덕성을 망각한 유전공학자부터 생명공학을 돈벌이 수단으로만 이용하는 루퍼트 머독+카를로스 슬림 같은 억만장자, 암 치료제를 만들 수 있는 성분이 나오는 자신의 세포를 불법적으로 이용당하는 노인과 그의 변호사 딸이 벌이는 법정 투쟁, 쥐 실험을 통해 우연히 마약치료제를 개발한 과학자는 형에게 그걸 사용하곤 탁월한 효과에 장밋빛 꿈을 꾸기도 한다(당연히 그 마약치료제에는 치명적인 부작용이 있다). 사람만 나오는 것도 아니다. 인간의 유전자가 침팬지 난자에 투입되어 만들어진 휴먼지(인간과 침팬지의 합성)는 말을 할 줄 알며, 때로 100퍼센트 인간보다 더 인간답게 보이기도 한다. 이외에도 유전자 조작을 통해 산수까지 거뜬히 해치우는 수다쟁이 앵무새와 염소수염을 기른 현상금 사냥꾼까지 다채로운 인간동물군상들이 출현해 유전공학이 이미 생활 곳곳에 침투한 오늘날의 우리 사회를 캐리커처식으로 그려낸다.

 

<쥐라기 공원>이 한정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공룡들의 살육과 인간들의 모험으로 엄청난 스릴을 쟁취했다면, <넥스트>는 이야기를 미국, 프랑스 등 세계 곳곳의 가정으로 확대시켜 그만큼 몰입도는 약간 떨어지는 감이 있다. 그러나 크라이튼이 <넥스트>에서 보여주고 싶었던 건 오늘날의 유전자 산업이 얼마나 병들었는가, 그것이 우리의 삶 속으로 어떻게 파고들고 있는가, 결국 어떤 파국을 낳을 것인가를 가감없이 알리는 데 있다(물론 소설이므로 어쩔 수 없이 과장된 부분도 있을 것이다). DNA 복제라는 첨단의 소재로 괴수살육극을 펼친 <쥐라기 공원>과 말초적인 재미보다는 생명공학에 대한 진지한 고찰이 우선시되는 <넥스트>가 갈라지는 결정적인 지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할 것이다(특정한 어느 작법 상의 태도를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본인 말초적인 재미도 엄청 좋아한다). 

 

전 세계 최고의 흥행 작가라는 문구는 포커를 쳐서 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영화로 치면 빠른 커트로 쉴새없이 장면 전환을 이루어 내내 시선을 잡아끌다 클라이막스에 이르러 대부분의 이야기들이 하나로 합쳐져 시원하게 끝을 맺는 솜씨는 대가라는 이름에 부족함이 없다. 덤덤하게 진행되다 한 마디로 오싹 소름끼치게 만드는 결말도 무척 훌륭하다. 개인적으로는 생명공학에 별 관심이 없어 몰랐던 사실도 몇 가지 알게 되었는데, 거의 모든 유전자에 특허가 매겨져 있어 연구하는 데도 거액의 돈이 필요하고 그로 인해 치명적인 사스SARS 질병이 창궐할 때도 필요한 연구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점은 특히 놀라웠다. 3만 5천개 인간의 유전자 중 하나가 어떤 작용을 하는지 밝혀내기만 하면 즉시 특허를 내 다른 연구자의 접근을 차단하는 식인데, 사람이 사람의 유전자를 단지 역할을 알아냈다고만 해서 소유권을 가진다는 점은 우습지 않은가? 적당한 재미와 더불어 이렇듯 생각할 거리도 제법 주는 묵직한 소설이니 가일층 집중해서 보시기를 권한다.

