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벤저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10-1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10
프레데릭 포사이드 지음, 이창식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6월
평점 :
절판


텔레비전 뉴스나 신문을 보면 매일 나오는 것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의 다툼은 끝이 없는 것 같다. 하기야 제각기 이해관계도 다르고, 느끼는 감정도 다르니 그럴 수밖에. 그렇다면 무수히 많은 사람과 사람이 모여 이뤄지는 국가 간의 분쟁이 그렇게 자주 일어나는 것도 당연하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영국의 베테랑 작가 프레드릭 포사이스는 이렇듯 인류 역사상 필연적으로 생겨나는 국가 혹은 개인 사이의 분쟁을 소재로 한 일련의 스릴러로 장인의 위치에 오른 노대가이다. 특히 샤를 드골 프랑스 대통령을 암살하려는 킬러 '자칼'과 프랑스의 민완 형사 르베르의 대결을 그린 1971년작 <자칼의 날>은 당시 전혀 새로운 장르의 스릴러 유행을 선도했고, 아직까지도 그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며 신드롬적인 현상을 불러일으켰다. 그밖에도 거의 20편에 달하는 폭넓은 저작을 남긴 포사이스는 일흔이 다된 오늘날까지 현역으로 활동하며 후배 스릴러 작가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프레드릭 포사이스는 냉전시대의 불안했던 세계 정세를 바탕으로 한 소설들로 성공을 거뒀으며, 비슷한 장르에 몸담았던 존 르 까레와 더불어 소련이 붕괴되고 냉전이 사실상 끝이 나자 이야깃감도 떨어졌고, 인기도 예전만 못하다는 게 중론이었다. 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21세기 들어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으로 남은 미국은 물론이고 전 세계 어느 나라 할 것 없이 테러리즘으로 인해 골머리를 썪게 되는 상황이 오자 작가로서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하게 되었다. 독일과 소련이라는 분명한 적(?)이 사라진 자리를 얼굴 없는 일군의 테러리스트로 채우게 된 것이다. 테러리스트들은 국가가 아니기에 그 실체도 없다. 공격 지점을 잡기도 애매하고, (국가 간의 분쟁에서 하던 것처럼) 정상적인 대응도 하기 어렵다. 확실히 오늘날 인류를 위협하는 가장 큰 적은 테러리즘과 그것이 낳는 증오와 원한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벤저>는 마치 직소 퍼즐처럼 진행된다. 2차대전 때 캐나다 공군 장교로 복무하면서 격전을 치루고 현재는 광산 재벌이 된 노인과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베트남 전쟁 당시 베트콩이 만들어 전황을 유리하게 이끌었던 미로 같은 지하 땅굴을 총 한 자루 들고 수색하는 일명 '땅굴쥐' 부대의 용사 '두더쥐'의 이야기가 교차하며, 다시 현재로 돌아와 1990년대 중반 우리에게도 익숙한 세르비아의 독재자 밀로세비치가 원흉이 된 보스니아 내전의 세계로 독자를 안내한다. 한 미국의 건전한 젊은이가 보스니아의 참상에 충격을 받고 자원봉사를 하러 떠났다가 독재자의 심복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살인을 저지르는 조란 질리치가 이끄는 범죄자 집단에게 살해당한다. 그것도 가축 분뇨통에 처박혀서 모욕적으로. 각각의 이야기들은 아직까지는 전혀 교집합을 찾을 수 없다. 이 이야기 퍼즐들이 어떻게 맞춰질지는 몰라도 작가가 2차대전, 베트남 전쟁, 보스니아 내전과 테러라는 소재를 들고 나온 건 주목할 만하다. 어쩌면 포사이스는 20세기의 역사를 관통한 세 가지 전쟁을 통해 20세기 역사는 다름 아닌 피와 전쟁의 역사였음을 말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제목으로 사용한 '어벤저'는 복수자라는 뜻으로서 보스니아에서 살해당한 미국인 젊은이의 원한을 갚아주기 위해 그의 부호 할아버지가 고용한 전문가의 코드 네임이기도 하다. 어벤저는 범죄자를 결코 죽이지 않는다. 그저 무사히 도피해 안락한 생활을 즐기는 범죄자들을 납치해 미국의 법정으로 끌고와 죄값을 치루게 만들 뿐이다. 총알 한 방으로 그들의 못난 삶을 끝내는 것은 너무 손쉬우니까. 종신형을 받게 만들어 매일 아침 다시는 바깥 공기를 맛볼 수 없다는 절망감을 느끼며 하루하루를 살게 만드는 것이 훨씬 고통스러우니까. 그가 상대해야 할 조란 질리치는 이미 중남미의 산마르틴 공화국으로 도피해 그동안 모은 천문학적인 거금으로 요새를 만들고 200여명의 용병을 고용해 철통 같은 경호를 받고 있다. 깎아지른 절벽과 상어가 득시글대는 바다, 강에는 피라냐가 돌아다니며, 밤이 되면 열두 마리의 사나운 도베르만이 이빨을 빛내는 자연친화적(?)인 요새기도 하다. 하지만 프로페셔널 중의 프로페셔널 어벤저는 서서히 목표물에 접근해가며 조란의 목줄을 노린다. 어떤 어려움에도 포기는 생각하지 않고. 그도 사랑하는 딸을 범죄자에게 잃었으므로. 희생자 가족의 고통을 너무도 잘 알고 있으므로.

