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넥스트
마이클 크라이튼 지음, 이원경 옮김 / 김영사 / 2007년 7월
평점 :
절판
<넥스트>는 오래간만에 소개된 마이클 크라이튼의 2006년 신작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들이 드물었지만 최근에는 좀 뜸했으니 간략히 소개해보자면, 모든 사람이 이름만 들어도 무릎을 칠 <쥐라기 공원>의 원작자로 20권이 넘는 저서들을 통해 전 세계에서 어마어마한 양의 책을 팔아치운 초대형 베스트셀러 작가라 할 수 있다. 이슈가 될 만한 기발한 소재를 발빠르게 작품 속에 포함시켜 작품이 발표될 때마다 끊이지 않는 논란을 만들어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이른바 하이 콘셉트를 잘 잡는 작가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작품 대부분이 영화화되어 소설뿐 아니라 영화 판권료로도 천문학적인 수익을 올리는 행복한 작가기도 한데, 아마도 <쥐라기 공원> <잃어버린 세계> <타임 라인> <스피어> <콩고> 등의 크라이튼 원작 영화를 한 번이라도 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잘 알려져 있지 않은 한 가지, 그는 제프리 허드슨이라는 필명으로 1968년에 발표한 <긴급할 때는>이라는 작품으로 미국추리작가협회 최우수상을 받은 미스터리 소설가이기도 하다는 것(그 작품은 안타깝게도 아직 보지 못했다).
원래 하버드 의대를 졸업한 의학도라 작품 속에 자주 과학과 의학에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며 영화화하기 좋게끔 속도감 있는 진행과 거대한 규모의 액션 장면을 즐겨 삽입하는 크라이튼의 신작 <넥스트>에서 작가가 천착하는 소재는 생명공학이다. 모든 생물의 설계도나 다름없는 유전자를 연구해 질병을 치료하고 안정된 식량 공급원을 만드는 등 21세기 최고의 블루 오션으로 각광받는 생명 산업을 타깃으로 설정한 것이다. 사실 가볍게 읽고 마는 소설에서 다루기엔 다소 어려운 소재라고 할 수 있지만 다행히도(?) 우리나라에서는 황우석 박사 파문으로 인해 국민들의 예습이 철저히 된 상태니 세계 어느 나라 독자들보다 이해하기 쉽다는 이점이 있는데, 역시나 실제와 허구가 절묘하게 배합된 이 책에서도 황우석 박사가 실명으로 자주 거론되어 일말의 반가움까지 안겨준다(연구보다는 포토샵에 능한 과학자로 설명되지만 말이다).
<넥스트>에는 방대한 이야기와 수많은 등장인물이 나온다. 이익에만 눈이 멀어 도덕성을 망각한 유전공학자부터 생명공학을 돈벌이 수단으로만 이용하는 루퍼트 머독+카를로스 슬림 같은 억만장자, 암 치료제를 만들 수 있는 성분이 나오는 자신의 세포를 불법적으로 이용당하는 노인과 그의 변호사 딸이 벌이는 법정 투쟁, 쥐 실험을 통해 우연히 마약치료제를 개발한 과학자는 형에게 그걸 사용하곤 탁월한 효과에 장밋빛 꿈을 꾸기도 한다(당연히 그 마약치료제에는 치명적인 부작용이 있다). 사람만 나오는 것도 아니다. 인간의 유전자가 침팬지 난자에 투입되어 만들어진 휴먼지(인간과 침팬지의 합성)는 말을 할 줄 알며, 때로 100퍼센트 인간보다 더 인간답게 보이기도 한다. 이외에도 유전자 조작을 통해 산수까지 거뜬히 해치우는 수다쟁이 앵무새와 염소수염을 기른 현상금 사냥꾼까지 다채로운 인간동물군상들이 출현해 유전공학이 이미 생활 곳곳에 침투한 오늘날의 우리 사회를 캐리커처식으로 그려낸다.
<쥐라기 공원>이 한정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공룡들의 살육과 인간들의 모험으로 엄청난 스릴을 쟁취했다면, <넥스트>는 이야기를 미국, 프랑스 등 세계 곳곳의 가정으로 확대시켜 그만큼 몰입도는 약간 떨어지는 감이 있다. 그러나 크라이튼이 <넥스트>에서 보여주고 싶었던 건 오늘날의 유전자 산업이 얼마나 병들었는가, 그것이 우리의 삶 속으로 어떻게 파고들고 있는가, 결국 어떤 파국을 낳을 것인가를 가감없이 알리는 데 있다(물론 소설이므로 어쩔 수 없이 과장된 부분도 있을 것이다). DNA 복제라는 첨단의 소재로 괴수살육극을 펼친 <쥐라기 공원>과 말초적인 재미보다는 생명공학에 대한 진지한 고찰이 우선시되는 <넥스트>가 갈라지는 결정적인 지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할 것이다(특정한 어느 작법 상의 태도를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본인 말초적인 재미도 엄청 좋아한다).
전 세계 최고의 흥행 작가라는 문구는 포커를 쳐서 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영화로 치면 빠른 커트로 쉴새없이 장면 전환을 이루어 내내 시선을 잡아끌다 클라이막스에 이르러 대부분의 이야기들이 하나로 합쳐져 시원하게 끝을 맺는 솜씨는 대가라는 이름에 부족함이 없다. 덤덤하게 진행되다 한 마디로 오싹 소름끼치게 만드는 결말도 무척 훌륭하다. 개인적으로는 생명공학에 별 관심이 없어 몰랐던 사실도 몇 가지 알게 되었는데, 거의 모든 유전자에 특허가 매겨져 있어 연구하는 데도 거액의 돈이 필요하고 그로 인해 치명적인 사스SARS 질병이 창궐할 때도 필요한 연구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점은 특히 놀라웠다. 3만 5천개 인간의 유전자 중 하나가 어떤 작용을 하는지 밝혀내기만 하면 즉시 특허를 내 다른 연구자의 접근을 차단하는 식인데, 사람이 사람의 유전자를 단지 역할을 알아냈다고만 해서 소유권을 가진다는 점은 우습지 않은가? 적당한 재미와 더불어 이렇듯 생각할 거리도 제법 주는 묵직한 소설이니 가일층 집중해서 보시기를 권한다.
p.s/ 책 내용 이외의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는 편인데, <넥스트> 같은 경우 번역부터 편집, 해설까지 모두 다 만족스러웠다. 꽤 많은 양의 신문기사나 동창회보 등이 실제 형식 그대로 실려 작품의 사실감을 더하는 역할을 하는데, 책 만드는 분들에게 복잡한 작업이었을 텐데도 보기 편하게 정리가 너무 잘 되어 있어 정말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