 

 

p.s/ 책 내용 이외의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는 편인데, <넥스트> 같은 경우 번역부터 편집, 해설까지 모두 다 만족스러웠다. 꽤 많은 양의 신문기사나 동창회보 등이 실제 형식 그대로 실려 작품의 사실감을 더하는 역할을 하는데, 책 만드는 분들에게 복잡한 작업이었을 텐데도 보기 편하게 정리가 너무 잘 되어 있어 정말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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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장미 2007-08-09 04: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연히 보게된 리뷰인데.. 글을 참 잘 쓰시네요. ^-^ 반갑습니다!
생명공학에 대해 잘은 모르지만, 제목을 보고.. 디스토피아소설을 떠올렸어요. 가장 먼저 떠오른 소설이 <멋진신세계>였는데. 고전에 비할 수 없는 책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살면서 가끔..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어요. 전혀 예상하지 않았던 일이 발생되거나 남들이 쉽게 경험하지 못하는 것들을 경험한다는 생각을 할 때, 혹은 내가 겪는 일을 대부분의 사람들도 겪는다는 생각이 들 때, 실험실의 쥐가 된 것 같다는.... 그런 망상을 하곤해요.
절대자가 있다면, 유전적 정보에 따라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들이 어떤 반응을 하는지 모두 관찰하고 싶을 수도 있잖아요. 세상은 참 신기하게도.. 유전정보가 완벽하게 같은 인간은 없을테니, 그것이 세상의 비밀을 풀 수 있는 키워드 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곤 했는데, 이 책 그런 생각을 어떻게 충족시켜 줄지 궁금하네요.

언제 즐찾을 했는지.. 모르겠는데. 이웃이네요. 제가 님 글을 전에도 보았나봅니다.
어쨌든,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

2007-08-08 08: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jedai2000 2007-08-08 1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시장미님...어이쿠, 많이 부족한 글솜씨인데 칭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알고 보니 예전부터 제 이웃이셨군요. 반쪽 이웃은 그래서 저도 찾아가뵙고 이웃 등록했습니다. 잘 받아주셔요 ^^ <멋진 신세계>는 부끄럽지만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넥스트>는 디스토피아 소설이긴 한데, 아주 암울하지는 않고 오히려 풍자소설로 느껴질 정도로 유머도 많고 속도감도 빨라서 잘 읽혀요. 세상이 이러다 망할테니 내 이야기를 명심하라고!, 뭐 이런 태도가 아니라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인간이 뭘 할 수 있겠어 그냥 무슨 일이 일어날 건지나 알아두라고, 하는 시니컬한 태도로 쓴 것 같아요 ^^ 저도 사실 그런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다. 인간이라는 게 어쩌면 신이 실험하면서 사용하는 모르모트 같은 존재는 아닐까 하고요. 그렇지 않으면 설명될 수 없는 게 너무 많으니까요. 이 책에서 어떤 걸 얻어가시게 될지, 실망하시게 될지는 잘 모르겠는데 성실하고 꼼꼼하게 그리고 재미있게 쓴 책이니까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



jedai2000 2007-08-08 1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숨은 분...그럴 줄 알았습니다. 전혀 모르는 분께 왔길래 일단 놀랐고, 아니 이 분이 제 이름과 주소를 어떻게 알았지 하고 두 번 놀랐습니다.님께서 가르쳐주셨군요. 앞으로도 종종 가르쳐주세요 ㅎㅎㅎㅎㅎ 암튼 정말 잘 받았고, 잘 읽었다고 전해주세요. 마지막 Ps는 같은 일 하는 사람으로서 더하고 뺄 것도 없는 진심이랍니다 ^^
 