 

어벤저와 프레드릭 포사이스 모두 자기들이 해야 할 일을 정확히 알고 있다. 그들은 단 한 장면의 낭비와 군더더기 없이 경제적인 행동과 서술을 보인다. 우리는 전문가라 불리워지는 사람들이 자신의 일을 맡아 숙련된 솜씨로 척척 해나가는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잘 알고 있다. 그것이 도공이 도자기를 빚는 것이든, 피자 주방장이 피자를 반죽하는 모습이든, 스릴러 작가가 날렵한 필치를 선보이는 것이든 전문가의 세심한 손길은 그만큼 지켜보는 이들의 가슴 속에 찬탄을 자아내는 것이다. <어벤저>는 감정이 축축 늘어지는 부분도 없고, 묘사가 지나쳐 지루하지도 않다. 철저하게 서사, 즉 이야기로만 일관하면서도 이처럼 폭넓은 교감과 재미를 만들어내는 능력은 과연 세계 최고의 이야기 전문가라 불러도 조금도 손색이 없겠다는 생각을 들게 만든다. 작품에 등장하는 아주 세세한 것 하나까지 완벽한 조사를 통해 현실감을 증폭시킨 것도 대단하다. 전반부의 이야기 퍼즐과 어벤저의 밑준비가 서서히 이뤄지는 중반부를 거쳐 조란의 요새로 침투하면서 벌어지는 후반부 100페이지의 긴장감은 근래 따라올 작품이 없었다. 잠입 액션 혹은 침투 스릴러로 부를 수 있을 <어벤저>는 우리나라에서 어느새 잊혀졌던 포사이스의 진가를 확신할 수 있게 해준다. 그의 다음 작품도 매우 보고 싶다. 프레드릭 포사이스를 몹시 열망한다. 제발 올해 안에 한 편쯤 더 볼 수 있게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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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촌토성 2007-08-04 1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예상 외로 안 팔려서 낙담하던 차 이런 서평을 보니 조금 위안이 되는군요. 포사이스의 신작 "아프간"을 번역 중인데 떡심이 많이 풀려 진도가 잘 안 나갑니다. 올해 안에 보실 수 있도록 힘을 좀 내 보겠습니다. ^^

물만두 2007-08-04 1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 이제야 올리셨어요? 정망 몽촌토성님 말씀마따나 예상외로 안팔리더군요 ㅜ.ㅜ

레몬향기 2007-08-04 1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배송기다리고 있는데.. 기대됩니다~

jedai2000 2007-08-05 0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몽촌토성님...그러게요. 제 생각에도 재미에 비해 너무 묻혔다, 싶어서 이런 제목을 달았답니다. <아프간> 너무너무 기대되구요. 올해 안에 꼭 볼 수 있게 수고 좀 해주세요. 정말 감사드립니다 (__)

물만두님...그러게 말입니다. 진즉 보고 초반에 나왔을 때 힘을 좀 실어드렸어야 하는 건데 말입니다 T.T

적님...짜릿한 독서를 보장합니다. 근래 보기 드문 즐거운 시간 되실 거예요 ^^

Apple 2007-08-05 2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얼마전에 펼쳐셔 읽고 있다가, 워낙 전쟁이나 군인이 등장하는 것에 약해서 그런지 100페이지쯤 읽으니 좀 어려워서 잠시 접어두고 있습니다. 끙....~.,~

jedai2000 2007-08-06 0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애플시즈님...ㅎㅎ 예, 뭐 그럴 수 있죠. 밀리터리 스릴러나 총기 등이 세세하게 나오면 여자분들이 조금 적응 못 하는 경우도 있더라구요. 그래도 이야기 자체가 재미있고, 스릴감이 대단하니까 꼭 끝까지 읽어보세요. 정말 훌륭하다는 걸 느끼실 수 있을 거예요 ^^

bongbong 2007-08-10 0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러니의 스릴러월드'에서 많이 보아온 닉네임이네여^^전 oasis란 닉네임 사용하는데^^;
번역하신 몽촌토성님 기분 알거같아요.. 힘을 내어요d^^b
이 책 나오자 마자 샀는데 시간이 지나도 별 반응이 없어 이상한단 느낌받았었는데..
전 정말 재밌었고 누가 읽어도 보편적인 감상이라 생각했었거든요..
할아버지 프레드릭 포사이드^^ 정말 좋은 작가예요
많이 읽혔으면 좋겠어요

jedai2000 2007-08-10 1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댄 브라운이나 토머스 해리스 등의 블록버스터 작가들을 주로 담당하시는 몽촌토성님께서도 그 작품들 못지않게 혹은 더 뛰어나다고 보시는 작품인데 의외로 반응이 별로네요. 우리 국민 납치 사건도 그렇고 시류에도 어느 정도 맞는다고 보고 작품 수준도 뛰어나 잘 될 거라 봤는데 의외입니다.