어벤저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10-1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10
프레데릭 포사이드 지음, 이창식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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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비전 뉴스나 신문을 보면 매일 나오는 것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의 다툼은 끝이 없는 것 같다. 하기야 제각기 이해관계도 다르고, 느끼는 감정도 다르니 그럴 수밖에. 그렇다면 무수히 많은 사람과 사람이 모여 이뤄지는 국가 간의 분쟁이 그렇게 자주 일어나는 것도 당연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영국의 베테랑 작가 프레드릭 포사이스는 이렇듯 인류 역사상 필연적으로 생겨나는 국가 혹은 개인 사이의 분쟁을 소재로 한 일련의 스릴러로 장인의 위치에 오른 노대가이다. 특히 샤를 드골 프랑스 대통령을 암살하려는 킬러 '자칼'과 프랑스의 민완 형사 르베르의 대결을 그린 1971년작 <자칼의 날>은 당시 전혀 새로운 장르의 스릴러 유행을 선도했고, 아직까지도 그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며 신드롬적인 현상을 불러일으켰다. 그밖에도 거의 20편에 달하는 폭넓은 저작을 남긴 포사이스는 일흔이 다된 오늘날까지 현역으로 활동하며 후배 스릴러 작가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프레드릭 포사이스는 냉전시대의 불안했던 세계 정세를 바탕으로 한 소설들로 성공을 거뒀으며, 비슷한 장르에 몸담았던 존 르 까레와 더불어 소련이 붕괴되고 냉전이 사실상 끝이 나자 이야깃감도 떨어졌고, 인기도 예전만 못하다는 게 중론이었다. 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21세기 들어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으로 남은 미국은 물론이고 전 세계 어느 나라 할 것 없이 테러리즘으로 인해 골머리를 썪게 되는 상황이 오자 작가로서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하게 되었다. 독일과 소련이라는 분명한 적(?)이 사라진 자리를 얼굴 없는 일군의 테러리스트로 채우게 된 것이다. 테러리스트들은 국가가 아니기에 그 실체도 없다. 공격 지점을 잡기도 애매하고, (국가 간의 분쟁에서 하던 것처럼) 정상적인 대응도 하기 어렵다. 확실히 오늘날 인류를 위협하는 가장 큰 적은 테러리즘과 그것이 낳는 증오와 원한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벤저>는 마치 직소 퍼즐처럼 진행된다. 2차대전 때 캐나다 공군 장교로 복무하면서 격전을 치루고 현재는 광산 재벌이 된 노인과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베트남 전쟁 당시 베트콩이 만들어 전황을 유리하게 이끌었던 미로 같은 지하 땅굴을 총 한 자루 들고 수색하는 일명 '땅굴쥐' 부대의 용사 '두더쥐'의 이야기가 교차하며, 다시 현재로 돌아와 1990년대 중반 우리에게도 익숙한 세르비아의 독재자 밀로세비치가 원흉이 된 보스니아 내전의 세계로 독자를 안내한다. 한 미국의 건전한 젊은이가 보스니아의 참상에 충격을 받고 자원봉사를 하러 떠났다가 독재자의 심복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살인을 저지르는 조란 질리치가 이끄는 범죄자 집단에게 살해당한다. 그것도 가축 분뇨통에 처박혀서 모욕적으로. 각각의 이야기들은 아직까지는 전혀 교집합을 찾을 수 없다. 이 이야기 퍼즐들이 어떻게 맞춰질지는 몰라도 작가가 2차대전, 베트남 전쟁, 보스니아 내전과 테러라는 소재를 들고 나온 건 주목할 만하다. 어쩌면 포사이스는 20세기의 역사를 관통한 세 가지 전쟁을 통해 20세기 역사는 다름 아닌 피와 전쟁의 역사였음을 말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제목으로 사용한 '어벤저'는 복수자라는 뜻으로서 보스니아에서 살해당한 미국인 젊은이의 원한을 갚아주기 위해 그의 부호 할아버지가 고용한 전문가의 코드 네임이기도 하다. 어벤저는 범죄자를 결코 죽이지 않는다. 그저 무사히 도피해 안락한 생활을 즐기는 범죄자들을 납치해 미국의 법정으로 끌고와 죄값을 치루게 만들 뿐이다. 총알 한 방으로 그들의 못난 삶을 끝내는 것은 너무 손쉬우니까. 종신형을 받게 만들어 매일 아침 다시는 바깥 공기를 맛볼 수 없다는 절망감을 느끼며 하루하루를 살게 만드는 것이 훨씬 고통스러우니까. 그가 상대해야 할 조란 질리치는 이미 중남미의 산마르틴 공화국으로 도피해 그동안 모은 천문학적인 거금으로 요새를 만들고 200여명의 용병을 고용해 철통 같은 경호를 받고 있다. 깎아지른 절벽과 상어가 득시글대는 바다, 강에는 피라냐가 돌아다니며, 밤이 되면 열두 마리의 사나운 도베르만이 이빨을 빛내는 자연친화적(?)인 요새기도 하다. 하지만 프로페셔널 중의 프로페셔널 어벤저는 서서히 목표물에 접근해가며 조란의 목줄을 노린다. 어떤 어려움에도 포기는 생각하지 않고. 그도 사랑하는 딸을 범죄자에게 잃었으므로. 희생자 가족의 고통을 너무도 잘 알고 있으므로.

 

어벤저와 프레드릭 포사이스 모두 자기들이 해야 할 일을 정확히 알고 있다. 그들은 단 한 장면의 낭비와 군더더기 없이 경제적인 행동과 서술을 보인다. 우리는 전문가라 불리워지는 사람들이 자신의 일을 맡아 숙련된 솜씨로 척척 해나가는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잘 알고 있다. 그것이 도공이 도자기를 빚는 것이든, 피자 주방장이 피자를 반죽하는 모습이든, 스릴러 작가가 날렵한 필치를 선보이는 것이든 전문가의 세심한 손길은 그만큼 지켜보는 이들의 가슴 속에 찬탄을 자아내는 것이다. <어벤저>는 감정이 축축 늘어지는 부분도 없고, 묘사가 지나쳐 지루하지도 않다. 철저하게 서사, 즉 이야기로만 일관하면서도 이처럼 폭넓은 교감과 재미를 만들어내는 능력은 과연 세계 최고의 이야기 전문가라 불러도 조금도 손색이 없겠다는 생각을 들게 만든다. 작품에 등장하는 아주 세세한 것 하나까지 완벽한 조사를 통해 현실감을 증폭시킨 것도 대단하다. 전반부의 이야기 퍼즐과 어벤저의 밑준비가 서서히 이뤄지는 중반부를 거쳐 조란의 요새로 침투하면서 벌어지는 후반부 100페이지의 긴장감은 근래 따라올 작품이 없었다. 잠입 액션 혹은 침투 스릴러로 부를 수 있을 <어벤저>는 우리나라에서 어느새 잊혀졌던 포사이스의 진가를 확신할 수 있게 해준다. 그의 다음 작품도 매우 보고 싶다. 프레드릭 포사이스를 몹시 열망한다. 제발 올해 안에 한 편쯤 더 볼 수 있게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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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촌토성 2007-08-04 1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예상 외로 안 팔려서 낙담하던 차 이런 서평을 보니 조금 위안이 되는군요. 포사이스의 신작 "아프간"을 번역 중인데 떡심이 많이 풀려 진도가 잘 안 나갑니다. 올해 안에 보실 수 있도록 힘을 좀 내 보겠습니다. ^^

물만두 2007-08-04 1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 이제야 올리셨어요? 정망 몽촌토성님 말씀마따나 예상외로 안팔리더군요 ㅜ.ㅜ

레몬향기 2007-08-04 1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배송기다리고 있는데.. 기대됩니다~

jedai2000 2007-08-05 0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몽촌토성님...그러게요. 제 생각에도 재미에 비해 너무 묻혔다, 싶어서 이런 제목을 달았답니다. <아프간> 너무너무 기대되구요. 올해 안에 꼭 볼 수 있게 수고 좀 해주세요. 정말 감사드립니다 (__)

물만두님...그러게 말입니다. 진즉 보고 초반에 나왔을 때 힘을 좀 실어드렸어야 하는 건데 말입니다 T.T

적님...짜릿한 독서를 보장합니다. 근래 보기 드문 즐거운 시간 되실 거예요 ^^

Apple 2007-08-05 2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얼마전에 펼쳐셔 읽고 있다가, 워낙 전쟁이나 군인이 등장하는 것에 약해서 그런지 100페이지쯤 읽으니 좀 어려워서 잠시 접어두고 있습니다. 끙....~.,~

jedai2000 2007-08-06 0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애플시즈님...ㅎㅎ 예, 뭐 그럴 수 있죠. 밀리터리 스릴러나 총기 등이 세세하게 나오면 여자분들이 조금 적응 못 하는 경우도 있더라구요. 그래도 이야기 자체가 재미있고, 스릴감이 대단하니까 꼭 끝까지 읽어보세요. 정말 훌륭하다는 걸 느끼실 수 있을 거예요 ^^

bongbong 2007-08-10 0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러니의 스릴러월드'에서 많이 보아온 닉네임이네여^^전 oasis란 닉네임 사용하는데^^;
번역하신 몽촌토성님 기분 알거같아요.. 힘을 내어요d^^b
이 책 나오자 마자 샀는데 시간이 지나도 별 반응이 없어 이상한단 느낌받았었는데..
전 정말 재밌었고 누가 읽어도 보편적인 감상이라 생각했었거든요..
할아버지 프레드릭 포사이드^^ 정말 좋은 작가예요
많이 읽혔으면 좋겠어요

jedai2000 2007-08-10 1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댄 브라운이나 토머스 해리스 등의 블록버스터 작가들을 주로 담당하시는 몽촌토성님께서도 그 작품들 못지않게 혹은 더 뛰어나다고 보시는 작품인데 의외로 반응이 별로네요. 우리 국민 납치 사건도 그렇고 시류에도 어느 정도 맞는다고 보고 작품 수준도 뛰어나 잘 될 거라 봤는데 의외입니다.
 
그레이브 디거 밀리언셀러 클럽 66
다카노 가즈아키 지음, 전새롬 옮김 / 황금가지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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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계단>으로 일본추리작가협회에서 그해 데뷔한 가장 우수한 신인에게 수여하는 에도가와 란포 상을 탄 다카노 가즈아키의 두번째 작품이다. 히가시노 게이고나 기리노 나쓰오처럼 같은 상을 타고 안정적으로 데뷔해 오늘날까지 히트작을 양산하는 성공한 작가들이 있는가 하면 이 사람들은 요즘 뭐하면서 먹고 사나, 싶게 낙마한 작가들도 분명히 존재하는 게 현실이다. 다행히 다카노 가즈아키는 <13계단> 수상 당시 최근 10년 내 최고의 수상작이라는 절찬을 들었던 유망주이니만큼 데뷔 이후에도 꾸준히 작품을 내며 평자나 독자들에게 호의적인 평을 받고 있어 미스터리 팬들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고 있다.

 

다소 묵직한 주제였던 일본 내 사형제도에 대한 비판과 사형 집행일까지 얼마 남지 않은 사형수의 누명을 벗기려 분투하는 주인공들의 모험이라는 오락적인 요소가 적절하게 균형을 이룬 <13계단>은 확실히 처녀작답지 않은 탄탄함이 돋보인 수작이었다. 반면 <그레이브 디거>는 메시지에서는 조금 후퇴한 인상이고 소설의 재미라는 측면에 더욱 방점을 찍은 듯한 느낌을 준다. 작가 프로필을 보면 영화 공부를 했던 사람이고 원래 시나리오 작가였다는 이력을 확인할 수 있는데, 그래서인지 철저하게 영화적인 글쓰기가 체질화된 작가라는 생각이 든다. 독자가 보기에 조금이라도 지루할 수 있는 장면은 최대한 빨리 넘어가 작품 전반에 속도감이 굉장하며(소설은 대화나 지문이 어느 정도 길어도 그러려니 하지만 영화에서는 장면이 한없이 늘어져버리면 관객이 견디질 못한다), 주인공이 위기에 처한 순간에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로 장면을 전환해 긴장감을 더하고 주인공의 생사에 대한 호기심을 유발시키는 기법은 영화로 치면 교차편집이 아닐까. <그레이브 디거>는 대부분 영상문법으로 씌어진 작품이고 그래서 당장 영화화해도 손색이 없어 보인다.

 

어린 시절 학대를 당한 끝에 비뚤어져서 양아치가 되어버린 야가미. 서른을 넘기고 이제 새 삶을 살겠다는 각오로 충만해 있다. 그는 백혈병에 걸린 아이에게 골수를 기증할 결심을 하는데, 이식수술이 성공하면 야가미와 그 아이 모두 살아나게 되는 셈이다. 한 남자는 정신적으로, 다른 아이는 육체적으로 말이다. 그러나 생전 처음 좋은 일을 하려는 야가미 앞에 암초가 나타난다. 정체불명의 추적자들이 나타나 이유도 모르고 쫓기게 되어버린 것이다. 왜 그러는지도 밝히지 않고, 다짜고짜 칼을 꺼내는 위험한 추적자들 중 한 명을 정당방위로 살해한 야가미는 결국 경찰에게도 쫓기는 신세가 된다. 추적자들에게 잡히면 물론이요, 특히 경찰에 체포되면 무죄가 입증되더라도 골수 이식수술 시간에 맞춰갈 수 없게 된다. 야가미는 올바른 일을 하겠다는 단 하나의 결심으로 생명을 걸고 한계를 뛰어넘는 노력으로 병원까지 달음질쳐간다. 남은 시간은 단 12시간, 이동해야 할 곳은 도쿄 북단에서 남단까지 30킬로미터. 야가미의 질주에 어느덧 독자는 모든 걸 잊고 빨려들어가게 될 것이다.

 

이상이 아주 간단히 요약한 대강의 내용인데, 실제로는 중세 유럽 전설을 차용한 암살자 '그레이브 디거'가 벌이는 연쇄살인극부터, 수사과와 보안과 형사들의 경찰 내부 알력다툼이라든가, 유력 정치인의 잘못된 행태에 대한 비판까지 다채로운 이야기가 그려져 있다. 그래도 야가미와 추적자들의 쫓고 쫓기는 도시추적극과 왜 야가미가 쫓겨야만 하는지 그 이유를 파헤치는 미스터리 스릴러의 융합이라는 점이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플롯에 헛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최초에 추적자들에게서 벗어난 야가미는 택시를 타는데 가다 보니 돈이 없는 걸 알고 그냥 내려 위기를 자초한다. 당시는 아직 경찰쪽에서는 비상선이 쳐지지 않은 상태라 병원까지 아무 문제없이 한 번에 갈 수도 있었다. 아무리 야가미가 개과천선했다고 하지만 그래도 악당이었는데 그 정도 융통성도 발휘하지 못할까. 더구나 야가미가 오기만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여의사가 있지 않았는가. 나중에 갚을 테니까 일단 내려와서 택시비를 치뤄달라, 그 말을 못했을까. 게다가 야가미가 사건을 풀어나가는데 큰 도움이 됐던 핸드폰과 노트북은 강물에 푹 담궈졌는데도 잠깐 말리니까 곧 제 기능을 한다. 또한 그레이브 디거의 정체라든가 그의 범행의 목적이라는 플롯 상에서 굉장히 중요한 부분도 속속 나타나는 사건 관계자들의 증언으로 인해 별 무리없이 금방금방 밝혀지는 것도 작가의 고민이 조금 부족하지 않았나 싶어 아쉬운 부분이다.  

 

이처럼 아쉬운 부분도 자주 눈에 띄지만 워낙 재미가 있는 소설이라 큰 문제로 지적하고 싶지는 않다. 악인이었지만 과거를 버리고 착한 일을 하겠다는 일념으로 무쇠 로봇처럼 굳건한 의지를 보이는 야가미는 누구도 미워하지 못할 것이다(하지만 야가미가 그렇게 갑자기 좋은 사람으로 변한 동기는 크게 설득력 있게 그려지진 않는다). 택시, 지하철, 페리호, 렌터카와 경찰차, 심지어 두 발이 부서져라 뛰기까지 하는 야가미의 한 밤의 질주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교통수단을 활용하므로 더 아기자기하고 현실감 있게 느껴진다. 자주 언급한 소설의 속도감은 정말 일품이고, 최종적인 사건의 진상도 그 얼개가 잘 맞는 편이다. 특히 병원 코앞에서 결국 잡혀버린 야가미가 역전의 한 방으로 적들을 무너뜨리는 장면은 시원한 소나기같이 통쾌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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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7-07-31 16: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야가미때문에 별 하나를 더 줬답니다^^;;;

보석 2007-08-01 1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올여름 읽을 책으로 쟁여두고 있는데 리뷰를 보니 당장 읽고 싶어 지네요.^^

레몬향기 2007-08-01 1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3계단은 참 재밌게 읽었는데.. 역시 이 책도 읽어봐야겠네요~

jedai2000 2007-08-01 2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만두님...오, 야가미에 꽤 매력을 느끼셨나 보네요. 하기야 얼굴이 못 났어도 마음이 비단결인데 누가 미워하겠어요 ^^

보석님...올 여름에 보시기 가장 좋은 책일 겁니다. 일단 시원시원하니까 ^^

적님...재미로는 <13계단>보다 뛰어난 것 같은데, 전작의 메시지같이 공감가는 부분은 약간 적어져서 어떨지 모르겠네요 ^^
 
호텔 정원에서 생긴 일
온다 리쿠 지음, 오근영 옮김 / 노블마인 / 2007년 7월
평점 :
절판


온다 리쿠의 2006년작 <호텔 정원에서 생긴 일>의 내용을 쉽고 간단하게 요약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실제 있었던 일과 거기서 힌트를 얻어 만드는 연극, 그 연극 안에 또 다른 극중극이 포함되어 있는 등 난해하고 복잡하기 짝이 없어 어느 것이 진짜이고 무엇이 허구인지를 책장을 덮고 나서도 모호하게 만든다. 기존의 온다 리쿠 작품과는 느낌이 많이 달라 그녀의 고정팬들조차도 적응하기 쉽지 않을 것이라 본다. 다만 대화나 진행되는 이야기 속에서 보통 사람들의 말로 표현하기 힘든 미묘한 심리를 예리하게 포착하거나 섬세한 정경 묘사, 자주 묘사하곤 하는 연극 장면의 삽입 같은 익숙한 특징들은 여전해 지나친 낯설음은 피하고 있다.

 

호텔 안마당에 꾸며진 정원에서 두 여자가 대면한다. 얼마 전 같은 장소에서 있었던 파티에 참여했던 그녀들은 당시 벌어졌던 희곡작가의 독살사건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마주앉은 것이다. 그 중 한 여자는 다른 여자의 행동에서 어딘지 수상한 점을 발견하고 그 점을 토대로 상대방이 어떤 트릭으로 각본가를 죽였는지 폭로한다. 그 장은 그렇게 끝나지만 곧 똑같은 등장인물들이 등장하는 동일한 이야기를 문체만 달리 해서 다시 한 번 펼쳐낸다. 여기서 이미 허를 찔리고 말았다. 이거 녹록찮은 이야기로구나, 하고. 

 

다음 장은 지방의 연극 공연장을 향해 하염없이 걷는 두 나그네가 등장하는데, 둘 중 한 명이 빌딩 한복판의 분수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한 젊은 여자의 이야기를 꺼낸다. 그녀가 발작을 일으키기 전 여러 명이 지켜보고 있었는데 신기하게도 목격자들의 증언이 모두 다르다. 누구는 여자가 웃었다고 하고, 다른 이는 울었다고도 하고, 어떤 이는 화냈다고 한다. 어쩌면 이 장면은 보는 이에 따라 하나의 사실도 여러 입장에 따라 달리 보일 수 있다는, 그래서 누구도 무엇이 확실한 진실인가를 말할 수 없다는 작품의 주제를 드러내는 복선일지도 모르겠다.

 

이야기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호텔 정원에서 살해된 각본가가 남긴 '고백'이라는 희곡이 공연되는데, 어쩐지 이 연극은 각본가에게 벌어졌던 독살사건을 토대로 씌어진 것 같은 느낌이다. 연극 속에서도 각본가는 살해된 상태고, 용의자로 '고백'의 주연배우 자리를 놓고 경합을 벌였던 세 여배우가 지목되었다. 형사는 각각 그녀들을 취조하는데, 역시나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미묘하게 다른 이야기를 쏟아내는 세 여배우. 여기서부터 처음에 제시됐던 각본가 독살사건이 과연 진짜로 일어났던 일인지, 도대체 이 연극은 무엇을 말하려는 건지 머리를 쥐어뜯게 된다.

 

어떻게든 줄거리를 묘사해보려 애썼지만 괜한 짓을 하고 말았다는 후회가 든다. 다채로운 화자들과 끊임없이 변주되는 이야기들이 향연을 펼치는 <호텔 정원에서 생긴 일>은 도무지 설명할 방법을 찾을 길이 없다. 이런 작품은 그저 직접 읽어보고 느끼는 수밖에. 취향에 따라 누군가는 신선하고 감각적인 재미를 발견하거나, 누군가는 끝까지 읽어내지 못할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이 모든 혼란스런 개개의 사건들이 결국에는 미스터리적인 장치를 이용해 풀려나가는 점이 만족스러웠고, 끝까지 명쾌한 해답을 내리지 않는 몇몇 부분들이 주는 모호함도 인상적이었다. 안개 속을 한참 헤맨 것 같은, 그렇게 고생하다 결국 안개 속을 빠져나왔지만 이번에는 미궁에 갇혀버린 듯한 신비한 느낌에 근사한 당혹감을 느꼈다. 어쩌면 작가가 주문하는 건 이 복잡하고 난해한 이야기를 너무 해석하려 들지 말고 그냥 그 낯설음과 기이함을 즐겨라, 라는 건지도 모르겠다.

 

작품 속에서 피살된 각본가 가미야는 절정의 인기 작가지만 이거다 하고 후세에 남길 만한 작품이 없다는 콤플렉스가 있었다. 그래서 영원히 남을 만한 대표작 '고백'에 몰두하는 거고. 사실은 이 작가가 온다 리쿠 본인은 아닐까. 인기는 실컷 누렸지만 아직까지 비평가들을 쓰러뜨릴 궁극의 작품을 쓴 적은 없었다고 생각하여 환상과 현실, 실제와 허구, 소설과 연극이 혼합되고 나눠지는 변화무쌍한 실험작을 써보기로 마음먹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그녀의 실험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걸지도. 2007년에 이 작품이 야마모토 슈고로 상을 받았으므로. 나 자신, 힘들게 읽어내긴 했지만 꽤 만족스러운 독서였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함부로 다른 이들에게 추천하지는 못하겠는데, 역시 취향에 따라 호불호가 극명하게 나눠질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A지점에서 B지점을 거쳐 C지점에서 끝나는 뻔한 스토리텔링에 지쳐 있는 독자라면 한번 잡아보는 것도 괜찮겠다는 말은 꼭 남기고 싶은 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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